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642
1642화. 그래서 즐거우십니까? (1)
눈을 뜬 호가명이 제 얼굴을 손으로 툭 덮었다.
‘꿈인가?’
옛이야기다. 그것도 이제는 무척이나 오래되어 버린.
손에 잡힐 듯 생생하면서도 시간의 흐름에 어쩔 수 없이 조금쯤 빛바랜 기억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호가명은 이 시간에 눈을 뜨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날 이후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으니까.
가만히 상체를 일으키니 호가명의 가슴팍에서 이불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의 시선은 제 가슴께로 향했다. 조금 말랐다는 말이 적절할 몸, 그 가슴엔 숱한 흉터가 종횡으로 그어져 있었다.
물론 장일소의 몸에 새겨진 흉터에 비할 바는 아니나, 호가명의 가슴에 자리한 흉터들 역시 그날 이후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그 모든 시간을 넘어 살아남은 호가명은 이제 전 강남을 넘어 강북까지 손에 넣기 위해 마지막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야만 했다.
‘나는 아직…… 냉철한가?’
이는 호가명에게 주문과도 같은 말이었다. 설령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반드시 관철해야 하는 것.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목적보다 우선되는 첫 번째 철칙.
호가명은 눈을 감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잠들어 있을 때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내실에 내려앉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천천히 눈을 뜬 호가명의 눈빛이 어두웠다.
탁.
침상에서 내려와 문을 여니, 대기하고 있던 시비가 다가왔다.
“식사를…….”
“아니. 의복을 준비해라.”
호가명의 차가운 눈이 시비에게로 향했다. 아니, 그 눈이 향한 곳은 앞에 선 시비가 아닌 그 너머 어딘가였다.
“련주님을 뵈어야겠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한 목소리였다.
장원은 그리 크지 않았다. 특히 사패련 본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크기이다 보니, 장일소의 처소까지는 금방이었다.
그러나 장일소가 처소로 쓰고 있는 전각에 이른 호가명은 불현듯 발길을 멈춰 세웠다.
그리곤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해가 뜨기까지는 먼 시간. 밤하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그 하늘 아래 선 사람은 과연 그때와 같은가?
수많은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대적하기조차 두려운 적과 치열하게 싸워 왔던 일, 목숨이 위중할 만큼 큰 상처를 입고 사경을 헤매던 일, 추적해 오는 이들을 뿌리치고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주해야 했던 시간, 만인방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내세우게 되었던 날…….
그 시간을 보내 오며 홍안의 청년이었던 호가명은 이제 장년의 사내가 되었고, 고작해야 귀주 작은 뒷골목 하나를 제집으로 삼던 백귀당은 이제 귀주의 지배자인 만인방을 넘어 강남의 패자인 사패련이 되었다.
모두가 믿지 않았다. 심지어는 호가명조차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장일소는 그 기적과도 같은 일을 이루어 냈다. 그렇기에 호가명도 후회를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그들이 이룩한 게 대단하기 때문이 아니다.
호가명이 한 점의 후회조차 남기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장일소가 장일소로 남아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만 지켜졌다면 설사 지금까지 귀주의 작은 뒷골목을 전전하는 신세였다 해도 호가명은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일소가 장일소이기에 호가명이 호가명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내 호가명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고도 잠시 전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마침내 걸음을 옮겼다.
처소 앞을 지키고 있던 호위들이 호가명을 보고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평소라면 허식이라도 한 번쯤은 막아서는 시늉을 해야 할 이들임에도 말이다.
그 반응에 안색을 굳힌 호가명이 말없이 전각 문 앞에 섰다.
“련주님. 가명입니다.”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호가명은 굳이 기다리지 않고 문고리를 잡았다. 호위들이 움찔했지만, 딱히 그를 제지하려 들진 않았다.
허락 없이 련주의 처소에 드는 건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려 나가도 할 말 없는 짓이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그토록 많은 이가 몸담은 사패련에서도 오직 한 명, 호가명에게만은 그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호위들도 당연히 이 사실을 알았다.
덜컥.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리고, 차가운 밤공기가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호가명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음울할 정도로 짙은 어둠과, 그에 힘겹게 저항하는 작은 등잔불들이 어룽거리는 게 보였다.
꿈속에서 본, 장일소를 처음 만나던 순간의 광경이 겹쳐 보였다. 그때의 삭막한 공간과는 다른, 실로 정갈한 내실임에도 이 방 안에 돌고 있는 공기는 그때의 메마르고 건조한 느낌과 똑 닮아 있었다.
호가명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한곳에 향했다.
작은 등잔으로는 채 다 밝히지 못하여 어둠이 고인 공간. 그중에서도 가장 깊고 짙은 어둠.
이윽고, 붉은빛으로 어른어른 흔들리던 등잔 사이로 푸른빛 귀화(鬼火)가 피어났다.
호가명조차 일순 숨을 멈출 정도로 강한 귀화였다.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서로 마구잡이로 얽혀들며 타오르는 것 같은 섬뜩한 불길이었다.
“……련주님.”
장일소는 그곳에 있었다. 과거의 호가명이 보았던 곳과 그리 다르지 않은 곳에.
“……가명이냐?”
“예.”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지? 이 시간에?”
호가명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이내 귀화가 천천히 일렁였다.
발소리와 함께 장일소가 희미한 빛 아래로 나왔다. 새하얀 침의 차림의, 화장기 없는 모습. 호가명이 익히 알았던……. 하지만 이제는 조금 낯설어진 장일소였다.
