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esperson Kim Yubin RAW novel - Chapter 129
129화 – 협상을 하다(2)
협상 장소는 페어몬트 샌프란시스코로 1907년에 오픈해 지금까지 수많은 명사가 묵었던 유명한 호텔이었다.
내부의 화려함과 비교되는 굳은 얼굴로 유빈이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질렀다.
최종 협상 장소를 어제저녁에야 통보받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 번갈아 열리던 인수합병 협상의 최종 장소가 샌프란시스코라는 것은 협상의 주도권이 에이티제이에게 넘어갔다는 의미였다.
협상단임을 나타내는 금색 명찰을 차고 걸어가자, 로비에 죽치고 있던 몇몇 사람이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제네스와 에이티제이의 합병은 초거대 다국적 제약회사의 탄생이라는 의미에서 미디어에서도 주목받고 있었다.
“멜리나, 협상단에 동양인이 있었어?”
“동양인? 아니. 지금까지는 없었어. 어느 회사 사람이었는데?”
“그렇게까지 자세히는 못 봤어.”
“그냥 진행 요원이겠지.”
“아닌데······ 분명히 금색 명찰이었는데······.”
“그나저나 제네스 주주들은 뿔 좀 나겠는걸. 오늘도 제네스 주가 급락 중이야. 오전장에서만 4% 빠졌어.”
“합병이 거의 확실하니까. 인수금액도 1,000억 달러 이상이라는 소문이고.”
“여유 있는데? 너 제네스 주식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벌써 팔았지. 그 돈으로 에이티제이 좀 사 놨고. 하하.”
“키야, 재빠르기도 하시지. 아무튼, 인수 금액이 예상보다 크면 마크 램버트 CEO한테는 부담될 거야.”
협상 시각까지 단 30분을 남기고 유빈이 페어몬트 호텔이 자랑하는 비즈니스 룸으로 들어갔다.
이 장소에서 기업은 물론이고 국가 간에도 수많은 협상과 회의가 벌어졌다.
기다란 책상을 가운데에 두고 서너 명씩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치열해야 할 협상 장소와 어울리지 않게 화기애애해 보였다.
특히, 에이티제이 협상단은 3개월 동안 이어진 협상을 유리하게 조율한 덕분인지 조금 더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
아직 착석한 사람은 없는 가운데 유빈이 미리 와 있던 마크 램버트에게 다가갔다.
“미스터 램버트.”
“미스터 킴. 시간에 맞춰 왔군. 샌프란시스코 관광은 잘했나?”
제임스 본드만큼이나 네이비 블루 수트가 잘 어울리는 램버트가 기분이 좋은지 유들유들하게 호응했다.
“협상이 끝나면 돌아볼 계획입니다.”
“그래? 자네 얼굴이 뉴욕에서보다 편안해 보이는군.”
‘포기한 건가?’
마크 램버트는 그의 업무실에서 유빈의 열변에 순간적인 감정으로 기회를 줬지만, 톰 로렌스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대화를 곱씹어 볼수록 황당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3일간 도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그의 말처럼 인수금액을 줄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지만, 사실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제네스의 곳간은 1,100억 달러(약 130조원)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풍족했다.
주주와 이사회를 안심시킬 자신도 있었다.
애브비의 연 매출은 약 10조 원.
에이티제이 인수와 동시에 MBG로부터 판매권을 가져오면 제네스의 영업력으로 매출은 더 키울 수 있었다.
TNF-알파 차단제 시장도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크 램버트는 약가 인상도 고려하고 있었다.
몇 년 안에 투자금을 뽑을 수 있다는 게 그와 협상단의 계산이었다.
제네스 협상단이 그동안 얻은 수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제리 클레멘트 회장이 끝까지 고집하던 직원의 완전 고용 승계를 협상 조건에서 뺀 것이었다. 물론 노력은 하겠다는 문구가 들어가겠지만, 강제성은 없었다.
더 큰 수확은 에이티제이가 MBG와 맺은 계약을 자기들 선에서 처리하겠다고 약속한 것이었다.
