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370)
371화 엔트로피
당진철은 팔짱을 꼈다.
“우리 동네에 화골산이라는 유명한 독이 있다네.”
당진철의 음색은 진중하기 그지없었다.
“보통 암살자들이 뒤처리를 할 때 사용하지.”
당진철은 식탁에 놓인 그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물론 그 독이 이름처럼 거창한 건 아니지. 정말 뼈마저 녹여버릴 정도로 대단하다면, 죄다 그 독만 가지고 다니겠지.”
당진철은 화골산에 누구보다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천당문에서 제조했던 독 중 하나였으니까.
“그냥 살만 녹이는 정도지. 얼굴을 몰라볼 정도면 돼. 생각해 보게. 굳이 비싼 독을 써서 시체 전부를 녹인다? 그냥 얼굴만 못 알아보게 뭉갠 다음, 묻어버리는 게 낫지.”
주로 사용하던 놈들이 암살자들이다.
사용 목적도 죽은 이의 신원 파악을 힘들게 하는 정도.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가 만들어내신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화골산이야.”
거인이 무너져내렸다.
정말 말 그대로 썩어 사그라들어버렸다.
당진철은 얼마 전의 상황을 음미하듯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음!”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에 고개를 세차게 꺾었으나, 그것은 유도탄이라도 되는 듯 따라왔다.
따악.
뒤통수에 얼얼하게 작렬한 것은 이숙자의 손바닥.
“염병, 밥 앞에서 뭔 지럴이여. 면 뿔기 전에 어여 먹어.”
“아오, 어머니. 금나수는 그럴 때 쓰는 게 아녀.”
“아니긴 뭐가 아녀 이눔자슥아. 밥 앞에서 염불 외지 말고 어여 먹어.”
후루룩.
괜히 잘 먹고 있던 명진이 움찔했으나, 당진철은 묘한 얼굴로 사람들을 살폈다.
커다란 대접에는 국수가 가득 담겨 있었고, 그 위엔 가늘게 채썬 김치가 가득이다.
“화골산 국수를 아주 잘도 말아 먹는군.”
“하하, 형님. 김치가 뭔 죄예요. 드셔보세요. 맛있어요.”
“내 식도가 녹을까 겁나는군.”
그 큰 거인도 김치 세례에 훅 갔다.
산채로 썩어 가는 느낌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지구인들은 겁도 없이 잘도 먹는군.”
“드셔 보세요.”
동수의 권유에 당진철이 질겁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발효되기 싫다.”
“어휴, 발효되는 건 김치고요. 그냥 드세요.”
당진철의 앞에 있던 국수가 홱 하더니 사라졌다. 이숙자가 그릇째 뺏어 든 뒤에 굳은 얼굴로 말했다.
“냅둬. 이눔시끼. 쫄쫄 굶어봐야 반찬투정 안 하지. 애도 아니고 김치 하나 못 먹어서 지럴이여.”
이숙자가 가장 싫어하는 게 반찬투정이다.
“니눔시끼. 다시는 뭐 가르쳐 준다고 해봐라. 내가 배우나.”
“으음.”
“내가 다시 네놈 꾐에 넘어가면 성을 간다.”
“으으음.”
당진철은 재빨리 이숙자가 가져간 그릇을 뺏었다.
휙, 휙!
국수그릇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무림고수가 서로 장법을 주고받았다.
‘특급 자질이다. 어머니의 보법이 일취월장하는구나.’
허공답보를 산책처럼 할 때부터 알아봤다.
조화를 이룬 그녀의 국수그릇을 낚아채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쉽지 않은 일을 해내는 것이 또 절대고수다.
홱.
당진철이 국수그릇을 뺏어 들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그 말 무르기 없소.”
“뭐 이놈아.”
“진짜 성 갈아야 하오.”
“아이고, 옘뱅. 이눔시키는 어찌 된 게, 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는겨?”
이숙자가 혀를 찼고 당진철은 사약이라도 삼키는 표정으로 김치말이 국수를 휘릭 휘저어 입에 넣었다.
후루루룩!
‘아!’
간질간질하다.
내 식도가 이대로 발효되는 것인가?
매캐하다.
목구멍이 따갑다.
이거 왜 맵지?
이게 발효되는 느낌인가?
뱉어야 하나?
“잘 묵네.”
탁! 꿀꺽.
이숙자의 등짝 스매싱에 면다발이 후룩 넘어갔다.
