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296
296화 비밀 작전(4)
휘이이잉~
바람이 불어와 잿빛 머리카락이 사방에 흩날렸다.
탑의 꼭대기 층.
[크하하하하하하!]고개를 하늘로 치켜든 마족에게서 터져 나온 웃음이, 마왕성 전체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갑옷 같은 근육으로 뒤덮인 단단한 육체.
한 손에 든 피처럼 붉은 검에는, 아직도 뜨거운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늘을 향했던 마족의 고개가 지상으로 향했다. 그 눈동자는 피처럼 붉은색이었다.
[경배하라! 너희 앞에 모든 시험을 통과한 새로운 마왕께서 탄생했노라!]바알군 제3 군단장, 베리트.
그는 지상을 바라보곤 또다시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수많은 마족이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을 올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가! 기특한 백성들이로구나! 크하하하하하!]조금만 자세히 봤으면 죽어 자빠진 부하들을 발견할 수 있었겠지만, 베리트는 마왕이 되었다는 기쁨에 취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
반면 릴리 일행은 혼란에 빠졌다.
“시험이 벌써 끝났다고?”
“그럼 저 녀석이 마왕이 되었다는 건가···.”
마왕성이 새로운 마왕을 선택했다면, 그들은 이제부터 저 마왕으로부터 마왕성을 빼앗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한다.
릴리가 초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러면 아저씨 계획이 잘못되는데···.”
마왕성의 힘을 얻은 마왕은 자신의 성안에 거주하는 마족들에게 절대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즉, 싸움이 벌어지면 이곳에 있는 마족 전부를 소멸시켜야 할 수도 있었다.
더 최악의 경우는 마왕을 상대하면서 마왕성도 상당 부분 파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거 꽤 곤란하게 됐는데.”
“클···. 하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지 않소.”
“이러면 안 되는데···.”
“언니. 왜 안 돼?”
일행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 의견을 나눌 때, 탑의 꼭대기에서는 베리트가 시험을 통과한 자신의 권리를 요구했다.
[짐의 마왕성이여!]그의 시선은 첨탑보다 높은 곳에 떠 있는 거대한 눈동자를 향했다.
마왕성의 메인 코어와 연결된 거대한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관식을 준비하라! 너의 새로운 주인이 탄생하였음을 온 마계에 알릴 준비를 하라!]-푸화아아악!
베리트의 몸에서 강력한 존재감이 터져 나왔다. 그 존재감에 지상에 무릎을 꿇고 있던 마족들-비록 무릎을 꿇은 건 베리트 때문이 아니었지만-이 몸을 덜덜 떨었다.
베리트의 입가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맺혔다.
‘이건 시작일 뿐이다!’
그는 바알군 제3 군단의 군단장이자, 바알의 심복이었다.
즉, 훗날 가장 유력한 차기 마왕 후보 중 하나였다.
주인 없는 마왕성의 시험을 통과하는 것 따위는 그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것이다. 바알 님을 따라 차원 허브를 정복하고, 인간들의 시체로 산을 쌓아 그 위에 옥좌를 만들어 그 옆에 앉을 것이다! 온 차원이 나 베리트를 공포로 기억하리라!’
베리트는 그 당찬 포부를 가슴에 품으며 마왕성에게 일갈했다.
[뭘 꾸물대는 것이냐! 당장 짐의 옥좌를 만들고, 너의 왕이 나타났음을 온 마계에 알리지 않고!]그때였다.
거대한 눈동자의 밑 부분이 쩌억- 갈라지며 입처럼 변했다.
{베리트 님.}
마왕성의 메인 코어가 그 입을 빌려 말하고 있었다.
“마왕성이···.”
“말하고 있어?”
마왕성이 직접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일은 극히 드물기에, 모든 마족들이 그 목소리에 집중했다.
{당신은 탑을 오르시며 제가 준비한 시험을 모두 통과하셨습니다.}
[물론이다. 내게는 간단한 시험이었지.]베리트는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는 빠르게 시험을 통과하는 동안, 위기라고는 겪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마왕성이 말하고 싶은 건 그 부분이 아니었다.
{그 시험은 공평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부하들이 탑으로 오는 길을 막고, 당신에게 경쟁자가 생기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 ‘눈’으로 그것을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그게 뭐가 문제지?]베리트는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감히 누가 내 경쟁자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다른 마족들이 탑을 오른다고 한들, 이미 마왕급의 힘을 지니고 있던 자신과 경쟁이 될 리 없었다.
