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incarnated Fallen sword emperor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머릿속이 꽃밭 (3)
스파앗!
무릎이 잘려나간 오우거의 거체가 균형을 잃고 앞으로 기울었다.
나는 빙글 돌아 놈의 뒤를 노리는 대신, 오른발을 깊숙이 내디뎠다.
쓰러지는 거대한 몸뚱아리가 내 몸을 덮치기 직전.
콰아아!!!
수직으로 세운 월영검의 검끝에서 적(積)이 폭발했다.
오우거의 두꺼운 가죽을 뚫기는 무리지만, 그 몸을 밀쳐내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지.
“꽉 잡으라고.”
나는 오우거의 간식거리가 되려다가 막 목숨을 건진 남자를 옆구리에 꼈다.
녀석의 바지와 닿은 내 허벅지로 축축한 느낌이 전해졌다.
너. 오줌 쌌구나.
일반인이 보기에 5미터짜리 오우거가 아름드리나무 같은 팔을 휘저으며 달려들었으니 이해는 한다만.
“감, 감사…, 으아악!!!”
축축함이 한층 깊어졌다.
또 쌌구나. 이 새끼가. 생명의 은인한테 오줌을 싸제껴.
“아재. 소리 지르지 말라고. 귀 울려.”
나는 중년의 남자를 옆구리에 끼고 재빨리 바닥을 걷어찼다.
적(積)에 얻어맞아 광분한 오우거가 뒤늦게 나를 덮쳐들었으나.
쿠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내가 놈의 나머지 무릎마저 잘라냈기 때문.
배를 깔고 엎드린 놈이 몸을 뒤집으려 버르작거렸다.
잘려 나간 단면이 꿈틀거리며 재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콰! 콰! 콰아! 콰아앙! 콰아!
일곱 번 적(積)이 놈의 등줄기에 정확히 격중했다.
강철보다 단단한 가죽이 짓이겨지고 찐득한 체액이 흘러나왔…
“끄아아아가!!!!”
진짜 고막 터지겠네.
아재 성량이 보통이 아니다.
“잠깐 실례.”
등줄기를 훑어 아혈을 누르자 그제야 귀가 평온해졌다. 비록 이곳저곳에서 여전히 비명 소리가 울리고 있기는 하지만.
내 바지에 대고 오줌 지려서 그런 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피곤죽이 된 오우거놈은 두 팔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세우려고 애를 쓰는 중이었다.
힘겨워 보이는 인생… 아니, 괴생이다.
그렇다면 내가 끝내줘야지.
희게 빛나는 월영검의 검날이 찢어진 등줄기의 가죽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고요한 파공성과 함께 안에서 터져나갔다.
삼반공의 6절, 침(沈).
해양괴물을 상대하면서 창안했다 해서 꼭 해양괴물에게만 쓰라는 법은 없지.
오우거는 마핵의 위치가 깊어 단번에 격살하기가 피곤한 놈이었는데 침(沈)을 시전하니 훨씬 간단했다.
움직임이 멈추고 마력이 사그라든 오우거의 시체를 뒤로 하고 빠르게 이동했다.
“으아아악!!!”
“사람, 살려!!!”
제주성은 비명과 피비린내로 가득 차 있었다.
좁은 골목과 언덕 위에 다닥다닥 붙은 일반인 주거지에서 오크와 오우거, 삼미호와 오미호와 구울과 고블린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한다고.’
일부러 유인한 게 분명하다.
범인은 당연히, 부철영과 불휘회.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분이 2대 백록검이셨어. 2차 블랙데이에 그분 덕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많아. 제주는 전쟁의 여파가 크지 않았지만, 정부의 지원도 없었거든. 제주에 주둔하고 있던 해군도 전쟁이 시작되면서 모두 이동하고…….
양범진의 이야기는 구구절절했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부철영을 죽이지 말라는 소리였다.
-실수하신 거야. 후회하고 있으실 거고…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때도 있잖아.
-그러든지.
-…진심이지?
육지에 머물며 내 행적을 들은 녀석은 내가 악인에게 가차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모르기는 힘들겠지. 내가 죽여서 계룡문 본부 앞에 매단 모가지가 몇 개인데.
하지만 나는 부철영의 모가지를 붙여 놓았다.
양범진의 뜻을 존중해서이기도 하지만…….
‘나도 네놈의 결정이 옳기를 바랐으니까.’
양범진의 믿음.
머릿속 꽃밭인 녀석의 믿음이 옳은 결정이기를 바랐다.
나는 이미 잃어버린, 인간에 대한 기대를 여즉 가지고 있는 녀석들. 녀석들이 그 희망을 계속 품을 수 있기를 바랐다.
잘못된 기대였다.
나는 오우거에게서 구한 아재와 또 오는 길에 주운 모녀를 구 탐라단 본부 1층에 내려놓았다.