MBG는 애브비뿐만 아니라 개발 중 신약인 AT-2와 AT-3의 판매권을 갖고 있었다.
남은 계약 기간은 5년으로 계약 해지를 하려면 100억 달러 이상의 위약금을 지급해야 했다.
그런데 그 문제를 에이티제이가 해결한다고 못 박았으니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설마 책임지겠다는 말을 무를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대답한 유빈이 마크 램버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미스터 램버트, 오늘은 제가 악역입니다. 그 이유는······.”
유빈이 가까이 다가오자 처음에는 인상이 굳어진 마크 램버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할 말을 마친 유빈이 멀어졌지만, 그는 한참 동안 유빈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확실한가?”
“저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장단만 잘 맞춰 주십시오.”
“으음······.”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던 마크 램버트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자, 이제 시작할까요?”
포탄은 장착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포문을 연 사람은 에이티제이의 창업자이자 회장인 제리 클레멘트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강렬한 태양을 어떻게 피했는지 하얀 피부의 소유자였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낀 그는 마크 램버트보다 더 젊었다.
연구원 출신이라 그런지 수트보다는 흰색 가운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이미지였다.
그의 말에 하나둘씩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빈이 자리에 앉자 에이티제이 측이 술렁거렸다.
제네스 협상단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인물, 그것도 동양인이 끼어 있었다. 더 중요한 건 그의 좌석 위치가 마크 램버트의 바로 오른쪽이라는 사실이었다.
오른팔로 알려진 톰 로렌스가 똥 씹은 표정으로 왼쪽에 앉아 있는 바람에 유빈의 자리는 더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유빈은 이 회의실 안에 있는 유일한 동양인이라 더욱 그랬다.
“이쪽은 유빈 킴입니다. 이번 협상에서 몇 가지 확인하기 위해 협상단에 참석했습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마크 램버트의 한 마디에 정리되었다. 그가 밝힌 건 유빈의 이름뿐이었지만 CEO가 보증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마크 램버트는 이번 인수합병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협상단 한 명이 바뀌었다고 해서 큰 흐름이 바뀔 일은 없었다.
“자, 그럼 정리해 보죠. 인수금액은 저번 협상에서 합의한 것처럼 1,100억 달러입니다. 에이티제이 직원에 대한 고용 승계는 마크 램버트 CEO께서 최대한 신경 써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애브비를 비롯한 신약에 대한 판매권, 즉 MBG와의 판매 계약 해지는 인수 합병 발표 후 3개월 이내에 에이티제이 측에서 마무리 짓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유빈의 오른편에 앉은 제네스 협상단 단장인 잭 손튼이 합의된 내용을 읊어 갔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부분과 관련하여 이견이 있거나 추가로 제안할 내용이 있으면 양측에서는 자유롭게 말씀해 주십시오.”
보아하니 다들 빨리 끝내고 파티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양쪽으로 나뉜 두 그룹 모두 약속이라도 한 사람들처럼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잭 손튼이 읊은 그대로 사인만 하면 되는 수순이었다.
“이견 있습니다.”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하고 유빈이 입을 열었다.
톰 로렌스는 유빈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인상을 찌푸렸고 ‘이제 사인만 하면 끝이구나.’ 하는 표정을 애써 들키지 않으려던 에이티제이 측 사람들의 굳게 닫혀 있던 입도 벌어졌다.
‘뭐야, 이 녀석은.’
자리가 한 칸 옆으로 밀려난 것도 가뜩 기분이 좋지 않은데, 나서기까지 하자 잭 손튼 단장이 유빈을 쏘아봤다.
하지만 마크 램버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대놓고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크흠, 말씀하시죠.”
이번에는 에이티제이 협상단장인 레이몬드 스미스가 목구멍에서 겨우 말을 끄집어냈다.
“인수 금액을 다시 제시하고 싶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금액은 1,100억 달러에서 30%를 낮춘 760억 달러입니다.”
“······.”
“콜록, 콜록.”
너무 황당하면 말이 안 나오는 법이다.
