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te 1 RAW novel - Chapter 11
11. 오래된 기억들
수연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내려 달라고 했다. 태산은 운전석에 앉아 둥글게 굽은 흙길을 올라가는 수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엄지와 검지를 벌려 본다. 한 뼘이었던 수연이 반 뼘, 다시 반의 반 뼘. 수연은 점점 작아지다 사라졌다.
나무 그늘 아래 차를 세운 뒤, 태산은 시트를 젖히고 뒤로 몸을 눕혔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다. 투명한 선루프 위로 팔락팔락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태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토요일 2시 괜찮아?”
너와 내가 한 팀이 되었고, 중간고사가 오기 전에 리포트를 써야 하며, 중간고사는 이제 1주일이 남았으니, 이번 주 안에 연극을 보고 다음 주 중에는 리포트를 써야 한다고. 차분히 설명을 마친 수연이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고는 물었다.
“어……. 주말은 아르바이트 가야 해서.”
태산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일요일 저녁은?”
“일이 늦게 끝날 거라.”
정확히는 늦게 끝나는 게 아니라 당진에서 올라오고 나면 늦은 시간이 될 거였다. 주말에 큰딸 결혼식이 있어 쉬어야 하는 홍씨 아저씨를 대신하기로 벌써 이야기를 해 놓은 상태였다. 수연이 한쪽 입술을 깨물더니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평일은 널널한데. 월, 화, 수, 목, 금, 아무 때나. 아침, 점심, 저녁.”
수연은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금요일 2시 반에 혜화역에서 만나.”
“어, 그래.”
“그럼 금요일에 보자.”
볼일은 다 보았다는 듯 무심하게 돌아서는 여자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쏴아아 바람이 불었던 숲의 소리까지도. 태산은 그 장면을 오래오래 기억했다.
연극은 재미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재미있었던 것 같았다. 허삼관이 피를 파는 이야기였는데, 사람들은 자주 웃음을 터트렸고, 수연도 몇 번인가 웃었으니까.
태산은 말하자면,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와 웃으면 한 박자 늦게 웃고, 사람들이 우르르 박수를 치면, 한 박자 늦게 박수를 쳤다. 정신을 차려 보면 멍하니 얼이 나간 채로 앉아 있는, 신종 바보가 거기 있었다.
늦은 오후, 연극이 끝난 후에는 패스트푸드점 2층에서 치킨으로 이른 저녁을 먹었다. 내용을 잊기 전에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며 정리를 해야 한다고 수연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7시까지는 과외를 하러 가야 하니, 눈앞의 패스트푸드점이 좋겠다고 말을 해서 태산은 그저 고개만 주억거렸다.
수연은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비스킷 두 개를 시켰다. 한여름에 뜨거운 커피도 의문이지만, 비스킷이라니. 치킨으로 유명한 패스트푸드점에서 고작 비스킷을 시키는 수연이 신기하고도 이상했다.
문득 형주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지방에서 올라와 과외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고 있다던. 혹 치킨 가격이 부담스러워 그러는 건가 싶어, 태산은 커다란 통으로 나오는 제일 큰 치킨 세트를 시켰다.
사각사각. 수연이 샤프펜슬로 노트에 적는 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을 했다. 연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강단 있는 글씨도 보기 좋았다. 그리고 차분히 가라앉은 눈동자가 자신을 보면 말문이 막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목소리.
살짝 낮은 목소리가 늦가을 내리는 빗방울 같았다. 태산의 마음 바닥에 물처럼 고이더니 이내 한 방울 한 방울이 둥글게 파문처럼 퍼졌다.
그래서 태산은 대체로 멍하니 있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수연이 물으면 어, 저, 그, 따위의 말을 하며 네 생각이랑 같아, 라는 멍청한 대답만을 하면서.
이야기가 끝나고 패스트푸드점을 나오면서 태산은 고스란히 남은 치킨을 포장하여 수연에게 내밀었다. 이걸 왜 자신에게 주는지 의아하다는 눈동자로 수연이 태산을 보았다.
“어, 그게 그, 치킨이.”
내가 왜 이걸 얘한테 내밀었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맛있어서.”
수연이 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번 먹어 보라고.”
싱거운 말에 수연이 피식 웃었다. 그때 살랑, 무언가 태산의 마음으로 불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나 치킨 별로 안 좋아해.”
“아.”
