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83
83화 술래잡기(2)
최근 들어, 테루 왕국에는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자네들 들었나? 옆 마을에 성자님의 마차가 왔다 갔다는 소문.”
“뭐? 성자님이 말인가! 언제!?”
술집 안. 단골 술꾼들이 모여서 나누는 이야기에 다른 손님들도 귀를 기울였다.
‘성자’ 그리고 ‘마차’라는 단어가 그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된 것을 느낀 사내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모습으로 말했다.
“며칠 전에 말이야. 우리 마누라가 동생 집에 갔다가 성자님을 뵈었다 이거야!”
우르르르.
금세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처음 말을 꺼낸 사내에게 이런저런 질문이 쏟아졌다.
“그럼 성자님 얼굴을 직접 뵌 건가!”
“성녀님은? 그 분의 미모는 이 세상의 미모가 아니라던데···.”
“마차는 어떻게 생겼나! 난 그게 제일 궁금해!”
마차의 성자.
최근 테루 왕국 백성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는 소문의 주인공.
그 분의 마차가 한번 오면 가난했던 마을이 부유해지고, 병자가 치유되고, 주변의 도적과 몬스터는 씨가 마른다고 했다.
물론 소문의 특성상 상당히 부풀려진 것들도 많았다.
예를 들면,
“성자님은 한 끼 식사를 하셔도 금괴를 주신다면서! 거스름돈도 안 받으시고!”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잔돈이 하나도 없어서 그랬는데.”라고 대답할 것이다.
“마을 주변의 도적떼를 다 토벌해주시는 건 또 어떻고!”
그건 먼저 덤벼드는 녀석들을 해치웠을 뿐이었다.
“어떤 병도 다 고쳐주신다면서!”
도박장에서 훔친 아티팩트를 실험해 보다가 실수로 을 광범위로 사용한 적은 있었다.
“얼마 전에는 그 분이 앉은뱅이를 일으키셨다고 들었다네!”
그런 적은 없었다.
“오오오오!”
이정도면 거의 신격화에 가까웠다.
당사자가 들으면 기가 찰 이야기를, 시골 마을의 사람들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살기 힘들고 팍팍한 세상에서, 부와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마법마차 이야기는 모두를 기분 좋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한껏 신이 난 사람들이 계속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소문을 떠들어댔다.
“마차가 전부 황금이라던데 그게 진짜일까?”
“응? 나는 빨간색이라고 들었는데.”
“모양이 꼭 커다란 호박 같다며?”
“엄청나게 커다란 소가 마차를 끈다더군!”
소문이 워낙 많고 제각각이어서 일치하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소문이 뒤섞이고, 가공되고, 재생산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냈다.
대부분의 전설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때 술집에 있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 분이 우리 마을에도 한번 들러주셨으면···.”
다들 비슷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의 실체를 뒤쫓는 자들도 있었다.
***
오늘도 지크는 대인을 힐끗힐끗 관찰했다.
도박장에서 탈출한 이후로, 그것은 소년의 일과가 되었다.
처음에 지크는 대인을 이렇게 생각했다.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야. 이유도 없이 우리한테 선행을 베풀 리가 없어.’
대인은 자신과 동생, 그리고 실험체가 된 많은 아이들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지크는 분명 대인에게 뭔가 목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지크는 어른을 믿지 않았다.
부모라는 인간들은 그들 남매가 어릴 때부터 때리고 학대했다.
남매는 살기 위해 밖에 나가서 구걸이든, 무슨 일이든 해야 했으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서로를 꼭 껴안고 오늘 밤은 맞지 않기를 빌었다.
부모가 자신들을 어딘가에 팔아버렸을 땐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어딜 가더라도 집보다는 나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실험실에 끌려온 이후로는 하루하루가 진짜 지옥이었다.
때문에 도박장에서 탈출한 밤, 지크는 따로 아이들을 모아놓고 조용히 말했다.
‘어른은 믿을 수 없어. 기회를 봐서 우리끼리 도망치자.’
‘‘응!’’
그때까지 아이들이 본 어른은 모두 악마나 다름없었고, 때문에 은인이라고 해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불편한 동행이 시작됐다. 지크는 몰래 대인을 관찰하며 도망칠 기회를 노렸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이 대인을 아빠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주인장. 여기 가장 맛있는 걸로 2인분씩 갖다 줘요.”
대인은 어딜 가든 가장 맛있는 음식을 모두에게 사줬고,
“어휴 냄새. 니들 일단 좀 씻자. 옷은 대충 사왔으니까 아무거나 갈아입어.”
