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53
53화 산타클로스
재앙을 막아낸 지 일주일이 지났다.
도시 곳곳에서는 재건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땡볕 아래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었다.
“그건 전부 저쪽으로 치워!”
“빨리빨리 움직여! 오늘 안에 여기 시마이 하게!”
건설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시민들 대부분이 도시 재건공사에 자원해서 나섰다. 군대와 경찰병력도 대민지원 형식으로 동원되었다.
초인길드 중에서도 일부는 자원봉사 형식으로 재건공사를 돕고 있었는데, 특히 화이트하우스 길드의 7팀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이···건···어···디···로···.”
쿠웅! 쿠웅!
거대해진 몸으로 건설기계가 필요한 작업을 혼자서 해내는 왕구호와,
아이언 골렘을 타고 다니면서 용접, 절삭까지 해내는 장영신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었으며,
건설 현장에서 몇 년은 일해 본 사람처럼 7팀 전체를 지휘하는, 인상이 꽤 험악한 사내도 있었다.
“천 1조장님!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니까요!”
“천 2조장님! 땡땡이 피우실 거예요?”
“헤헤. 설아님. 힘든 일은 저한테 맡기고 좀 쉬시죠.”
‘시루떡’이라는 독특한 별명의 사내의 지휘 하에, 화이트하우스 7팀은 도시재건공사를 도왔다.
7팀이 가는 현장은 작업속도가 최소 5배 이상 빨라졌기에, 그들은 어딜 가나 환영을 받았다.
잠시 후 점심시간.
건설현장 노동자들과 시민들, 그리고 화이트하우스 7팀이 모여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작업반장이 시루떡에게 막걸리를 권하며 말했다.
“보통 초인길드에서 오신 분들은 이렇게 험한 일은 안하려고 하는데···.”
다른 초인길드에서도 공사를 도우러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 형식적으로만 돕다가 돌아갔다.
게다가 그들은 건설현장의 노동자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하지만 화이트하우스 7팀은 달랐다. 그들은 초인길드 소속이라고 해서 잘난 척 하지도 않았고, 노동자들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다들 열심히 일했다.
이곳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화이트하우스 7팀에 호의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시루떡이 히죽 웃으며 사발에 막걸리를 받았다.
“길드에서 놀면 뭐하나요.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달려와서 도와야죠.”
마치 자신이 팀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시루떡의 모습에, 7팀 사람들-거의 현장지원팀 사람들-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참나···.”
“하···.”
하지만 딴지를 사람은 없었다.
초인인 왕구호도 장영신도 가만히 있었으니까.
게다가 진짜 팀장이란 사람은···. 말을 말자.
작업반장과 시루떡이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자자! 한잔 더 받으십쇼.”
“어이쿠. 고맙습니다.”
“우리가 더 감사하죠. 길드에서 오신 분들! 밥 많으니까 많이들 드십시오!”
안 그래도 다들 고된 노동에 많이 먹는 중이었다. 왕구호는 벌써 5그릇 째였다.
그때 작업반장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뭔가 못마땅한 듯,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근데 저 분은···.”
파라솔 아래에 겨우 스무 살이나 됐을 법한 뽀얀 피부의 청년이, 썬베드에 누워서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청년과 똑같은 자세를 한 빨간머리의 소녀가 어린이용 썬베드에 누워 콜라를 쪽쪽 빨아 마시고 있었다.
쪼로로록.
둘 사이의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팝콘이 놓여 있었는데, 팝콘으로 손을 뻗는 쪽은 대부분 어린소녀였다.
“아니, 다들 땀 흘리면서 일하는데···.”
막걸리 몇 잔으로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작업반장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말했다.
“저 사람은 뭐가 잘났다고 저러고 있는 겁니까?”
어린 소녀야 그렇다고 치고, 사지 멀쩡한 젊은 놈이 누워서 저러고 있는 것이 퍽 아니꼬웠던 모양이다.
시루떡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분은 저희 형님···. 아니, 저희 팀장님이신데요.”
“팀장? 하. 아주 잘나신 분이었나 봅니다.”
작업반장 혼자만의 불만은 아니었다.
마치 휴가 나온 사람들처럼 쉬고 있는 대인과 릴리의 모습을, 현장에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아니꼽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루떡이 손을 내저으며 그들을 변호했다.
