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186
186화. 방관
임근용은 육 노부인을 부축해 침상에 눕히고, 또 사 마마가 건네주는 뜨거운 수건을 받아 육 노부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육 노부인이 다정하게 말했다.
“아용아, 이 할미한테 이야기 좀 해 주렴.”
임근용이 미소 지으며 육 노부인의 맞은편에 있는 비단 방석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할머님은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으세요?”
육 노부인은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 보니 조용한 것을 좋아해 집안의 대소사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며느리가 문안을 드릴 때도 늘 건강이 좋은 건 아니다 보니 자연히 손자며느리들과도 별로 친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생에 육 노부인은 녕아를 아주 예뻐했고 사 마마가 자주 녕아를 안고 가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그래서 임근용은 육 노부인과 별로 접촉이 많지 않았어도 그녀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지금 육 노부인과 함께 이 방에 숨어 있으니 정말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이런 때에 이 노부인에게 잘 보여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육 노부인이 잠시 생각해보다 말했다.
“요즘 아가씨들이 뭘 좋아하는지 말해 주려무나? 할미는 너무 오랫동안 외출을 하지 않아서 새로운 물건들 같은 건 하나도 모른단다.”
임근용은 잠시 멍해졌다. 전생에서 그녀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홀로 쓸쓸히 지내 처량한 신세였다. 또 이번 생에서는 너무 바빠서 즐길 시간이 없었다. 모든 시간과 노력을 돈 버는 데 쓰고 도씨와 임신지를 위한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는 데 쓰다 보니 그런 쓸데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임근용은 임근지나 다른 아가씨들이 지금 무엇을 좋아하는지, 지금 가장 유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자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건 역시 먹는 것과 입는 것 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할머님 때랑 다를 게 없어요. 풀싸움하고, 꽃 보고, 그네 타고, 호수 유람하고, 향 피우며 부처님께 절하고, 맛있는 걸 만들고, 좋은 연지를 만들고, 유행하는 옷을 만들면서 누가 가장 솜씨가 좋은지 비교하고 놀지요.”
육 노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그럼 넌 뭘 제일 좋아하느냐?”
임근용은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한가할 때 고훈을 불고 다도를 하고 글씨를 쓰고 책을 봐요. 하지만 제일 오래 하는 건 장부를 보는 일이에요.”
어차피 이미 밖에 명성이 자자해 숨길 필요도 없으니 차라리 먼저 까발리는 편이 나았다. 그럼 나중에 임세전을 불러들여 다음 할 일들을 상의하기도 편할 터였다.
육 노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성실한 아이로구나. 나도 젊었을 때 너희 할아버지를 도와 장부를 좀 보았었는데 나중에는 몸이 안 좋아져서 할 수 없게 되었어. 그 작은 글자들이 꼭 춤을 추는 것 같아서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어지러워졌거든.”
임근용이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할머님께서 쉬면서 복을 누리실 때가 되었었나 보네요.”
이때쯤 되자 밖은 이미 조용해져 있었다. 시녀가 조심스럽게 들어와 말했다.
“노부인, 대부인과 아가씨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육 노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피곤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러가 말을 전했다.
임근용도 그 틈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님, 이제 그만 쉬세요. 손자며느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육 노부인은 “응” 하고 대답하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 * *
임근용이 침실에서 나오니 임옥진과 육운은 이미 가고 없었다. 육함만이 밖에 서서 그녀를 등진 채 문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들은 그가 고개를 돌려 힐끗 그녀를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갑시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계 마마는 두 사람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놀라서 전전긍긍하며 왼쪽 눈으로는 임근용에게 눈짓하고 오른쪽 눈으로는 육함을 살폈다. 여지는 아주 조심스럽게 차를 올렸고 두아를 비롯한 다른 시녀들은 더욱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가 굳은 얼굴로 냉랭한 기운을 풍기며 앉아 있자 주변 사람들이 모두 좌불안석이었다.
임근용이 육함에게 물었다.
“민행, 청설각에 공부하러 안 가요?”
육함은 그때서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 갈 거요.”
임근용이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럼 난 방 정리 좀 할게요. 당신은 옆방에 가서 공부할래요?”
육함이 또 말했다.
“공부 안 할 거요.”
그럼 네 맘대로 해라. 임근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을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육함은 또 한참 동안 앉아서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말했다.
“아용, 다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시오.”
임근용이 웃었다.
“난 그저 누구든 매일 다른 사람한테서 병자라 쓸 데가 없다는 소리나 듣고 있으면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 벌써 열세 살이니 앞으로 어떻게 할지 잘 생각해 봐야죠. 그것 말고 다른 뜻은 없었어요.”
임근용의 이 말을 듣든 말든, 뭔가를 하든 안 하든 그건 그가 결정할 문제였다.
육함이 그녀를 힐끗 보고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일단 건강부터 회복한 뒤에 다시 말해 보겠소. 언제까지 이렇게 살게 둘 수는 없지.”
그가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임근용은 그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걸 직감하고 이 기회를 틈타 말했다.
“혼인 날짜를 받은 이후로 가게 일에 관여한 적이 없어서 세전 오라버니를 못 본 지도 꽤 됐어요. 민행, 혹시……?”