그러나 마왕성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저 또한 방금까지는 베리트 님과 같은 판단을 하였습니다.}
[그럼 뭐가 문제란 말이냐!]{베리트 님. 아래를 보십시오. 당신의 부하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그 녀석들은 내 군단에서도 최정예···.]베리트를 황당해하면서도 불안감을 갖고 다시 지상을 내려 보았고, 곧 죽은 부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째서···.]몸의 절반이 사라진 아보림, 얼어붙어 산산조각 난 코키우스, 그리고 시커멓게 불탄 마르베스가 보였다.
군단에서도 가장 아끼던 부하들.
훗날 차원 허브 침략에 선봉장이 되어, 자신과 함께 수많은 전공을 세울 전우들이었다.
베리트의 얼굴이 분노로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감히 어떤 놈들이 한 짓이냐!]-콰콰콰콰콰콰!
살기 가득한 마력이 담긴 포효가 지상을 향했다. 마족들이 고통스러워하며 귀를 틀어막고 신음했다.
단 네 명만 제외하고.
마왕성의 거대한 눈동자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들은 시험을 치르기 위해 온 새로운 도전자입니다. 베리트 님의 부하들이 저들을 막아섰고, 전투가 벌어진 후 전원 저들에게 죽었습니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준 저들에게 마족들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놈들이, 내 부하들을 죽였단 말이지···.]베리트가 싸늘한 시선으로 릴리 일행을 노려보는 가운데, 마왕성이 말을 이었다.
{저들에겐 충분히 베리트 님의 경쟁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재시험을 치르도록···.}
마왕성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기계적이었다.
따라서 얼핏 합리적인 듯 들릴 수도 있었지만,
“뭐야. 뽑고 나니 더 괜찮을 것 같은 물건이 보여서 일단 반품하겠다는 거잖아?”
아브락사스는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마왕성을 올려다보았고,
“클클. 어찌 되었건 우리한텐 잘된 일이 아니오.”
천무극은 두꺼운 목을 좌우로 꺾으며 웃었다.
“왕눈이 말이 맞아! 우리한테도 기회를 줘!”
“맞아! 왕눈이가 맞아!”
두 마계토끼는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내려 보는 베리트의 몸 주위로 마기가 거칠게 들끓었다.
[···좋다. 저것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다시 올라오지. 그땐 너도 충성의 대가를 보여야 할 것이다.]{물론입니다.}
휘익!
베리트는 탑의 꼭대기 층에서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떨어지는 속도가 엄청나, 마치 유성처럼 바닥에 내리꽂혔다.
-콰콰콰콰쾅!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마족들을 덮쳤다. 마족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일부는 정신을 잃었다.
“으으···.”
“죄, 죄송합니다···.”
베리트의 엄포에 공포에 질린 마족들이 몸을 일으키며 비척비척 물러났다.
그러나 여전히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건방진 자들도 있었다.
사티로스, 서큐버스,
그리고 웃기지도 않는 토끼 둘.
[내 부하들을 죽일 정도면 제법 실력이 있는 모양이지. 허나 너희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베리트는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는 이 싸움을 오래 끌 생각이 없었다.
[전부 상대해주지. 죽어라.]우우우우웅-!!
손바닥 위로 어마어마한 마력이 모여들면서 진동했다.
반경 수 킬로미터를 초토화시킬 수 있을 만큼의 강력한 공격.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베리트는 방해꾼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자신의 힘을 증명할 생각이었다.
[너희는 이곳에 존재했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할 것이다.]-파아아아아앗!
베리트의 손에서 쏘아진 마력포가 릴리 일행을 덮쳤다.
그 순간,
“클클. 그래도 마왕이라고 제법이구나.”
천무극이 벼락처럼 검을 휘둘러 마력포를 수십 조각으로 베어냈고,
“냅다 자르기만 하면 어떻게 해? 우린 몰라도 구경꾼들이 다 죽잖아.”
아브락사스의 마법이 마력포의 폭발이 하늘로 향하도록 튕겨냈으며,
“웬디! 얼음 보호막!”
“웅!”
쩌저저적-!
웬디가 만들어낸 얼음벽이 뒤쪽에 있는 마족들을 폭발의 여파로부터 보호했다.
허공으로 튕겨 올라간 베리트의 마력포가 폭발을 일으켰다.
