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Train RAW novel - chapter 3
“주방에서 음식이라도 좀 가져다드릴게요.”
“괜찮습니다. 나도 여기서 뭘 얻어먹으면 체할 것 같습니다.”
“차는요?”
“괜찮습니다.”
아르춈이 앉았을 때도 그랬지만, 위르겐이 소파 위에 앉았을 땐 걱정부터 밀려왔다. 그의 체격이 지나쳐 소파가 부서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골격 좋은 남자 하나가 들어서 앉아 있으니 방이 더 좁아진 기분이라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럼 기다리세요. 전 술이라도 한잔해야겠거든요.”
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은 밀주 보드카였지만 어쨌든 마시면 취하는 건 분명했다. 고약한 숙취를 앓고 술을 끊은 지 고작 일주일 반이 지났지만, 오늘은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신도 마시지 말고 맨정신으로 들으세요.”
“불을 좀 때 달라고 부탁해야겠어요.”
“시간 끌지 말고 앉아요. 침대에 앉아도 오늘은 안 건드리겠습니다.”
“정말 추워서요.”
“정 그럼 이불을 덮으시든가.”
완전한 지배자의 행태였다.
주먹을 쥐어 폭이 넓은 작업복 바지를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기겁했다. 내가 작업복 차림이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걸 입고 집까지 기어 왔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검댕이 덕지덕지 묻은 비닐 재질의 노란색 작업복을 입고 돌아다닐 사람은 없으니까.
“잠깐 나가 계세요. 옷이라도 갈아입게요.”
다짜고짜 위르겐을 방에서 쫓아낸 나는 그대로 소파 위에 주저앉아 입을 틀어막았다. 옷이 문제가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처음부터 그가 끔찍하게 싫었다. 그런데 그와 결혼을 해서 같이 살아야 한다고? 아니. 그보단… 세료자 오빠가 죽었다고?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서 작업복을 벗었다. 지독한 피로감이 밀려와서 옷을 벗으면서 몇 번이나 비틀거렸다. 흰색 외출복을 찾아 꺼내 입는 내내 나는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기분을 달래려고 애를 썼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구겨진 원피스를 툭툭 털며 기뻐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죽을 때까지 수용소에 갇혀 있어야 할지도 몰랐던 로만 오빠와 게오르기 오빠를 구원할 수 있게 되었다. 세료자 오빠가 죽은 건 슬프지만 그래도 오빠 둘은 내가 살리는 것이다.
“다 입었어요. 들어오세요.”
너무 추워서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코트를 다시 껴입었다.
“위르겐 씨가 차를 안 마신다면 저라도 마셔야겠어요. 안 그럼 얼어 죽을 것 같거든요.”
위르겐은 내가 차를 우리는 것까지 말릴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침대 위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를 지나쳐 주방을 향했다.
뜨거운 차 생각이 간절했다. 사모바르를 쓰는 대신 주전자를 쓰기로 결심하곤 가스 불을 켜 물을 끓였다. 거름망에 찻잎을 넣어 차를 우렸다. 내 바람과 달리 순식간에 차가 우러났다. 나는 검붉게 우러난 차를 들고 위르겐이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빨리 얘기 끝냅시다.”
그는 왼팔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하지만 역시나 조금도 급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그가 앉아 있는 침대 대신 소파에 앉았다.
“결혼 하나로 값을 치르기엔 내가 당신한테 관심이 없습니다.”
“네….”
그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수용소에서 사람을 빼내려면 돈은 물론이고 인맥도 필요할 것이 분명했다. 잘못해서 들켰다간 감옥살이까지 당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렇게까지 해서 그가 얻을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나는 차를 홀짝이며 그를 샅샅이 응시했지만 역시나 위르겐을 읽어 낼 순 없었다.
“제가 더 치러야 할 값이 뭐죠?”
결혼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외려 안도했다. 차라리 대가를 치른다면 더 깔끔한 거래가 될 것이다. 잠시나마 위르겐이 나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우선 자식이 필요합니다.”
“네.”
