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 the Dungeon! RAW novel - Chapter 49
48화 – 상실
용훈은 만변자의 피부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제 겨우 반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마치 평생을 함께했던 것 같은 기분. 아마도 언제나 든든하게 그를 지켜줬기 때문이리라.
잃어 봐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했던가.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야말로 그를 ‘전능’하게 만들어주는 이 공간이 아니었다면, 지난 24시간은 아마 지옥이었으리라.
[3. 2. 1. 주인-]“됐다!”
휙! 마음이 급했던 그는 손이 닿자마자 만변자의 피부를 변형시켰다. 휘리릭, 검은 바람이 불더니 그의 옷차림이 단숨에 바뀌었다.
“오빠.”
“응?”
“나랑 있을 때도 얼굴 가리고 다닐 거예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익숙한 뱅가랭의 코스튬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아아, 미안. 바꿀게.”
휘릭. 검은 후드와 복면, 가죽재킷에 엔지니어드 진이 화려한 옷차림으로 바뀌었다.
양수영은 그 모습이 꼭 TV에서 자주 보는 아이돌의 패션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풉.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렇게 하면 좀 어려 보일까 싶어서. 별로야? 바꿀까?”
쑥스러워진 용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에요. 고딩 같고 좋네요. 누나라고 부를래요?”
“됐거든.”
피식 웃어버린 용훈이 유리문을 드륵 열었다.
“그럼. 나갈까?”
“가요.”
두 사람의 손이 하나로 합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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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두 사람은 어둠에 잠긴 텅 빈 도시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을 제외하면,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양수영은 불안한 듯 용훈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사실 더 불안한 건 용훈이었다.
‘자비스. 왜 아무도 없는 거야?’
[와쳐 프로토콜이 이 구역의 모든 인간을 와쳐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주인님은 와쳐로 변한 그들을 모조리 붙잡아 인스턴스 내로 데려가셨죠.]사실이었다. 그는 단숨에 그들을 모두 데려가기 위해 그들이 한곳에 모이도록 유인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불길한 느낌을 다 설명할 수 없었다. 이것은 마치···. 종말 이후의 세상에 홀로 떨어진 기분이지 않은가.
[그것은 이 지역에 신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격 스킬인 시공강탈은 예상보다 더욱 강력했습니다. 와쳐 프로토콜을 끌어당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 구역 내에 산재해있던 신력까지 모조리 빨아들여 버린 것입니다.]‘그렇구나···. 그런데 뭔가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네. 신력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황폐한 느낌이 들다니···.’
분명 눈앞에 보이는 도시는 화려한 밤의 옷을 입고 있었다. 네온사인이 번쩍였고 커다란 간판이 골목을 밝혔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황폐했다. 그것이 더더욱 큰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종말 이후의 세상에 홀로 울려 퍼지는 피에로의 녹음된 웃음소리 같달까.
[이동하시지요. 메인 시스템이 이 지역으로 추격대를 파견할 것입니다. 또한, 인간들도 움직이겠지요. 그 전에 자리를 옮기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그래. 알았어.’
용훈은 양수영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 가자.”
두 사람은 적막이 내려앉은 화려한 도시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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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시공강탈의 딜레이는 시공강탈로 만들어낸 시간의 일그러짐으로 회복시킬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용훈은 현실에서 하루 정도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다음날.
눈을 뜬 용훈은 신격 스킬의 사용이 가능해졌음을 깨달았다.
‘자비스. 준비됐어.’
‘잠시만. 좀 긴장되는데. 차원 밖으로 나가되 완전히 튕겨 나가서도 안 된다, 차원의 표면에 멈춰 서서 새틀 하우스를 설치한다. 이게 다지?’
[그렇습니다.]‘후. 머리로는 알 것 같긴 한데···. 과연 잘 될까 걱정되네.’
[잘하실 겁니다. 정 걱정되시면 제가 팁이라도 하나 드릴까요.]‘어, 그래. 줘봐.’
[이전에 경험하셨던 메인 시스템 내부를 떠올리십시오. 그때 주인님은 분명 차원의 경계를 보셨습니다.]‘그랬지. 하지만 거긴···. 우주의 끝이었다고. 너무나 멀단 말이야.’
[주인님, 그건···.]‘알아, 알아. 현실의 거리와 차원의 거리는 다르다는 거.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단 말이야.’
[주인님. 쉽게 생각하십시오. 우주가 아무리 넓더라도, 그것은 메인 시스템에 속한 시공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리고 주인님은 그 대단한 메인 시스템에게서 시공을 훔쳐낼 수 있지 않습니까.]‘으음···. 그건 그렇지.’
[생각해보십시오. 주인님께서 저번에 펼치셨던 시공강탈은 반구형을 띄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시공강탈의 형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때는 그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와쳐를 해치우고 싶었을 뿐이었다.
‘글쎄, 모르겠는데?’
[그것은 반구형이 가장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와쳐를 시공강탈의 영향권 아래에 놓는 것에 말입니다.]문득 엷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설마, 자비스. 내가 시공강탈의 형태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소리야?’
용기가 솟았다. 자비스의 말대로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좋아. 고마워, 자비스.’
[무슨 말씀을.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용훈은 침대맡에 걸터앉아 천사 같은 얼굴로 잠든 양수영의 코를 간질였다. 몇 번 코를 비비던 그녀는 반쯤 뜬 눈으로 용훈을 보고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정말···. 괜찮겠어?”