육함이 호쾌하게 말했다.
“일단 이번 달이 지나고 나서 날을 잡아 보겠소.”
육함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 잠깐 나갔다 오겠소.”
그가 어딜 갈지 말하지 않았지만 임근용도 굳이 묻지 않고 그저 문밖으로 배웅했다. 임근용이 막 돌아와 자리에 앉았는데 임옥진을 모시는 시녀 침향(沉香)이 들어와 말했다.
“부인께서 이소부인께 한 번 들르시라 하셨습니다.”
방금 전에 그녀가 했던 말 때문에 부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임근용은 여지를 데리고 그 시녀를 따라 임옥진을 만나러 갔다.
* * *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답답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임옥진은 정색을 하고 창문 앞에 있는 침상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손에 찻잔을 들고 임근용을 등지고 앉아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쪽에 앉던 있는 육운이 임근용을 향해 임옥진이 화가 났다는 눈짓을 했다.
임근용이 인사하니 임옥진은 무시했다. 그녀가 또 다시 인사를 했는데도 임옥진은 여전히 모른 척했다. 육운이 황급히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문만 닫으면 우리는 한 식구잖아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그냥 하세요. 이렇게 성질만 내고 말씀을 안 하시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임옥진이 고개를 돌리고 임근용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내가 너를 너무 우습게 봤나 보다. 시집온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렇게 많은 일이 생기다니…….”
임근용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그녀가 화내는 걸 듣고 있다가 온화하게 말했다.
“고모, 제가 무슨 일을 저지른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저지른 거예요. 아까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화나신 거죠?”
육운은 열심히 임근용을 살폈다. 임근용은 화난 것 같지 않았고 아주 평온해 보였다. 육운은 이것이 그녀의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라 경계심이 아주 높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임근용은 성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심을 아주 깊이 숨기고 있어서 파악하기 어려운 것뿐이었다.
임옥진이 화를 내며 말했다.
“알긴 아느냐? 난 네가 모르는 줄 알았지! 이소야는? 외출했다고 하던데 어딜 갔느냐?”
임근용이 말했다.
“이소야가 따로 말을 안 해서 저도 묻기가 곤란했어요. 뭐 때문에 화가 나셨는지야 저도 당연히 알지요. 알기 때문에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육운이 말했다.
“새언니, 언니가 알고 있다고 해서 하는 말인데 우리 상황도 이해를 해 줘야 해요. 언니는 셋째 숙모가 여섯째 동생을 제 선생한테 보냈으면 하는 거죠? 셋째 숙모는 여섯째를 목숨처럼 여기고 아껴요. 언니가 여섯째를 꼴 보기 싫어해서 시집오자마자 못된 짓을 꾸몄다고 수군대면 어쩌려고 그래요?”
임옥진이 한 마디 쏘아붙였다.
“만약에 육선이 제 선생 문하로 들어가서 이소야한테 짐만 되면 그게 누구한테 제일 손해일 거라고 생각하느냐!”
임근용은 어쨌든 그게 자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했다.
“짐이 되지 않을 거고 반대로 모두에게 좋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육운이 바짝 추격하듯이 말꼬리를 잡았다.
임근용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들은 원래 명절에 새 옷을 입잖아요. 원래는 새 옷이 있었는데 그걸 다른 사람한테 빼앗기고, 별로 좋지 않은 옷 한 벌만 남아서 입고 나갈 수가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제 입장에서는 당연히 울면서 소란을 피울 수밖에 없죠. 안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제가 억울하고 불쌍하다는 걸 어찌 알겠어요? 하지만 만약 저도 좋은 옷을 얻게 된다면 당연히 그렇게까지 억울해할 필요가 없지 않겠어요. 불평이야 좀 하겠지만 그래도 체면은 세워야 하니 지금처럼 절박하게 굴지는 않겠죠.”
여씨가 왜 육함을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고, 앞뒤 재지 않고 오늘 이런 사고까지 쳤겠는가? 여씨에게는 다른 희망이 없기 때문이었다.
비유가 귀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또 아주 정확한 말이기도 했다. 육운은 그 뜻을 알아듣고 임옥진의 어깨를 누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새언니, 언니는 좋은 마음이었겠지만 세심하게 주의하지 않으면 사람들한테 오해를 사거나 이용당하기 쉬워요. 오늘 그 말도 할아버지에 귀에 들어가면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어머니와 상의하고 난 후에 말을 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임근용이 아주 얌전하게 대답했다.
“앞으로는 최대한 주의할게요.”
임옥진은 전혀 믿지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육운이 임근용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새언니, 오라버니가 걱정할 테니 먼저 돌아가세요. 여긴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할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셔도 제가 해명할게요. 언니가 혼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임근용이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자, 육운이 얼른 말을 이었다.
“고맙긴 뭐가 고마워요? 다들 우리가 친사촌 자매라고 하는 거 못 들었어요? 서로 배려하고 아껴 주는 건 당연한 거예요.”
임근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말이 맞아요.”
임근용이 여씨의 팔찌를 받지 않으려 했을 때부터 모든 일에 조용한 변화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