“가능한 빨리.”
다시 한번 차를 홀짝였다. 맛이 밋밋해. 역시 차가 아니라 술이었어야 했다.
3년 하고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위르겐을 봐 왔지만 그와 내가 침대에서 섹스 하며 뒹구는 모습은 어떤 식으로든 상상할 수가 없다. 그래도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는 요구였다. 결혼을 각오한 이상 관계를 가지고 자식을 낳는 것 또한 각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 뒤에 죽어 주세요.”
위르겐의 나직한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분명히 그의 말을 알아들었음에도 나는 넋을 놓았다.
“죽으라니…… 애를 낳고 1년 뒤에 저더러 죽어 달라는 말씀인가요?”
“그쯤 돼야 그림이 예쁘겠죠.”
“지나치게 조건이 커졌다는 생각 없으세요? 농담할 만큼 나 여유 없어요. 지금도 질식해서 죽어 버릴 것만 같거든요.”
상대의 진지함과 별개로 나는 그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 꽉 다물린 위르겐의 입매를 응시한 채 차를 또 한 번 홀짝였다. 이젠 고작 한 모금이 남았고 그마저도 다 식어 미지근했다.
“원래는 죽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네.”
“그런데 당신 지금 꼴을 보니… 꼭 죽어 줬으면 좋겠거든요.”
위르겐이 내 머리칼을 가져다 입을 맞췄다. 나는 숨을 참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할 겁니까, 말 겁니까?”
“안 해요.”
내 거절에 그는 더 이상의 말도 없이 산뜻하게 일어서 떠나려 했다. 나는 황급히 그의 단단한 팔뚝을 붙잡았다.
“잠깐…….”
미련이 남은 건 내 쪽이었다. 지난 3년, 위르겐이 농담을 한 적이 있었던가? 위르겐은 언제나 나와 함께 식사하며 내가 꺼내는 말을 들어 줬을 뿐, 떠드는 법이 없었다. 나는 그런 그의 침묵을 못 견뎌 더 수다스럽게 굴곤 했다. 그게 우리 둘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분명히 위르겐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었다. 이상한 사람이긴 했어도 선을 넘은 적은 없었다. 정중하다…는 평가가 차라리 어울리는 사람이었지.
“당신은 누군데… 갑자기 나타나선…… 이런 걸 쥐여 주고 떠나려고 하는 거죠?”
나는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지도 못했다. 그저 처량하게 그의 팔을 붙든 채 입술을 덜덜 떨었다.
“난 힐덴베흐크 총리의 아들입니다. 여태 몰랐습니까?”
그가 조롱 섞인 투로 물었다. 그러나 내가 그걸 알 리가 없었다. 내가 아는 건 자동차를 고치는 방법이었고, 정비소의 사람들이었다. 화장실을 같이 쓰는 옆집 중년 부부였고, 그 집 꼬마 일랴였다. 그리고 나를 구원해 준 아르춈……. 그게 전부다.
증오스럽기 짝이 없는 나라인 힐덴베흐크의 총리가 누구인지, 총리의 성이 무엇인지 따위를 알 리가 없었다.
“알…잖아요. 난 신문 못 보는 거…….”
신문을 보지 못하게 된 건 아버지의 처형 소식을 신문으로 접한 뒤였다. 아버지를 깎아내리는 말들로 뒤덮인 신문을 차마 읽을 수가 없었다. 총살당하기 직전의 아버지를 신문 속 사진으로 접한 뒤론 신문지만 봐도 식은땀이 손에 배어들고 숨이 막혔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습니다. 신원이 보증될 테니 당신이 날 믿기도 편하겠군요.”
“정치적으로 나를 이용하겠다는 건가요?”
“뭐.”
위르겐은 고개 숙인 내 턱을 붙잡아 올려 내가 강제로 그와 눈을 맞추게 했다. 위르겐은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나를 집요하게 내려다보았다.
“어쨌거나 당신은 아름답고.”
