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esperson Kim Yubin RAW novel - Chapter 43
43화 – 리빌딩, 사랑 산부인과(2)
최석원이 신경질적으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몇 번을 걸어도 상대방이 통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년이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지? 오백만 원만 먹고 잠적한 건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녀가 잠적할 이유가 없었다.
최석원의 손에 몇 장의 사진이 들려 있었다.
여자가 써니힐병원에서 시위하는 모습, 병원 대기실에서 의사에게 삿대질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최석원은 여자를 써니힐병원에 보내 놓고 확인하기 위해 흥신소 직원을 고용했다.
손에 들려 있는 사진은 그 직원이 보내 준 사진이었다.
사진을 확인하고 돈을 여자에게 입금한 최석원은 다른 일을 꾸미기 위해 전화를 했지만, 시위녀는 며칠째 전화를 받지 않았다.
“네가 그래 봤자 내 손아귀 안이지. 오백만 원 가지고 며칠이나 쓰겠냐. 어차피 또 술집에 나가겠지.”
최석원이 손에 든 사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유빈이 당황했을 걸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이 정도 진상이면 분명 처방에도 타격이 있을 게 분명했다.
최석원은 유빈을 망칠 궁리를 다시 했다.
의사 비위 맞추며 힘들게 실적을 올리기보다 훨씬 쉽고 간단했다.
한번 발을 들여놓으니 마약 같은 쾌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네까짓 게 나한테 덤벼?’
최석원이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고 선생? 이따 좀 만납시다.”
누군가와 약속을 한 최석원의 눈이 광기에 번들거렸다.
*
사랑산부인과 김이진 원장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아직 도메인 등록을 하지 않았지만, 20년 만에 갖게 된 병원 홈페이지가 그렇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눌러 봤다.
“원장님 Q&A는 어떻게 할까요?”
“내가 컴맹이라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겁나요. 호호.”
“음, 제 생각에는 남겨 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원장님께서 직접 답글을 달아 주시면 환자들이 병원에 대해 더 친근하게 느낄 것 같습니다.”
“그럴까요?”
“솔직히 대부분의 병원 홈페이지 답글은 똑같은 내용을 붙여넣기를 하거나 유선으로 문의하라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답변이잖아요.”
“맞아요. 정말 그래요.”
같이 듣고 있던 이 간호사가 맞장구를 쳤다.
“단지 병원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말고 Q&A에서 다른 병원과 차별화를 하는 방법이 좋은 전략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붙여넣기가 뭐죠?”
“……최소한 붙여넣기를 할 일은 없으시겠네요. 하하.”
유빈이 웃으며 김이진 원장에게 기본적인 한글 용어를 말해 줬다. 워낙 컴퓨터와 담을 쌓으신 분이니 그럴 수도 있었다.
“일단 찬찬히 보시고 추가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도메인이 등록되면 저하고 같이 다시 전체적으로 훑어보면 될 것 같습니다.”
“휴우, 안 하던 일을 계속 시도하니 힘들기도 하지만 흥분되네요. 요즘 유빈 씨 덕분에 인생이 재밌어졌어요. 남편도 왜 그렇게 웃고 다니느냐며 물어보더라고요. 호호.”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축제 일은 잘되고 있어요?”
“네, 하나씩 준비해 가고 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상담만 신경 쓰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다 제 일인데요.”
“저도 같이 가도 되는 거죠?”
옆에 서 있던 이 간호사가 기대하는 눈초리로 물었다.
“물론입니다. 아마 사람이 몰리면 원장님 혼자서 상담해 주시기에는 벅찰 수도 있습니다. 간단한 질문은 이 간호사님이 보충 설명해 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죠? 원장님.”
“당연하죠. 왜요? 이 간. 이틀 동안 쉬고 싶어요?”
“아뇨. 무슨 소리세요. 원장님. 원장님 가는 곳에는 제가 꼭 같이 가야죠. 혹시나 해서 유빈 씨한테 물어본 거예요. 호호.”
사랑산부인과는 일이 착착 진행되었다.
사랑산부인과 말고도 세원여대 근처에 있는 노원구 황진주산부인과나 의정부의 예손산부인과도 C급 병원에서 대변신을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대로 잘 안 되는 병원도 있었다.
지금 유빈이 대기실에 앉아 있는 한양산부인과가 대표적이었다.
환자도 별로 없었지만, 유빈은 대기실에 30분째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양산부인과는 홍정호의 인수인계에 따르면 B급 병원으로 세 명의 원장이 공동대표로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셋 중 유일하게 영업사원을 상대하는 손진수 원장은 전형적인 처방 인센티브를 요구하는 부류의 의사였다.
