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iting Filmography RAW novel - Chapter 40
40화. 이것 봐라?
『너를 부르다』의 오디션을 위해 안시현과 김진모가 방문한 곳은 JM액터스 사옥이었다. 『너를 부르다』가 JM액터스에서 자체 제작하는 드라마이기 때문이었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드라마와 예능에서의 수익 모델이 변화한다. 자본금에 여유가 있는 연예기획사에서 제작에 나서는 경우도 더러 있다.
다만 지금은 아니다.
외주 제작이라고 해 봐야 방송사에서 제작비를 100% 받는 하청 구조인 시대다.
그런 상황에서 JM액터스는 드라마 자체 제작이라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이때 김진석 대표의 역량이 빛을 발했다.
배우 때부터 꾸준히 쌓아 온 탄탄한 인맥을 바탕으로 투자사들을 설득했고, MBS와의 협의하에 편성 일정까지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다.
더욱 놀라운 건, 이 모든 과정을 『나는 간첩입니다』 촬영 종료일에 곽상필 감독과 대화를 나눈 다음부터 진행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대본이야 JM액터스와 계약한 드라마 작가가 일찌감치 써 오고 있긴 했지만, 불과 몇 달 사이 방영을 확정할 정도로 성과를 낸 건 김진석 대표의 사업적 역량이 총동원된 덕분임이 분명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JM액터스는 드라마 방영을 통해 얻게 될 수익의 일부를 MBS에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김진석 대표는 만족했다.
외주 제작이 곧 방송사의 하청과 일맥상통한 분위기 속에서, 다소 손해를 보지 않으면 자체 제작 드라마는 편성을 받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나마도 MBS 드라마국 국장과 호형호제하는 김진석 대표이기에 일부 손해를 보는 선에서 거래가 성사된 거다.
게다가 수익 배분율과 상관없이 일단 시작을 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봤다.
지금이야 굽히고 들어가는 입장이지만 드라마가 대박이 나면 그때는 방송 3사가 고개를 숙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절반 이상의 배역은 이미 확정했다. 실력파 스태프들까지 준비됐어. 이진수 역을 포함해, 몇몇 배역만 제대로 캐스팅하면 드라마는 무조건 흥행한다.’
김진석 대표는 오디션을 통해 배역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배우들을 발굴해내길 바랐다.
그렇게 시작된『너를 부르다』의 오디션.
“긴장되냐?”
“긴장은 무슨. 빨리 오디션 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려 죽겠다. 그리고…… 오디션장에 나타난 날 보고 아빠가 무슨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흐흐흐.”
김진모가 키득키득 웃었다. 놀랄 김진석 대표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정작 안시현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어림도 없는 소리.’
만약 내기를 한다면, 안시현은 김진석 대표가 놀라지 않는다는 쪽에 전 재산을 걸 자신이 있었다.
뭐…… 그래도 다행이었다.
오디션을 앞두고 있음에도 김진모는 긴장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한시라도 빨리 준비한 연기를 보여 주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역시나 김진모는 무대 체질이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56번 배우님,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마침내 김진모의 차례가 다가왔다.
“갔다 올게.”
“잘하고 와라.”
“걱정하지 마셔. 후딱 끝내고 올게.”
김진모가 넘치는 자신감을 마음껏 드러내며 오디션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연습실로 들어간 순간.
안시현이 발길을 돌려 1층으로 내려갔다. 이내 로비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정상과 만났다.
캔음료를 건네며 박정상이 물었다.
“진모 들어갔어?”
“네. 방금요.”
“그 녀석 긴장하지 않았을까 걱정되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 앞에서 연기하는 거잖아. 나라면 부담돼서 준비한 걸 반도 채 못 보여 줄 거 같아.”
“긴장은커녕 들떠 있던데요.”
“응? 들떠 있다고?”
“네. 자기가 오디션에 참가한 걸 보고 대표님이 놀랄 거라 기대하더라고요.”
“허…….”
박정상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안시현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몇 차례 눈을 껌뻑거리기까지 했다.
“……단순한 건지 순진한 건지 모르겠다. 대표님이 놀라실 리가 없잖아.”
“아하하하. 둘 다일걸요.”
“대본 가져가자마자 대표님께 보고 올린 거 알면 화내려나? 매니저 바꾸지는 않겠지?”
“맛있는 거 사 주면 바로 풀릴걸요?”
“저녁에 삼겹살 먹으러 가자. 오늘은 형이 쏜다.”
“오. 삼겹살 좋죠.”
김진모가 『너를 부르다』의 대본을 가져간 당일.
박정상은 김진석 대표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그리고 김진모가 오디션에 참가해도 문제가 될 게 전혀 없다는 확답을 받아 냈다.