그곳은 부상자들로 가득했다.
아재는 발목을 접질린 정도였으나 모녀 중 어머니는 팔꿈치 아래를 잃었다.
힐을 받아도 긁힌 상처나 치료가 가능하지, 잃은 신체가 자라나지 않는 일반인에게는 치명상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됐어요.”
아혈이 풀린 아재가 버튼 눌린 인형처럼 꾸벅꾸벅 허리를 접으며 감사합니다를 연창했다. 팔뚝을 잃은 어머니도 신음을 삼키며 감사하다고 꾸벅거렸다.
나는 그들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주변을 확인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으니 사망자가 생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그래도 탐라단은 상황에 잘 대응하는 중이었다. 일단 급하게 소집한 탐라단원들이 현장으로 향했으니 그쪽은 대충 수습이 될 테고.
양범진은 부상자들에게 회복술을 퍼붓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부분의 부상자는 일반인. 마음은 알지만 큰 의미는 없는 행위다.
“형. 이리 와.”
녀석은 되묻지 않고 따라왔다.
얼굴이 바싹 굳어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손에 잡히듯 보였다.
자신의 탓을 하고 있겠지. 부철영을 살려둔 일을 후회하고 있겠지.
나는 기감의 그물을 넓게 펼치고 제주성내를 빠르게 한 바퀴 돌았다.
‘어디 있냐, 이 거악놈아.’
이제 슬슬 나올 타이밍이다. 지금 나오지 않으면 저 괴물들을 유인한 덕을 보지 못할 터.
이런 악인의 수법은 빤하다. 약한 곳을 찔러 혼란에 빠뜨리고 그 사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한다. 그 과정에서 누가 다치든 얼마나 죽든 무감하다.
이번 생에서도, 검황으로 살면서도, 그런 자들을 수없이 마주쳤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지켜야 하는 대상은 보통 약점이 되니까.
하지만 놈은 운이 나빴다.
‘내가 지금 여기 있거든.’
콰아아아아!!!!
굉음이 울리고, 뒤이어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멀지 않은 곳이다. 제주성의 북쪽 성벽 방향.
“형.”
“그래.”
나는 재빨리 방향을 바꿔 북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양범진의 발소리가 내 뒤를 바싹 따랐다.
지붕 아래 좁은 골목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모두가 도망치지는 못했겠지.
일부러 무너뜨린 흔적이 역력한 서쪽 성벽 인근의 현장에도 백여 구 시체가 널려 있었으니.
‘네놈은 곱게 죽지는 못할 줄 알아라.’
곧, 야트막한 언덕과 낮은 지붕 너머 멀리로 무엇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그것의 모양이 익숙했다.
“…림아! 저게, 뭐야……!”
등 뒤에서 들려온 양범진의 목소리에 당황이 섞여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침음을 삼키며 전력으로 경공을 운용했다.
성벽 위로 불쑥 솟아오른 그것은, 시체의 덩어리였다. 이미 경화를 마친 시체괴물이 성벽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건물의 기둥처럼 거대한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땅이 잘게 진동했다.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진짜로 진동하고 있다.
암주술이다.
죽은 시체를 모아 시체괴물을 일으키는 주술.
하지만, 제주에는 어둠속성이 없었는데.
내가 일일이 비무를 빙자해 속성 확인까지 마쳤다. 분명 어둠속성은 없었었는데.
“부철영. 이 새끼가…….”
전직했구나.
그 며칠 사이에 사람을 죽여 전직 조건을 채우고, 전직하고, 괴물을 유인하고, 암주술을 실행하다니.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아주 행동이 빠른 놈이다.
아마 이 시체괴물을 일으켜 놓고 이놈을 상대하며 혼란에 빠진 사이 뒤통수를 치려 했겠지만.
내가 저걸 보고 당황하기에는 겪은 바가 너무 많아서 말이지.
“형.”
바다를 건너며 생사를 넘나든 전투를 수백 번 함께했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미 내 생각을 이해했을 터.
‘이 정도는 누워서 껌 씹기라고.’
눈앞의 시체괴물은 그저 커다랗고 단단할 뿐이다. 추혼마인처럼 이지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암주술로 일으키는 시체괴물은 처음 주술을 걸었을 때 내렸던, 아주 간단한 명령만 이행할 수 있을 뿐.
보아하니 저 괴물에게 내려진 명령은 ‘성벽을 부숴라.’인 듯했다.
한 번 죽은 시체덩어리가 아까운 성벽을 파괴하게 둘 생각도 없지만.
탓.
내 발이 거세게 바닥을 걷어찼다.
동시에 양범진이 시체 괴물을 향해 공빙(空氷)을 시전했다.
수증기가 얼어붙고, 그 곁의 기체가 얼어붙고, 급기야,
쩌어엉, 작은 소리를 내며 공간 자체가 얼어붙었다.
