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thless Warrior RAW novel - Chapter 185
-끓어오르는 심연께서 그리 말하셨다면 너희를 귀하게 쓰겠다.
-영광! 또 영광이나이다!
거인 록스피우스는 무척 기뻐했다.
-너희는 몇이나 되는가? 고대의 혈통은 이제는 남은 이가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오십여 명이 좀 안 되나이다. 하지만 1만 대군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자신하옵니다.
그렇겠지. 이 거인들은 고대에 영걸이라 불렸던 자들이니까. 사실 인간의 역사에 등장하는 고대 영웅들 태반이 이 거인족이다.
당시 인간은 리켄티아투스를 지배하던 괴종족과 맞설 힘이 없어, 거인족을 동경하고 그들을 자신의 역사에 편입시켰다. 길가메시나 엔키두 같은 전설적 영웅의 정체는 사실 고대 거인이었다.
하지만 이 강대했던 이들은 고대부터 괴종족과 싸우다 세를 크게 잃어버리고 오늘날 비주류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한 종족의 운명과 영광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법인가 보다.
전설에 의하면 엔키두는 나도 한 번 맞선 적 있는 ‘별의 자식’ 여럿과 싸우다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저희는 이 산지에 흩어져 살고 있나이다. 가까운 곳에 있는 자는 반나절이면 닿겠으나 멀리 있는 자는 도착하는데 일주일 이상 걸릴 것이옵니다.
-시일에 관계없이 내게 와준다면 모두 중용하겠다.
-실로 자비로우십니다. 왕이시여.
내가 자신들의 왕이나 다름없다고 하더니, 정말 왕이라고 부를 작정인 듯했다.
아무튼, 그리 환담을 나누고 있는데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끼어드는 자가 있었다.
“크하하하! 아주 우스운 꼴이구나! 록스피우스. 웬 인간 놈에게 덩치가 아깝게 조아리고 있군!”
갑자기 나선 이는 덩치 큰 외눈 오거였다. 그래봐야 거인에 비하면 아이만도 못했지만.
“더덱. 주제 파악하지 못하고 나서는 것이냐.”
훨씬 덩치가 큰 록스피우스가 경고해도 더덱이란 외눈 오거는 능글능글 비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같은 용병끼리 한 마디 하지도 못하나? 응? 그런 말라빠진 인간에게 굴복하는 이는 우리 용병단을 이끌 자격이 없다. 그렇지 않나! 형제들!”
“크워어어어어!”
더덱의 주위에 몰려든 많은 오거들이 무기를 들거나 배들 두들기며 소리를 질러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송구하옵니다. 최근 저희 용병단은 서열 다툼이 본격화됐나이다. 제 밑에서 일을 봐주던 미노타우르스 하나가 얼마 전 죽었는데, 그 후로 저 더덱이란 놈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사옵니다.
대강 무슨 일인지 알만했다. 용병대 대장 자리를 놓고 알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더덱이란 놈이 다른 종족의 용병마저 선동하기 위해 뭐라뭐라 연설을 하는 사이에 록스피우스는 설명을 계속했다. 그 때문에 록스피우스가 겉으론 아무 말이 없자 더덱은 더욱 기세가 올라 떠들어대고 있었다.
-더덱은 오거들의 우두머리로 잔인하지만 장악력이 뛰어난 인물입니다. 제가 힘을 잃었다고 여기자 자신이 대장이 되려고 나서고 있사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잘 이해가 안 됐다.
-오거 따위가 거인에게 상대가 되는가? 숫자를 믿고 날뛰는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내 지적에 록스피우스가 쓰게 웃었다.
-크흐흐, ‘거인은 친구가 없다’는 고어를 들어보신 적 있으시옵니까?
-독불장군은 따르는 이가 없다는 소리잖나.
-물론 이제는 관용적으로 그리 쓰이고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말 그대로의 의미이나이다. 거인이 진짜 힘을 발휘하면 곁에 남는 이가 없으니, 지금부터 펼쳐질 촌극을 보시옵소서. 마침 이 짓도 끝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잘 된 일이나이다.