“그게···. 아직 부상이 안 나으셔서 그래요.”
“부상은 무슨. 저 피부 뽀얀 것 좀 봐. 고생 한번 안하고 산 얼굴이구만.”
“아니, 그게···.”
시루떡은 멋쩍게 웃으며 머리만 긁적였다.
그때 조용히 밥만 먹고 있던 천설아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길드에 대민지원 나가자고 말한 분이 팀장님이었어요. 정작 이곳에 와서 본인은 일을 안 해서 문제지···.”
그 옆에 있던 천일남도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한 마디 보탰다.
“오해하지 마시길. 저희 팀장님이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좋은 사람이냐고 물으시면···.”
동생 천이남이 말을 받았다.
“장담은 못하겠지만, 아마도?”
그들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는 듯, 현장지원팀 직원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짧았던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작업이 시작됐다.
시루떡이 박수를 치며 7팀을 독려했다.
“자, 그럼 다시 힘내서 일해 봅시다!”
화이트하우스 7팀은 다시 일하기 시작했고, 대인과 릴리는 여전히 썬베드에 누워 휴식을 만끽했다.
*
*
*
새하얀 리무진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대인이 12권 째 만화책을 막 펼쳤을 때였다.
차에서 내린 백영희가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그에게 다가왔다.
최근 정신없이 바빠서, 그녀도 며칠 만에 대인을 만난 것이었다.
“팀장님은 여전히 열심히 놀고 계시네요.”
대인이 만화책을 옆의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기지개를 켰다.
“흐암. 당분간은 할 일도 없으니까요.”
-재앙이 지나간 후, 31일 동안은 차원문이 열리지 않으리라-
대현자 악시무스가 남기고 간 예언.
그의 예언대로 지금까지 게이트는 발생하지 않았고, 덕분에 도시는 군대, 경찰, 민간이 힘을 합쳐 재건사업에 전력을 다할 수 있었다.
초인길드들도 바쁜 시간을 보냈다.
아직 도시 도처에 몬스터의 시체가 쌓여있었다. 길드마다 그것들을 가져다 분석하고, 연구하고, 개발하는 데만 해도 무척 분주했다.
다만 싸울 상대가 없어진 초인들은 상대적으로 한가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초인들은 정부의 요청에 응해 대민지원을 나가거나,
통제구역 바깥으로 사냥을 나가거나,
아니면 각자 훈련을 하거나,
혹은 여기 있는 누구처럼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만 시키고 본인은 놀고먹는 사람도 있었다.
백영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게 놀기만 하면 안 질리세요?”
대인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느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질릴 리가 없잖아요. 평생 노는 게 내 꿈입니다만?”
그 옆의 썬베드에 누워 있는 릴리도 꽤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거, 돈 많은 백수야!”
도대체 저런 말은 어디서 배워와 가지고···. 하긴 뻔하지.
백영희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어휴.”
백수 라이프를 실현 중인 이 남매가, 무려 숨겨진 코어게이트를 찾아서 부수고 화염거인을 사냥한 초인들이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길드 최고의 성과였다.
게다가···.
그 순간 백영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팀장님?”
만화책을 옆으로 치워서 드러난 대인의 얼굴에, 며칠 전과는 분명하게 달라진 부분이 보였던 것이다.
대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바로 그 얼굴이 문제였다.
“갑자기 피부가 왜 이렇게 좋아졌어요?”
평소 피부에, 그리고 임대인에게 관심이 많은 백영희였기에 단숨에 그 변화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원래도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아기처럼 뽀송뽀송했다.
그냥 좋아진 수준이 아니라 아예 새로 태어난 수준.
“아 이거요?”
대인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빨도 라미네이트를 받은 것처럼 새하얬다.
“며칠 전에 시술을 좀 받았거든요.”
시술의 이름은 ‘환골탈태’
대인은 화염거인의 심장 속에 있던 영혼석을 꺼내, 드디어 피부미남의 꿈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대인이 머리 위에 파라솔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술 후에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해서 며칠 요양 중이에요.”
환골탈태를 후 며칠 동안은 신체에 안정이 필요했다.
때문에 대인은 지난 며칠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빈둥댔던 것이다.
그것도 이제 거의 끝났지만 말이다.
백영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도대체 무슨 시술을···. 저도 거기 소개해주시면 안 돼요?”
