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Grand Master RAW novel - Chapter 280
제11장. 지하 세계 (2)
지구 문명이 멸망한 지 30일째, 한성은 김유환과 연구하여 카렌 대륙의 병력을 추리는 한편, 각 방공호를 연결하는 방안을 고안하고자 하였다.
각 방공호는 수만에 이르는 시민들을 수용할 수 있었고 자체적으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약간이라도 상비해 두었다. 그렇기에 각 방공호를 연결하여 그 길에서 식량을 생산한다면 더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동시에 교류를 할 수 있었으므로 지금과 같이 고립된 느낌까지는 들지 않을 것이다.
김유환은 방공호를 연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였으며 조심스럽게 공사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적들은 방공호를 해체할 생각만 하고 있었지 설마 각 방공호를 연결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준비되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한성은 전 세계의 방공호를 이으려 하였다.
두 번째로 진행하는 일은 방송사를 복원하는 것이다.
방송 장비의 생산 기술은 남아 있었고 그것을 카렌 대륙에서 제작하여 들여오는 것이다. 각 방공호에는 TV들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라디오도 배치되어 있다. 그러니 방송국을 만들어 운영한다면 지금보다는 생활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한성이 그렇게 신경을 쓰는 사이, 지하 세계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터를 잡았고 마켓들을 운영하였다. 물물교환이 성행하였으며 지하에 각종 상점들이 들어섰다.
한성이 방공호를 계획할 때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 가장 성행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지하 격투였다.
이른바 BUFC였다.
지하 UFC의 약자로, 사람들은 단순한 이 스포츠에 열광하였다.
일부에서는 지하 격투의 문제점을 지적하였지만 한성은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사람들은 불안감에 빠져 있었다.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지 않으면 언젠가는 터지고 대학살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인류의 반 이상을 지켜 내었는데 자멸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한성이 인류연합의 회장 비슷하게 추대되어 있었다.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동의하였던 것이다.
지하 세계에서 한성의 발언권이 가장 강하였다.
한성도 가끔은 BUFC를 관람하였는데 문제가 생겼다.
BUFC를 반대하는 세력이 등장하였고 그 세력의 수장은 모든 관람을 중지시키기 위하여 출전하였고 가볍게 승리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한성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한성은 이번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김유환과 회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지하 세계 구축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그 안의 운영을 재량껏 두었는데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하 격투를 반대한다고요?”
“그래, 심각한 문제지.”
“정신이 나간 것 아닙니까? 지금 사람들의 욕구는 터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마땅한 오락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지하 격투까지 금지시키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입니다.”
“그러니 문제라는 거지.”
“놈들이 대놓고 깽판을 치나요?”
“그건 아니야. 깽판을 친다기보다는 지하 격투에 참여하여 가볍게 승리하고 있지.”
“이해할 수 없는데요.”
“그러니까 놈들을 막아야겠지.”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해결책이 있겠나?”
“저희가 참여하여 놈들을 박살 내 버리도록 하죠. 그럼 다시 활성화될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로군.”
아직 여러 가지 문제들은 해결하고 있는 중이었다.
구축도 끝나지 않았는데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박살 낸다면 한성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해결을 볼 수밖에 없었다.
“어떤 놈인지 면상이라도 보도록 하자.”
“함께 가시죠.”
한성과 김유환은 가면을 쓴 채로 돌아다녔다.
지하 세계에서는 모든 개성이 허락되고 있었다. 약육강식의 논리에 지배되기도 하였으며 국가적인 틀은 무너진 상황이었다.
그나마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은 각 방공호가 완전히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과 수만 명씩 고립되어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각 방공호를 완전히 잇는 것도 국가의 틀을 잡아 놓고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정말 제국으로 편입해야 하나. 이곳에 새롭게 국가를 세우는 것이 나을까?’
아직 답은 나오지 않고 있는 상태.
한성은 술집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천장에는 밝은 등들이 달려 있어 대낮같이 환하였다.
사람들이 방공호 안에 나름대로 집을 짓고 있었으며 연결되어 있는 길을 따라 상점과 술집, 환락가까지 생기고 있는 판이었다.
이전의 문명은 몰락하였으나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곳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아가고 있었다.
“놀다 가세요! 예쁜 계집들이 있습니다!”
“좋은 약도 있습니다. 사 가세요!”
그야말로 난장판처럼 보였지만, 세계의 질서는 나름대로 유지되고 있는 중이다.
한성은 큰 광장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링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사람들이 모여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와아아아!”
“더 때려라!”
퍽퍽퍽!