“허어.”
당진철은 본능적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진기를 둘러 내장을 점검했다.
“…….”
한참동안 그러는 그를 보며 한동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형님. 누가 보면 임신하신 줄 알겠어요.”
“으음…….”
“그냥 마저 드세요.”
“으음…….”
당진철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치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발효란 것은 지구인들에게만 면역이 있는 게 아니라, 무림인인 그에게 까지 통용되는 듯했다.
“좋아.”
이숙자의 성을 갈아치울 수만 있다면.
이 매콤한 국수 따위.
후루룹.
전투적으로 국수를 먹는 그를 보며, 한동수는 오랜만에 썸네일과 제목이 떠올랐다.
[김치 처음 먹어보는 무림인 리뷰.]이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이숙자의 발효 공격에 거인이 쓰러진 이후 주변을 정리하고 막 식사를 마친 참이다.
아공간에 잠들어 있는 보급식량보다는 아무렴 복지부장 이숙자의 음식 맛이 좋을 수밖에 없었고, 용병들은 국수 몇 그릇씩을 먹은 뒤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파팟.
용병 팀별로 다시 할당된 목표지역이 떨어졌고, 진격로를 잡아 한 팀씩 떠나기 시작했다.
“누님. 목숨 빚 졌습니다.”
“하이고, 한 식구끼리 그러는 거 아이다.”
“예에.”
장순필이 이숙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장취아와 박건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당 숙부를 꼭 따라다녀야 한다.”
“걱정마세요.”
장취아도 이미 화경에 이른 고수가 되었건만, 아비 마음이라는 것이 어디 그렇던가.
아직 성년도 되지 못한 딸아이가 전장에 나서는 것이 영 불안하기만 한 그였다.
“취아는 제가 꼭 지켜드릴게요.”
“도련님…….”
주군의 조카는 어찌 이리 총명하고 기상이 남다른가?
지구인들이 그렇듯 L등급. 화경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무림인보다 쉽다지만, 건우는 레벨만 90인 것이 아니다.
그 지닌바 무공 수위 또한 결코 낮지 않다.
사냥을 통한 레벨업이 통하지 않는 중원 태생이었다고 해도 능히 화경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 수준.
“도련님만 믿겠습니다.”
장순필이 걱정과 대견함을 담아 건우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벌써 이토록 크셨구나.
주군께서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아, 곧 주군이 오시겠지.
신탁이 있었으니.
오시기 전 최대한 많은 오크들의 수급을 따 놓아야지.
“취아야. 아비는 이만 가봐야 하니…….”
“아버지. 소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으응?”
“소녀 아직 성년이 되지 못했다하나 제 한 몸 지킬 자신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큰일을 이루시지요.”
“취아야…….”
언제 이렇게 컸단 말인가?
장순필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떠났다.
각 팀들이 하달된 목표지점까지 이동하며 오크들을 격살했다.
“그런데 이모. 같이 움직이실 거예요?”
“잉? 거 미소가 따로 움직이라던데.”
“아.”
동수가 못내 아쉬워했으나 굳이 전력을 합칠 필요가 없다.
거인 등장이라도 아닌 다음에야 G등급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다닐 필요가 없다.
긴급 지원이 가능한 구난조가 둘이 되었다.
한동수와 명진, 진세연.
이숙자와 당진철, 박건우, 장취아.
동수가 와이번으로 변신 가능하고, 이숙자 일행은 진짜 와이번인 비룡을 타고 다니니 기동력에도 문제없다.
삐빅.
“이잉. 이제 연락 오는구마잉. 건우야, 이것 좀 봐라.”
“네, 할머니.”
건우가 태블릿을 넘겨받고 손가락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래요.”
“그러자.”
수호가 없기에 소환이나 역소환을 할 수 없는 비룡은 그대로 그들의 옆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야수들은 아직도 성에 있어요?”
“짐승들이야 다 거기 있지, 왜?”
“아뇨. 걔들도 비룡처럼 다 나와 주면 좋은데.”
“미소가 그러든데? 갸들은 성 지켜야 한담시로.”
“헤헤, 것두 그렇죠.”
용병들이 죄다 일본으로 출동할 수 있었던 배경도 야수 전력이 크다.
어쨌든 신목인 세계수를 지키자면 방어병력은 필요하니까.
*쿠르르르릉.
후지산이 심상찮은 소리를 내며 들끓었다.