-퍼버버버버벙!
-퍼버버버버벙!
[지금 뭘···!]베리트는 부릅뜬 눈으로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일개 마족들을 바라봤다.
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검을 휘둘러 마력포를 잘라낸 사티로스.
그 힘의 방향을 통째로 하늘 위로 꺾어버린 서큐버스.
수천에 달하는 마족들에게 일일이 얼음벽을 만들어 보호한, 가슴에 파란 리본을 단 마계토끼.
하나하나가 괴물이었다.
‘분명 별다른 힘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설마, 이 내가 제대로 파악하기도 힘들 정도의 강자들이란 말인가···?’
등에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베리트는 긴장한 표정으로 검을 꽉 쥐었다.
하나하나가 상상 이상으로 강한 데다, 숫자도 열세다.
···아무래도 4:1은 무리라는 계산이 들었다.
[잠깐!]베리트는 혹시나 적들이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은 그들을 첨탑 위에서 내려 보고 있는 마왕성을 향했다.
[이 자리는 단 한 명의 마왕을 뽑는 자리다! 협공을 통해서 가장 강한 자부터 제거된다면, 이 시험의 목적 자체를 위반하는 것이 아닌가!]“···쟤 아까는 우리보고 전부 덤비라고 하지 않았어?”
아브락사스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지만, 베리트는 못 들은 척하며 계속 말했다.
[나는 공정한 시험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강한 자부터 하나씩 제거된다면, 결국 우리 중 가장 약한 놈이 마왕이 될 것이다!]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지만, 의외로 마왕성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설득력 있는 제안입니다. 저는 이 시험의 주최자로서, 승자를 가리는 방식을 토너먼트로 변경할 것을···}
그때였다.
“푸훗···!”
“크하하하하!”
아브락사스와 천무극이 배를 잡고 미친 듯이 웃었다.
마왕성도 베리트도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아아,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아브락사스가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어차피 우리 중에서 마왕이 될 사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거든.”
[···그게 누구지?]베리트는 사티로스와 서큐버스를 번갈아 노려봤다.
풍기는 기운도, 강자다운 자연스러운 말투도 그 둘이 가장 강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피식피식 웃을 뿐이었다.
“클클. 우린 잠깐 물러나 있자꾸나.”
두 사람은 웬디를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베리트는 자연스럽게 혼자 남은 마계토끼를 빤히 바라봤다.
[네가···?]“그래! 내가 여기 대장이다!”
둘 중 더 통통한 마계토끼는 가슴에 붉은 리본을 뽐내듯 당당하게 내밀었다.
‘강해 보이긴 하지만···. 저 사티로스나 서큐버스보다는 이쪽이 낫겠지.’
베리트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리고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뒤로 물러나는 사티로스와 서큐버스를 노려봤다.
[···누가 중간에 끼어들면 마왕 선발 자격에서 박탈하는 것이다. 동의하나?]“요샌 마족 새끼들이 찌질하게 정정당당한 거나 찾고. 마계도 말세구만 말세야.”
혀를 쯧쯧 차던 서큐버스는 갑자기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네가 이기면, 우리 전부 네 부하가 될게.”
[호오···.]구미가 당긴다는 듯 베리트가 반응했다.
하지만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우리 대장 토끼가 이기면, 넌 바알을 배신하고 이쪽에 붙는 거야. 어때?”
[감히! 누구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냐!]“이기면 되잖아? 자신 없어?”
상상도 못 해본 제안에 베리트가 버럭 화를 냈다. 그러나 곱씹어 볼수록 그게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의를 하면 발동하는 마법 계약서를 쓸 거야. 그래야 서로 마음 편하게 싸울 수 있지 않겠어?”
[······.]베리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저 서큐버스의 의도가 대충 짐작이 되었다.
‘멍청한 년. 내가 지면 서큐버스의 권능으로 나를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모양인데···. 나는 이미 바알 님께 존재 맹세를 한 몸이다. 너 따위의 마법으로 그 맹세를 깰 수 있을 것 같으냐.’
만약 서큐버스의 진짜 정체가 바알 못지않은 강력한 본체를 가진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베리트는 절대 가볍게 생각하고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다. 수락하지.]그 대답에 아브락사스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베리트에게 윙크를 했다.
“훌륭한 결정이야.”
잠시 후, 넓은 공터가 만들어지고 최후의 마왕 후보 2인이 마주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