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iting Filmography RAW novel - Chapter 178
178화. 심심하지는 않겠어
할리우드의 경우 배우의 출연료에 따라 대우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Timeless』의 출연 배우 중 몸값이 가장 높은 건, 아역으로 데뷔해 30대 초반이 된 지금까지 25년 동안 착실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은 알렌 그레이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높은 것이 바로 안시현이다.
그래서일까?
크랭크인을 위해 농장 인근에 도착하자마자 안시현은 할리우드의 차별 대우를 제대로 실감했다.
알렌 그레이에게는 트레일러 5개를 통째로 연결한 초호화 대기 공간이 주어질 예정이었고, 안시현이 그다음으로 많은 3개의 트레일러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반면 송강식과 이석재는 다른 배우들과 함께 트레이러를 이용해야만 했다.
이에 안시현은 두 배우가 자신과 함께 트레일러를 사용하기를 바랐다.
혼자서 쓰기에는 트레일러 3개는 지나칠 정도로 넓었고, 함께 대기하면서 담소를 나누는 것 또한 촬영의 즐거움 중 하나라고 생각했으니까.
“와…….”
“허허허. 역시 할리우드가 다르기는 달라.”
“어쩌면 여긴 천국일지도 몰라. 네 트레일러가 이 정도면, 알렌 그레이 트레일러는 어느 정도라는 거야?”
“뉴욕 촬영 때 트레일러에 초대받으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저야 그 자리에 없겠지만요.”
안시현의 트레일러에 들어온 송강식과 이석재는 차별 대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자신들이 이용했던 트레일러는 문자 그대로 대기실의 용도에 지나지 않았던 반면, 안시현의 트레일러는 안에서 대부분의 용무를 해결할 수 있도록 온갖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특히나 송강식을 감동시킨 건 술이었다.
냉장고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는 맥주, 냉장고 옆에 진열되어 있는 와인과 위스키.
그것들을 마시고 싶어서 군침을 흘렸다.
“촬영 전에 이거 마시면 안 되겠지? 군것질거리도 잔뜩 있네. 이거만 먹어도 배부르겠다.”
“그러면 후회할걸요. 밥차 메뉴에 랍스터 있다고 들었거든요.”
“랍, 랍스터? 할리우드는 밥차도 미쳤구나. 이러니까 다들 할리우드, 할리우드 노래를 부르지.”
촬영이 시작되기 전부터 호들갑을 떠는 송강식과 달리 안시현은 비교적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회귀 전.
최정수가 할리우드에 잠시나마 진출했을 당시 할리우드의 촬영 환경에 대해 지겹도록 들었으니까.
그때와 지금의 환경은 크게 다를 거 없었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최정수가 아니라 자신이 할리우드에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것도 주연 배우로서 말이다.
‘적응이 잘 안 되기는 하네.’
한국과는 너무 차이나는 할리우드의 촬영 환경에 당황한 것도 잠시.
안시현은 이내 새 환경에 적응했다.
기욤 뒤자르댕과 JP스튜디오가 자신에게 『Timeless』의 출연 배우 중 두 번째로 좋은 대우를 해 주는 건, 그만큼 좋은 연기를 해 줄 거라 믿어서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기대치가 낮은 배우에게는 후한 출연료와 극진한 대우가 결코 따라오지 않는다.
대우를 받는 만큼 연기를 잘하면 된다.
그리고 안시현은, 데이비드 킴을 완벽하게 연기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 * *
텍사스의 한 농장.
데이비드 킴이 담배 파이프를 손에 쥔 채 불안한 표정으로 집 주위를 걸어 다녔다. 힐끗힐끗 집을 바라보고, 문고리를 수차례 잡았다가 놓기를 반복했으며, 꼬리를 살랑거리며 호감을 표현하는 강아지 앞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집안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데이비드 킴이 다급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노파의 품에 안긴 채, 자신이 세상에 나왔다는 걸 목청껏 알리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데이비드 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오……. 이사벨, 헬렌은 어때요?”