그의 물음에 부스스한 핑크빛 머리칼의 여신이 환히 웃는다.
“그럼요.”
깃털 같은 그녀의 손길이 용훈의 귀밑을 간질였다.
“같이 가자고 해줘서 고마워요. 저는···. 오빠가 그냥 훌쩍 가버릴 거라고 생각해서···.”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에서 작은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래. 그녀는 평생에 걸쳐 사람에게 상처를 받아왔었지. 나 역시 그들과 똑같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했을지도 몰라.
용훈은 일어선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처음에는 깜짝 놀란 듯 몸을 빼더니 이내 그녀가 머리를 기대왔다.
“걱정 마. 너 없이는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나직한 그의 목소리에 그녀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슬며시 용훈을 밀어내며 말한다.
“잠시만 기다려요. 준비하고 올게요.”
“지금도 이쁜데. 그냥 가도 돼.”
“안돼요.”
파우치를 챙겨 욕실로 들어가던 그녀가 걸음을 멈춘다. 발끝으로 바닥을 문지르던 그녀가 수줍게 말을 꺼낸다.
“우리···. 첫 우리 집이잖아요.”
우리 집. 그녀와 나, 둘만의 집. 그 말이 용훈의 가슴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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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그녀는 여신도 꾸미면 더 예뻐진다는 것을 온몸으로 웅변하며 욕실을 나섰다.
용훈이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코를 비튼다.
“그만 봐요. 닳겠어요.”
“어, 어. 그래, 알았어.”
말을 마치자 그녀가 안겨온다. 용훈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그녀는 양팔로 용훈의 목을 둘렀다.
그녀의 몸에서 희미한 떨림이 느껴진다. 그녀도 아는 것이다.
지금 그들이 가려고 하는 곳이 어떤 곳인지. 얼마나 멀고 얼마나 외로운 곳인지.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따라와 주는 것이다.
용훈은 그녀의 허리를 안은 팔에 꽉 힘을 주었다. 그녀의 떨림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준비는 끝났다.
‘자비스. 간다.’
[알겠습니다.]후. 짧은 한숨. 번득이는 눈빛. 그리고 의지의 발동!
번쩍!
호텔의 창밖으로 눈부신 빛이 치솟았다. 사납게 끓어오른 신력이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 사방으로 뻗치고 있었다.
‘안돼! 모이란 말이야!’
용훈은 이를 악물며 폭발 직전의 신력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찰흙으로 모양을 빗듯 그것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가늘게. 길게. 뾰족하게. 좋아, 할 수 있어.’
부르르, 난폭하게 날뛰던 신력이 목줄이 채워진 듯 그의 의지를 따르기 시작했다. 서서히, 하지만 꾸준히 모여든 신력이 드디어 형태를 이루어냈다.
와장창! 유리창이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동시에 플래시 라이트처럼 안광을 번득이는 남자 둘이 안으로 짓쳐들었다.
‘뭐, 뭐야!’
[와쳐입니다! 이렇게 반응이 빠를 수가···. 설마 스토커 모드로 실행된 건가?]용훈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는 지금 폭발 직전의 신력을 붙들어두는 데 모든 힘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여기서 멈춘다면 시공강탈은 실패한다. 이미 신력은 상당히 소모된 상황. 여기서 실패한다면 다음 시공강탈은 언제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5초만! 아니 3초라도! 막을 수 없어?’
용훈은 자신이 듣기에도 황당한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을 듣고 움직인 것은 자비스가 아니었다.
스릉! 어느새 플립사이드 러닝을 사용해 용훈의 팔을 벗어난 양수영이 붉은 대검, 크림슨 타이드를 꺼냈다.
찰나의 순간, 양수영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시간을 벌어볼게요.’
안돼! 용훈은 비명을 질렀다. 할 수만 있다면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시공강탈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와쳐에게 이미 노출된 상태에서 시공강탈마저 잃는다면 더이상 살아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후웅! 그녀의 칼이 두 명의 와쳐를 향해 날았다. 와쳐들은 어렵지 않게 그녀의 칼을 받아냈다. 겨우 그것만으로도 양수영의 몸은 위태롭게 흔들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됐어!’
시공강탈이 완성되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차원벽을 뚫어낼 무적의 바늘이 되어 있었다.
‘수영아!’
용훈은 비명처럼 양수영을 불렀다. 양수영은 곧바로 용훈의 의지에 반응했다. 바람처럼 몸을 돌린 그녀가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순간 공간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용훈을 중심으로 360도 전방위의 공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며 찌그러졌다.
양수영은 미친 듯이 바닥을 박찼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아니, 그녀가 발악하면 발악할수록 그는 그녀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수영아! 안돼, 수영아!’
용훈은 시공강탈의 강철같은 손아귀 안에서 미친 듯이 날뛰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신의 창이 된 시공강탈은 전력으로 차원벽을 뚫고 있었다.
콰직!
순간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멍해진 용훈의 눈에 핏물이 뚝뚝 흐르는 새하얀 손이 들어왔다. 그것은 그녀가 뱅가랭과 커플룩이라며 좋아하던 검은 후드티를 찢고 튀어나와 있었다.
서걱. 크리스탈 같은 염동력의 칼날이 그녀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아름다운 핑크빛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졌다.
‘수영아아아아아!’
용훈은 어느새 세상의 끝처럼 멀어진 그녀를 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팟.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