그리 말한 록스피우스는 껄껄 웃으며 외눈 오거인 데덱에게 손을 뻗었다. 한참 연설을 하다가 붙잡힌 그는 벌컥 화를 내며 무기를 휘둘러댔다.
“이 크고 멍청한 놈! 놓지 못하겠느냐!”
저 태도를 보니 평소에 록스피우스가 얼마나 얕잡아 보였는지 알만했다.
“덩치만 크고 아둔한 놈!”
데덱은 성이 나 붙들린 채 무기를 휘둘러댔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록스피우스는 큭큭, 웃더니 마치 아이가 장난감을 망가뜨리는 것처럼 외눈 오거의 손발을 차례로 뜯어냈다.
부욱!
촤아아아!
피가 쏟아지자 데덱이 돼지처럼 꽥꽥 비명을 질러댔다.
“꾸아아아악!”
지켜보던 용병들은 놀라서 허둥댔다. 록스피우스는 데덱의 사지를 뜯어 몸뚱이만 땅에 내려놓았다.
팔다리가 사라진 데덱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간 이 몸이 오냐오냐하고 힘을 한 번 쓰지 않았더니 호구로 보인 모양이로구나. 이제 우리 ‘산주인’들의 힘을 느껴보라!”
록스피우스는 몸뚱이만 남은 데덱을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콰아앙!
무슨 소리가 폭발이라도 일어나는 것 같았다. 데덱은 그야말로 케첩이 터진 것처럼 죽었다. 그리고 곁에 있던 그의 수하들은 충격에 우르르 넘어졌다.
“크워어어어어!”
록스피우스가 소리를 지르며 팔을 휘두르자 10여 마리 이상의 오거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유적 앞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용병의 진지가 단번에 철거됐다.
“으아아아아!”
“도망쳐! 저 미친 거인이 날뛴다!”
유적 앞에 있던 이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온순하기 짝이 없게, 석상처럼 있던 거인이 성질을 내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록스피우스는 근처에 있던 커다란 바위를 양손으로 들어 도망치는 용병들을 마구 내리찍었다.
쿵! 쿵! 쿠웅!
한 번 내리찍을 때마다 주변의 지형이 바뀔 정도의 위력이었다.
“감히 네놈들이 선택받은 분을 모욕해! 피와 목숨 외에는 치를 대가가 없을 것이다!”
바위가 온통 피로 범벅이었다. 이윽고 그는 바위를 도망치는 놈들의 머리 위에 던져버렸다.
콰가아아아앙!
산지를 구른 바위가 달아나는 용병들을 완전히 뭉개고 지나갔다. 자욱이 일어나는 먼지 속으로 그들은 모조리 사라졌다.
이 모든 게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도망친 놈들도 좀 있었지만 록스피우스는 콧방귀를 한 번 뀌고는 무시해 버렸다. 더 손을 쓰기에는 귀찮은 피라미라 여긴 듯했다.
그가 공격하지 않은 건 나와 루드, 근처에 있던 인자한 어머니 직속의 엘프들 뿐이었다.
“왕이시여! 마침 급료를 지급할 기간이었는데, 이로써 왕의 동료인 제 고용주의 금화를 아낄 수 있게 됐나이다! 크하하하!”
자리에 털썩 앉아 호탕하게 웃는 그를 보고는 황당한 기분이 됐다.
“이래서 거인은 친구가 없다고 하는군?”
“그렇나이다. 제가 진심을 보이면 모두 극도로 공포를 느끼고 도망치니, 그저 석상처럼 우직이 있을 수밖예요. 그 때문에 우습게 보였나 보옵니다.”
용병대가 흩어져버리긴 했지만 이 자 하나만 있으면 그딴 불한당들은 필요가 없으니 괜찮다. 그러다 나는 한 가지를 발견했다.
“팔에 그려진 드래곤의 두개골 문신은 무엇인가? 열두 개로군?”