첫 방문에서 대화를 나누고 나서 유빈은 고객 리스트에서 한양산부인과를 바로 지워 버리려 했다.
하지만 전임자인 홍정호가 손진수 원장에게 PMS(Post Market Surveillance : 시판 후 조사, 약품 시판 후 다수의 환자를 대상으로 부작용 또는 새로운 효능 등을 수집하는 조사로 임상 시험의 마지막 단계)를 맡겨 놨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 위치도 나쁘지 않고 단골 환자도 꽤 있어서 처방은 잘 나왔지만, 유빈이 담당자가 된 이후로는 제네스 약품에 대한 처방은 내림세였다.
하지만 홈페이지 게시판의 병원 평도 나쁘지 않고 나머지 두 원장을 공략할 생각으로 유빈은 하반기 타겟 리스트에 편입해 놓은 상황이었다.
어떻게 공략할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드디어 원장실 문이 열렸다.
환자 한 명을 이렇게 오랜 시간 진찰하다니.
제약회사에는 까칠하지만, 환자를 대하는 자세는 훌륭한 의사구나 생각하려는 찰나 정장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원장실에 나왔다.
누가 봐도 환자는 아니었다.
게다가 둘 다 유빈이 아는 사람이었다.
“김유빈!”
정장을 입은 사람 중 한 명도 유빈을 알아봤다. 그는 백서제약의 최한솔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키 큰 남자는 바로 이동우 지점장이었다.
유빈과 이동우의 눈빛이 허공에서 강렬하게 부딪혔다.
최한솔은 이미 엑스트라였다.
예전 같으면 똑바로 바라보는 것도 어려웠던 이동우의 눈을 유빈은 담담히 바라봤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뭔가가 끓어 올라왔다.
“이제 인사도 안 하는구나. 김유빈.”
겉으로는 점잖지만, 사람을 깔아보는 듯한 가식적인 모습은 여전했다.
“인사는 받을 만한 사람한테 하는 겁니다.”
“뭐? 그런데 이 자식이……. 요즘 잘 나간다고 아주 건방이 하늘을 찌르네.”
“출세를 위해서 부하 직원을 이용만 해 먹고 버리는 사람에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죠.”
이동우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유빈을 쳐다봤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유빈과 지금 모습은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사회성 없이 그저 열심히만 일하는 눈치 없는 녀석.
이용하기 딱 좋은 녀석.
이동우에게 유빈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다시 만난 유빈은 그가 알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실적은 차치하고 눈빛부터가 달랐다.
어딘가 연약하고 불안했던 눈빛은 고요하고 단단했다. 아무리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고는 하지만 이동우에게 던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날이 서 있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날카로움이었다.
“제네스 들어가세요.”
긴장감이 팽배한 소강상태에서 간호사가 끼어들었다.
“요즘 많이 힘들죠? 앞으로는 더 힘들 겁니다.”
이동우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유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미소는 덤이었다.
이동우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그의 점잖은 가면에 금이 가려 했다. 병원이라 큰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이동우에게 지난 3개월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담당 지역의 실적이 급격하게 내림세를 보이는 바람에 거의 매일같이 본부장에게 시달렸다.
최근 이동우의 일정은 최한솔 그리고 김철환과의 동행방문이 대부분이었다.
어떻게든 그 둘의 담당 지역 실적을 올려야 했기에 직접 나선 것이었다.
회사 정책만으로는 부족했기에, 이동우는 사비까지 들이면서 처방 인센티브를 마련했다.
“최한솔, 아버님께 이바돈 프로모션 연장하는 건은 말씀드려 봤어?”
최한솔의 아버지는 백서제약과 거래하는 대형 도매상이었다. 강북 지역 대부분에 이바돈을 비롯한 약품을 납품했다.
“그게……. 말씀은 드렸는데 더는 힘들다고 하십니다. 두 달 동안 이바돈을 10개 주문하면 1개 더 주는 프로모션을 했는데도 주문이 많이 늘지도 않고 남는 것도 없어서 그만하시겠다고…….”
“그러니까 더 세게 해야지. 아예 10개 주문하면 2개를 더 주는 식으로 하면 안 되나?”
“그건 좀…….”
‘이게 자기 회사 아니라고 막 이야기하네.’
어차피 자신이 물려받을 회사였다. 아버지가 손해 보는 건 내가 손해 보는 것이었다.
최한솔이 인상을 찌푸렸다.