김진석 대표가 놀랄 거라는 김진모의 바람은, 애석하게도 그가 대본을 가져간 날부터 불가능했던 것이다.
* * *
이진수 역 오디션 56번 참가자.
김진모가 오디션장에 들어왔음에도 심사위원들 중 그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아버지인 김진석 대표마저도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제야 김진모는 깨달았다.
‘정상 형이 말했구나! 와! 배신자!’
그렇다고 당황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놀랐으면 했던 건 소소한 재미를 위해서였지,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이진수 역에 다른 배우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연기로 캐스팅을 결정짓는다. 자유연기까지 갈 필요조차 없게 만들 거야.’
이진수 역의 경쟁률은 311대 1.
자유연기까지 가지 않고 캐스팅을 확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김진모는 자신이 있었다.
제아무리 다른 배우들이 좋은 연기를 펼쳐도, 그 이상의 연기를 보여 주고 압도할 자신이 말이다.
그러기 위해 비장의 카드까지 준비해오지 않았던가.
‘깜짝 등장으로 놀라게 하지 못했다면 연기로 놀라게 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긴장한 기색이 눈곱만큼도 없는 김진모를 바라보며 김진석 대표가 물었다.
“56번 참가자, 어떤 신을 준비해 왔습니까?”
“신 5입니다.”
이진수 역에 할당된 지정연기 신은 도합 셋.
그중 김진모가 선택한 건 신 5.
인기를 끌지 못한 아이돌 그룹의 리더 이진수가 매니저로부터 팀의 해체 소식을 전해 들은 뒤 반지하로 이사,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서 눈물을 흘리는 신이다.
“준비되면 시작해 주세요. 대사 맞춰 드릴 테니.”
“감사합니다. 후우우…….”
몇 차례 심호흡을 한 김진모는 별다른 예고 없이 곧장 연기를 시작했다.
“……매니저 형.”
단 네 글자.
첫 대사부터 김진모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묻어났다.
동시에 김진석 대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것 봐라?’
사소하지만 큰 변화.
김진석 대표는, 아들이 오디션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왔는지 대번에 파악했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팀 해체라니요?”
오디션을 준비하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솟구치는 호기심을 애써 억누르며 김진석 대표가 대사를 받아 줬다.
“그럼 어떻게 하냐. 사장이 하루아침에 해외로 돈 다 빼돌리고 야반도주했는데.”
“그럼 저는요? 대표님 믿고 멤버들 다독이면서 4년 동안 죽어라 노력한 저는요? 대표님이 조만간 주겠다고 하셨던 제 정산금은요? 형, 전 어떻게 해야 돼요?”
“대표 자식 잡으면 받아 낼 수 있겠지. 하아. 월급 조금씩 밀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개새끼.”
“이렇게…… 이렇게 끝낼 순 없어요. 이건 아니에요.”
이진수가 붉어진 눈시울로 입술을 악문 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울컥하는 감정을 꾹꾹 짓누르며 어렵사리 말을 이어 나갔다.
“소울, 계속 활동할 거예요.”
“무슨 수로? 회사는 문 닫았고, 대표 새끼는 도망갔어. 정철이는 고향 내려가서 오리 키운다고 이미 짐 싸서 숙소 나갔고, 다른 멤버들도 그만둔다더라.”
“…….”
“인정하고 받아들여. 소울은 해체야. 각자 살길 알아보자. 오디션 볼 거면 연락해라. 내가 아는 연예기획사라도 다리 놔줄 테니까.”
소울.
인기 아이돌 그룹들 속에서 아등바등 생존해 나가던 4년 차 아이돌 그룹이 해체됐다.
소속사 사장이 정산금을 해외로 모두 빼돌리고서 하루아침에 야반도주했고, 멤버들은 연예인 활동을 포기했으며, 매니저는 새 직장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홀로 남은 리더 이진수는…….
“이대로는 포기 못 해.”
재도전을 선택했다.
장면이 전환되며 허름한 반지하.
이진수는 숙소를 나와 구한 월 15만 원 집에서 부모님과 통화를 했다.
“진수야, 뉴스에 나온 야반도주 사건…… 그거 네 회사 이야기 아니니?”
“아, 그거 봤어요? 걱정하실까 봐 일부러 말씀 안 드렸는데, 다행히 큰 문제없을 것 같아요. 저 새 소속사랑 곧 계약할 거예요. 그룹이 아니라 솔로에요. 대표님이 절 좋게 생각해 주시더라고요.”
“그럼 다행이다만……. 잘하고 있는 거지?”
“그럼요. 다 잘되고 있어요.”
거짓말이었다.
소속사가 망한 뒤 수차례 오디션을 봤지만 모두 고배를 마셨다.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새 소속사를 찾고 있지만 쉽지 않았다.