짧게 말한 뒤, 태산은 고개를 갸웃했다. 세상에 어떻게 치킨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 그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그냥.”
태산이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을 짓자, 수연이 웃었다. 살랑, 다시 한 번 무언가 불어온다. 아주 많이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꾸만 명치 부근이 시큰거렸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멀미라는 것이 이런 걸까 생각했었다.
자꾸만 시큰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을까 해서, 태산은 크게 숨을 마시고 천천히 뱉어 보았지만 별로 소용은 없었다.
“이거.”
지하철 개찰구 앞에서 수연이 가방을 뒤적여 책 한 권을 내밀었다. ‘허삼관 매혈기’. 연극과 동일한 제목의 책이었다.
“읽고 월요일에 돌려줘.”
“월요일에?”
“주중에 시간 된다고 했었지? 월요일 3시 10분에 학생 문화관 식당에서 보자.”
한 손에는 치킨 박스를, 한 손에는 책 한 권을 들고 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당행 열차가 들어오는 쪽을 향해 걷는데, 수연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나는 이쪽이야.”
“어, 그래.”
“월요일, 잊지 말고.”
“응.”
“월요일 아침에 문자 한 번 보낼게.”
태산이 영 미덥지 않은지 수연은 여러 번 확인을 하며 반대편 개찰구로 나갔다. 수연이 계단을 내려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태산도 계단을 내려왔다.
태산은 승강장에 섰다. 열차가 지난 역을 출발했다는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반대편 승강장에 수연이 보였다. 태산을 보고는 흐리게 웃는다. 살랑, 불었던 바람이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그때 삐리리리, 열차가 들어온다는 방송이 들려왔다.
수연을 가리며 열차가 들어왔다. 문을 활짝 열어 태산에게 어서 타라 말을 한다. 알람음을 울리며 곧 열차 문이 닫힌다고도 했다. 계단을 황급히 뛰어내려온 사람들이 급하게 문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태산을 두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열차 문이 닫혔다.
천천히 움직이던 열차에 점점 속력이 붙었다. 마지막 칸이 역을 빠져나갈 때는 눈도 뜨지 못할 만큼 세차게 바람이 불었다. 태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맞은편을 보았다. 수연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린다. 피할 겨를도 없이 사랑에 빠져 버린 순간이었다.
* * *
빠바바밤. 빠바바밤.
태산의 핸드폰에서 운명 교향곡이 울려 퍼졌다. 태산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며 핸드폰을 잡았다. 걸려 온 전화의 주인공은 형주였다.
– 어이.
“어이.”
– 뭐 하냐? 서울이야?
“아니. 조치원.”
– 현장?
“응. 왜?”
– 왜는. 주말에 잠깐 얼굴 보려고 그랬지. 나 다음 주에 들어가잖아. 반년은 지나야 다시 들어올 텐데.
대학에 진학하면 글씨라고는 한 글자도 보지 않겠다던 형주는 타고난 모범생 정신을 버리지 못하고 제법 꾸준히 공부를 하더니 대학원에 진학을 했다. 대학원에서 만난 여자친구와 결혼을 하고, 나란히 유학을 가서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
“아주 가는 것도 아닌데 뭐. 다음에 보면 되지.”
– 정 없는 자식.
“형주야.”
– 왜 인마.
“나 누구 만났게?”
– 누구?
형주의 물음에 태산은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형주가 감을 잡았는지 왁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 너 인마 너, 여자 생겼지? 누구냐, 어?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야?
이번에도 태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형주가 펄쩍 뛰는 소리가 들렸다.
– 걔구나, 걔. 그때 왜, 태은이 과외했던. 그 조치원, 복숭아 잔뜩 줘서. 왜 있잖아. 나한테 찾아와서 말했던 애. 이름이……. 이, 뭐였는데. 이……서? 이……수?
“이수연.”
– 그래! 이수연! 이수연, 맞지?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배은망덕한 놈이 말이야. 미안한데 좋아하게 되었다고. 그랬냐 안 그랬냐.
형주에게 수연은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잊힌 존재인가 보다. 하긴, 수연과 연극을 보고 난 뒤 당진에 내려가 주말을 뜬눈으로 새우고 찾아갔을 때도 그랬었다.
수연과 계절 수업이 같아 과제를 함께하게 되었다고 말을 했을 때, 아 그래? 간단히 대답을 하더니 자신의 말을 잘 들어보라며. 이번엔 진짜 여자친구가 생길 것 같다며. 영어교육학과 선배 누나인데, 정말 이런 마음이 드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했었다.
