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232
232화 통째로 넘겨
성안의 비밀통로를 통해 도망친 영주 일행은, 패잔병 같은 모습으로 어두운 지하터널을 걷고 있었다.
“빌어먹을···.”
키요시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길어진 칼날 손톱이 지하통로의 벽을 신경질적으로 끼기긱 긁어댔다.
3년이었다!
도쿄 북부를 3년간 지배해온 그의 왕국이 고작 하룻밤, 아니 몇 시간 만에 멸망했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키요시의 두 눈에 광기가 일렁였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난 아직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어···.”
“당연하죠. 전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해요.”
사쿠라가 키요시의 옆에서 걸으며 말했다. 그녀는 거치적거리는 드레스를 허벅지 부근에서 찢어버리고,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모습이었다.
양쪽 허벅지에는 권총집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한 손에 권총을 든 모습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적들은 지금쯤 승리를 자축하고 있을 거예요. 그게 얼마나 섣부른 판단인지···. 곧 알게 해줘야죠.”
“놈들은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남매는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겐 아직, 적들이 상상도 못 했을 비장의 무기가 남아 있었다.
‘그곳에만 도착하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어.’
조급해진 마음에 두 사람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나 그들을 뒤따르고 있는 이들은 그 속도를 맞추지 않았다.
“여, 영주님.”
“조금만 천천히 가 주십시오.”
그들은 비밀통로를 따라온 수하들이었다. 상황실에 함께 있었던 수하들, 그중에서 겐지에게 당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숫자는 열 명도 되지 않았다.
“끄윽···.”
“조금만 천천히···.”
하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뿐이지, 그들 모두 적지 않은 부상을 입어서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부상자들을 데리고 가려니 속도가 좀처럼 나지 않는 상황.
‘이러다 추격대가 비밀통로를 발견하고 쫓아온다면···.’
결국 제자리에 멈춰선 키요시가 뒤따라오는 부하들을 바라봤다. 그는 마치 물건을 감평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들을 쭉 훑었다.
“약해빠진 녀석들뿐이군.”
아이러니하게도, 강한 부하들은 우선순위로 겐지에게 공격당해 쓰러졌다.
이곳까지 따라온 이들은 상대적으로 약했고, 키요시의 눈에는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일회용품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는 일회용품 쓰레기를 줍는 취미는 없었다.
“너희는 더 이상 따라올 필요 없다.”
키요시의 두 눈에 악독한 빛이 흐르는 순간, 가장 먼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남자가 돌아서며 외쳤다.
“도망쳐! 우릴 다 죽일 셈이야!”
남자는 그 말을 외치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 두 걸음을 걷기 전에, 그의 목이 잘려나갔다.
촤아아악!
피분수가 높게 치솟았다. 갑작스러운 살인에 부상자들 중 일부는 그대로 주저앉고, 일부는 도주를 시도했다.
“왜, 왜, 왜···. 우, 우, 우리를···.”
다리를 다쳐 제대로 뛸 수도 없는 남자는 뒷걸음질 치며 말을 더듬었다.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키요시는 약간의 친절을 베풀었다.
“너희가 이대로 성으로 돌아가서 비밀통로의 위치를 고자질하면 곤란하거든.”
그러니 그 전에 입을 막아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남자는 기가 막혔지만,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저, 절대 아닙니다! 제발 목숨만은···.”
푸욱-.
칼날 손톱에 심장이 꿰뚫린 남자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개자식! 끝까지 종 취급이냐!”
“영주고 뭐고 죽여 버려!”
부상자들도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그들은 힘을 합쳐 키요시를 공격했다.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자는 칼을, 총을 쏠 수 있는 자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온몸을 강철화한 키요시의 몸에 어지간한 공격은 흠집도 내지 못했다. 키요시는 순식간에 부하들을 도륙했다.
“사, 살려줘!”
처음부터 몸을 돌려서 도망친 자들도 있었다. 아직 뛸 수 있는 두 남자가 필사적으로 달렸다.
키요시는 그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물론, 그들을 살려줄 생각은 없었다.
타앙! 타앙!
머리가 터져나간 시체들이 맥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빨리 가요. 오라버니.”
사쿠라가 권총을 허벅지에 있는 권총집에 넣으며 말했다. 방금 전 공격은 그녀의 솜씨였다.
키요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르자.”
남매는 시체들을 버려두고 걸음을 빨리했다. 추격자들이 붙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했다.
그들이 사라지고 잠시 후,
“쓰레기들···.”
