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109)
110화 어르신의 싸가지
문씨세가 가주 문상길은 내총관의 보고에 인상을 찌푸렸다.
“운철이 스무 근?”
“그렇습니다. 적어도 재력으로는 그의 마음을 잡을 수 없어 보였습니다.”
운철 스무 근이면 돈이 얼마인가?
그런 걸 척척 내놓는 걸 보면 돈깨나 있다는 말.
“지구엔 운철이 흔한가?”
“그렇지 않은 걸로 압니다.”
문상길은 흰 수염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그자와 함께 왔다는 야장은 어떤가?”
“거의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오늘내일 중으로 전서구가 도착할 것입니다.”
“천검야장이라.”
현 시대에 천검야장이라면 2년 전 사라진 남궁가의 그자뿐이다. 그가 고향인 지구로 돌아가 절대고수 하나와 함께 돌아온 것이다.
확실히 하기 위해 야장의 신원 확인을 의뢰했는데, 그 정보가 곧 당도할 것이다.
“흠, 단순한 관광이라.”
그들의 말대로 그럴 수도 있다.
중원 격언 중에 결코 우연은 없다는 말이 있다.
모든 것엔 이유가 있고, 사정이 있다.
의심스럽지 않은가.
지구인 출신의 절대고수, 그의 조카, 또 다른 지구인, 그리고…….
“그 당…… 뭐라고 했지?”
“당진철이라고 합니다.”
“혹, 사천당가 인물인가?”
“멸문한 사천당가의 생존자가 없음은 아시지 않습니까?”
“하긴…….”
문종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씨 성을 쓰는 게 사천당가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은 그 야장의 신원 확인이 우선이군.”
“네, 전서구가 당도하는 즉시 보고하겠습니다.”
“종성이를 구해줬다던데, 괴한들 신원은 나왔는가?”
“고문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황가장 소속 무인들입니다.”
“으음.”
처음엔 알력 다툼으로 시작한 황가장과의 분쟁이 길어지더니 이제 본격적인 싸움이 되려 하고 있었다.
중원에서는 은혜를 모른 척하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원한을 잊으면 업신여김 당한다.
은원 관계의 정리야말로 중원 가문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
종손을 납치하려 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보복이 뒤따라야 할 터.
“적룡단주를 불러들이게.”
“네, 주군.”
그간 너무 얌전히 굴었더니 문씨세가를 졸로 보는구나. 문상길은 본격적으로 이빨을 드러낼 준비를 했다.
*장원을 이루는 담장은 그리 높지 않았다.
고작해야 2미터 정도?
외부 시선을 차단하는 정도일 뿐, 어지간한 무사들이 마음먹으면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높이다.
그래서일까.
장원 내에 요소요소마다 문씨세가의 호위무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적은 인원으로 넓은 곳을 감시, 순찰하며 유사시에 모여들어 합공할 수 있도록 그리 멀지도 좁지도 않은 지역을 유기적으로 돌아다니는 무사들.
마치 절묘한 진법 안에서 움직이는 장기 말을 보는 듯했다.
“절묘하네.”
“거의 모든 장원이 이처럼 수비됩니다.”
수호의 옆에는 장순필이 따르며 그의 궁금증을 하나하나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길 안내를 맡은 노복은 안 듣는 척하면서도 그들의 대화를 하나하나 기억해둘 것이다.
귀가 쫑긋쫑긋 거리는 노복의 모습이 우습지만, 수호와 장순필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며 걸었다.
참 담도 많고, 중간중간 둥근 문도 많은 장원이다.
문을 통해 담을 넘을 때마다 마치 다른 공간에 온 듯 정원이 다르기도 해,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겹겹이 쌓였네.”
“그렇습니다. 보통 역사의 증명은 마을의 중심에 있게 마련입니다.”
물론 선후관계가 뒤바뀐 말이다.
역사의 증명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마을을 세운 것이니까.
그중에서도 문씨 세거지는 문씨세가 장원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거의 외곽에 있는 별관에서 이곳까지 쉬엄쉬엄 구경하며 산책하듯 걸은 지 30분쯤 되었을 때였다.
