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ion | Lonelyheart RAW novel - Chapter 2
2화.
2화. 시은
“된 거야 ”
나는 힘차게 사인을 하고 펜을 내려놓으면서 물었다.
“네, 여기 한 군데 더 사인을 해주시면……. 감사합니다.”
여자의 긴 설명을 한 줄로 요약하면 세건 대학에 최첨단 도서관 건물을 하나 올린다는 것이고 결국 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에서 도서관이 구닥다리 독서실 역할로 전락하는 것은 충분히 비극적인 일이다. 학교에 기부는 가장 손쉽고 효과적인 사회 환원 방식 중 하나라는 생각을 평소 하기도 했지만, 여자의 차분차분한 설명을 듣다 보니 갑자기 애교심이 들끓어 올랐다.
“그러면, 이제 중도 열람실에서 풍기던 암모니아 냄새는 사라지는 건가 ”
60년대 후반에 신축했다는 중앙도서관은 여름이면 입구부터 퀴퀴한 곰팡내가 날 뿐 아니라 좁은 계단과 연결되어 있던 열람실, 특히나 5열이라 불렀던 5열람실의 화장실 냄새는 가히 오열을 할 만큼 지독했던 기억이다. 나는 실없이 웃었다. 건일이 너, 대학 때는 파랬거든. 종종 푸르른 나무 같았어. 세경의 말이 맞다. 캠퍼스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절반쯤은 푸르게 만들어주는 모양이다. 그것이 비록 암모니아 향일지라도 말이다. 여자가 도서관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마음은 이미 십 수 년의 세월을 건너 그 시절 캠퍼스로 곧장 달려가고 있었다. 교문에서 중앙도서관, 도서관에서 상경대, 그리고 인문대……. 갈래갈래 굽어지며 이어지던 길마다 쏟아지듯 꽃들이 피고 잔디는 늘 푸르렀던 것만 같은 그곳.
“물론, 그렇습니다. 이번 신축 건물 안은 학생들과 졸업생들의 설문조사를 기반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열람실의 쾌적한 분위기 역시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부적인 안을 보시자면…….”
여자는 농담조로 던진 말에, 암모니아 냄새라구요, 어머머! 하는 감탄사는커녕 가벼운 웃음 한 번 보이지 않고는 준비된 정답만을 제시하였다. 이미 금액에 사인도 한 마당에 이런 융통성 없는 성실함이라니 내가 싫어하는 유형의 인간이다.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아 여자의 말을 잘랐다.
“됐어. 냄새 안 난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여기예요. 여기, 보셨어요 ”
여자가 3D 디자인을 펼치고는 손으로 어딘가를 짚고 있었다. 건물 외형을 스케치한 그림인데, 여자가 짚은 곳은 건물 뒤편이었다. 그러니까 잘 보이지도 않는 부분이다.
“뭐가 좋은데 ”
“여기 은행나무예요. 은행나무 아래 노란색 벤치가 있잖아요.”
전반적으로 조악한 그림이었다. 게다가 노란색이라니 끔찍했다. 이런 그림을 보면서 꿈꾸는 눈동자를 하는 여자라니. 여자에게서 생기가 느껴지는 건 사무실에 들어와 처음이다. 줄곧 비에 떨어진 꽃 이파리 같은 꼴이었다면 지금은 빗물을 흠뻑 빨아들여 탱탱해진 화초처럼 탄력이 넘쳤다. 어이가 없어서. 이런 표정은 금액에 사인해줄 때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꿈을 깨서 미안한데, 이렇게 안 할걸 이건 스케치잖아.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 실제 건축내용은 달라질 수 있음. 더군다나 배경일 뿐인데 ”
“그럼, 은행나무 길은 하지 않나요 벤치도 ”
“펀드 레이징 열심히 해봐. 혹 몇 그루 심을지 아나. 그래도 노란 벤치는 오버다. 최신식 건물 외양과 완벽하게 어그러지는데 ”
네, 그런 거군요. 여자는 풀이 죽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 된 거지 금액은 계좌에서 이체될 거고.”
네, 라고 여자는 답했지만, 테이블에 펼쳤던 참고 자료를 정리하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산호색 립글로스를 바른 입술이 뭔가 말할 듯 벌어지다가 다시 다물렸다.