“개방 방주 승리!”
“와아아아!”
“뭐야, 저거?”
웬 거지 하나가 선수들을 박살 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무협의 개방을 생각해 내어 방주라고 불리는 모양이었다.
김유환은 한눈에 거지의 무공을 알아본다.
“개방의 타구봉법입니다.”
“개방의 무예라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는 말은 이곳에 넘어온 인간이 너 하나만은 아니라는 뜻인가.”
“음……. 저와는 다른 방법으로 넘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무림까지 넘나들 수 있는가.”
“그건 불가능하겠지만요.”
“네가 나가서 상대해 봐라.”
“알겠습니다.”
한성은 김유환을 출전시키기로 하였다.
김유환은 출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반 정도 빠져나갔다.
그들은 난타전을 원하는 것이지 한 사람에게 완전히 털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군중들은 피를 보고 싶어 한다.
지금 이런 오락거리라도 없으면 사람들은 미칠 것이 분명하였는데 웬 거지새끼가 방해하고 있었다.
그가 올라오자 사람들은 환호했다.
“와아아아!”
“이번 대전은 가면의 기사와 개방 방주의 대결입니다!”
김유환은 거지를 노려보았다.
“왜 사업을 방해하는 것이냐?”
“옳지 않으니까.”
“네가 이렇게 버티고 있으니 경기가 활성화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들의 유일한 오락거리다.”
“내가 허락지 않아.”
“이 새끼가!”
팟!
김유환의 주먹과 놈의 봉이 허공에서 얽혔다.
콰과과광!
“이런!”
근처에서 지켜보던 한성이 결계를 쳤다.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며 박투를 벌였다. 그야말로 난전. 하지만 그 안에 무학의 묘리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거지 놈이 소리쳤다.
“네놈은 마교의 졸개로구나!”
“흥! 거지새끼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천마신교는 더렵혀지지 않았다!”
“클클클! 노부가 드디어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되었구나!”
콰과과과과광!
“허어!”
화려한 폭발이 이어진다.
바닥에서는 지진이 일어났으며 그들의 손속은 더욱 날카로워진다.
이제는 검강의 다발들이 천지를 뒤덮었다.
‘이대로는 큰일 나겠군.’
한성이 중재에 나서기로 하였다.
카가가가가강!
퍽퍽!
“크윽!”
“아아아악!”
그들은 양쪽으로 날아가 처박힌다.
“이게 뭐 하는 짓들인가!?”
“형님! 놈은 정파의 졸개입니다! 죽여야 합니다!”
“비켜라! 마교 놈이라면 치가 떨린다. 세상을 파멸로 몰아가는 일등공신이지.”
한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노부 어쩌고 하는데 네놈은 아무리 많이 쳐 줘야 10대다.”
“마교 놈들이 수작을 부려서다.”
“너도 무림에서 왔냐?”
“그렇다면?”
“잘되었다. 얘기 좀 하자. 그만 싸우고. 아니면 나와 싸워 볼 테냐?”
한성은 거지를 노려보았다.
그는 무기를 허리춤에 꽂았다.
“쳇.”
“가서 목이나 축이며 이야기하도록 하지.”
“어쩔 수 없지.”
거지도 한성을 이길 수는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근처 술집으로 향한다.
웅성웅성.
이곳은 지하 세계에 설치되어 있는 술집이다.
나름대로 재배까지 되는 세계였기에 넉넉하지는 않아도 배급하였고 사람들은 쌀과 보리를 이용하여 술을 만들어 팔았다.
마치 카렌 대륙의 가난한 시골 마을 술집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다.
그들은 서로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거렸다.
“중원으로 돌아가 권토중래할 날만 손꼽았다. 사악한 마교의 무리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꿈이었지.”
“거지새끼가 말이 많군. 네놈이 본좌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놈이?”
“죽여주겠다!”
“그만!”
한성이 테이블을 내려쳤다.
살기가 사방으로 진동하자 사람들이 슬슬 자리를 피해 빠져나갔다. 주인은 어렵게 세운 술집이 망하지 않을까 전전긍긍이었다. 그렇다고 자경대나 경찰도 없는 상황에서 어디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
지금 세계는 폭력단이 성행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개방 방주나 살기를 내뿜는 한성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몸을 사리는 것이다.
한성은 신기한 눈으로 거지를 바라본다.
“네 이름은 무엇이지?”
“본좌는 염희제, 무림에서는 개왕으로 불린다. 천하를 일통하고 중원을 주유하다가 그만 마교 놈들의 간계에 빠져 이렇게 되었다.”