“산모도 아이도 건강해요. 일단은 아이보다 산모부터 챙겨 줘요. 진통이 길어서 힘들었을 거예요.”
“네, 그래야죠. 당연히 그래야죠.”
데이비드 킴이 침실로 향했다.
얼굴이 땀에 흠뻑 젖은 채 지친 기색이 역력한 아내 헬렌 킴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상태였다.
헬렌 킴은 그런 데이비드 킴의 손을 잡아 줬다.
“데이비드, 우리 아이 참 예쁘죠?”
“너무 예쁘오. 천사가 따로 없어.”
“사내아이예요. 이름 지어 줘야죠.”
“알버트. 아이 이름은 알버트요.”
데이비드 킴의 아이의 이름을 말한 직후.
침대에 누워 있는 헬린 킴과 데이비드 킴을 뒤따라 들어온 노파, 노파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동시에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1분 후, 첫 번째 시간여행이 종료됩니다.
시간여행의 종료 임박을 안내하는 목소리였다.
남은 시간은 1분.
데이비드 킴은 알버트 킴에게 다가가 이마가 가볍게 입을 맞추고서, 다시 헬렌 킴에게로 다가와 침대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손을 잡았다.
“헬렌, 만약 내게 이 시간을 다시 경험할 수 있는 기적이 주어진다면, 당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소.”
어느새.
데이비드 킴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닭똥 같은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리며 시야를 가렸다.
한 번 봇물이 터진 감정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데이비드 킴은 서럽게 오열하며 남은 시간을 이용해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했다.
“나와 평생을 함께해 줘서 고맙고, 부모가 되는 기쁨을 알게 해 줘서 고맙고, 나같이 모자란 사람을 사랑해 줘서 고맙소. 내 남은 시간이 얼마일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다하는 그날까지 당신을 그리워할 거요.”
그렇게 데이비드 킴의 첫 번째 시간여행이 끝났다.
* * *
『Timeless』는 주연만큼이나 조연들의 연기가 중요한 작품이다. 주연 세 명이 시간여행을 하는 주인공을 연기하는 건 맞지만, 그 연기가 빛나려면 현재의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력이 필수다.
물론 정작 판이 깔렸는데 주연 배우의 연기가 기대 이하라면 그게 더 문제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크랭크인 당일부터 데이비드 킴의 첫 번째 시간여행을 연기하게 된 안시현의 연기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OK 사인을 낸 직후.
자리에서 일어난 기욤 뒤자르댕이 안시현을 향해 박수를 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3시간 넘게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다니, 역시 시현은 최고예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연기였어요!”
“제 요구로 인해서 촬영이 번거로워졌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죠.”
사실 데이비드 킴의 첫 번째 시간여행 신은 기존의 시나리오에서 수정된 부분이 존재했다.
이는 안시현의 아이디어로 인한 변동 사항이었다.
바로 데이비드 킴이 헬렌 킴의 출산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기다리는 걸 촬영하는 것이었다.
원래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장면부터 촬영할 예정이었지만, 안시현의 아이디어가 채택되면서 약간의 변화가 발생하게 됐다.
“아이가 태어날 걸 알면서도, 이미 한 번 겪어본 일임에도, 현재에 변화를 주지 않는 시간 여행임에도 남편이자 부모의 마음은 똑같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요. 혹시나 출산을 하다가 헬렌이 잘못되면 어쩌지, 알버트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 대사를 하지 않더라도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거예요. 이왕이면 몇 시간 동안 촬영한 뒤,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편집해도 좋지 않을까 싶고요.”
이에 기욤 뒤자르댕은 안시현의 아이디어를 채택하며 데이비드 킴이 헬렌 킴의 출산을 기다리며 온갖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무려 대낮에 시작해서 해가 진 이후까지 말이다.
꼬박 8시간.
실제로 영화에 나오는 건 몇 십 초에서 1분 내외이겠지만, 굳이 첫 번째 시간여행으로 헬렌 킴의 출산 임박 시점을 선택한 데이비드 킴의 감정을 관객들이 이해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선택지였다.