“뭐 문제가 있나 ”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자는 눈을 맞추지 않은 채로 두툼한 파일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여전히 활짝 웃으며 감사하다는 마무리 인사 대신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숨을 들이켜곤 할 뿐이었다. 미적미적 애매하게 구는 사람은 누구든 기다려주지 않았지만, 어쩐 일인지 없던 인내심이 동원되었다.
“알겠지만 회사 차원의 후원은 금액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일정한 형식이 필요해. 내가 이 자리에서 그렇다 아니다 할 수가 없어.”
내가 왜 이러한 변명을 붙이는지 알 수 없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주지 않으면 여자는 곧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럼 뭐.”
“개인적인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자가 눈을 맞추면서 말했다.
“개인적인 부탁이라, 나 그런 거 잘 안 받는데 ”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자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가보겠습니다.
“뭔데, 말이나 해봐.”
나는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면서 물었다. 여자의 초조함을 보는 건 꼭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부스럼이 속옷에 닿았다 떨어졌다 하는 것처럼 개운치 못한 기분이었다. 마침내 여자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저…… 취직하고 싶습니다.”
“여기 ”
“꼭 이 회사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급히 일자리를 구해야 합니다. 저, 경력도 있습니다.”
여자가 봉투를 열더니 투명 파일에 담긴 이력서를 밀어 놓았다. 우측 상단에 사진이 먼저 보인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다. 웃으면 훨씬 낫군, 생각하면서 제일 아랫줄까지 훑었다. 바로 두 달 전까지 회사를 다녔다가 퇴사한 걸로 되어있다.
“CK물산 비서실이라. 일자리가 그렇게 급한데 여기는 왜 그만두었지 큰 회산데.”
“목돈이 필요했습니다.”
“응 ”
여자는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한 듯이 양손을 꽉 맞잡았다가 풀었다.
“퇴직금이라도 급히 필요했어요.”
“그러니까, 급전이 필요해서 퇴직금을 받고 나니, 이제 일자리가 급해졌다 ”
느릿느릿 상황을 꼭꼭 되짚어 주자 수치심 때문인지 여자의 뺨이 붉어진다. 하긴, CK 회장실이라면 돈으로 문제가 되는 사람을 계속 앉혀둘 리도 없었다.
“그래 ”
“……네.”
“이력서 두고 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여자가 벌떡 따라 일어섰다.
“고맙습니다.”
“취직시켜준다고는 안 했는데 ”
“……네.”
여자가 순순히 답한 뒤, 표정을 감추듯 고개를 숙였다. 절망과 비참이 깨물린 입술 사이에 맺혀있었다. 급하게 말을 덧붙인 건 내 쪽이었다. 억지로 자리를 만들 수는 없지만, 비는 자리가 있는지 알아볼 테니 기다려보라는 말이었다. 절반만큼만 희망이 깃든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
“비서만 가능한가 다른 일도 할 수 있어 ”
“비서직이 제일 익숙하고 편하지만 다른 사무직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뭐든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 나는 밀쳐두었던 이력서를 집어 들었다.
정시은, 세건 대학교 서양사학과 졸업, 영어 성적도 좋고 경력도 있고 나쁠 건 없다. 그래도 굳이 내가 나서서 취직을 시켜줄 일도 없다 싶다. 회장 영감은 성일과 나를 두고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저울질만이 몇 년 남지 않은 여생의 최대의 낙이다. 이마에 질긴 심줄이 벌떡 서는 기분이다. 무엇보다 성가신 입방아에 오를 거리는 좁쌀만 한 것이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력서를 아무렇게나 던지고 양복재킷을 입었다.
이 정도면 어디든 곧 취직하겠지. 더구나 학교 후원을 설명할 기회까지 잡는 적극성이라면…….
정시은이라는 여자는 어쩌면 오늘 하루만도 이 이력서를 열 군데는 비슷한 방식으로 뿌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똑같이 후원에 대한 설명을 차분하게 하고 그리고 머뭇거리면서 본론을 꺼냈겠지. 그녀가 보이던 초조한 기색이나, 절망감을 깨물던 입술 따위들을 열 명도 넘게 지켜봤을 것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착잡해진다. 던져버린 이력서에 붙은 사진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렇게 표정이 다를 수 있나.
연한 핑크색 배경 때문인지 사진은 진주처럼 은근한 빛을 머금은 듯하다.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이력서가 하나 있습니다. 좀 살펴봐 주시지요.”