“오호, 그렇다면 김유환 네놈과는 서로 다른 시간에서 온 것이겠군.”
“그렇습니다, 형님. 제가 마교의 교주이던 시절에는 이런 거지새끼들은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그만하라고 했다.”
“쳇.”
그들은 서로 노려보기만 할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성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일단 함께 마계 놈들을 몰아내도록 하자. 가능하면 중원으로 돌아가 고수들을 데리고 올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해 보도록 하고.”
“본좌가 왜 그래야 하나?”
“왜 그래야 하느냐고?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처맞을 테니까.”
한성은 나름대로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염희제라는 놈이 무림을 일통하였다고 하니 그곳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충분히 그곳의 세력을 이끌고 올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해도 이런 고급 전력은 노예로 만들어 부려야 직성이 풀리는 한성이었다.
외전. 개왕 염희제 (1)
홍무제(洪武帝) 13년.
천하 무림은 유례가 없는 평화를 맞이하였다.
20년 전부터 시작한 정사대전은 무림을 피로 물들였으며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피가 강이 되어 흘렀다.
천하가 어지러웠던 원 말기부터 명 제국이 세워지고 10년이 지나는 동안 무림은 하루도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정파 무림은 맥이 끊기기 직전에 몰렸으며 혈마(血魔) 위지강에 의하여 무림제패가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정파의 세력이 겨우 남해군도에 한정되어 있었을 때, 홀연히 영웅이 등장하였다. 그는 위지강과 칠 주야에 이르는 혈전을 벌여 죽였으며 마교 사대호법과 오대천왕들이 모조리 절멸하였다.
이를 두고 무림인들은 천산 대혈투라 명명하였다.
개왕(丐王) 염희제는 타구봉 하나로 마교의 세력들을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남해군도에서부터 마교 최후의 보루로 불렸던 십만대산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쓸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본래 개방이라 하면 수많은 방도들을 거느린 무림 최대 세력이었다. 거지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그 숫자가 10만에 달하였고 무공 역시 구파일방 중 으뜸이라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무공에 대해서는 검증이 되지 않았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단숨에 무림제일 세력으로 떠올랐다.
무림사 최초로 이기어봉(以氣馭棒)술을 선보인 개왕 염희제는 단연 전설적인 존재로 추앙을 받았다.
개방은 이제 천하의 중심이었다.
숫자만 많은 거지들의 집단이라는 조롱은 완전히 사라졌다.
거지가 대우를 받는 세상이 도래하였으며 개방의 거지들은 당당하게 구걸하러 다니기에 이르렀다.
무림에서 개방의 입김이 가장 강하였으므로 개방 총타에 들를 때면 다 찢어진 옷을 입고 오는 것이 예의라 생각되기도 하였다.
20년에 이르는 정사대전이 개방에 의해 정리가 된 이후, 처음으로 개방 총타로 전 무림의 장문인들이 모이고 있었다.
개방 총타 화룡각.
원래 개방의 총타는 천진 내우산에 위치하고 있었다.
총타라고 하여도 다 무너져 가는 허름한 전각에 거적을 깔고 유리걸식하듯 살아가는 거지들이 가득하였다.
정사대전이 끝난 이후로, 각 문파의 장문인들은 천하제일방의 위신에 맞도록 전각을 짓도록 권고하였는데, 약간 증축 공사를 하였을 뿐 허름한 모습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개왕의 신조는 거지가 거지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거지가 거지이기를 포기할 때, 거리를 돌아다니는 범인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무소유를 강조하고 있는 그였기에 이 전각도 황송하다고 말할 지경이었다. 개왕은 아직까지도 구걸하러 다녔고 큰 행사가 있을 때에는 대규모 거지 행렬을 볼 수 있는 진귀한 풍경을 자아내기도 한다.
오늘은 제3차 무림대회를 시작하는 날이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내우산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무당파의 장문 장무전은 허름한 도복을 입고는 제자들과 함께 내우산 초입에 이르는 길이었다.
탁.
한데 삼결제자들이 그들의 앞을 막는다.
제자들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묻는다.
“지금 뭐 하는 짓이오? 이분이 뉘신지 알고 계시오?”
“그런 차림으로는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뭣이?”
냄새가 풀풀 나는 삼결제자는 근엄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문지기들은 상거지 꼴이었는데 도대체 언제 옷을 빨았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으며 머리에는 파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결제자들은 자세 하나 흩트리지 않는다.
“개방에 출입하는 모든 분들께서는 예를 갖춰 주십시오!”