안시현이 연기를 잘해 준다면 말이다.
이에 안시현은 자신이 어째서 그런 아이디어를 냈는지를 몸소 증명해 보였다.
무려 8시간 동안 15분 촬영 후 5분 휴식이라는 강행군 속에서 한순간도 감정이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게다가 8시간 동안 끌어올린 감정을 집 안에 들어가서 진행된 촬영에서 제대로 폭발시켰다.
특히나 시간이 멈춘 이후 알버트 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헬렌 킴의 손을 잡은 채 한 대사는, 안시현이 어째서 황금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는지를 몸소 증명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집 안에서의 촬영 전.
안시현은 기욤 뒤자르댕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마지막 대사, 애드리브로 해도 될까요?”
“그 순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보겠다?”
“그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좋아요. 해 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기존 대사 가지고 다시 촬영하면 되는 거죠. 부담 갖지 말고 시현이 하고 싶은 대로 해 봐요.”
기욤 뒤자르댕의 대사가 나쁜 건 아니었다.
다만 안시현은 이왕 관객들의 심금을 울릴 신이라면, 그 순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는 좋은 선택지가 됐다.
눈물 콧물 쥐어짜며 오열하면서 내뱉은 대사가 기존의 대사보다 데이비드 킴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훨씬 더 좋았던 것이다.
안시현의 명연기 이후.
송강식과 이석재를 제외한 배우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알렌 그레이와 루카스 헤르만의 경우 함께 연습을 하며 안시현의 연기력을 두 눈으로 보았기에 선입견이 없었지만, 다른 배우들의 경우 안시현에 대한 선입견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 상태였다.
일부 배우들은 안시현을 시험하려는 듯한 오만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할리우드 출신이 아닌 동양인 배우에 대해 불편한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물론 안시현은 그런 배우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묵묵히 연기를 준비해 나갔다.
‘허세 떠는 친구들. 배우는 입을 터는 직업이 아니라 연기를 통해 증명하는 직업이라고. 억울하면 연기 잘해서 주연을 맡질 그랬어.’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오긴 했지만 말이다.
안시현이 존재감을 드러낸 이후.
“시현, 내일 낮에 트레일러에 놀러 가도 될까요? 다음 촬영과 관련해서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
“괜찮다면 저도 초대 좀…….”
“집에 좋은 와인이 있는데, 시현만 괜찮다면 내일 트레일러로 가져가고 싶어요.”
배우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안시현의 트레일러에 초대되기를 바랐다. 안시현이 트레일러 3개를 사용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시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송강식과 이석재는 자신들도 모르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렇게 쉽게 해결해 버릴 줄은 몰랐네요.”
“허허허. 그러게 말이다. 서로 융화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았는데 말이야. 하여간 난놈이야.”
“전 마지막 대사를 통째로 애드리브를 했다는 게 무섭네요. 애드리브나 집중력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서요.”
“강식아. 경쟁하되, 이기려고 들면 안 된다.”
“네.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경쟁은 경쟁에서 끝나야지 추해지면 안 되죠.”
사실 송강식과 이석재는 촬영 현장을 둘러보고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할리우드 출신 배우들이 자신들을 무시하고 있다는 게 대놓고 몸으로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 시선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충무로와 할리우드의 규모 자체가 다르고, 배역의 비중과 무관하게 자부심을 느끼는 걸 가지고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인종 차별을 하거나 촬영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다만 그들과 어떻게 친해질 것인지가 고민이었다. 여차하면 촬영이 끝날 때까지 거리를 두고, 철저하게 자신들의 연기에만 집중해야 할 수도 있다고 봤는데…….
안시현이 그것을 깔끔하게 해결해 버렸다.
촬영이 끝난 직후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 주는 것으로 말이다.
송강식은 지친 기색임에도 애써 웃으며 배우들과 대화를 나누는 안시현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미국에서의 촬영,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