“그랬지. 넌 그때 다른 여자한테 푹 빠져서 온통 그 얘기만 했고. 그거 내가 지현이한테 다 말해도 되나?”
– 야, 하하하, 왜 이러냐. 말할거리가 뭐 있다고.
조금 당황한 형주의 목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대학 때 네가 쫓아다녔던 여자가 하나, 둘, 셋……. 여덟에 아홉하고도 열. 열 명도 넘지, 아마?”
– 떽! 쫓아다니다니. 그냥 마음으로 살짝, 참 괜찮구나 생각한 것뿐이라고. 너 지현이한테 입도 뻥끗하지 마라. 내 처음과 끝은 전부 송지현 하나뿐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학 내내 이 여자, 저 여자 마음 앓이만 할 뿐 연애는 시작도 못 해 본 형주는 어이없게도 초등학교 동창이자 원수였던 송지현과 사랑에 빠졌다. 지구상에 여자가 송지현 하나만 남는다 해도 절대 안 좋아할 거라고 큰소리를 뻥뻥 치더니, 아이를 둘씩이나 낳고 잘만 살고 있다.
“아무튼 주말엔 못 올라간다고.”
– 자식. 1년 만에 만나는 베프보다 여자가 더 중요하다 이거지? 아, 근데 수연이? 수연 씨? 뭐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네가 좋아했던 거 알긴 해? 너 기억 못 하는 거 아니야? 그때 그냥 흐지부지 끝났지 않았나? 둘이 사귀었던가?
기억을 더듬는 형주의 말이 길어졌다. 그 후의 일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 제일 먼저 형주를 찾아가는 것으로 혼자서 시작한 마음이지만, 그 중간과 끝은 알리지 않았다. 알리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알릴 필요도 없이, 흔히들 말하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던 사이였기 때문에.
– 그래도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다시 만나다니. 잘해 봐라. 어? 너 인마 나한테 누구 좋다고 한 거 처음이었잖아.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렇게 굴지 말고 뭔가 딱. 꽉. 똬합똽똽똽! 어? 알아들었냐?
기합이 팍팍 들어간 형주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이렇게 응원을 해 주다니, 고마운 마음에 슬그머니 장난을 치고 싶어진다.
“잘해 보려고. 아, 맞다. 근데 결혼해서 애가 둘이더라고.”
– 헐. 진짜?
얼이 빠졌는지 형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다급하게 말했다.
– 야, 안 된다. 안 돼. 너 인마 불륜은 안 돼!
“안 돼? 왜?”
선루프 위로 떨어지는 벚꽃잎을 바라보며 태산은 형주를 놀렸다. 심각한 목소리로 되묻자, 수화기 너머 형주가 당황하며 대답한다.
– 마, 그건 당연한 거지. 와, 얘 좀 봐. 큰일 날 놈이네. 야, 너 당장 올라와. 나 없는 사이 무슨 물이 든 거야.
“농담이다, 인마.”
– 진짜? 진짜 농담이야?
“어. 농담이야.”
– 진짜지?
“그래.”
– 와 씨, 나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야, 내가 노파심에 말하는 건데 불륜은 진짜 안 돼. 알았어? 진짜 그럼 우리 우정은 끝이야.
“여자친구 쫓아서 유학까지 간 주제에. 네게 우정 운운할 자격이 있던가?”
– 나는 참사랑이니까 그래도 되지. 그치만 불륜은 안 된다고. 알아들어?
어지간히 걱정이 되나 보다. 농담이라고 하는데도 형주는 몇 번이나 안 된다고 강조에 강조를 하고 있었다.
“은근 섭섭하네. 넌 내가 불륜이나 저지르고 다닐 놈으로 보이냐?”
– 아니, 그게 아니라. 야. 태산아. 솔직히 니가 누구 말을 들어 처먹어야지. 유부녀든 뭐든 마음먹으면 불도저처럼 밀어붙일까 봐 내가 아주 불안해 죽겠다. 제발 정상적인 여자를 만나다오. 진짜 결혼 안 한 거 맞지? 확실하지? 나 지금 동창들한테 전화 돌려서 알아본다?
형주의 말에 태산은 스륵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확실해. 이수연. 32세. 미혼.”
– 그렇다면 건투를 빈다. 아, 이거 참. 내가 옆에서 지도 편달을 해 줘야 하는 건데.