분노한 소년의 목소리가, 터널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
발걸음을 서두른 덕에, 두 사람은 날이 새기 전에 지하터널의 끝에 도착했다.
“이런 식으로 이곳에 오게 될 줄이야···.”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몇 달 더 지나서 왔겠죠.”
두 사람 앞에는 거대한 철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벽이 아니었다.
벽 한쪽에 있는 패널로 다가간 사쿠라가 그것을 컨트롤했다.
두 사람은 차례대로 목소리, 지문, 홍채 인식을 작업을 거쳤다.
[출입 요청 대상 확인. 최종 명령권자임을 확인.]지이이잉-!
두꺼운 철벽이 좌우로 열렸다. 두 사람은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은 만다라에서 1년 이상 공들여 비밀리에 만든 지하 전진기지였다. 최신 기술로 개발한 무기, 수백 명이 3년 이상 버틸 수 있는 보존 식량이 보관돼 있었다.
또한 마정석 발전기를 통해 전력을 수급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로도 1년 이상 버틸 수 있었다.
키요시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 약탈자 놈들. 생각보다 깨끗하게 사용한 모양이군.”
옆에서 걷고 있던 사쿠라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여긴 지하시설 밑에 숨겨진 또 다른 공간이에요. 켄 패거리는 이 위에 있는 공간만 알고 있어요.”
이 지하기지는 신주쿠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약탈자 무리로 유명한 켄 패거리가 이곳을 본거지로 사용하기도 했었다.
키요시는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으로 지하 기지를 둘러봤다.
“여길 완성하는 데 1년쯤 걸렸지?”
“전진기지 중에서도 가장 많은 예산이 들어갔죠.”
만다라는 신주쿠 경찰도 기피하는 약탈자 무리를 이용해 이 주변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분위기를 형성했고, 그 후 이곳에 지하기지를 건설했다.
결국 신주쿠 주민들에게 온갖 범죄를 저질러 온 약탈자 무리는, 두 사람의 하수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그들이 아는 한은 말이다.
“···얼마 전에 켄 패거리가 전부 체포됐다고 하지 않았어?”
키요시는 문득 얼마 전에 받은 보고가 생각나 물었다. 사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신주쿠 레인저. 그 광대 짓 하고 다니는 초인들이 켄 패거리를 전부 체포했어요.”
“그럼 이곳 위치가···.”
“이 위는 노출됐을지도 모르지만, 이곳까지 들켰을 리는 없어요.”
켄 패거리가 체포되거나 다른 약탈자들에게 당할 것에 대비해, 만다라는 그들도 모르게 지하시설의 지하에 비밀기지를 건설했다.
이 위에 있는 시설은 위장에 불과했다.
“만약 위층에 불청객이 있다면 전부 청소해야겠군.”
“바로 확인해 볼게요.”
사쿠라는 시설의 중심에 있는 메인 컴퓨터로 다가갔다.
[사용자를 확인합니다.]또다시 목소리, 지문, 홍채 인식.
잠시 후 사쿠라는 시스템의 관리자 계정으로 접속했다.
위이이이잉!
지하기지에 차례대로 불이 켜지면서, 어두웠던 내부가 그 실체를 드러냈다.
수천 평 규모의 내부에 가득 채워진 전쟁 무기와 식량, 그리고 언제든 장비를 제조할 수 있는 공방까지.
이곳은 만다라의 부와 기술력과 집약된 장소였다.
사쿠라는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도쿄 통일 전쟁이 시작되면 가동하려고 한 시스템인데···.”
“바로 오늘이 그날이야.”
키요시가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센트럴 시스템에게 명령했다.
“센트럴. 모든 지하기지의 시스템을 가동해라.”
잠시 후, 전면의 모니터에 도쿄도 전체의 지도가 떠올랐다.
지도는 가운데 작은 원을 중심으로, 4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동쪽의 이자나미.
서쪽의 오로치.
남쪽의 무사시.
그리고 북쪽의 만다라.
도쿄를 지배하는 4대 트라이브.
지도 위에 표시된 그들의 영역에서, 하나씩 작은 점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스트(East) 시스템 가동 완료.] [웨스트(West) 시스템 가동 완료.] [사우스(South) 시스템 가동 완료.]만다라가 도쿄 4대 트라이브 중 가장 많은 부와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 부와 기술로, 지난 1년간 다른 트라이브의 땅 아래에 전진기지를 건설했다.
그 모든 공사가 끝난 것이 불과 한 달 전이었다.