벌어진 내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는 손길이 지독하게 건조했다. 마치 인형을 만지는 것만 같았다. 애욕이라곤 조금도 없이 담백했으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마음이 무참했다.
“난 당신이 싫으니까 죽일 때 아쉽지도 않을 테고.”
긴장감에 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나는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몰락한 귀족이고.”
그 말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이 급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내 목숨이 2년쯤은 더 남은 것이다. 도망칠 시간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할게요. 죽어 드릴게요. 아이를 낳고 1년 뒤에 그림이 예쁠 때… 제일 처절한 모습으로. 당신의 뜻대로…… 오빠들만 빼내 준다면.”
비명처럼 튀어나온 말을 내뱉고 나는 꺽꺽대며 괴롭게 울기 시작했다. 위르겐은 그런 내 얼굴을 손수건으로 꼼꼼히 닦아 주며 놀랍도록 서늘하게 뇌까렸다.
“축하합니다, 스볘타. 이젠 시한부 신세군요.”
***
겨울이면 아파트에는 새로운 규칙이 생긴다. 매일같이 두껍게 쌓이는 눈을 치울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파트 입주민들은 날짜를 정해서 돌아가며 눈을 쓸었다. 운이 좋으면 눈을 안 치울 수도 있었지만, 오늘 난 운이 나빴다. 내가 내내 흐느끼던 간밤에 눈이 내렸기 때문이다.
금요일은 내가 눈을 쓰는 당번이었다. 그 때문에 정비소에도 양해를 구해야 했다.
나는 넉가래를 쥐고 멍청하게 눈을 쓸었다. 밤에 얼마나 많은 양의 눈이 내렸는지 종아리까지 눈이 쌓였다. 종아리를 전부 덮는 긴 부츠를 신었지만, 치마가 젖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평소라면 담배라도 한 대 물고 욕지거리를 내뱉었겠지만, 오늘은 욕할 여력조차 없었다.
“어이! 스볘타!!”
옆집 이고르 아저씨가 손을 흔들었다. 나 또한 환히 웃으며 좋은 아침이라며 상투적인 인사를 건넸다.
“하필이면 간밤에 눈이 많이 내렸어. 그렇지?”
아침부터 보드카를 병째 홀짝이는 이고르 아저씨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 접었다. 평소에는 술을 잘 마시지 않는 아저씨다. 저 아저씨도 나처럼 무슨 사정이 있을 테다.
“한잔할래?”
“주시면 감사하죠.”
아저씨에게 병을 넙죽 받아 벌컥벌컥 보드카를 들이켰다. 첫 모금은 괴로웠고 두 번째는 쓰라렸다. 내장이 타들어 가는 감각에 기침을 몇 번 했다. 취기가 금방 올라 알딸딸한 어지러움이 온몸으로 번졌다.
입가를 닦은 뒤 술병을 다시 아저씨에게 건넸다.
“간밤에 눈만 내린 게 아니라… 쵸마가 찾아왔었어. 안 들어가고 아가씨 집 앞에서 가만히 서 있던데.”
“쵸마가요? 왜…….”
“당연히 자네를 보러 왔겠지.”
아저씨는 아파트 건물에 아무렇게나 세워진 넉가래를 가져와 나를 도와 눈을 치워 주시기 시작했다.
나는 쵸마가 찾아왔다는 소식에도 무덤덤했다. 그것까지 신경 쓰기에는 머릿속이 포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때는 내 뇌를 폭군처럼 지배하던 아르춈조차 이젠 흐릿하다.
“고마워요.”
“할 일도 없는데 뭐. 어차피 백수 신세거든.”
“네?”
“놀라긴…! 오늘은. 오늘은… 휴가를 좀 냈어.”
콧등을 붉힌 채 껄껄껄 웃는 걸 보니 아저씨는 벌써 취하신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저 큰 보드카 병을 벌써 반이나 비웠다. 이런 기분으로 눈 치우는 것도 서러운데 토사물까지 치우게 생겼다.
“쵸마가 왔는 줄도 몰랐어요. 초인종 한 번을 안 눌렀으니까요.”