*
이력서를 인사팀에 넘기긴 했지만 ‘정시은’ 이라는 이름자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스러울 만큼 이후로는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여자는 취직한 후 이틀 뒤, 추가된 도서관 건물 디자인 스캔을 이메일로 첨부하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짤막한 문구를 넣었을 뿐 따로 찾아와 인사를 하여 곤란하게 만든 일도 없었다. 워낙 무관심했는지 도통 어떻게 일을 하는가에 대해서 들리는 소리도 없었다. 오늘 우연찮게도 하루에 두 번을 마주치니 괜스레 반가운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의무실 약사나 여자나 내가 들어 온지는 두 사람 모두 모르는 눈치였다. 둘 외에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비밀스런 일이라도 공모하듯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 중이었다. 좀 떨어져서 지켜보자니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네, 감사합니다.”
“사실, 이러면 안 돼요.”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여자가 머리를 조아리듯 숙였다.
“진통효과가 이걸로는 턱도 없을 텐데.”
“그래도 일반 진통제 중에서는 제일 잘 듣는다고…….”
“위장약도 같이 넣었어. 알아서 처리해볼게. 아버지한테 꼭 같이 드셔야 한다고 그래.”
약사가 안쓰럽다는 표정을 하고는 두툼한 흰 봉투 하나를 건넸다. 여자가 이쪽으로 방향을 틀려는 찰라, 나는 문밖으로 몸을 뺐다가 막 지금 도착한 듯이 다시 들어섰다. 왜 그랬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못 들은 척, 모르는 척하는 건 어린 시절부터 특기란에 기재할 수 있을 만큼 자신 있었다.
여자가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시은 씨, 어디 아파요 ”
“아, 네. 조금.”
여자가 핸드백 밖으로 비뚜름하게 나온 약 봉투를 손으로 꾹 눌러 넣었다. 어디가 라고 물어보려다가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인사말처럼 되물었다.
“본부장님은 어디 많이 편찮으세요 ”
“약간.”
“두통 있으세요 ”
시은이 눈을 맞추면서 물었다. 키 차이가 한참이라 턱을 조금 들어야 눈이 맞춰지나 보다. 이제 보니 얼굴은 동그스름한데 턱만 뾰족하다. 답을 하지 않고 쳐다보니 금세 무안한 표정이다. 재빠르게 감추기는 했지만 눈썹을 살짝 모으고 입을 오므리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경력직이든 아니든 신입들은 대체 꼭 대학 신입생같이 귀여운 구석이 있다. 슬며시 웃음이 나는 동시에 뻣뻣한 나무줄기 같이 뻗어가던 신경질이 말랑해지나 싶더니 갑자기 쉬엇, 명령을 받은 졸병처럼 일시에 몸과 마음이 탁 풀렸다.
“맞아. 나 두통인거 어떻게 알았어 ”
“아침에도 그랬는데……. 여기, 찌푸리고 계세요.”
시은이 제 미간을 손가락 두 개로 짚어 보였다. 추측이 맞아 기쁜지 눈동자가 환하다. 여자는 정말 어릿한 신입생처럼 군다.
“아픈 데가 또 있는데. 맞춰볼래 맞추면 상 줄게.”
시답잖은 농을 거니 여자가 어깨를 움츠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안 되겠네. 약사 선생님한테 조수로 채용하라고 할랬더니.”
깔끔하게 돌아서자 등 뒤에서 들릴락 말락 조그만 소리가 들렸다.
“속, 불편하시죠.”
픽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못 들은 척했다. 약사가 어제 과음하셨나요, 묻더니 위장 상태나 두통의 정도에 대해 꼼꼼하게 질문하고는 조제실로 들어갔다. 돌아서니 여태 그대로 시선을 붙박았던 시은이 놀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아픈 애 데리고 온 보호자처럼 지키고 서있기는, 아침엔 새치름하게 눈도 안 맞추더니……. 인사를 하고 가려는 걸 급히 붙잡았다.
“시은 씨.”
“네 ”
“부탁이 있는데. 점심시간에 바빠 ”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보시다시피 속이 안 좋아서. 점심도 굶어야 할 판이야.”
“제가 죽이라도 사올까요 ”
“난 파는 죽 같은 건 안 먹어. 속이 더 뒤집어지거든.”
“그럼…….”
“집에 좀 다녀올래 전화해 놓을 테니 주는 거 받아오면 돼.”