침상과는 동떨어진 구석에서 걸어 나온 장일소를 빤히 보던 호가명이 물었다.
“안 주무셨습니까?”
“조금 일찍 깼을 뿐이다.”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장일소의 목소리에 살짝 으르렁대는 듯한 음성이 섞여 나왔다. 이런 거친 모습 역시 호가명에게 익숙하나, 또한 낯설다.
호가명은 긴장한 기색도 하나 없이 그저 장일소가 있었던 곳에 물끄러미 시선을 주었다. 집기 하나 없는 방의 구석. 이 공간에서 가장 삭막한 곳이다.
“조금 편히 쉬지 그러셨습니까.”
장일소는 입을 닫고 그런 호가명을 보았다. 찰나의 시간, 하지만 호가명은 분명히 느낄 수 있을 만큼의 공백 뒤에 장일소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생각이 조금 많아져서 말이다.”
호가명이 아는, 익숙한 장일소의 목소리와 손짓이었다.
“조금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보다…… 무슨 일인지 내가 물었던 것 같은데? 몇 번이나 더 물어야 대답할 거지?”
“련주께서 평안하신지 확인하러 온 것뿐입니다.”
“평안?”
“예.”
장일소가 호가명을 뚫어져라 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철부지인 건지, 네가 노인네인 건지. 사사건건 이리 걱정을 해 대서야 원.”
장일소가 느릿하게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차라도 들겠느냐? 아니면 이르지만 술이라도?”
“아닙니다.”
“재미없긴. 앉아라. 올려다보면 목이 아프니까.”
하지만 호가명은 그가 가리킨 의자에 앉는 대신 묵묵히 장일소를 바라보기만 했다. 장일소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그냥 눈치나 살피자고 온 건 아닌 모양이구나.”
“…….”
“할 말이 있으면 하려무나. 아니면, 계속 기다려 주랴?”
호가명은 제게로 향하는 장일소의 시선을 완전하게 읽어 내려 애썼다. 부드러운 호의와 단호한 신뢰. 그리고…….
“련주님. 기억하십니까?”
장일소가 무슨 뜬금없는 말이냐는 듯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호가명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꿈을 꿨습니다.”
“꿈?”
“예. 련주님과 처음 만났던 때를.”
그 말에 장일소가 피식 웃었다.
“뭐 좋은 기억이라고 꿈까지.”
“그때 련주님께서는 제게 당부하셨습니다. 항상 냉철하라. 그 어떤 순간에도.”
호가명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 말은 지금까지 제게 있어서 첫 번째 원칙이었습니다. 능력이 부족하여 때로는 지키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어느 때고 냉철함을 유지하려 애써 왔습니다.”
장일소가 끄덕이며 가볍게 답했다.
“그랬지.”
“이제는 알겠습니다. 련주님께서 제게 왜 그런 주문을 하셨었는지. 제게 뭘 원하셨는지. 그래서 하나 묻고 싶습니다. 저는 련주님의 기대에 부응했습니까?”
장일소는 조금 더 의심스러움이 담긴 눈초리로 호가명을 뚫어지게 보았다.
“새삼스럽구나. 왜 이러는 거지?”
“대답하기 어려우십니까?”
장일소가 깊이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래. 너는 내가 기대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잘해 주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저 귀주 어딘가에 반쯤 묻혀 썩어 가는 백골 신세가 되었겠지. 뭐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삶이겠다만.”
호가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오늘 저는 잠에서 깨어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냉철한가?”
“…….”
“대답은 ‘아니다’였습니다.”
호가명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냉철해야 함에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제 냉철하려 합니다. 그게 련주님께서 제게 요구하신 첫 번째이고,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는 일이니까요.”
장일소는 살짝 피로한 기색을 내비쳤다.
“오늘따라 쓸데없는 서론이 참 길구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그럼 련주님은 어떠하십니까?”
“……뭐?”
호가명이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제가 련주님께 요구했던 것은 가혹한 집념도, 불굴의 의지도, 상대를 압도할 실력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 여유를 가지실 것.”
장일소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러니 묻겠습니다. 련주님께는 지금 여유가 있습니까? 가지려 악을 쓰는 이가 아니라, 이미 가진 사람처럼 굴고 계십니까?”
서늘하기까지 한 호가명의 물음에 장일소의 눈꼬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대답하렴, 가명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 목소리에 정제되지 않은 거친 감정이 묻어 나왔다. 마치 처음 호가명이 보았던 장일소처럼.
호가명은 짧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정면으로 장일소를 응시했다.
“제가 스스로 냉철하지 못했다고 여기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대답을 하라 했을 텐데?”
“먼저 물은 건 접니다.”
“뭐?”
호가명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장일소를 노려보고 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련주께서는 여유를 가지셨습니까?”
“…….”
“아니. 그게 아니어도 좋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련주.”
호가명의 눈에 두 장일소가 겹쳤다.
모든 것을 가진 강남의 지배자 패군과, 아직 치기 어렸던 젊은 장일소.
닮은 듯 다른 그 두 사람이.
세월이 흘렀음에도 딱히 변한 것이 없어 보이나, 딱 한 가지만은 확연히 달랐다.
“그래서 즐거우십니까?”
장일소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변하며 새파란 귀기가 어렸다. 호가명을 상대로는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명백한 적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