“예의라면…….”
“허허허! 되었네.”
쫘악! 쫘좌좌작!
장무전은 스스로 옷을 찢어내 버렸다.
허름하다 못하여 넝마를 걸친 꼴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지기들은 봉을 풀지 않았다.
“저쪽에 흙 밭이 있습니다.”
문지기들은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장무전은 흙 밭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민감한 후각으로는 그곳에 소똥까지 깔아 놓은 것 같았는데 그곳에는 놀랄 만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소림사의 방장 일각대사를 비롯하여 화산파, 곤륜파, 점창파 등 위명이 쟁쟁한 장문인들과 장로들이 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똥밭에서 한 차례 구른 그들은 겨우 입산할 수 있었다.
“통과입니다.”
“끄응.”
제자들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한다.
“아무리 그래도 똥 밭이라니…….”
“이곳은 개방이다. 개방에 왔으니 개방의 법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예전에는 안 그랬습니다.”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지.”
장무전은 망설임 없이 소똥과 흙이 섞여 있는 밭을 뒹굴었다.
그 시각.
염희제는 실의에 빠져 있었다.
얼마 전, 염희제의 제자였던 유설화가 죽어 버렸다.
원래 염희제는 제자 따위는 키우지 않았다. 하지만 유설화를 제자로 맞아 타구봉법을 전수하였으며 다음 대 방주로 점찍기까지 하였다.
사실 인품이 있고 무공에 재능만 있다면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꼭 유설화가 무림오미에 속해 있기 때문에 아꼈던 것은 아니었다.
개방에서 강조하는 무소유와 강직한 마음, 자비로운 성품을 겸비한 최고의 기재였다. 하나 마교 잔당의 암습에 그만 목숨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염희제는 유설화의 시신을 붙들고 있는 중이다.
“설화아…….”
“헤헤, 사부님! 쉰밥이라도 한 그릇 하실까요?”
아직까지 유설화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시신은 차갑게 식어 있었으나 당장에라도 벌떡 일어나 함께 구걸을 가자고 조를 것 같았던 것이다.
염희제는 탄식하였다.
“개방의 큰 별이 떨어졌음이다.”
유설화는 특이하게도 윤회 사상을 믿는 제자였다.
무당파 도사들이나 할 말을 남겼고 그것은 염희제의 머릿속에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사부님, 걱정하지 마세요. 인생이란 돌고 도는 것. 저희가 이 생에 인연을 맺었으니 반드시 다음 생에도 인연을 맺을 거예요.’
‘윤회를 한다고 하여도 만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저희는 필시 전생에 부부였을 거예요.’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제가 사부님을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니 제가 죽는다고 해도 슬퍼하지 마세요. 다음 생에는 다시 부부로 만날지도 모르잖아요?’
염희제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유설화가 남긴 유언을 기억해 냈다.
“제가 죽는다고 해도 반드시 제자를 맞아 주세요. 괜히 저 때문에 실의에 빠져 지내지 마시고요.”
염희제는 제자와 약속을 하였다.
그러니 떠나야 한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온다.
각 당의 호법들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는데, 방주가 짐을 꾸려 나오자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방주! 어디 가십니까!?”
“제자를 찾아야겠다.”
“하나 오늘은 무림대회입니다. 가시더라도 내일 가시는 것이…….”
“제자와의 약속이었다. 그러니 지키는 수밖에. 이것은 나의 신념이다. 한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
“방주!”
탓!
짐을 꾸린 염희제는 봉을 허공에 띄워 올렸다.
이것은 일명 어봉비행(馭棒飛行)이다.
어검비행과 비슷한 이치였으나 봉으로 시전을 한다는 것은 이미 염희제의 경지가 하늘에 닿아 있다는 것을 뜻하였다.
염희제가 마음을 먹었으니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림대회는 너희가 알아서 진행하도록 하라.”
그렇게 명을 내린 염희제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염희제는 천하를 주유하고 있었다.
천하를 떠돈 지 1년.
지금까지 천하를 이 잡듯이 뒤졌지만 그의 마음에 드는 제자는 발견할 수 없었다. 애초에 유설화와 비슷하거나 뛰어난 기재를 찾으려 하니 만날 수 없는 것이 당연한지도 몰랐다.
천하를 떠도는 동안 염희제는 무림으로 나오면 당장에 혈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영약과 영물의 내단들을 가득 수집하였다.
만년하수오나 만년설삼, 공청석유 등은 무림인이라면 목숨을 걸고 구할 만큼 진귀한 가치가 있었다.