“저기가 가주님의 집무실입니다.”
인근에 본채가 있지만 대부분의 주요시설들은 이 근방에 있는 모양.
“그래서?”
“으음.”
노복은 상식 밖의 반응에 무어라 답해야할지 당황하는데, 장순필이 나서서 말해줬다.
“그래도 손님으로서 초대되었는데, 집안의 주인은 만나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하는 장순필도 조심스러웠다.
집주인과 손님의 예의 이전에, 이건 일종의 기싸움 같은 거다.
별관에 머무는 수호 일행을 푸짐히 대접하면서도 가주가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은 그런 메시지다.
‘네가 나를 보러 와라.’
서로의 급을 재는 유치하다면 유치한 행위고, 무림 가문에서는 중요하다면 중요한 일.
“그럽시다.”
수호는 대수롭지 않게 나섰다.
“주인이라면 종성이 할아버지인가?”
“그렇습니다.”
“가자.”
“예, 이리로.”
집무실 옆에 붙은 접객실에 안내된 지 30분.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는 문씨세가주의 모습에 수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장순필의 안색은 조금 어두웠다.
“이거 맛은 좋긴 한데 계속 무한리필만 시켜주네.”
“허허허허.”
수호는 데운 찻주전자를 들고 오는 시비를 보고 만류했다.
“그만 줘도 돼.”
“네에.”
혼자 시간 보내는 걸 세상에 수호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냥 가만히 멍 때리는 그를 보며 장순필은 속이 타들어갔다.
바보라도 이 상황이 무엇인지 알 만한 상황이다.
‘이건 아니다.’
언행이 조심스럽고, 대접이 좋다 하여 대우까지 좋은 것은 아니다.
수호의 기분이 어떠한지는 짐작키 어려웠지만, 구천 행성 생활이 8년이나 되는 장순필에게는 꽤 익숙한 문화이자 상황이다.
‘나의 주군께서는 이런 대접을 받으실 분이 아니다.’
야장으로서, 노예로서 검만 두드린 자신이야 이런 대접이 익숙하지만, 수호는 다르지 않은가?
무려 지구인들 중의 최강이자, 전설의 이무기도 길들인 자.
그가 역사의 증명을 마주하면 얼마나 많은 공적을 인정받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만한 위인을 이리 푸대접하다니.
주인이 무시당하면 종 또한 함께 기분이 나빠진다.
장순필은 굳은 얼굴로 수호에게 말했다.
“이만 일어나시지요.”
“응? 왜?”
“이건 명백한 무시입니다.”
“무시? 날?”
수호는 생각했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늦게 나오는 게 어찌 무시가 될 수 있을까? 언제나 자신의 근처에 접근하는 무리는 조심스러웠다.
숲의 왕의 땅을 밟는 짐승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이것은 야생의 땅도, 왕의 대지도 아니다.
이곳은 문씨세가.
“와, 그럼 일부러 기다리게 한 거야?”
너무 익숙한 상황이라 이것이 무시하는 것이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불러놓고 일부러 기다리게 했다는 거야?”
“중원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이곳의 문화지요.”
행성마다 룰이 다르다.
하지만, 룰이 있다 하여 굳이 따라야 할까.
지구에서도 답답했는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맞춰줄 이유는 없다.
태어난 시간을 중시해 이숙자에게는 존댓말하는 수호도, 이곳 구천 행성에서는 반말 일변도다.
천 년에 가깝게 묵은 이무기도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데, 무림인 중에 자신보다 연장자가 있을까.
“기분 나쁜 놈이네.”
수호는 문종성을 생각했다.
굽실거리며 집안에 초대를 하더니, 그 할아버지는 아닌 모양이다. 굳이 인사할 필요도 없다.
“나가자.”
수호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문이 열리며 흰머리에 흰 수염의 문상길이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두 사람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하나는 문종성이고 하나는 그와 비슷하게 생긴 것이 아버지로 보였다.
3대가 들어서며 수호와 마주섰다.
“세가 내에 바쁜 일이 있어 결례했습니다.”
“그러게.”