내가 그걸 발견하자 록스피우스는 다소 쑥스러워 하면서도, 그걸 알아줘서 기쁘다는 듯 순진하게 웃는다.
“제가 목을 분지르고, 날개를 뽑아 죽인 드래곤의 숫자이옵니다. 위대한 분께 후원받는 왕께서 보시기엔 우습겠습니다만, 제겐 큰 자랑이옵니다. 크하하하하!”
이 녀석, 생각 이상으로 거물이었구나. 드래곤을 저 정도로 패 죽인 걸 보니 거인 중에선 영웅이라 불리는 부류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녀석이 감히 나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겸양을 표하고 있었다. 강력한 부하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꽤 능력이 있었군. 앞으로 잘 부탁하지.”
“미천한 소인이야 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왕이시여!”
그리 얘기하면서 근처를 보니 인자한 어머니의 부하들인 호수 엘프들이 오들오들 떨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거인을 보고 경악했는데, 그런 거인조차 당연히 깔보는 날 더 질린 듯 보고 있었다. 그때 넋이 반쯤 나간 어떤 호수 엘프가 중얼거렸다.
“저분은 커다란 건 뭐든지 정복하는군요. 저희 주인님도 그렇고….”
***
“자네는 정말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나 보군. 저런 거인이 고개를 조아린다니.”
유적지 안으로 같이 들어온 루드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별 거 아닙니다.”
“별 게 아니긴. 솔직히 제국 12궁정도 와야 저 거인장군과 맞상대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자네는 여유가 넘치지 않나.”
솔직히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신격은 아니지만 신성에 반쯤 발을 걸친 처지다. 거인 중 영웅이라고 해봐야 필멸자에 불과하다. SSS등급 스킬을 발동하면 그냥 썰려나갈 터.
그 정도로 필멸자와 초월자의 간극은 거대하다. 하지만 루드에게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웠기에 한 마디만 했다.
“사실 저는 별 거 아닙니다. 베오울프라면 저 거인을 일격에 때려죽였을 겁니다.”
베오울프는 화신도 두들겨 팼으니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인간이긴 했지. 게다가 후원 없이 달성한 경지니, 그자가 정말 사람인지 뭔지 알 길이 없군.
“…….”
루드는 천외천의 경지에 할 말이 없는 듯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우리는 한참 그대로 지하 유적을 내려갔다. 길이 복잡해서 루드의 안내를 받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한참 내려갔을 때 루드가 멈춰 섰다.
“이대로 쭉 내려가면 목적지네. 함께 가고 싶지만 더 내려갔다가 나는 미쳐죽고 말걸세.”
지난번에야 엘프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지금은 그를 보호해줄 게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벌써 그는 압박감을 느끼는 듯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안내를 위해서 상당히 무리한 것 같았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유적 밖으로 나가 계시죠. 이미 길은 외웠습니다.”
루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되돌아갔다. 그 같은 필멸자에겐 지금 이 압박감은 감당하기 어려운 거겠지. 아닌 게 아니라 계단 아래 시커먼 어둠 속에서 초월적인 존재가 똬리 틀고 있는 게 느껴졌다.
뚜박뚜벅.
어두컴컴한 통로 속에서 내 발자국 소리만 울렸다. 사실 이 유적에 대해 들었을 때 짐작이 가는 게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쫓아온 거고.
“으…….”
엄청난 독기가 아래에서 피어올라오고 있었다. 여길 뚫고 들어갔다니 엘프 마법사들과 루드의 근성도 알아줄 만했다.
계단이 끝나자 거대한 공동이 나타났는데, 앞을 본 나는 탄성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허어!”
거대한 신적 존재의 육체가 조각조각 나서 벽에 꽂혀있었다. 금방이라도 그 빛이 꺼질 듯한 마법의 검들이 그 육체를 공동의 벽면에 고정한 모양새였다.
“어둠의 대군이로군….”
이 정도 존재감이니 루드 일행이 악몽을 헤매는 듯한 기분에 빠져 허둥대다가 겨우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잘린 신체(神體)는 본디 뚱뚱한 거인과 비슷한 형상이었던 거 같다.