“야, 이 새끼야. 내가 나 때문에 이러냐? 네 실적이 엉망이라 이러는 거 아니야? 어떻게든 아버지한테 이야기해서 실적을 올려야지 네가 인상을 써?”
“……죄송합니다.”
대답은 했지만, 최한솔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본부장한테 깨지는 것 때문에 필사적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말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말하는지.
슬슬 다른 지점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최한솔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조용히 좀 하세요.”
이동우의 높아진 언성에 간호사도 대놓고 이야기를 했다.
“지점장님, 그만 가시죠. 김유빈 저 새끼하고 이야기해 봤자 좋을 것도 없습니다.”
“…….”
이동우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뗐다.
성질은 났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예전에는 부하 직원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원장실에 들어간 유빈을 본 손진수 원장의 얼굴이 굳었다.
조금 전 백서제약 직원과 나눴던 생산적인 대화로 좋았던 기분이 금방 가라앉았다.
“안녕하십니까, 원장님.”
“앉으세요. 오늘은 무슨 일인가요?”
심기가 불편하니 나오는 말이 딱딱할 수밖에 없었다.
“PMS 마무리됐다는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아, PMS. 성 간호사! 정 원장한테 PMS 자료 좀 받아 와 줘. 그럼 이제 입금되는 건가?”
“네, 환자 10명에게 받아 주셨으니까 50만 원이 입금될 겁니다.”
PMS는 공짜가 아니다.
환자 한 명당 5만 원의 조사비용이 의사에게 지급된다. 홍정호가 한양산부인과에 PMS를 맡긴 이유였다. 이렇게라도 해야 처방 건수를 유지할 수 있었다.
“병원에 그다지 도움은 안 되지만 그래도 전임자는 이런 거라도 맡기면서 노력했는데, 이번 담당자는 영 하는 게 없어요.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야 나도 처방을 할 텐데 말이야. 그렇죠?”
현재 제네스 담당자가 눈앞에 앉아 있는데도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제가 좀 부족합니다.”
유빈은 PMS 자료만 받으면 나갈 생각이었다.
이 사람하고는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손 원장은 오랜만에 방문한 유빈에게 작심한 듯 말을 이어 갔다.
“우리 병원에서 제네스 약품 꽤 처방하는데. 뭐 없습니까? 조금 전에 다녀간 백서제약의 반만 열심히 해 주면 좋겠네요. 백서제약 노원구에서 요즘 잘 나가죠? 이렇게 열심히 하니까 잘될 수밖에요. 안 봐도 뻔합니다.”
어떤 게 열심히 한다는 건지.
리베이트를 주면 열심히 하는 건가. 유빈은 슬슬 열이 받았다. 의사란 사람이 돈에 눈이 먼 것 같았다.
“글쎄요. 제가 받은 자료로는 이바돈과 디안트 모두 작년 대비 30% 정도 점유율이 하락했습니다.”
마음을 정한 유빈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
“그리고 한강대병원에서는 이바돈과 디안트가 아예 처방 목록에서 빠졌습니다.”
“……그래요?”
손 원장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사실 그는 다른 병원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유빈이 무표정하게 이야기를 하자 그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
“아마 최근 한 달 동안 열심히 다녔을 겁니다. 하락한 실적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겠죠. 지점장이 매일 동행 방문할 정도면 심각할 겁니다. 그런데 그냥 열심히 하면 좋을 텐데 대놓고 몇몇 병원에 처방 인센티브를 제안하고 있어서 노원구 산부인과 의사회 안에서도 말이 조금씩 나오는 것 같습니다.”
“크흠…….”
영업사원 주제에 말하는 거침없이 말하는 폼이 건방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손 원장이 불편해하거나 말거나 유빈은 말을 이어 갔다. 이왕 꺼낸 말 속 시원하게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물론 마치 한양산부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말했다.
“요즘 리베이트 쌍벌제 때문에 어수선한 시기라 병원들도 제약회사가 방문하는 일에 민감해 하고 있는데 참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무대뽀라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하는 영업사원은 처음이었다.
영업사원은 손 원장에게 무슨 말을 해도 ‘네네’ 하기 바쁘고 반박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유빈의 말을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그냥 듣고 넘기기에는 심각한 문제였다.
유빈의 태도에 말문이 막힌 손진수 원장의 뒤로 마침 PMS자료를 가진 간호사가 나타났다.
“원장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좌 입금에 문제가 생기면 연락 주십시오.”
대답 없는 손 원장을 뒤로하고 유빈은 병원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