따듯한 물로 씻게 해주었고, 비싸 보이는 옷과 신발도 사주었다.
“뭐? 아프다고? 어디가 아픈데?”
아프다는 아이한테는 비싼 포션을 물처럼 들이부었다.
급기야 나중에는,
“야야! 귀찮으니까 저기 가서 놀아!”
놀아달라며 달라붙는 아이들-주로 가장 어린 아이들-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감시는커녕, 누가 도망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을 분위기.
“······.”
오히려 그래서 더, 지크는 도망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이젠 도망가자고 해도 몇 명이나 따라올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지크는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에게 어떤 목적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지크가 혼란을 겪는 동안, 여동생 한나는 릴리와 절친이 되었다.
비슷한 나이에, 실험실에서 겪은 아픔을 공유한 두 소녀는 급격히 친해져서 찰싹 붙어 다녔다.
그리고 어느 날, 지크가 대인을 의심한다는 걸 알게 된 릴리가 와서 이렇게 말했다.
“바보. 아저씨는 착한 일 하는 게 취미야!”
“······.”
지크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이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그래서 숙소에 머무를 때, 장영신에게도 슬쩍 물어보았다. 임대인 아저씨는 어떤 사람이냐고.
장영신은 아직 어설픈 가이아어로 대답했다.
“···아저씨, 좋은 사람. 하지만···.”
평소 말수가 없는 소년이 머뭇거리는 모습에, 지크는 뭔가 숨겨진 비밀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잠시 후, 장영신은 여자아이들이 있는 방 쪽을, 그리고 반대편에 대인이 혼자 쓰는 방 쪽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라이벌.”
소년의 표정은 무척 비장해 보였지만, 지크는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물어볼 사람은 흑발의 엘프, 모드레아 뿐이었다.
“······.”
지크는 그녀가 너무 예뻐서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했다.
그리고 여행은 계속 됐다.
마차는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여러 마을과 도시를 들렀고, 가는 곳마다 대인은 돈을 펑펑썼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대인을 성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성자는 무슨. 물주겠지.”
대인은 피식 웃으며 팁을 잔뜩 뿌렸다.
돈은 넘치도록 있으니, 하루를 머물러도 항상 최고로만 먹고 최고로만 누렸다.
그리고 함께 마차를 타고 온 아이들을 한명씩 내려주었다.
아이들의 고향, 혹은 그 주변마을에 도착할 때마다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엄마!”
“존!”
아이를 와락 끌어안은 부모가 연신 대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성자님!”
대인은 부모에게 금화 몇 개를 건네주며 말했다.
“다시는 애 잃어버리지 말고. 잘 키워요.”
부모가 애를 팔았든, 다른 복잡한 가정사가 있든-대부분 돈 문제겠지만-, 대인은 스스로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는 돌려보냈다.
그리고 부모에게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동안 애가 어디에 있었냐면···.”
아이가 어떤 조직에 잡혀가 실험을 당했다는 사실은 부모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아이들 몸에 새겨진 흔적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조직에서 나중에 애를 찾으러 올지도 몰라요.”
“네? 그, 그럼 저흰 어떻게···.”
겁에 질려서 떠는 부모와 아이에게, 대인은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소개장을 써줄 테니까 엘프의 숲으로 가보세요.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필요 없으면 됐고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소개장이 필요 없다.’ 라고 말하는 부모는 없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소개장을 써주세요!”
대인은 부모들에게 소개장을 써줬다.
그들 대부분은 원래 살던 마을을 떠나 엘프의 숲으로 향했다.
지크는, 대인이 마을을 떠나는 한 가족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저주는 대장로가 풀어주겠지. 훈련은 노인네가 시켜줄 테고···. 나중에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크는 대인에 대한 모든 의심을 떨쳐버렸다. 그리고 의심했던 만큼 그를 믿게 되었다.
대인이 말했다.
“그럼 다시 출발할까?”
“네!”
어느새 소년은 마차의 마부가 되어 있었다.
*
*
*
다그닥다그닥.
마차는 계속 달렸다.
중간에 아이들을 내려주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 됐지만, 꾸준히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이제 마차 안에 남은 아이들은 지크와 한나 남매뿐이었다.
대인이 물었다.
“너희는 집으로 안 갈 거냐?”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나쁜 기억 밖에 없는 집으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럼 돌아갈 때 엘프의 숲에 데려다 줄까?”
“네!”
“···네.”