“……?”
상식적이지 않은 반응에 문상길은 멈칫했다.
보통은 이럴 때 아닙니다, 차가 맛이 좋아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따위의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무림 동년배이거나 항렬이 비슷한 경우라면 대개 손님이 주인에게 져 주는 것이 중원 예의가 아닌가?
“허허허허, 손께서 기분이 상하신 모양이구려. 앉으시지요.”
“아냐, 얼굴 봤으니 됐어.”
“허허허허허허.”
이건 뭐지?
지구인들은 죄다 예의가 없는 건가?
아니면 실력에 자신이 있어 오만한 성격인가?
손자에게 들은 것과 많이 다른데?
“그럼 담에 보자.”
수호가 쓱 나가버리고, 장순필이 겸연쩍은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장순필마저 나가버리자 문씨 3대만 남은 접객실은 침묵이 감돌았다.
“…….”
문상길은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의자를 빼내 앉았다.
“종성아.”
“네, 할아버지.”
잔뜩 억눌린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기에, 문종성의 몸은 아까부터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구명지은이라 하였더냐?”
“그렇습니다.”
“이 할애비가 이토록 모욕을 당했는데 어찌 생각하느냐?”
“…….”
원수로 대할 것인가, 은인으로 대할 것인가.
“지구의 예의범절이 이곳과 다르니, 노여움을 푸시지요.”
“지구란 곳은 새파란 놈이 잘도 지껄이는 곳인가 보구나.”
문상길은 전혀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중원어를 저토록 유창히 하는 놈이 문화에 어두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누구에게 말을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인 중원 문화와 강호 도리에 대해서는 모두 배웠으리라.
“문씨 종손을 지켰으니 이 모욕은 잊겠다.”
무림인에게 있어 당장 생사결 비무를 청해도 모자랄 무시를 당했다. 손자를 구해준 은원은 이것으로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말은 천금이니, 약조한 일이 끝나면 더 이상 내 눈에 띄지 못하게 하라.”
축객령이다.
이미 뱉은 말이 있으니, 그것만 들어주면 앞으로 더 이상 손님 대접은 없으리라.
“예, 아버지.”
소가주가 노한 아비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뒤따라간 야장의 신원이 그가 맞다면 남궁가에 전서구를 띄워라.”
“예.”
괘씸한 놈 혼내 주는 건 꼭 자기 손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문상길이 조용히 속을 달랬다.
*장순필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토록 대책 없다니.’
두려우면서도 시원시원하다.
웃긴 감정이다.
“왜 표정이 그러냐?”
“하하, 아닙니다.”
이분이다.
이 정도 되는 사람이니 무림맹주가 되어버린 남궁장천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니 마니 하는 것 아니겠는가?
거칠 것 없는 새 주인을 얻은 듯해 장순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기가 역사의 증명이오.”
반면, 길을 안내하는 노복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주인이 무시당하면 종이 함께 기분 나쁘다고 하였다. 노복도 그와 같은 모양.
“어, 고마워.”
수호가 길을 안내하느라 수고한 젊은이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커다란 일주문 같이 생긴 문턱을 넘었다.
정갈하게 꾸민 정원 같은 곳에 비석이 덩그러니 서 있다.
높이는 3미터, 너비는 1미터쯤.
“오.”
기억의 돌보다 더 진하고 큰 기운이 느껴진다.
“저거 만져 봐도 되나?”
“예, 그것이 역사의 증명에 이름을 남기는 방법입니다. 아무런 공적이 없으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지요.”
수호는 가까이 다가가 비석을 관찰했다.
이름을 남겼다더니. 세월의 흔적이 더해진 긁힘만 있을 뿐 어디에도 글자는 없었다.
수호가 손을 뻗어 비석에 대었다.
가만히 손을 대고 있었으나 더 이상의 메시지는 보이지 않았다.
“으음.”
모를 땐 역시 물어보는 게 낫지.
“코드가 뭐야?”
“예?”
수호 길드 연구소장 장순필이 처음 들어보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해봐.”
“예에.”
장순필이 역사의 증명에 손을 가져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