하지만 특이한 건 그 몸이 수많은 지렁이나 장어와 같이 생긴 것들이 뭉친 살덩이란 점이었다. 징그럽기 짝이 없었는데, 죽은 지 한참된 것 같은 지금도 그 지렁이들은 간헐적으로 꾸물꾸물거렸다.
“역시 여기는….”
틀림없이 저 존재는 ‘끈적거리는 역병’이었다. 아퀼라에게 듣기로 산호공주가 저 존재와 자폭했다고 했다. 잠시 어둠의 대군의 몸뚱이에서 눈을 떼고 주변을 살피니, 수많은 그림이 벽면에 그려져 있었다.
“산호공주….”
그림은 모두 한 여검객이 저마다 특별한 자세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었다. 특이한 점은 그녀가 검을 휘두르는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 어둠의 대군이나 그들을 따르는 괴종족이었다. 그림들마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주석이 달려있었는데 아마 어둠의 대군과 괴종족마다 상대하는 법을 적어둔 듯했다.
이것은 내 발전을 위해서 더없이 소중한 것으로 보였다. 나는 주변을 더 탐색하던 중 잘 만들어진 책을 발견했다. 저기에 뭔가 중요한 내용이 담겼으리라. 막 손을 뻗어 그걸 쥐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인간이여, 거래를 제안한다.”
황급히 뒤를 돌아본 나는 끈적거리는 역병이 말을 건 것을 깨달았다.
“…죽은 거 아니었나?”
“이 몸은 너희 인간과 다르게 쉽게 죽지 않는다. 그 고약한 여자도 쓰러진 날 어쩌지 못하고 이렇게 가둬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50년 전에 희미하게 의식을 되찾았다.”
역시 초월자인가. 아퀼라에게 들은 것과 다르게 역시 산호공주도 완전히 그를 죽이지 못했군.
“산호공주는?”
“그 여자라면 소멸했다. 작은 티끌조차 남기지 못했지.”
“그런 건가….”
“그리 묻는 걸 보니 네놈은 이곳의 내력을 아는 자로보군. 그나저나 인간이 맞는 건가? 어찌 인간에게 이런 심후한 기운이….”
그는 기운이 없어 간파하는 힘을 쓰진 못했다. 그저 초월자 특유의 날카로운 감각으로 날 살폈다.
“음? 이것은? 네놈! 내 아버지와 대적하는 이들의 힘을 받았구나. 그것도 여럿의! 진짜 뭐 이런 놈이 다 있는 건가!”
하지만 나는 그의 말 때문에 오히려 놀랐다.
“내 아버지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음… 모르나 보군. 하긴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니. 좋아, 본디 이것은 비밀이지만 지금 네놈의 호의를 얻고 싶으니 말해주겠다. 나는 발버둥치는 죽음의 아들이다.”
“정말인가!”
“그렇다. 내 아비가 가졌던 힘을 탐내다가 그에게 버려진 자식이지.”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산호공주가 대단했다고 하나 어찌 어둠의 대군을 베는 검술을 만들 수 있었겠느냐?”
“하면?”
“사실 그 힘은…….”
거기까지 말한 끈적거리는 역병은 입을 닫았다.
“뭐야? 말하다 말기야? 호의를 얻고 싶다며.”
“내가 발버둥치는 죽음의 아들임을 알린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다. 산호공주의 비밀이나 여타 얘기를 더 듣고 싶다면 거래에 응해라. 그리고 저 벽화!”
끈적거리는 역병은 반쯤 썩어 문드러진 육체 일부분을 들어 산호공주가 그려진 벽화를 가리켰다.
“저것은 네놈이 원한다고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초월자를 베는 공전절후한 기예. 저 검술을 익히고 싶다면 거래에 응하라. 그렇다면 길을 알려주지.”
“역시 혼자는 익힐 수 없는 건가!”
내가 길게 탄식하자 그가 날 비웃었다.
“크크큭, 그럼 저게 인간의 검술인 줄 알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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