대인의 질문에 한나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도 옆에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좋은 분이야.’
지크가 보름이 넘게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무심한 듯 행동하지만, 대인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신경 썼다.
릴리도, 영신도, 말이 없는 모드레아도 그를 신뢰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 사람들과 계속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지크는 생각했다.
그때 대인이 지도를 보더니, 옆에 있는 릴리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 속도로 하루만 더 가면, 꼬맹이 네가 살던 마을이야.”
“응···.”
릴리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설레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대인은 그런 릴리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자.”
잠시 후, 마차는 숲 속 한 가운데 멈췄다.
여기까지 오면서 잡일이 능숙해진 지크가 야영준비를 진두지휘하고, 다른 아이들이 도왔다.
냉장고를 확인하고 나오느라 가장 늦게 마차 밖으로 나온 대인이 말했다.
“간편식이 다 떨어졌으니 오늘은 만들어 먹자. 오랜만에 내가···.”
그 순간 아이들이 동시에 펄쩍 뛰었다.
“안 돼!”
“싫어요!”
“제가 할게요!”
격렬한 반대, 그리고 만장일치로 요리당번은 지크로 결정되었다.
딱 한번, 여기까지 오면서 지크가 대인에 대한 의심을 확신했던 적이 있었다.
바로 그가 직접 요리한 음식을 처음 먹었던 순간,
‘악당!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인체실험이 아니면 고문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었다. 그 오해가 풀리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지금은 안다.
대인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하지만 요리는 못한다.
···정말 못한다.
대인이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애들은 입맛은 까다롭다니까.”
일행에 어른이 있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지만, 그건 벌써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지크는 척척 요리 준비를 했다.
냉장고에서 꺼낸 고기를 물에 담가 핏물을 빼고, 능숙하게 재료를 다듬고, 양념을 만들었다. 웬만한 어른보다 솜씨가 훨씬 좋았다.
다만 한 가지가 아쉬웠다.
‘재료가 좀 더 있으면 좋을 텐데···.’
고기 잡내를 잡아줄 재료가 없었다. 없어도 요리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이왕이면 모두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다.
그때 마침, 오면서 본 월계수 나무가 생각났다. 이파리 몇 개만 따오면 잡내를 없애는 데 제격이었다.
“저 잠깐만요. 금방 돌아올게요.”
지크는 동생에게 자리를 맡기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인체실험을 통해 밝아진 눈과 오감은, 별빛만 가지고도 충분히 숲속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휘익! 휙!
순식간에 숲을 가로지른 지크는 곧 월계수 나무를 발견했다. 잎 몇 장를 따서 품에 넣고, 바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스르륵.
어둠 속에서 붉은 빛이 일렁인 것은 그 순간이었다.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 치는 소년 앞에, 레드 고블린이 걸어 나왔다.
“누, 누구···!”
“쉬잇.”
붉은 빛은 가면 속 두 눈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그 빛이, 천천히 소년의 의식을 잠식했다.
마법이었다.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으으···.”
지크는 점점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블린이 그에게 다가와 콩알만 한 알약을 건넸다.
“아주 간단한 일이지. 이걸 음식에 넣어라.”
‘싫어!!!’
거부하는 의지와 달리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지크는 돌아와서 요리를 마저 했고, 레드 고블린이 준 알약을 음식에 넣었다.
모두가 맛있다고 말해줬다. 지크는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절규했다.
‘안 돼! 적의 함정이야! 그걸 먹으면 안 돼!’
그러나 식사는 계속 됐고, 잠시 후 한 명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졸려···.”
“우웅···”
털썩.털썩.털썩.털썩.
···털썩.
마지막으로 대인이 쓰러지고, 어둠 속에서 레드 고블린이 걸어 나왔다.
“수고했다.”
쓰러진 지크에게 인사를 건넨 레드 고블린이 릴리 앞에 쪼그려 앉았다.
소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흉측한 가면 속에서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크흐흐흐흐!”
레드 고블린은 두 손으로 릴리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찾았다! 드디어 찾았어! 불의 아이. 네년만 데려가면 나도 다시···!”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끼. 하도 안 오고 멀리서 깔짝대기에 뭐하나 했네.”
“!!”
눈을 부릅뜬 레드 고블린이 몸을 일으키며 뒤돌아섰다. 동시에 마력을 잔뜩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시야를 가득 메운 주먹뿐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 개새끼야.”
-빠아아아악!
통렬한 소리와 함께 레드 고블린이 바닥에 처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