여기에 영물 백호의 내단과 인면주의 독액, 이무기의 구슬 등 무림사에도 보기도 힘든 내단들을 갈무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 염희제가 제자를 키우기 위하여 수집한 것들이었다.
삐익. 삐익.
오늘도 그는 노숙을 감행한다.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곳이다.
그는 천산 자락의 이름 모를 바위 아래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스스슷!
인기척이 느껴진다.
지금까지 염희제는 제자를 찾는 일과 병행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교의 잔당들을 소탕하는 일이었다.
염희제는 인기척만으로도 그가 마교 오대 천왕 중 하나였던 환마(幻魔)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마교의 비전 무공들 중에서 사술이라 일컬어지는 환영 술과 여러 가지 잡기들을 익혀 상대하기가 극히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세간 사람들의 입장일 뿐이었다.
뭔가가 오면 쳐부숴 버리면 그뿐이었다.
염희제는 무림의 지존이었으며 누구도 그의 타구봉에 무릎 꿇지 않은 자가 없었다.
환마 독고진이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이끌고 나타난다.
“그렇지 않아도 찾아가려 했는데, 잘되었군.”
“홈마니반다라 훔마니아…….”
염희제는 그대로 놈들을 쓸어버리려 하였다.
환마의 졸개들에게는 어봉술도 아까웠다. 그냥 개 잡듯이 두들겨 패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한데 문제가 발생했다.
염희제의 봉이 허공을 갈랐으며 그들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어떤 일그러지는 공간으로 밀어 넣어졌다. 공간에서 빠져나가려 하였으나 그럴수록 더욱 깊게 그를 빨아들일 뿐이었다.
“이건 무슨!?”
천하의 염희제도 당황하고 말았다. 이런 경우는 난생처음이었던 것이다.
“이따위 사술로는 어림없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염희제의 몸은 점점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일렁거리는 공간은 염희제를 완전히 집어삼킨다.
환마 독고진이 멀어지고 있는 염희제에게 모습을 보였다.
“후후. 영감, 그곳은 아수라의 세계라오. 아무리 강한 당신이라도 당할 수밖에 없지.”
“이노오오오옴!”
“우리를 너무 원망치 마시오. 마교 천하를 쳐부순 것이 당신 아니오? 개왕 당신이야 무림을 구한다는 명분이었겠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으니…….”
“끄아아아악!”
염희제는 미지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외전. 개왕 염희제 (2)
스아아아아!
염희제는 태어나 처음으로 심각한 상황에 몰리고 말았다.
일그러지는 공간의 압력이 엄청났다.
그는 현경의 경지를 밟고 있었으며 어떤 무기도 그의 몸을 상하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공간은 그의 몸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압력은 외부와 내부를 모조리 터뜨리고 있는 중이다.
옷과 기물들은 멀쩡하였지만 몸만 타들어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염희제의 얼굴은 해골이 되어 갔으며 생기가 모조리 빠져나갔다. 그는 완전히 미라처럼 변하고 말았다.
마침내 그는 기나긴 통로를 빠져나와 어딘가에 떨어졌다.
털썩.
“끄윽. 끄으으윽…….”
염희제는 숨만 깔딱거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숨을 쉬기 힘들었으나 탁한 대기 탓에 더욱 숨이 막힌다.
기의 농도는 중원의 반절도 되지 않았으며 대기 오염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곳이 깊은 산속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이곳이 중원이라고 하여도 그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그가 죽으면 중원은 피로 물들 것이었다.
염희제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가능하면 기억을 간직한 채로 환생이라도 하고 싶었다. 다음 세대에 태어나더라도 기억만 있다면 충분히 마교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염희제는 영혼을 강인하게 압축하였다.
그가 죽음을 각오하였을 때, 염희제의 혼백이 빠져나와 사방을 쏘다녔다.
염희제는 이곳이 중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였다. 이곳이 중원이라면 괴상한 비행체가 날아다니지도 않았을 것이며 고층 건물들이 이리 즐비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끝인가…….’
결국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은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든 미련을 버리고 극락왕생을 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휘이이잉!
염희제가 모든 미련을 포기하였을 때, 그의 혼백은 유령의 잔상처럼 휘날렸고 어딘가에서 죽어 가는 육체에 끌어 당겨졌다.
스아아아아!
염희제는 죽기 직전의 몸으로 들어갔으며 그와 기억이 융합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삶.
그의 이름은 바로 김유성이었다.
이곳은 중원이 아닌 한국이라는 곳이었으며 본의 아니게 김유성과 염희제가 혼합되며 새로운 인격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 * *
애애애앵!