아쉬워하는 형주에게 태산은 시동을 걸며 말했다.
“조심해서 들어가라. 나오면 연락하고. 미국 가면 지현이랑 애들한테도 안부 전해 주고.”
– 그래. 너도 내 얘기 꺼내면서 말 걸어 보든가. 예전에 널 좋아했던 한 남자가 있어~ 하고 말 붙여. 그 정도는 내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마.
형주가 노래를 부르며 이야기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궁색할까. 태산은 웃으며 형주에게 인사를 건넸다.
“들어가라.”
– 너도.
전화를 끊고서 태산은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었다. 서울까지는 아니어도 잠시 나가 있을 생각이다. 지금쯤 많이 혼란스러울 수연의 마음이 가라앉을 수 있도록.
* * *
집에 도착한 수연은 안채의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멍하니 발끝을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뒤늦게 실감이 났기 때문이었다.
“무슨 짓을……. 하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도 눈을 감으며 수연은 중얼거렸다. 태산과 함께 있을 때면 늘 이런 식이었다. 눈빛에, 미소에, 목소리에 어느새 휩쓸려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그리고…….
얼굴에서 손을 떼며 수연은 한숨을 쉬었다. 누구 탓을 하겠는가. 전부 스스로 저지른 일인데.
“오올, 이수연. 오오올.”
멀리서부터 세호가 빙글거리며 느물느물 다가왔다. 수연이 무슨 짓이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옆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어디 갔다 오셨을까. 우리 누님이.”
눈썹을 두어 번 들썩이며 아주 신이 났다.
“이세호. 용건만 간단히 하자.”
“아니이. 나는 그냥 궁금한 거지. 무슨 산책을 그렇게 오래 하나. 누나가 산책 갔는데 태산이 형은 어디를 갔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흐흥. 세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냐는 표정을 짓는다. 수연은 찌릿 세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뭐. 왜.”
“이상하잖아. 왜 누나는 태산이 형한테 여친이 있다고 그랬는지. 태산이 형은 없는 여친 만나러 서울에 간다고 했는지. 아버지만 모르네, 아버지만 모르셔.”
고개까지 끄덕여 가며 세호가 말했다. 수연은 아래 저수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아빠가 쓸데없는 걱정할까 봐 그런 거야. 신경 꺼.”
“정말로 쓸데없는 걱정일까나.”
뭘 알고 하는 말인지. 수연은 세호의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살펴보았다. 대충 넘겨짚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점심 먹은 것은 모르는 것 같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일이나 해.”
“에이. 그러지 말고 잘해 보지? 재민이 형이 그러는데 태산이 형네 겁내 빵빵하대. 그, 유경 그룹 그쪽 뭐라고 했는데. 지금 장현 건설도 태산이 형 지분이 반이고. 사장님은 작은아버지라는데?”
언제 그런 이야기까지 나눈 건지. 수연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세호가 큼큼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아니, 내가 뭐 돈 보고 그러는 건 아니고. 누나도 눈이 있으면 봐봐. 저 스펙에, 저 피지컬에, 집도 빵빵하고, 심지어 얼굴도 남자답게 잘생겼는데. 누나가 언제 저런 남자를 만나겠어.”
세호에게서 엄마가 보인다. 수연은 한숨을 쉬며 세호를 보았다.
“그러니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구.”
“왜 상관이 없어. 태산이 형이 누나만 보는데.”
세호의 한마디에 심장을 꾹 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시선, 이라는 말을 생각한다. 눈이 가는 길. 가끔씩 고개를 들 때면 태산과 눈이 닿았던 순간들이 있었다. 짧은 우연이라 애써 생각했었던,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아빠는?”
수연은 말을 돌렸다.
“엄마랑 빨간 지붕집에. 토요일에 거기 어디지, 왜 있잖아. 튤립 축제 간다고 했던 데. 맞아. 태안. 태안 가기 전에 그 집 밭 가는 거 도와준다고.”
빨간 지붕집은 퇴직 후, 부부가 귀촌을 한 집이다. 주말마다 내려오긴 했어도 본격적인 귀촌 생활은 얼마 안 되었다. 아직은 농사에 서툴러 부모님이 한 번씩 돕곤 했었다.
“아무튼. 잘해 봐. 내가 비밀로 해 줄게.”
