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thless Warrior RAW novel - Chapter 14
“어디 보자.”
첫 번째로 나온 건 판타지 게임의 필수 아이템이라는 추가 인벤토리였다.
“마법 지퍼로군.”
허공에 대고 이 지퍼를 열면 안에 물건을 집어넣을 수 있는 마법적인 공간이 열린다. 이 세계에는 지퍼가 존재하지 않는데, 유일한 예외가 이 마법 지퍼다. 일종의 오파츠다. 일단 나무판자를 하나 가져와서 마법 지퍼 안에 뭐가 들었는지 털어봤다.
와르르-.
“이야!”
금화와 보석이 쏟아져 나왔다. 역시 마왕군 간부답게 부자로구나. 감정을 해봐야 알겠지만 대강 봐도 2,000플로린이 넘어 보인다. 상당한 밑천을 얻었다. 그 외에 주머니에서 포션 두 개를 발견했다.
-힐링 포션.
-신체강화 포션.
목숨의 위기에서 구명줄이 돼줄 물건들이었다. 나는 이건 팔지 않고 잘 챙기기로 했다.
“좋은 게 하나 더 있군.”
또 하나의 마법 아이템을 찾았는데 그건 움직이는 밧줄이었다. 마치 뱀처럼 움직이는 마법 밧줄로, 포로를 자동으로 묶는 등 다용도로 사용이 가능했다.
듣자니 수도의 귀족들 중에는 성적인 유희를 위해 쓰는 자도 있다고 했다. 어느 용도로 활용하던 기능성 아이템 중에선 최고 수준인 물품이다.
“음?”
마지막으로 나온 건 극악한 독과 해독제였다. 나는 각종 상위직을 섭렵했던 안목 덕에 그게 뭔지 알아봤다.
-독룡 후르구마의 이빨 독.
-독룡 후르구마의 이빨 독 해독제.
이건, 게임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극악의 독이다. 비싸기도 엄청나게 비싸다. 왜냐하면, 잘만 쓰면 영웅들도 골로 가게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왜 이런 걸 헤작스가 가지고 있었을까?
후르구마의 독은 항상 가장 교활한 정치적 음모와 연관이 있었다. 지난 게임에서 이 독을 만날 때는 반드시 거물이 죽어나자빠지곤 했었다.
설마, 헤작스는 자기 주인인 페자무트를 암살하려고 헀던 걸까? 진실이 궁금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알 길이 없어졌다.
독과 해독제는 잘 챙겼다. 이건 반드시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도 팔아도 가격이 장난 아니다. 내가 기억하기로 작은 성 하나 값은 줘야했다. 오늘 최고 득템이 이 독약이었다.
아이템은 거기까지였다. 나는 헤작스의 철퇴와 헤작스의 갑옷도 챙겨서 마법 지퍼 안에 넣었다. 이 둘은 값나가는 마법 무구이다.
워낙 덩치가 큰 헤작스의 물건이라 내가 쓰진 못하니 팔아서 돈을 벌면 된다. 오거 같은 녀석에게 팔면 되겠지. 나는 세계의 정보를 잘 알고 있다.
마법 무구를 필요로 하고, 거래를 할만한 최소한의 오거가 어디 사는지 잘 안다. 이 일이 끝나면 물건을 들고 한 번 찾아가 봐야겠다. 일단 그렇게 물건을 다 챙긴 나는 캐릭터 창을 열었다. 기대하는 바가 있어서이다.
아니나 다를까, 헤작스를 잡아서 그런지 레벨이 2나 올라 있었다.
괴물 사냥꾼(30->32레벨)
생명력:520->570
마력:0
힘158->187
지능34->39
민첩성212->233
건강230
카리스마67->70
업적치 +3,000
나름대로 상당히 만족스러운 스탯이었다.
“흐으음….”
그때 뒤쪽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들려왔다. 발푸르기스였다. 이제 깨어나려는 것 같았다.
“발푸르기스 경.”
“으으….”
“정신 차리십시오.”
몇 번 말을 걸자 그녀는 의식을 되찾았다.
“…여기는?”
“기억이 안 나십니까?”
“아!”
발푸르기스는 깜짝 놀란 듯 일어나다가 격통에 비명을 지른다.
“꺄으윽!”
“부상이 심하셨습니다. 무리하지 마시길.”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어떻게 죽어가던 자신이 회복한 건지 묻는 그녀에게 근처에서 구르고 있던 빈 물약병을 들어보였다.
“경께서 제게 주신 겁니다. 경을 구하는데 사용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아!”
발푸르기스는 힐링 포션을 선물한 게 기억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참 발푸르기스스럽다. 보상을 주는 것도 좋지만 자기 몫의 포션은 남겨놔야지 않나.
계산적이지 않은 게 그녀의 매력이긴 해도 옆에서 보면 솔직히 좀 답답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천성이라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그런 고지식함 때문에 사망하곤 했다. 나는 발푸르기스의 죽음을 떠올리자 조금 울적한 기분이 됐다. 하지만 괜찮다. 이번에는 그녀를 구해냈다.