저렇게 효과가 좋은 시술이라면, 돈이 얼마가 들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대인은 고개를 저었다.
“거기 폐업했어요.”
영혼석의 마나는 절반정도 남아있었지만, 그건 쓸 곳이 따로 있었다.
“치사하게 혼자만 알지 말고···.”
“그거 물어보려고 왔어요?”
“···아니요.”
한숨을 푹 내쉰 백영희가 서류 하나를 임대인에게 내밀었다.
“포션 공장을 3개로 늘렸는데도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고 있어요. 제휴 문의도 계속 들어오고 있고···. 확인 부탁드릴게요.”
[WH포션]화이트하우스에서 독점으로 공급하는 치료제.
포션의 효과는 재앙을 겪는 동안 수많은 이들이 경험했다. 죽었어야 할 사람들이 생존했고, 평생 불구로 살 운명이었던 사람들이 건강하게 회복했다.
현장에서는 WH포션이 사망자 숫자를 10분의 1로 줄였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때문에 포션의 수요는 지금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어디 보자···.”
대인은 서류를 대충 살펴보고 백영희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목 뒤로 팔베개를 하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제휴 건은 알아서 해주세요.”
그의 시큰둥한 표정에, 백영희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안 좋으세요? 팀장님 지금 누워서 떼돈 벌고 있는 건데요?”
“그야···.”
대인은 옆으로 손을 뻗어 팝콘을 집어먹으려 했다.
그러나 정수기통 만한 팝콘 통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잠깐 릴리를 째려본 대인이 말을 이었다.
“당연히 좋죠. 다른 거 더 보고할 건 없어요?”
살짝 어깨가 처진 백영희가 두 번째 서류를 건넸다.
“화염거인 사체에 관한 리포트에요. 몇 가지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는데···.”
대인은 손을 저었다.
“보고서는 패스. 내 몫으로 가죽, 뼈, 피 20kg씩만 남겨두고 나머진 알아서 처분하세요.”
화염거인의 가죽은 드래곤의 비늘 다음가는 방화소재였고, 뼈와 피는 최상급 마법시약을 만들 수 있었다.
그 중에 당장 필요한 건 없었지만, 대인은 혹시나 싶어 20kg씩만 챙겨두기로 했다.
“그 다음은?”
백영희의 보고가 이어졌다. 대인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거나, 간단한 지시사항을 전했다.
어느덧 마지막 보고였다.
“오늘 전사자 합동 영결식. 가실 거예요?”
아무리 재앙을 미리 알리고 철저하게 대비하게 했어도, 그만한 싸움에서 사망자가 없을 수는 없었다.
총 427명의 전사자.
대인이 회귀하기 전의 재앙과 비교하면 100분의 1밖에 안 되는 피해였지만, 전사자들의 유가족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숫자일 것이다.
427명의 합동 영결식이 오늘 저녁에 있었다.
대통령과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참여할 예정이었고, 길드의 팀장 이상급 초인들에게도 최대한 참여해달라는 협조문이 도착했다.
하지만 대인은 고개를 저었다. 단호하게.
“내가 거길 왜 가요.”
“안 가시게요?”
대인은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
“가봤자 유가족들이 울고불고 질질 짜는 모습이나 볼게 뻔한데. 숨 막혀서 가기 싫어요.”
백영희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전사자들 유가족 정보는 왜 알아봐달라고 하신 거예요?”
오늘 백영희가 대인에게 건네준 서류 중에는, 전사자들 유가족 정보와 그들이 머무는 임시숙소 위치가 적힌 것도 있었다.
“······.”
대인은 대답 대신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새 여름의 끝자락. 따뜻한 햇볕과 선선한 바람이 공존하는 계절이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계절도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겐 지옥일 뿐이라는 걸, 대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 역시 퍼스트 게이트로 가족을 잃었으니까.
잠시 후, 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구에 이상 현상이 발생해서, 올해는 산타클로스가 여름에 올 예정이라던데.”
“···네? 산타클로스요?”
대인은 백영희에게 씩 웃어주곤, 옆에 있는 빨간 머리의 루돌프를 바라봤다.
“꼬맹이.”
“웅?”
“머리띠 사러 가자. 뿔 달린 걸로.”
이왕 할 거면 제대로 분위기를 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