서울대학교병원 응급실로 수많은 환자들이 이송되고 있었다.
환자들의 상태는 대체적으로 심각하였는데, 야수에게 찢긴 듯한 상처들로 가득하였다.
팔다리가 뜯겨 나간 것은 양호하다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가슴이 벌어져 대충 압박 붕대로 동여맨 환자들도 있었으며 장기가 흘러나와 미처 몸으로 밀어 넣지도 못한 채로 손으로 막아 수술실로 옮겨지고 있는 중이었다.
김유성의 정신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수술실로 이동하며 잠깐 주변을 둘러보았다.
“후욱! 후욱!”
‘내 인생도 이렇게 끝나는구나.’
돌이켜 보면 보잘것없는 인생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병약하여 허구한 날 병원을 오가야 했다.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쇠약증이 왔다. 감기만 걸려도 일주일은 앓아누워야 했으며 폐렴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어려서부터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였고 중학교에 들어서는 학교 공인 빵셔틀로 명성이 드높았다.
공부를 하려고 하여도 체력이 안 되어 하지 못할 지경이었으니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올라온 뒤로는 일명 몬스터 사태라고 말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2016년 여름, 그러니까 더위가 한창 거리를 잠식하고 있을 당시였다.
운석이 떨어졌고 그 안에서 몬스터들이 깨어났다. 그것은 각 지역에 몬스터 출몰지를 형성시켰으며 한국에만 열 곳이 넘는 지역이 금역으로 지정되었다.
검은 운무에 휩싸여 있는 몬스터 지대에는 끊임없이 많은 괴물들이 형성되었으며 군대는 그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군대를 출동시켰다.
결과는 괴멸.
전 세계 어느 국가도 몬스터를 죽이지 못하였다. 핵폭탄까지 동원하였으나 몬스터에게는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은 창과 검 같은 원시적인 무기뿐이었다.
과학자들은 몬스터들에게는 특유한 효소가 있어 피부에 모든 화학 무기를 방어할 수 있는 방어막을 형성시킨다고 한다. 그것이 인류를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려 할 때 즈음, 헌터들이 등장한다.
헌터들의 몸값은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각국에서는 헌터 양성을 장려하였다. 하지만 이능력자들은 기감에 민감한 사람들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이 세상에는 새로운 절대 계급이 탄생하였다.
헌터들은 몬스터를 사냥하며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으나 놈들은 엄청난 에너지를 품을 핵을 머금고 있어 새로운 대체 에너지로 각광받고 있었다.
각국의 회사들은 몬스터 핵이나 사체를 매입하는 사업을 시작하였고 엄청난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세계에서 유성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작년 겨울, 민감도 테스트를 받았다.
기에 대한 민감도가 30%가 넘는 학생들은 국가장려정책의 일환으로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과 미래 직업까지 책임졌다. 민감도가 뛰어난 학생들을 모아 따로 헌터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그들은 헌터로 양성되었다.
물론 민감도가 30%가 넘는다고 하여도 모두 헌터가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최소한 몬스터 수거와 출몰지 관리인 등 수많은 고소득 직종에 속할 수 있었으므로 탄탄한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었다.
김유성의 민감도는 4~5%였다. 이 정도면 그냥 일반인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
그 때문인지 고등학교 생활도 순탄치 못하였다.
오늘 김유성이 이렇게 실려 온 것은 순전히 운이 없었기 때문이다.
몬스터의 출몰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냥 운이 없으면 길을 가다가 몬스터를 만나 죽을 수도 있는 세상이었다.
대개의 몬스터들은 출몰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나오는 것은 정부로서도 어찌 대처를 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지하철을 타기 위하여 늘 다니던 길을 가던 중이었다.
C급 몬스터 잔트라가 나타나 길거리의 사람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기 전에는 그저 평범한 하루라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미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잔트라는 거리의 사람들을 덮쳤고, 혼선 와중에 김유성은 잔트라에게 배가 베이고 말았던 것이다.
내부 장기가 쏟아지기 직전이었고 지금 그는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이 없었다.
삐-.
수술실로 옮기는 도중, 김유성의 심장은 멈추고 말았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수술실 앞에서 심장 마사지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전기충격기의 충격으로도 그의 심장은 뛰지 않았다.
“후우.”
그를 옮기던 의사와 간호사들은 한숨을 내쉬며 멈춰 섰다.
“신원 미상의 고교생, 2016년 7월 21일 18시 23분, 사망.”