그저 그랬던 아이돌 출신의 20대 중반 가수는 소속사들의 관심 대상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몸이 안 좋은 어머니가 걱정하실까 봐, 마음고생해서 몸이 나빠지실까 봐 말을 지어냈다. 하나뿐인 아들 걱정에 어머니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엄마는 우리 아들 믿어. 어디에 내놔도,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잘할 거야.”
이진수가 울컥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자신을 믿는다고 말해 주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가수는커녕 어떻게 하면 식비를 줄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고 속상했다.
좋은 가수가 되고 싶었다.
TV에 나오는 저들처럼, 수많은 팬들에게 사랑받고 무대의 중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었다.
하나 모두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경쟁에서 낙오된다.
이진수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빌며 겨우 입을 열었다.
“응, 엄마. 나 연습하러 가야 하니까 끊을게요. 추석에 바빠서 못 내려갈 거 같아요.”
허겁지겁 어머니와의 통화를 끝낸 직후, 이진수의 휴대폰에 오디션에 불합격했다는 문자메시지가 도착한다.
“끄윽…….”
이진수가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양손으로 거칠게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꾹꾹 억눌러놨던 울분이 결국 터져 나왔다.
* * *
김진모의 감정 표현은 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철저하게 감정을 절제하며 의도적으로 필요에 따라 조금씩 드러내는 정도에서 그쳤다.
마지막 순간 눈물을 흘릴 때마저도 과하지 않았다. 감정 표현에 강점이 있는 배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였다.
한데…….
“방금 그거, 메소드였죠?”
“그런 것 같네. 역시 연기 잘한다니까.”
“지금껏 보여 준 연기 스타일과는 달라서 혼란스럽네요. 솔직히 눈물콧물 쏙 빼는 감정 표현에 중점을 둘 거라 생각했거든요.”
“전 오히려 그래서 신선한데요? 신 5는 실패한 가수의 밑바닥을 드러내야 하는 신이잖아요. 메소드를 택했기에 더욱 표현이 잘된 것 같아요. 콧등이 시큰한 정도인 대신, 소름이 돋았어요. 그럼 성공한 거 아닐까요?”
“동의해. 아마 기존 스타일대로였다면 감정 표현은 잘됐겠지만 다른 부분들이 아쉬웠을 거야.”
“흡사 안시현 배우를 보는 것 같았어요.”
“그러게요. 언제 이런 걸 또 준비했대? 자신만만하게 이진수 역을 노리는 이유가 있었네.”
지정연기를 끝마친 김진모가 오디션장에서 나간 뒤, 심사위원들은 김진모의 연기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극찬을 하는 게 당연했다.
김진모는 그들의 오디션 전 예상을 벗어나 기존과는 전혀 다른, 안시현의 스타일과 유사한 메소드 연기를 보여 줬으니까.
『너를 부르다』의 신 5는 실패한 한 가수의 밑바닥 일부를 드러내야 하는 신이다. 안시현의 스타일로 연기해야 표현이 극대화된다고 봐야 한다.
김진모는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메소드 연기를 보여 줌으로써 해답을 제시했다. 실패한 가수의 내면 심리를 완벽한 몰입과 절제된 감정을 통해 제대로 표현해 냈다.
자연스러움을 밑바탕에 둔 메소드 연기.
연기 스타일의 변화.
말로야 쉽지,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다. 어설프게 시도했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김진모가 그것을 해냈다. 22세의 나이에 말이다.
“대표님도 한 말씀 하시죠?”
“흠흠.”
본부장의 말에 김진석 대표가 헛기침을 했다.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예상보다 성장세가 빠르네. 벌써 연기 스타일에 변화를 주고 그럴 듯하게 성공할 줄은 몰랐어. 뭐, 그래 봐야 아직 애송이일 뿐이니 다들 너무 치켜세우지 마.”
“대표님…….”
답을 들은 본부장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김진석 대표를 바라보았다.
“다음부터 그런 말을 할 때는 입이라도 가리세요. 표정은 진지하려고 하는데, 입꼬리가 올라가니까 감정을 숨기질 못하잖아요.”
표정은 진지해 보이려 노력하는데, 입꼬리를 자꾸 씰룩거렸다. 예상치 못한 아들의 눈부신 성장세에 좋아하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헛기침을 해 보아도, 애써 근엄한 표정을 지어 봐도 그놈의 입꼬리만큼은 참으로 정직했다.
“어허. 이 친구야, 내 입꼬리가 뭐 어쨌다고 그래?”
“에휴. 평소에는 포커페이스면서 진모 이야기만 나오면 왜 이렇게 표정 관리가 안 되세요. 왕년의 국민배우 타이틀 내려놓으셔야 되겠네.”
“……좋은 걸 어떻게 하냐.”
김진석 대표는 오디션이 끝나자마자 아들바보로 되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