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432)
433화 엘프 퀸 (1)
벼들이 고개 숙인 누런 들판을 지났다.
농사 짓는 엘프들이 다섯대의 마차 행렬을 신기한 듯 구경했다.
이 행성은 모든 게 풍요롭고 평화롭다.
엘프들의 시선에서는 경계심보다 호기심이 더욱 컸다.
마차에 탄 이들이 인간에 엘프, 드워프까지 뒤섞여 있었으니 신기해할 만했다.
그들이 보기에 외형은 인간과 똑같겠으나, 실상은 구천 행성 출신의 무림인도 있었다.
“무릉도원이 있다면 여기겠군.”
아루카 행성에 오고부터 딱히 말수가 없던 당진철이 담담히 말했다.
옆에 앉아있던 장취아가 그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인과 무림인의 혼혈로 태어난 취아는 그리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지구인인 아버지는 남궁세가에 잡혀, 도검 장인으로 일하는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아버지 장순필을 붙잡아 두기 위해 내린 여자가 자신의 어머니다.
‘어머니…….’
어릴 때 기억이라고 하면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와 함께한 기억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녀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이따끔씩 자신을 찾아오는 낯선 어른 정도였다.
‘아버지도 힘드셨겠지.’
올 때마다 어머니와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아버지의 얼굴은 아직도 기억의 한쪽에 화인처럼 남아있다.
오기 싫어 그런 게 아니라, 남궁세가로부터 자유를 억압당해 그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여차저차 아미파에 맡겨졌다.
그쯤부터 아버지도 볼 수 없었다.
조금 더 철이 들고, 무림에 혈겁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더 이상 남궁세가의 노예가 아니었으나, 문제는 혈겁을 일으킨 혈마를 주군으로 모시고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취아는 지구로 혈마를 따라, 아버지를 따라 지구로 왔다.
‘여긴 사람 사는 곳 같다.’
취아는 지구에서 처음 그런 감정을 느꼈다.
구천 행성은 항상 마몬족과 무림인이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곳이니까.
무림인들의 일생은 저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비슷했다.
마몬족을 죽이기 위해 평생을 수련하고, 그러다 죽는다.
죽음 따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역사에 기록될 테니까.
무림인들은 왜 그리도 역사에 집착했을까?
역사에 다 담지도 못할 정도의 업적을 쌓은 이들이 등선하는 곳이 신계라 들었다.
그곳은 무릉도원이나 다름없다 하였는데, 이곳을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취아의 눈에 비친 아루카는 평화롭고 고요했다.
저 멀리서 지켜보는 엘프들의 눈엔 전혀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었다.
평생을 두려움 속에 살아온 취아에게는 조금 생소한 느낌의 풍경이었다.
취아는 엘프들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당 숙부.”
“불렀느냐?”
당진철은 호칭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들썩이는 입꼬리를 감추며 위엄있는 목소리를 냈다.
“신령님이 되면 다들 귀가 길어지는 걸까요?”
“하하하.”
당진철이 스스로의 웃음소리에 꽤 흡족했다.
꼭 한 가문의 수장 같은 소리였다.
위엄있고 기품있었으며 여유가 묻어났으리라.
장취아는 기분 좋아 보이는 당진철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웃으세요?”
“내가 한 말을 곡해한 것 같구나.”
당진철은 엘프들을 가리켰다.
“저들은 신선이 아니고, 엘프란다.”
“그건 저도 알아요.”
장취아라고 어찌 모르겠나?
영 애도 아니고, 이미 L등급. 무림인들의 그것으로 치자면 화경의 고수가 된 그녀다.
지구인의 핏줄을 이어받은 덕분인지 그녀는 내공 수련이나 역사의 축복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수련이 가능했다.
몬스터 사냥을 통한 레벨업.
‘지구인들의 축복.’
아니, 지구 출신의 모든 것들의 축복이라 할 만했다.
지구에 사는 토끼도, 한우도, 돼지도 몬스터를 죽이면 레벨업을 할 수 있고, 경지를 올릴 수 있으니까.
“우리가 살았던 구천 행성은 꽤나 치열했던 건 사실이나, 이곳이 무릉도원은 아니다.”
당진철은 자신이 무심결에 뱉었던 혼잣말을 보충해주었다.
“무릉도원이 있다면 꼭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 게지, 여기가 무릉도원이라는 말은 아니란다.”
“알아요.”
“응?”
“그냥 물어본 거예요.”
“허허허.”
당진철은 당황하는 대신 여유로운 웃음으로 대화의 마침표를 미뤘다.
‘그럼 왜 물어본 거야?’