의사의 선고가 떨어졌다.
염희제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가 꾸는 꿈은 평범한 소년에 대한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사고를 당해 병약하였으며 다섯 살 무렵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꽤나 잘살았던 가정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아파트에서 투룸으로, 원룸으로 이사하였으며 1년 전에는 옥탑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유성이라는 소년은 병약함 때문에 놀림의 대상이었다. 학교라는 곳에서는 매일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였고 일명 ‘공인 빵셔틀’이라는 별명까지 붙어 있었다.
몬스터 사태에 대한 내용과 이 세계의 각종 지식들이 들어왔는데, 그것은 모두 김유성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꿈의 마지막에는 인면지주와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괴물에게 배가 베여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사망했다.
“허억!”
염희제는 갑자기 깨어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분간하지 못하였다.
염희제의 기억과 김유성의 기억, 그리고 인격이 융합되며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는 염희제이기도 하였고 김유성이기도 했다.
외전. 개왕 염희제 (3)
주변을 둘러보자 한 중년 여자와 소녀가 울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정신을 차리자 눈을 비비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머니…… 유정아?”
“꺄아아아악!”
그녀들은 비명을 질렀다.
유성은 흰 천으로 덮여 있었다. 이마까지 덮여 있었으며 의사가 사망 확인까지 한 상황이었다.
도저히 그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던 가족들은 차가운 시신을 손으로 만지기까지 하였다.
차라리 머리가 다치거나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삼일장 문화까지 생겨났을 정도이니 이토록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성은 몬스터에게 배가 깊게 베여 내장이 돌출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엄청난 출혈까지 있었기에 도저히 살아날 수 있는 가망성이 없었다.
한데 김유성이 깨어났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달려온다.
“아, 아들아?”
“오빠가 살아 있어요!”
의사는 유성의 얼굴을 살핀다.
동공이 확대되었는지 확인하였으며 맥을 잡는다.
펄럭!
급기야는 베인 상처까지 보았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학생, 이름 기억하나?”
“김유성입니다.”
“이분들은?”
“가족입니다.”
의사는 어머니와 유정을 가리켰다.
“이분은?”
“제 어머니입니다.”
“이 학생은?”
“여동생이죠.”
“허허. 그것참.”
“선생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어머니 백혜정이 의사에게 묻는다.
응급실 과장인 오상기는 생전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는 듯이 말한다.
“해괴합니다.”
“어쨌거나 살아난 것인가요?”
“살아난 정도가 아니라 몬스터에게 당했다고 볼 수 없을 지경입니다. 아까 제가 직접 학생을 싣고 수술실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상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요.”
“그런데요?”
“살아났습니다.”
“유성아!”
“오빠가 정말 살아 있어!”
가족들은 다시 한 번 유성의 몸을 확인한다.
그녀들도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 유성의 몸에는 길게 찢어진 상처가 있었는데 그것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감쪽같이 없어졌던 것이다.
후우웅!
유성과 가족들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집은 망원 6동이다.
그러지 않아도 망원동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몬스터 사태 이후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면서 공동묘지도 확장되었다.
유성의 집은 공동묘지와 인접해 있었으며 검은 기둥이 치솟아 있는 위험 구역에 가깝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싼 월세로 집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성은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느낌의 도시 풍경을 눈에 담았다.
거리에는 이능력자들이 꽤 눈에 띄었는데, 거대한 도끼와 검, 화살 등 고대 무도에서 사용하는 무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소지하고 다녔다. 그 밖에 일반인들도 필수적으로 검 한 자루씩은 가지고 다니는 세상이 되었다.
몬스터의 출현으로 인구가 대략 10억 정도 줄었으며 국토의 3할이 파괴되었다. 그 때문인지 무너져 내린 빌딩이나 부서진 주택들이 즐비하였다.
군대 역시 곳곳에 주둔하였는데, 이제 그들은 총 대신 검으로 무장하였다. 군대에서는 기본적으로 검술과 궁술을 배웠으며 중대 단위로 하급 몬스터들을 사냥하였다. 이제 군대에 들어가도 죽는 사람이 즐비하였다.
유성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김유정이 묻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해?”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 싶어서.”
“뭘 새삼스럽게.”
“그래, 새삼스러운 일이지.”
“오빠, 분위기가 바뀐 것 같다?”
“네 착각이겠지.”
“아니야. 예전의 김유성이 아닌걸?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성격이 조금 바뀐다고 하던데 말이야. 오빠도 그런가?”
“쓸데없는 소리.”