세호가 찡긋 윙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우우, 기지개를 크게 펴더니 팔을 휘두르며 식당 쪽으로 걸어간다. 밥 먹고 산책 조금 했다고 피로가 몰려왔다. 산책만 한 건 아니었지. 수연은 신발을 벗으며 생각하다 고개를 흔들었다. 낮잠이나 한숨 자고 싶은 날이다.
* * *
연극의 이해는 교양 수업이라 인문대에서도 제일 큰 대강의실을 썼다. 월요일, 수연은 늘 그랬던 것처럼 20분 먼저 강의실 문을 열었다.
오전 강의가 9시부터 12시. 오후 강의가 1시부터 4시. 지금은 12시 38분. 점심을 먹을 시간이라 그런지 강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나치게 이른 감이 있긴 하지만, 무엇이든 다급하게 서두르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탓에 남들보다 일찍 다니는 편이었다. 촉박한 시간에 서두르다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이 싫어,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늘 일찍 교실 문을 열곤 했었다.
강의실 왼쪽의 창문으로는 푸른 나무가 우거져, 사정없이 들이치는 여름의 볕을 막아 주었다. 예배당처럼 긴 의자와 긴 책상. 그 위로 드리운 나무 그림자와 사이사이로 짙게 내리는 빛. 아무도 없는 강의실의 적막함과 바깥에서 들려오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묘하게 뒤섞인, 수연이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수연은 늘 앉는 뒤쪽의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교재와 필기구를 꺼내고 노트를 펼치다 핸드폰을 들었다.
[3시 10분, 학생문화관 1층에서 보자.]혹시 태산이 잊었을까 확인 문자를 보내 놓고 리포트 초안을 잡아 놓은 파일을 꺼내는데,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화면 위로 태산의 이름이 뜬다.
“여보세요.”
수연의 대답에 태산이 말했다.
– 가고 있어.
“약속은 3시…….”
대답을 하는데 강의실 앞문이 열렸다. 무심결에 고개를 드니, 키가 큰 사람이 보인다. 태산이었다.
약속 시간에 늦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수업을 들으러 오다니. 의외라 생각하는데 핸드폰을 든 태산의 시선이 수연에게로 향했다.
수연을 확인하고 전화를 끊은 태산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열린 문틈으로 바깥에서 떠들고 있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리다, 문이 닫히자 뚝 하고 소리가 끊겼다. 저 아래 강단에서부터 수연이 앉은 뒷자리까지, 태산이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만이 텅 빈 강의실을 울렸다.
“일찍 왔네?”
수연은 가까이 다가오는 태산에게 말했다. 주말 동안 여름 볕에 오래 내놓았을 태산의 팔과 얼굴이 구릿빛이었다. 대답 대신인지 고개를 끄덕이는 태산의 얼굴이 왠지 피곤해 보여, 생각 없이 물어보았다.
“힘들었어?”
수연이 묻자 태산이 눈을 들어 올렸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표정이다.
“아르바이트 말이야.”
말이 좋아 아르바이트이지 시멘트 포대 지고 나르는 막노동이라고 했던 기억이 나서 물은 말이었다.
“더운데 고생했겠다.”
태산의 입가에 흐리게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오르다 가라앉았다. 오래 걸어온 사람들의 지친 미소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수업 들으러 올 거면 연락하지. 점심에 만나서 얘기해도 되는데.”
태산은 말이 없었다. 그래서 수연은 침묵이 흐르지 않도록 자꾸만 이야기를 했다. 혼자 있을 때의 적막이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었다면, 태산과 함께 있을 때의 적막은 마음을 어지럽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조금 정리할까?”
수연이 물었다. 태산은 대답 없이 수연을 보고 있다. 마치 무엇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오래 수연을 본다. 단단하고도 뚜렷한 눈빛이 눈으로 들어와 마음을 훑고 바닥까지 내려가는 것 같다.
수연도 태산을 마주 보았다. 왜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굳이 이유를 댄다면, 눈을 피하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아서, 정도일까. 그렇게 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그리고 묘한 정적이 흘렀다.
“수연아.”
태산이 수연을 불렀다. 태산의 목소리로 불리는 자신의 이름이 낯설었다. 태산의 목소리에 실린 자신의 이름이 수직 하강해서 마음 가장 낮은 곳에 닿는 것 같았다. 낮은 음의 건반이 쿵 하고 눌렸을 때처럼,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 그런 기분은 처음이라 수연은 애써 침착하게 태산의 눈을 바라보았다.