“발러. 목숨을 걸고 도우러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금보다 귀한 걸 써 본녀를 구해줬구나. 이 얼마나 훌륭한 사내인가….”
드물게 발푸르기스의 목소리가 촉촉이 젖어들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포션은 원래 경의 것이었습니다.”
“그런 건 핑계도 되지 않는다. 힐링 포션을 팔았으면 한적한 곳에서 집 한 채 사서 편히 살 수 있을 것을.”
그녀는 퍽 감격한 모양이었다. 언제나 감정을 절제하는 이 완벽한 전사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아주 드물다.
아마 아직 소녀티가 남아서 그런 거겠지. 이후에 발푸르기스가 한 명의 완벽한 기사로 성장하고 나면 이런 한 때의 귀여운 모습은 사라진다.
심성이나 무술 실력이 완숙해지면 그녀는 마치 영웅담 속 기사처럼 기사도의 현신이 된다. 그때의 발푸르기스는 한 자루의 아름다운 검을 연상시키곤 했다.
나는 그런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았다는데 기쁨을 느꼈다.
“그저 경의 고결함이 경을 구한 것입니다.”
내 말에 발푸르기스는 가볍게 신음을 흘린다.
“아….”
뭔가 그녀의 머릿속에 중요한 게 스쳐지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마 지금 그녀의 내면에서 무언가 확립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본의 아니게 발푸르기스라는 한 명의 기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일조한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말 영광인데.
“일개 용병이라 차별하지 않고 절 염려해 주셨지요. 경께서 제게 힐링 포션을 주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아니다! 그대에게 다시 큰 은혜를 입었구나.”
발푸르기스는 연신 감사해왔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나도 처음 보는 거라 상당히 신선하게 느껴졌다.
“발러, 오늘 목숨을 빚졌으니 후일 반드시 내 목숨을 걸고 그대를 돕겠다.”
“더없이 든든한 말씀이십니다.”
나는 감사를 표현 뒤 빨리 자리를 벗어나자고 제안했다.
“사체를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여기 오래 있어봐야 좋을 게 없습니다.”
우리는 근처에 널린 사체를 가져와 헤작스의 위로 포개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가져와 쌓고 기름을 부었다.
“설마 전하께서 그런 행동을 할 줄 몰랐구나.”
발푸르기스는 착찹한 듯한 말투였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입니다.”
이건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필립을 며칠 안에 죽여 버릴 작정이었다.
“발러, 필립은 보통 인물이 아니다. 섣불리 나서지 말거라. 후일 기회가 있을 테니 본녀와 함께 도모하자. 본녀도 오늘 일에 대해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다.”
발푸르기스도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녀는 결사적으로 필립을 지켰다. 그런데 총을 쏴 낙마 시키고 자기만 도망가다니.
발푸르기스의 성격이면, 지켜달라고 요청하기만 하면 된다. 그녀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필립이란 존재가 목숨을 걸고 싸울 가치가 있다고 믿었었다. 기꺼이 그를 위해 희생했을 거다.
“그 자가 마왕과 싸울 인간의 희망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본녀의 안목이 부족했구나. 하아…….”
본래는 그렸어야 했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바뀐 걸까.
“이제라도 본성을 파악했으니 다행입니다. 후일 더 큰 일이 터질 걸 막았다고 생각하십시오.”
나는 사체에 불을 놓았다.
활활 타올랐다. 끔찍했지만, 보기 좋았다.
“그나저나 경의 유니콘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싸움이 한창이라 챙기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다. 걱정할 것 없다. 발러, 그대는 유니콘에 대해 잘 모르는구나.”
“음?”
“유니콘은 영물이다. 총에 맞자 환수계로 돌아간 것일 테지. 아마 며칠 뒤에 회복해서 되돌아올 거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다.”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 없겠다. 그나저나 엄청 편리한 탈 것인데. 군마가 전투 중에 다치는 게 제일 골치 아픈 문제다.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쟁에선 인간보다 말이 더 많이 죽으니까.
그런데 환수계로 돌아가서 자동으로 회복해서 온다니? 이 무슨 사기 아이템인가. 그래도 탐내봐야 소용없다. 유니콘은 전설처럼 순결한 처녀가 아니면 따르지를 않으니. 나 같은 시커먼 사내놈은 무슨 짓을 해도 유니콘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말이 없으시니 태워드리겠습니다.”
나는 숨겨놨던 필리를 끌고 왔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 자기 말이었던 필리를 보고 반가워했다.
“너도 전 주인이 반가운가 보구나, 필리.”
“세상에. 발러. 아무리 암말이라지만 이렇게 덩치 큰 군마에게 필리(암망아지)라고 이름 붙인 건가?”
“제 눈에는 망아지처럼 귀여워 보여서요.”
필리는 털이 비단결처럼 고았고 눈은 보석처럼 예뻤다. 나는 이 명마가 마음에 쏙 들었다.