30여 미터 높이의 시체괴물은 얼음 동상이 되어 오도카니 멈춰 섰다.
역시 상당한 수준의 마력이다.
순수한 마력의 양만 비교하면 김강산보다 훌쩍 앞선다.
‘기술을 좀 연마하면 금방 늘겠어.’
이런 애들이 뒈지지 않고 잘 성장해야지.
머릿속이 꽃밭인 애들. 인간에 대한 기대를 놓지 못하는 애들.
한껏 기운을 끌어 올리자,
월영검을 가득 채우고 있던 진기가 한층 농도를 높였다.
곧, 올올이 풀려나간 진기가 주변을 가득 메우고,
그 진기(眞氣)를 중심으로 자연의 외기(外氣)가 휘돌기 시작했다.
공기와 흙, 반쯤 마른 나뭇잎, 바람이 몰고 온 바다의 냄새, 그 사이사이에 스며 있던 작은 외기의 조각들이 나에게서 흘러나간 진기에 엉겨붙고,
엉겨붙어,
다시 나에게로 흘러들어왔다.
삼반공의 3절, 결(結).
내기와 뒤엉킨 내기가 기맥을 타고 올랐다.
이마에 땀이 돋아난 것도 모른 채 나는 진기의 운용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한낮의 태양처럼, 그보다 더 밝게 월영검을 에워싸고 있던 빛의 덩어리가 정면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고요히 어둠을 가른 결(結)의 끝이 얼어붙은 공간에 닿는 순간.
쩌어어어어엉!
큰 북이 울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얼어붙은 공간, 그 공간을 메꾼 얼음이 갈라지고,
멈추지 않고 나아간 결(結)이 공간 속에 갇힌 시체 괴물을 단번에 꿰뚫었다.
산산조각난 얼음이 기화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 사이로 조각난 괴물의 시체가 후두둑 떨어졌다.
어떤 조각은 완전히 박살났으나 어떤 조각은 구울의 대가리만큼 크다.
그것들을 그대로 두면 다시 주술의 힘에 의해 꿈틀거리며 모여들 터.
그러므로.
파바밧바바밧밧밧바밧!
다시 한 번, 월영검이 폭발하듯 검기를 발출했다.
결(結)에 이은 산(散).
찢긴 괴물 사체들은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산(散)에 꿰뚫리고, 적(積)에 얻어맞고, 양범진이 쏘아낸 얼음창에 의해 티끌처럼 작은 조각으로 화했다.
검은 먼지가 된 과거의 시체 괴물이 허공을 나풀나풀 헤엄쳤다.
어둔 밤 위에 더 어두운 괴물의 조각들이 내려앉았다.
그 어둠을 뚫고,
“반란군 수괴님께서는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
내가 쇄도했다.
***
고호준은 입을 헤 벌린 채 정면을 응시했다. 벌어진 입에서 문장이 되지 못한 탄성이 연신 흘러나왔다.
“와… 우… 와……!”
분명히 자신의 눈으로 보았는데 무엇을 보았는지도 알기 어려웠다.
양범진의 뒤를 좇아 다급히 달려온 길이었다.
비명소리를 헤치고 도착한 곳에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성벽의 세 배를 훌쩍 넘는 거대한 괴물.
그 앞의 제주성벽은 마치 크라켄 앞의 인간처럼 작아 보였다.
코가 멀 듯한 악취를 풍기는 괴물이 빌딩처럼 거대한 발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저 발이 바닥을 내리치는 순간, 성벽은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저기 도망치지 못한 이들은…
고호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예상과 달리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눈앞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발을 들어올린 시체 괴물은 그대로 얼음 인형이 되어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빛. 빛. 빛.
두꺼운 빛줄기와 불꽃처럼 가느다란 수백 가닥의 빛줄기가 얼어붙은 괴물을 향해 연달아 쏟아졌다.
작은 산처럼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던 괴물은 단번에 먼지처럼 작은 조각이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제주를 위해 어렵게 모셔온 고수라는 양범진의 설명을 듣고서도, 그 스스로 서림과 맞붙은 후에도,
저 바다를 건넌다는 사실에 회의적이었는데…
‘가능할지도.’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 희망을 눈으로 좇던 양범진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분이, 사람은 맞으실까요?”
그의 뒤를 따라온 고명희였다.
고명희도 멀리에서 서림이 쏘아낸 빛줄기를 보았다.
어둠을 사른 그 빛은 비현실적으로 새하얬기에 눈을 감았다 해도 그 번쩍거림을 느꼈을 터였다.
고호준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아니지. 사람이 저럴 수는 없지.”
그야말로 신이라 부를 만한 위용.
‘검신.’
고호준이 침을 삼키며 서림이 달려나간 흔적을 좇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