튀어나오려는 말을 겨우 삼키며 인자한 숙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취아의 옆에 붙어있던 박건우가 물었다.
“무릉도원이 뭐야?”
“우화등선하면 가는 곳이야. 신선들만 사는 곳이야.”
“신선? 그건 신이야? 우리 삼촌 같이?”
“음, 비슷하지 않을까?”
“그럼 삼촌이 있던 데가 무릉도원인가?”
“으음. 그건 잘…….”
취아는 대답에 자신이 없었는지 당진철을 보았다. 하지만 그라고 하여 딱히 답을 알고 있진 못했다.
그도 신계는 가보지 못했으니까.
“신선들이 가는 곳은 선계란다. 그 모습이 마치 무릉도원 같다고 알려져 있긴 한데……. 사실 나는 신도 아니고 신선도 아니라, 그 두 곳이 같은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구나.”
그때 불쑥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신 해볼래?”
“음?”
당진철이 흠칫 놀라 돌아보니, 저 뒤쪽 끝 마차에 타고 있는 수호가 씩 웃고 있었다.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서로 간에 대화를 하기엔 충분한 거리다.
둘 모두 화경을 넘은 고수들로 오감이 일반인의 경지를 아득히 초월하니까.
“형님께서는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조카들 앞이라고 무게를 잡는 당진철을 보며 픽 웃은 수호가 손을 까딱했다.
“무게 잡지 말고 와봐.”
“쳇.”
당진철이 훌쩍 뛰어 끝 마차에 올라탔다.
“너 우화등선할 뻔했잖아.”
“흠, 그때는.”
당진철은 그때가 생각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선계의 실체도, 신선의 실체도 없는 그저 전설 속의 이야기나 다름없는 구천 행성에서 우화등선은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그땐 그냥 죽을 뻔한 거요.”
“살았네.”
“아오, 말이 나와서 그렇지, 형님 때문에 주화입마에 빠진 게 아니오? 운기조식 중에 누가 그리 손을 댄단 말입니까?”
“어쨌든 살았잖아?”
“쳇.”
맞는 말이다.
그때 당진철은 수호 때문에 심력이 어지러워져 주화입마에 든 것도 맞지만, 수호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버티다가 주화입마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내력의 폭주는 무서웠다.
“누가 멍청하게 드래곤 하트를 먹냐.”
“쳇, 용의 내단을 욕심내지 않을 무림인이 몇이나 된다고.”
당진철이 입을 삐죽거렸다.
내심 불만이 있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그는 수호로부터 목숨을 구명받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가 개입해서 더 엉망이 되었긴 하지만, 개입하지 않았다면 더 최악이었을 것이다.
‘죽었겠지.’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도 드래곤 하트의 내력을 다스려 잠재울 자신이 없었다.
그의 생각 이상으로 포악했으니까.
첩!
당진철이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의형께서 번번이 목숨을 구해주시니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됐어.”
수호는 당진철의 과한 인사에 대충 손을 휘젓고는 그를 관찰했다.
레벨 83 초절정 고수(U)
암살자
“너 그동안 뭐한다고 아직 그 렙이냐?”
당진철이 주화입마에 빠져 모든 내력을 지우고 자연지기를 밀어 넣어 겨우 소생시킨 수호다.
단전마저 파괴된 것을 새롭게 복구하여 자연지기로 채운 그때의 당진철 레벨이 71이었다.
절정 수준에서 초절정 수준으로 오르긴 했지만, 수호로서는 조금 의아했다.
“내 하루도 쉬지 못하고 밤낮으로 축기에 애썼는데 어찌 그리 야박하게 평하시오?”
“12레벨이면 하루면 찍겠다.”
“그건 지구인들이나 가능한 수법이오.”
당진철이 흡성대법이라도 익혔다면 가능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 그의 단전에 자리잡은 기운은 그런 사이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연지기.
더없이 순수하고 고고한 기운이 그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것 때문인가?’
무림인에게 있어 단전은 생명과 같고, 그것이 바뀌어 버린 당진철은 새롭게 태어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단전에 담긴 기운의 성질이 변해서인지 몰라도 성격마저 조금 변한 느낌이다.
제 스스로 느끼기에도 그러했으니, 남들은 오죽할까.
“언제 99 찍냐?”
“……형님께서는 화경을 너무 쉬이 생각하시는 거 아니오?”
“너도 화경이었잖아? 다시 오르는 건데 엄청 느리네.”
“고지가 같으나 다른 길을 오르니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소.”
“말투 적응 안 되네. 아무튼 언제쯤 될 것 같아?”
“소제가 확답을 드리긴 애매합니다.”