“그대에게 주길 잘했군.”
“하하하. 자, 어디로 가시렵니까?”
목적지는 대강 예상이 됐다. 아마 그녀는 곧장 바이에른에 돌아가겠다고 하지는 않을 거다. 여기로부터 하루거리에, 그녀가 소속된 ‘발푸르가 수녀회’의 본원本院이 있으니까.
“라인펠덴 근방으로 가고 싶군.”
“발푸르가 수녀회입니까?”
발푸르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거리니 좀 부탁하겠다. 후일 바이에른에 돌아가면 오늘 일을 포함해 다 보답하겠다. 그대가 받아들이겠다면 남작의 위라도 주지.”
발푸르기스는 바이에른의 후계자이다. 제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갈 대귀족가의 차기 가주란 얘기. 남작 위 같은 거 하나 내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찌 저 같은 낭인을 귀족의 반열에 들게 하려 하십니까.”
“그런 말 하지 말거라. 발러 그대는 내가 본 어떤 귀족보다 명예로운 전사니까.”
“과찬이십니다. 그 얘기는 후일 하지요.”
스스로 올라가고 싶지만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라인펠덴까지 경 같이 멋진 분을 모실 수 있다니 일생의 영광입니다.”
“허! 그대는 아첨도 좀 할 줄 아는구나. 매끄러운 말솜씨는 본녀 같은 못난이가 아니라 아름다운 숙녀를 위해 남겨 두거라.”
“어디 아름다움이 얼굴에만 있겠습니까?”
발푸르기스가 나를 주먹을 툭 친다.
“흥, 말이나 못하면!”
“하하하.”
우리는 서로 한 번씩 목숨을 구했다. 그래서일까, 만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금세 가까워졌다. 그나저나 시간을 좀 계산해 봐야겠구나. 지금 출발하면 내일 정오가 되기 전에 수녀원에 닿을 거다. 거기서 좀 쉬다가 돌아와 달아난 필립 사냥에 나서야 한다.
발푸르기스에겐 미안하나 나 혼자 처리할 작정이었다. 이 일은 더러운 일이었다. 내가 예전에 강철 선제후로 플레이했던 경험에 의하면, 대패 후 그는 집결지를 겸하는 안전가옥으로 도망간다. 그리고 거기서 사흘을 머문다.
아직 여유가 있다. 하지만 시간을 끌수록 필립의 주위에 패전 후에 몰려온 신하들이 늘어나게 된다. 되도록 빨리 가는 게 좋았다.
“자, 그럼 말에 오르시죠.”
“고맙구나, 발러.”
이번 발푸르가 수녀원 행은 단순히 발푸르기스를 데려다 주는 목적 외에도 의미가 컸다. 그 발푸르가 수녀회의 본원에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성물이 하나 있는데, 나는 그걸 발푸르기스를 구해준 대가로 요구해 볼 작정이었다.
발푸르기스는 발푸르가 수녀회의 미래나 다름 아닌 존재다. 그런 그녀를 구했으니 한 번 말해 볼만하다.
그 성물은 ‘천사의 심장’.
캐릭터의 목숨을 한 몫 늘려주는 SS등급 마법 물품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지금, 그건 가장 귀하고 시급히 구해야할 물건이 됐다. 현재 그 천사의 심장은 발푸르가 수녀회의 대수녀원장인 안젤라가 갖고 있다.
“발푸르기스 경. 수녀원으로 가면 대수녀원장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그건 어렵지 않다. 안 그래도 그대가 본녀를 구했다고 하면 감사를 표하실 게 틀림없다.”
기억이 맞다면 대수녀원장은 아마 안젤라라는 이름이었지. 과연 그녀에게 천사의 심장을 받아낼 수 있을까? 좀 공이 부족한 거 같기도 하고.
하지만 발푸르기스를 구한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이다. 정 난색을 표하면 내가 알고 있는 특급 정보를 몇 개 넘기면 된다. 발푸르가 수녀회는 마왕 페자무트와 대치 관계에 있다.
마왕 페자무트에 관한 정보 풀고 와야지. 나는 한 번 죽으면 끝이다. 그러니 무슨 짓을 해서라도 대응책을 마련해야 했다.
“이랴!”
나는 필리를 부지런히 움직여 라인펠덴으로 향했다.
흠, 그건 그렇고. 저 하늘 위의 몽실몽실한 구름을 보니, 발푸르기스의 경의 새하얀 가슴이 생각나는군. 뭐랄까, 크고 아름다웠었지….
“아, 그런데 말이다. 발러.”
그때 뒤에서 발푸르기스가 말을 걸어왔다.
“네?”
“본녀를 치료해 준 건 좋은데, 그렇다면 설마 흉갑을 버, 벗, 벗겼던 것이냐?”
발푸르기스가 그녀답지 않게 수줍은 듯한,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제야 나는 16살의 어린 소녀가 남자 앞에서 옷이 벗겨졌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깨닫고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뭐,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갑자기 숨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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