톰 로렌스는 물을 마시다 사레가 걸렸고 나머지는 눈동자만 뒤룩뒤룩 굴렸다.
잭 손튼은 반쯤 입을 벌린 채 유빈을 쳐다보고 있었고 나머지 제네스 협상단은 ‘이건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냐.’ 하는 표정으로 유빈, 잭 손튼 그리고 마크 램버트를 번갈아 쳐다보며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에이티제이 측의 반응은 더했다.
이제 곧 1,100억 달러짜리 협상을 마무리하고 페어몬트 호텔 방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웬 동양인의 폭탄 발언으로 다들 혼란에 빠졌다.
제리 클레멘트 회장은 연신 옆에 앉아 있는 레이몬드 스미스와 귓속말을 나눴다. 동시에 마크 램버트의 의중을 읽으려는 듯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마크 램버트였다.
유빈의 발언이 그의 허락 없이 나왔을 리는 없었다.
“잠깐만요. 지금······ 미스터 킴의 의견이 제네스의 통일된 의견입니까? 이건 협상을 엎자는 말 아닙니까?”
레이몬드는 제네스 협상단의 표정으로 봐서 자초지종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마크 램버트와 유빈 둘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에이티제이 측에서 760억 달러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엎어야겠죠.”
유빈의 대답에도 모든 시선은 마크 램버트에게 가 있었다.
“1,100억 달러는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마크 램버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유빈을 지지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톰 로렌스가 끼어들려고 했지만, 마크 램버트의 손짓 한 방에 입을 다물었다.
“크흠, 미스터 램버트, 이렇게 되면 협상이 다시 길어질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에이티제이에서 미스터 킴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겁니다. 그러니까 그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 주십시오.”
“헛······.”
“이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긴장감이 맴돌았다.
“······좋습니다. 우선 인수금액을 760억 달러로 책정한 이유부터 들어보죠. 합의했던 금액에서 30%를 깠으면 적절한 이유가 있겠죠? 그 이유가 납득이 안 된다면 우리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유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유창한 영어가 비즈니스룸을 가득 채웠다.
“가장 중요한 애브비의 가치를 다시 책정했습니다. 저는 셀아키텍트의 바이오시밀러가 곧 EMA의 허가를 앞두고 있어서 애브비의 가치가 과대평가됐다고 생각합니다. 에이티제이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고작 바이오시밀러가 이유입니까?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 그 안에서도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회사에서 나온 바이오시밀러를 의사들이 처방할 것 같습니까? 게다가 그 약은 아직 승인도 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은 ‘나 무식합니다.’라고 하는 고백하는 것 같군요. 미스터 스미스. 잘 들으십시오. 머토마의 EMA 승인 여부는 제네스가 아니라 에이티제이의 불안 요소입니다. 그걸 제네스가 떠안을 필요는 없죠? 안 그렇습니까?”
유빈은 평소와 다르게 제대로 악역을 하고 있었다.
협상할 때는 차후를 생각해서라도 나쁜 관계로 끝나서는 안 되었다. 적당히 줄 것은 주면서 원하는 것을 가져오는 것이 협상의 정석이었지만, 유빈은 그런 기본은 모르는 사람처럼 강경파와 나쁜 역할에만 집중했다.
마크 램버트 역시 유빈의 강경 발언에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유빈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는 에이티제이 쪽에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전전긍긍한 모습이었다.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 알아야 협상도 되는 것이었다.
“크흠······.”
“머토마가 승인을 받고 유럽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을 때, 점유율을 가정해 봤습니까?”
“······최대 10%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가정은 해 봤다는 이야기군요. 에이티제이에서는 어떻게든 깎아내리고 싶겠지만, 인수하는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머토마가 2년 이내에 애브비 점유율을 최소 50% 잡아먹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지금 나눠 드리는 자료를 분석해서 나온 결과입니다.”
유빈의 손짓에 진행요원이 자료를 협상단의 앞쪽에 놓았다.
마크 램버트에게 보여 준 설문조사를 비롯해 최근 임상 스위칭 결과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와 작은 침음성이 조용한 비즈니스룸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