“응.”
“네 생각이 났어.”
“…….”
“주말 내내.”
천천히 땅이 기우는 기분이었다.
* * *
웡웡.
진돌이가 짖었다. 수연은 느리게 눈을 떴다. 소파에 기댄 채 잠깐 눈을 감았는데 어느새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수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팔을 올려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묶는데, 꿈처럼 오래된 기억들이 이어진다.
‘그랬구나.’
그때의 대답이었다. 네 생각이 났다는 말에 수연은 그렇게 대답을 했었다. 한참 후에야, 조금은 멍한 상태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그럴 수도 있다는 듯이, 그러니 별 의미 없는 일이라는 듯이.
자신의 대답에 태산은 웃었었다. 싱겁기도 하고 피곤한 것 같기도 했던 미소였다. 웃고 있는 태산의 눈동자가 부드러웠다는 게 생각이 난다.
태산의 미소를 떠올리며 수연은 스르륵 팔을 내렸다. 많은 기억들이 뒤를 잇는다. 네 생각이 났다던 태산은 그 뒤로 별말이 없었던 것. 수업이 끝난 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함께 리포트를 썼던 것. 드문드문 태산이 수업에 들어왔던 것. 고개를 들면 한 번씩 시선이 마주쳤던 것.
방학이 끝날 무렵, 아르바이트비를 받았다며 태산이 밥을 먹자 했던 것. 여름 저녁에 후문의 숲에서 커피를 마신 것. 모기에 물렸던 것. 아버지가 넘치게 보내 주었던 복숭아를 나누어 주었던 것. 태산이 그 보답이라며 예쁜 부채를 사 주었던 것. 그 부채로 팔랑팔랑 바람을 만들어 주었던 것.
가을이 깊어질 즈음에, 노을 지는 창문에 기대어 입을 맞추었던 일까지, 한 편의 영화처럼 눈앞을 스쳤다.
수연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창문 너머 노을 지는 마당의 풍경이 아름답다. 그 풍경 안으로 차 한 대가 들어온다. 태산이 내리고, 진돌이가 웡웡 반갑게 짖었다.
껑충껑충 뛰는 진돌이의 머리를 태산이 쓱쓱 쓰다듬고 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이유는 노을이 아름다워서라고, 수연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어났어?”
마당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자 수돗가에서 딸기를 씻고 있던 동만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응. 엄마는요?”
“저녁 하지. 수연아, 이것 좀 먹어 봐.”
알이 굵고 색이 진한 딸기를 골라 동만이 물기를 탁탁 털고 수연에게 내밀었다. 수연은 딸기를 받아 한 입을 베어 물었다. 달콤하면서도 진한 딸기 과즙이 입안에서 터진다.
“딸기 맛있다.”
우물거리며 말하자 동만이 나머지 딸기들을 소쿠리에 담으며 말했다.
“장 팀장이 시내 나갔다가 사 온겨. 딸기하구, 진돌이 개껌하구, 그 뭐냐. 너 좋아하는 치즈 케이키하구. 늬 엄마 먹으라고 사 왔댜. 밥 하느라 고생한다구.”
수연은 고개를 돌려 진돌이를 바라보았다. 거꾸로 돌아앉아 엉덩이만 보이는 진돌이가 앞발로 개껌을 잡고 열심히 뜯고 있다. 앙앙 물어뜯을 때마다 엉덩이가 실룩거렸다.
“서울은 여자친구가 일이 있어서 못 가고 나간 김에 목욕만 하고 왔다나. 어째 너 좋아하는 것만 귀신같이 알고 사 왔는가 했더니만, 젤로 좋아했다대.”
수연은 진돌의 집 옆으로 있는 별채를 바라보았다. 하나의 방에만 불이 켜 있다.
“자기도 예전부터 젤로 좋아했대. 치즈 케이키.”
댓돌 위에 놓인 운동화를 본다. 가지런히 벗어 놓은 태산의 마음을. 수연은 중얼거렸다.
“그랬구나.”
“응. 그렇댜. 들어가자. 저녁 먹어야지. 장 팀장은 먹고 왔댔고, 우리끼리만 먹으면 돼. 엄마가 너 좋아하는 오징어 넣고 뭇국 끓이더라. 딸기 하나 더 줄까?”
“응.”
수연은 아버지가 내미는 딸기를 받았다. 달콤한 딸기즙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오는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