지금의 자연지기는 정순한 만큼 축기하는 속도가 느리다.
‘옛날에 비하면 더없이 빠른 속도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호시티라는 특수한 지역 덕분이다.
기의 농도가 다르다.
자연지기가 좋다는 명산보다 수호시티 내성이 더 기의 농도가 높다.
세계수 앞에서 호흡만 해도 축기가 자연스럽게 된다.
“그럼 아까도 해 보지.”
“왜 안 해 봤겠습니까. 지구의 수호시보다 못하더군요.”
주울 부족에 들렀을 때 운기조식을 해 본 당진철이다. 지구에서 하는 효율의 1할도 되지 않기에 금새 멈췄지만 말이다.
“기의 농도가 다르다라.”
수호는 당진철의 단전에 쌓인 조화력을 느낄 수 있었다. 저걸 퍼부은 당사자가 자신이니까.
수호의 조화마법은 여기저기 퍼져있는 나무정령이 전해주는 힘에서 비롯된다.
‘여긴 조화력이 옅다.’
있긴 한데 그 농도가 지구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지구의 조화력이 지구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라면, 아루카 행성의 조화력은 세계수에서 비롯되는 느낌이다.
‘혈석이나 엘프 마법사에게서 빨아들인 에너지를 행성에 퍼트리고 있다.’
수호가 느끼는 기의 흐름은 그렇다.
조화력의 기반은 무엇일까?
“미소.”
“네, 사장님.”
“아루카 행성은 겨우 에너지가 미약하게 증가하고 있고, 미드얼 행성은 고갈되고 있어.”
“네.”
김미소가 차분히 수호의 뒷말을 기다렸다.
“근데 지구는 넘쳐나고 있지. 뭐 때문인 거 같아?”
“혈석일까요?”
실제로 혈석은 아루카 행성에 와서 세계수의 에너지 공급원이 되어 주고 있었다.
“혈석 이전엔 엘프 마법사들이 수련한 기운이 세계수를 유지하고 있었지.”
혈석 이전의 모습.
“몬스터일까요?”
김미소의 대답에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는 던전이 생겨나지. 타 차원의 것들이 마구 마구 생겨난단 말야.”
정돈되지 않아서 그렇고, 인류가 감당되지 않아서 그렇지, 인류가 아닌 지구의 시점으로 보면 지금 지구는 폭발적인 에너지 증가를 이뤄내고 있었다.
“근데 이건 내가 들은 이야기와 정 반대란 말이야?”
“어떤 이야기죠?”
“정해진 엔트로피가 있어서, 인류가 조화력을 모두 바닥까지 쓰면 행성의 기능을 상실한다더군. 그래서 지구에 신수들이 날뛰고 인류 멸망을 지나 조화력이 다시 차오르면 새로운 지구 8이 시작한다고 들었지.”
“으음.”
김미소는 잠깐 생각하다 대꾸했다.
“입장 차이 아닐까요?”
“입장?”
“지구인들이 각성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그 에너지를 기반으로 한다면, 지구 입장에서는 뺏기는 것이니까요.”
“지구 입장에서라.”
확실히 인류가 자신의 것을 빼앗아 부흥했다면 지구는 메말라 갈 터다.
에너지가 소모된 것이 아니라, 지구의 것이 인간에게 옮겨갔다가, 다시 신수들이 날뛰며 인류를 멸망 수순으로 몰아 새롭게 분배하는 것이다.
에너지의 소모가 아닌 이동.
수호는 턱을 쓰다듬었다.
지구의 관리자는 다름 아닌 자신이다.
이건 지구로 돌아가 관리자 툴인 가이아를 통해 알아봐야 할까?
“형님. 대화 중에 죄송합니다만.”
“어. 왜?”
“저는 왜 부른 겁니까?”
“레벨 다 올렸나 싶었지.”
“레벨은 왜…….”
“그야.”
수호는 당진철이 주화입마에 들던 당시의 메시지를 잊지 않고 있었다.
지금은 당진철의 몸에 손을 대봐도 나타나지 않는 메시지다.
‘자격 요건이 있다면 만렙이겠지.’
구천 행성의 관리자라면 현경의 경지에 올라야 할 터니까.
수호에게 있어 구천 행성 관리자는 계륵이다.
관리자라는 타이틀만 있지, 아무런 권한이 없어 딱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구천 행성 출신인 자에게 관리자 권한을 맡기면 다를지 궁금했다.
“널 신선으로 만들어 주려고 하지.”
“예?”
의형은 결국 이 아우를 우화등선시키려 한단 말인가?
‘죽인단 말인가?’
당진철이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