여자는 무슨 말인가 한 번 되새기듯 눈을 크게 떠서 보더니 입술을 꼭 맞물리게 다물었다. 어느새 아이 같은 순한 눈동자는 사라지고 찬바람이 쌩하게 인다. 어처구니없는 사적인 업무를 지시하는 상사를 엄하게 힐책하는 눈빛을 보는 순간 갑자기 심술이 치밀어 올랐다.
“못해줘 개인적 부탁을 하는 상사가 우스운 건가 ”
비틀린 소리를 하는 순간 위액이 솟구쳐 난 끄응, 소리를 뱉으며 배를 움켜쥐었다. 어머, 저기……. 여자가 눈을 찡그리며 올려다보았다. 많이 아파요 이마, 식은땀이에요 마치 손수건으로 이마라도 눌러줄 듯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식은땀이 나도록 많이 아프다 그러면 부탁 들어줄 건가 ”
여자는 보일 듯 말 듯 인색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택시타고 다녀와.”
지갑을 꺼내자 시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주소와 약도만 알려주시면 다녀오겠습니다.”
“그럼 시간 안에 못 와. 속 쓰려 죽겠어.”
입력을 위해 약사에게 사원증을 건네고는 휴대폰을 들어 지시했다.
“1층에 택시 불러요. 사람 하나 내려갈 겁니다.”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서있는 여자를 쳐다보면서 단축버튼을 눌렀다.
“아주머니 저예요. 하하, 안 그래도 생각나서 말이죠. 좀 챙겨주세요. 누구 보낼 겁니다.”
사원증을 호주머니에 넣자 약사가 용법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이거 한 봉지 드시면 울렁거리는 건 좀 가라앉을 거예요. 그러면 두통도 조금은 나아질 텐데, 이 초록색 알약이 두통약이거든요. 하나 먹고 안 들으면 이거 흰색 하나 더 드시구요. 두통약은 꼭, 식사 후에 드셔야 해요.”
“식사는 아무래도 소화가 잘되는 걸로 해야죠 ”
“그럼요. 따뜻한 흰 죽 같은 걸로 드세요.”
“숭늉은요 ”
“좋죠.”
“속 아프면 그것만 먹거든요. 다른 거 먹으면 계속 토하더라구요.”
어떻게 해야 하나 아직도 고민스런 표정인 여자가 들으란 듯이 쓸데없이 떠들어 대고는 금색 바탕에 무슨 환이라 한자로 적힌 약 한 봉지를 뜯었다. 동글동글 반질반질 토끼 똥같이 생긴 까만 알약들을 노려보다가 눈을 꼭 감고는 한입에 털었다.
“여기요.”
물을 찾아 두리번거릴 사이도 없이 시은이 정수기에서 받은 냉수를 내밀었다. 꿀꺽 삼키면서 말했다.
“1층 정문 앞에 모범 있을 거야.”
명함 한 장을 꺼내어 뒷면에 주소를 휘갈겨 썼다. 이건 택시비야, 수표 한 장과 명함을 같이 쥐어주었다. 의무실 밖을 먼저 나서서 걸어가는데 여자가 불렀다.
“선배님.”
“응 ”
“개인적인 부탁이라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선배님이 제게 해주셨듯이요.”
시은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스쳐 지났다. 또박또박 단정한 걸음걸이였다.
부탁 내가 부탁이라고 말했던가.
착한 얼굴로 두통 있느냐 걱정하는 다정함이나 걱정스런 눈으로 물을 건네던 따스함은 싹 지우고선 개인적 부탁을 들어주었던 선배이니 나 역시 한 번쯤은 들어주겠다, 라고 경고하는 여자가 좀 어이없게 느껴졌다.
저 여자는 어느 얼굴이 진짜인가.
차분차분 학교 후원을 설명하던 목소리, 노란 벤치를 꿈꾸는 눈동자, 비참함을 깨물어버리던 입술, 아래를 향하던 숱 많은 속눈썹, 아이 같은 검은 눈망울이나 뾰족한 턱, 그리고 부당한 화풀이를 하듯 내민 어깃장을 사무적으로 처리하는 냉정함, 어느 조각이 그녀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 잠시 생각하였다.
혹은 환하게 웃던 사진인가.
시은은 저만큼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뒤태를 봐야 해. 등은 속이지 못하는 법이거든. 우리 건일이 나중에 짝 고를 때는 뒤태가 곱고 깨끗한 각시를 골라.