“취해서 왔던데?”
“취해서… 왜지…? 연락을 한번 해 봐야겠어요. 무슨 일이 생겼나.”
“부잣집 도련님이 일은 무슨. 설마 찼어?”
“아뇨. 차였죠. 제가…….”
음울하게 중얼거리자 이고르 아저씨가 미간을 좁혔다. 내가 걱정된다는 얼굴이었다. 어제 스미르노프 씨도 나를 이렇게 쳐다봤었다.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긴 있구나.
“괜찮아요.”
“괜찮긴! 내가 아가씨를 한 3년 봤나? 3년 내내 좋아했잖아.”
“뭐… 어때요. 다른 남자 만나면 되죠. 아직 전 젊잖아요.”
“젊은 것도 아니고 어리지.”
다른 남자를 만났는데 그 남자가 날 죽일 거라는 말은 당연하게도 꺼내지 못했다.
“아저씨. 아침부터 너무 마시면 마샤 아주머니가 화낼 거예요. 이제 술은 그만 마시세요.”
“그 여편네… 화낼 정신도 아닐 거야.”
“무슨 일 있으세요?”
“……아들이 아파.”
“일랴가요?”
나까지 가슴이 철렁한 기분이었다. 휴가까지 낼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닌 건 분명했다.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은 아저씨는 훌쩍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어디가요? 크게 아픈 건 아니죠?”
“소아마비가 왔어.”
나는 괴롭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흐느끼기 시작하는 아저씨를 꽉 껴안았다.
도대체 까닭이 무엇일까? 일랴는 탁아소에서도 손꼽히게 착한 아이고, 이 부부의 유일한 기쁨이었는데……. 주님께선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뜻하신 걸까?
아저씨, 기도할게요.
이 말이 조롱으로 들릴까 염려되어 꺼내지 않고 삼켰다.
아저씨의 등을 토닥이는데 눈앞이 흐려졌다. 어린애처럼 우는 이고르 아저씨가 가여웠고, 실은 내가 조금 더 가여웠다.
“눈 치워야지…….”
얼굴을 붉힌 채 옷소매로 눈물을 훔친 아저씨는 던져 둔 넉가래를 집어 들고 말없이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밀고 또 밀었다.
째지는 클랙슨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나는 클랙슨을 울려 대는 위르겐의 은회색 자동차를 무시하곤 계속해서 눈을 쓸었다. 기어이 차에서 내린 그가 다가올 때까지도 성실하게 눈만 치웠다. 내게 배당된 일이니 하는 게 마땅하다. 이고르 아저씨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지만, 아저씨에게 모든 일을 설명할 용기가 없었다.
“무슨 일이시죠?”
“나랑 같이 가죠. 출근도 해야 할 테고.”
“물론 출근은 해야 하죠. 그런데 오늘은 오후 출근이에요. 겨울이라 눈을 치워야 하거든요.”
“얼마나 걸립니까?”
“대강 봐도 알지 않나요?”
아파트 뜰에 가득 쌓인 눈 때문에 사람이 지나다닐 길조차 없었다. 다들 부츠를 신겠지만 그래도 저급한 욕설은 몇 마디 내뱉을 것이다. 폭설 때문에 길이 막혔을 텐데도 차를 타고 온 위르겐에게 박수라도 쳐 줘야 하나.
“이제 절반 치웠어요. 차에서 기다리세요.”
“당신 집 열쇠 내놔요.”
“미쳤… 남자 둘을 집에 들인다는 소문은 나도 썩 달갑지가 않네요. 어제는 상황이 상황이라 당신을 들였지만, 오늘은 날도 밝고 곤란해요.”
그런 평판을 신경 쓸 만큼 나는 고상한 사람이 아니었고, 내 이웃들 또한 소문을 신경 쓸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위르겐을 내 집에 들이는 건 꺼려지는 일이었다. 설마 겁탈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그가 한 협박을 떠올려 보면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타세요. 차에.”
고압적인 말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그는 마치 부하를 다루듯 나를 다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