예전의 유성은 힘없고 자신감 없는 소년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에 괴롭힘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런 악순환은 반복되었고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몸을 움츠렸으며 고개를 제대로 들고 다니지도 못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유성은 어딘가 모르게 여유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평생 함께 살아온 여동생이 그런 유성의 모습에서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망원동 집에 도착하였다.
유성은 허름하게 지어진 건물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궁전이 따로 없군.”
“뭐라고?”
“꽤 좋은 집에 살고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해.”
“머리가 살짝 어떻게 된 것 아니야? 이런 집이 좋다고?”
“유정아.”
어머니가 김유정을 만류한다.
지금 유성이 어떤 감상을 하건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사실, 유성이 몬스터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막막했던 가족들이다. 유성이 크게 다쳤다고 해도 수술한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성은 집으로 들어가며 감탄을 거듭하였다.
“이곳이 나의 집인가.”
“오빠, 조금 이상해.”
휘이이잉!
옥상에 올라오자 작은 옥탑방이 하나 있었다.
거지 생활에 익숙한 그로서는 궁궐이나 다름없다고 생각될 지경이었다. 실제로는 빈민층이나 다름없었지만, 왠지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는 것처럼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벌써부터 유리걸식을 하던 과거가 그리워지고 있었다.
“조금 쉬어라.”
“예, 어머니.”
“늠름해졌구나.”
어머니는 유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유성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다.
언제 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침대와 책상, 의자가 전부인 방이었다. 그래도 깔끔하게 도배가 되어 있었는데 푹신한 침대에 눕자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60년을 거지로 살아온 그였다.
유성의 기억과 혼합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아무래도 양쪽의 기억 중에서 염희제로서의 기억이 더 강하다 보니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인지도 몰랐다.
과연 이런 편안한(?) 생활에 익숙해질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었다.
그날 저녁.
유성은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좀이 쑤셔 밖으로 나왔다.
얕은 바람이 불고 있었고 서울 시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신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유성은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의 몸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어봉술을 사용하여 천하를 주유하였던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한 걸음 떼기도 힘든 이 몸은 죽은 시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는 10년 동안 모은 영약과 영물의 내단, 개방의 신물인 타구봉을 품에 지니고 넘어왔다.
육신은 해골처럼 말랐지만 타구봉과 각종 영약들은 멀쩡하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미 개방을 비롯한 천하의 무학들이 머릿속에 집대성되어 있었으니 육체만 조금 개조하고 막혀 있는 혈들만 뚫으면 이전의 경지를 되찾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곳에 갈 수는 없어 보인다.
대략적으로 어디에 떨어졌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찾아내고 영약을 복용하기 위해서는 이틀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였다.
오늘은 목요일이다.
내일 하루는 학교에 나가야 하니 토요일 아침에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유성은 생각을 정리한 후에 집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뒤에서 무언가가 유성을 안았다.
“고마워.”
김유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간절함과 진심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유성과 김유정의 관계는 평범한 남매를 뛰어넘고 있는지도 몰랐다. 깊은 우애가 남달랐던 것이다.
어릴 적 당했던 교통사고는 김유정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치원에 가고 있던 김유정은 마주 오던 차량에 부딪힐 뻔하였고 유성이 그녀를 밀어내고 대신 들이받히면서 거의 한 달 동안 혼수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전신쇠약이라는 질병을 앓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김유정은 항상 유성에게 살갑게 대하려고 노력하였다.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뒤섞여 언젠가부터는 집착 비슷하게 발전했는지도 몰랐다. 유성이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오거나 어떤 일을 당할 때에는 불안해하였다.
어느 정도 기감이 뛰어난 김유정이었기에 노력하면 무도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고교에 입학한 것도 모두 유성 때문이었다.
“오빠가 죽었다면 아마 나도 따라 죽었을 거야.”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사실인걸.”
“너도 이제는 남자 친구도 만나고 해야지? 학교에서 꽤 인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싫어. 다른 남자들은 전혀 눈에 차지 않는걸.”
“어른이 되어라.”
“오빠가 할 소리는 아닌데?”
유성은 김유정을 토닥였다.
어쨌거나 김유정은 거의 기절할 정도로 놀랐었다. 유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장례식이 끝나고 따라 죽을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 유정이었으니 지금 얼마나 애틋할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유성 학생의 몸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닌 모양이로군.’
이 세상에 우연 따위는 없었다.
이렇게 될 운명이었으니 어쩌면 이 세상에서 환생한 제자를 찾을 수도 있었다. 혹시나 유정이 유설화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유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속단할 수 없는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