건일이 각시 각시 아하, 왕할머니, 나 각시가 무슨 말인지 알아. 결혼하는 거지
그으럼, 건일이가 멋진 신랑 돼서 각시랑 결혼하는 거야.
증조모는 주름진 손으로 뺨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할미는 울 건일이 결혼하는 거도 보고 싶은데, 욕심이다. 욕심. 욕심이 과하면 안 돼.
작아지는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 건 오래된 습관이었다. 각시감을 고르는 건 아니지만, 뒷모습은 대체 앞모습이 성공적으로 숨긴 부분까지 내비치는 편이었다. 아무튼, 여자의 등은 깨끗하고 고왔다.
점심시간이 거의 다 끝날 즘 시은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문 근처에 서서 인사하더니 다가왔다. 좀 어떠세요, 들리지도 않도록 작게 우물거리다가 말실수라도 한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에 준비해드릴까요 ”
고개를 끄덕이자 펼쳐 둔 자료를 조심스레 챙겨서 옆으로 밀어두고 봉투에서 보온병과 도시락 하나를 꺼냈다. 숭늉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콧속으로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반은 낫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마시는 동안 시은은 흰 냅킨을 깔더니 수저를 놓고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그게 뭐야.”
“같이 주셨습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로 둥글둥글 빚은 찹쌀 주먹밥이다. 윤기가 좌르르 도는 찹쌀밥 속에는 간이 잘 밴 쇠고기 볶음이 들어있을 것이다. 겨자 장에 찍으면 소화가 안 되거나 입맛이 없는 날 끼니를 때우기에 그만이었다.
“너 먹어.”
“아닙니다. 제 것도 있습니다.”
“그래 ”
“사양했는데…….”
미안한 내색을 하면서 시은이 말을 얼버무렸다.
“그런데 ”
“죄송합니다. 사양했는데 같이 넣으셔서…….”
“뭘 또, 죄송하기까지야……. 배고팠겠다 ”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답하면서 시은이 도시락 옆에 뭔가를 올렸다.
“뭐지 ”
몰라서 물은 건 아니었다. 고깔모양으로 접은 흰 종이로 한쪽 모서리를 감싼 지폐였다.
“택시비 영수증과 남은 돈입니다. 본부장님.”
“너 해. 심부름 비야.”
“아닙니다.”
“점심도 굶게 했잖아. 뭐 사먹어.”
“도시락 받았습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는다.
“그건! 아주머니가 준 거고. 내가 준 게 아니잖아.”
소리를 높여 그런가 골이 지끈 다시 울렸다. 이마를 짚자 시은이 움칫거렸다.
“골 아파. 말 시키지 말고 돈 들고 나가.”
빤히 내 얼굴만 향하고 있는 눈망울 때문인지 꼭 상처받은 애만 같았다. 벌떡 일어서서 손을 잡고는 돈을 구겨서 쥐어줬다.
“버정거리는 자존심이 한 끼 밥 먹여주는 거 아니거든 ”
자리에 도로 앉으면서 머리를 뒤로 젖혔다. 우두커니 서있는 시은을 쳐다보지 않고 나가라 손짓했다.
“본부장님.”
“왜 ”
돈을 움켜쥔 손이 조금씩 떨리는 것 같았지만 시은은 마치 첫날 학교 후원을 설명할 때처럼 차분한 목소리였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 지금 돈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
“너무 필요하니까 고맙습니다 말도 못하겠고 공돈 생겼다고 기뻐하지도 못하겠어요.”
시은이 돈만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사실, 오면서 내내 그런 기대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니요, 기대했어요. 수고비라고 여기서 만 원쯤 주실까, 치사하게 그런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주시니까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비굴한 기대를 들킨 거 같아서요.”
나는 주먹으로 턱을 쓱쓱 문질렀다.
뭔가 잘못한 거 같은데 그렇다고 미안해, 할 상황은 아니지 않아 만약, 김 대리에게 똑같은 일을 시켰더라면 1,2만 원 쯤 주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도시락도 주려고 했지, 5만 원은 넘어 보이는 걸 다 주겠다고 했지, 그런데도 저 여자는 마치 치명적 공격이라도 받은 얼굴이다.
“그래서, 받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싫으면 두고 가.”
시은이 눈을 들었다. 눈물이라도 쏟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말끔하게 답했다.
“아니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시은은 비워버린 컵에 숭늉을 다시 따라놓고는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