드래곤 락샤샤가 배를 깔고 앉은 주변은 이미 용암이 출렁이고 있었다.
그 열기에 브레스로 잃었던 화기를 보충하던 드래곤이 눈을 떴다.
[……어떻게…….]지구에 조화력이 가득해졌다.
무슨 영문인지 알 길이 없다.
미드얼 행성이 나날이 갈수록 척박해졌던 이유가 무엇인가?
행성 전체가 점점 마른 잎사귀와 같아지던 이유가 무엇인가?
흙이 힘을 잃어 사막이 늘어나던 이유는 또 무엇인가?
모두 조화력이 사라져서다.
신계와 연결되어 요람으로서 기능할 때는 그것이 있었다.
하지만 신계와 연결이 끊어진 이후부터 미드얼은 언젠가 소멸 수순을 밟는 행성에 불과했다.
영생을 살아간다는 드래곤에게 있어 그것은 지독한 공포였다.
행성의 주민인 오크들에게 신으로 군림하면서도 불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언제고 이 행성이 생을 다해 사그라들 테니까.
그 이전에 방법을 찾아야 했고, 신계의 조화력만이 미드얼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신계로 쳐들어가 조화력을 강탈해도 좋고, 미드얼의 대체제로 새롭게 탄생한 지구를 사라지게 만들고 그 자리를 대체해도 좋고 말이다.
헌데 지금 지구의 상황은 조금 이상하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조화력은 천지만물의 창조한 힘.
신계는 넘치는 조화력으로 미드얼도 만들고 지구도 만들었다.
지구라는 그릇에 물을 가득 채웠으니, 이제 그 물이 줄어들 일만 남았지 다시 채워지는 일은 없다.
비워진 물을 채우는 일이 바로 세계의 종말.
하나의 지구 역사가 끝나면 새로운 원시 지구가 시작한다. 조화력이 가득 찬 상태로 말이다.
지구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조화력을 스스로 만들어낼 힘이 없다.
오직 신계만이 그것이 가능하다.
[이 에너지는 뭐란 말인가?]락샤샤는 근원에 가까운 지식이 흔들리는 기분마저 느꼈다.
분명 지구의 에너지가 상승하고 있다.
조화력이 늘고 있다.
이것은 대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쿠르르릉.
거칠게 일어서는 락샤샤의 몸짓에 동굴의 바위들이 부스러져 내렸다.
알아봐야겠다.
이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헙!”
동굴 위를 선회하던 대머리 독수리가 급히 바닥으로 착륙했다.
‘들켰나?’
바짝 엎드린 서민수가 락샤샤를 주시했다.
후우우웅, 후우우우웅.
검붉은 날개를 흔들며 허공에 치솟은 드래곤이 주변을 휘이 둘러봤다.
힐끗.
“…….”
서민수는 오싹한 기분에 몸이 굳고 말았다.
뱀 앞의 쥐가 이런 기분일까?
그저 눈빛만으로도 사지를 옥죄는 느낌이다.
후우우웅, 후우웅!
드래곤이 날개를 휘저어 날아가버렸다.
“허억, 허억.”
그 영향력에서 벗어날 때쯤이 되어서야 서민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분명 보았다.
자신의 존재를 알고도 놓아주었다.
일부러 봐준 게 아니다.
너무 하찮아 굳이 목숨을 취하지 않았을 뿐.
당사자인 서민수는 그것을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모멸감보다는 안도감이, 분함보다는 패배감이 들었다.
성장했다 여겼건만.
반신으로까지 사람들이 추앙한다지만, 어디까지나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었다.
진짜 신과 마주한 상념과 격에서 오는 차이는 참혹한 심정을 대변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서민수가 드래곤이 자취를 감춘 하늘을 보았다.
“한국?”
북서로 날아갔다.
한반도가 있는 방향.
서민수가 재빨리 김미소에게 소식을 전하곤 대머리독수리로 다시 변신해 날아올랐다.
‘뒈져도 간다.’
격의 차이는 차이고, 임무는 임무다.
안 들킬 자신이 없지만, 외려 자신을 하찮게 보기에 어디로 향하는지 동향 정도야 파악할 수 있을 터.
목숨이 다하기 전까진 녀석의 위치를 알려줄 수 있다.
휘릭, 휘이이익!
대머리 독수리가 바쁘게 날갯짓해 드래곤을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