도쿄 워 프로젝트.
이곳 신주쿠의 센트럴 기지를 중심으로, 지도상에 보이는 4개의 점이 선으로 이어졌다.
4개의 지하기지에 나뉘어 보관된 무기의 양이, 영주성에 있는 것보다 3배 이상 많을 정도였다.
‘설마 이걸 사용하기도 전에 선수를 당할 줄이야···.’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지하기지 건설에 전력을 다했지만 정작 본진이 털리고 말았다.
하지만 키요시도 사쿠라도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지하기지가 있는 한, 그들은 언제든지 재기할 수 있으니까.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봤다.
“먼저 내 성을 불법 점거한 놈들부터 응징해야겠어.”
“동감이에요.”
센트럴 기지에는 수십 종류의 폭탄, 미사일, 그리고 치명적인 생화학 무기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그중 일부만 사용해도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었다. 수많은 민간인이 휘말리겠지만, 그건 그들이 알 바 아니었다.
“성안의 무기고를 폭파시킬까?”
“그보단 사린 가스를 터트리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겠어요?”
대형 모니터 위에 펼쳐진 자신들의 옛 영지를 바라보며, 남매는 뱀처럼 차갑게 눈을 빛냈다.
그러나 그들의 반격은 시작되기도 전에 끝이 나고 말았다.
“꼼짝 마! 이 악당들아!”
“···!!”
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소녀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렸다.
릴리가 양손을 허리에 척 얹고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신이 싸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여길 어떻게 들어온 거지?”
끼기긱.
키요시가 칼날 손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릴리에게 걸어갔다. 사쿠라는 황급히 지하기지 안의 모든 감시카메라를 확인했다.
“오라버니. 다른 침입자는 없어요.”
그 말에 키요시는 조금 안심했다. 그러나 곧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여길 어떻게 알고 들어온 거냐? 다른 놈들도 이 장소를 알고 있나?”
“흥. 나쁜 놈한텐 안 알려줘.”
릴리가 콧방귀를 뀌며 말하자, 키요시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는 이런 꼬마 따위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칼날 손톱을 길게 빼 들어 소녀를 겨눴다.
“말하지 않으면 그 건방진 얼굴에 흉터가 생길 텐데?”
그걸 본 릴리의 두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너 죽었···. 어? 진짜? 아저씨가?”
말을 하다가 말고, 릴리는 갑자기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옆에 있는 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할 수 있어?”
“···한번 해볼게.”
살기 가득한 눈으로 키요시를 노려보던 신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능력을 사용했다.
잠시 후,
지이잉-!
소년의 옆에 사람 하나가 겨우 드나들 법한 작은 게이트가 열렸다. 아직 힘이 제대로 회복이 안 돼 그 정도가 한계였다.
하지만 작아도 상관없었다.
그 안에서 걸어 나온 존재는 거대한 몬스터가 아니었으니까.
스윽.
“혹시나 했는데. 이게 진짜 되네.”
게이트에서 걸어 나온 대인은 신기한 듯 주위를 둘러봤다.
“당신은···?”
사쿠라가 대인의 얼굴을 알아봤다.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지만, 그녀는 한국인 외교 사절에 대해서 조사할 때 대인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대인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에 이 위층에 새로 이사 왔거든. 레인저 본부로 삼으려고···. 그런데 아래층에 이런 대단한 게 있을 줄은 몰랐네.”
“······.”
“운이 좋았지 뭐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키요시와 사쿠라는 침묵한 채 대인을 노려봤다.
대인은 키요시를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
“뭐, 둘 다 눈치는 있는 같으니 긴말은 안 할게.”
그는 손가락을 들어 도쿄 워 프로젝트의 메인 컴퓨터를 가리켰다.
“그거 통째로 넘겨. 뒈지기 싫으면.”
그 양아치나 다름없는 말투에, 키요시의 얇은 이성의 끈이 그대로 끊어졌다.
“죽여주마!”
벼락처럼 짓쳐들어온 키요시가 대인에게 칼날 손톱을 휘둘렀다.
그리고,
쨍강!
칼날 손톱이 전부 박살 나고, 키요시는 달려들었던 것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튕겨 나갔다.
“커헉!”
대인은 쓰러진 키요시를 향해 걸어갔다. 그 뒤에서는 사쿠라가 경악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두둑, 두둑.
목을 좌우로 꺾으며 대인이 말했다.
“역시 말로 해서는 안 되겠지?”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은, 대인에겐 꽤 익숙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