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456)
457화 모순 (4)
털썩.
세계수 기둥에서 손을 뗀 김미소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괜찮으세요?”
이소진이 얼른 부축했으나 김미소는 그녀의 손을 거절했다.
지금 당장 일어설 힘이 없다.
“조금만 앉아 있자.”
“네.”
김미소는 탈력감을 느끼며, 앉은 채로 기력을 회복했다.
반신.
그것도 대사제로 임명되어 다른 여타의 사제나 기사보다 더 강력한 힘을 내는 그녀지만 접신은 많은 힘을 필요로 했다.
고작 대화를 주고받는 일이 무엇이 힘들까 싶지만, 그녀는 전력을 다해 수 시간 달리기한 듯한 정도의 기력을 소모했다.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력의 문제였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인간의 몸으로 행하기에 받는 대가라고 이해해야 할까?
“차이.”
“네.”
뱀파어어 차이지엥.
그녀는 대만 출신의 각성자였지만, 뱀파이어에게 물려 몬스터가 되었다가, 박쥐 상태일 때 수호에게 길들여져 이곳에 있게 된 기구한 운명의 사람이다.
아니, 뱀파이어의 특징 그대로이기에 사람이라고 부르기엔 무리일지도.
그녀의 유창한 한국말은 수호와 의식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야수들이 그러했다.
그중에서도 본신이 인간이었던 뱀파이어 차이는 조금 특이한 경우라, 주인의 허락하에 수호의 기억과 경험을 엿볼 수 있고, 이를 통해 언어를 익혔다.
한정된 기억과 경험이지만, 그 공유 행위로 인해 수호에 대한 차이의 존경심과 두려움은 모든 인간을 통틀어 독보적이지 않을까.
야수들이 그러하듯 그녀도 수호와 의식의 한쪽이 이어져 있기에 대화가 가능했다.
“사장님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요?”
“미천한 제가 어찌 감히.”
차이는 수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목소리와 몸가짐을 조심했다.
“주인님의 허락이 떨어지면 가능합니다만, 제가 함부로 행할 수 있는 것은 소환 의지를 피력하는 정도입니다.”
수호의 허락이 떨어지면 대화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야수의 시야와 생각을 공유하는 스킬에 의한 것이라, 타 행성에 가 있는 수호와 연결될지는 미지수다.
“한번 시도해 보시겠어요?”
“제가 어찌 감히…….”
바짝 몸을 숙이는 차이의 모습을 보니, 강제로 시켜도 듣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요. 다음에 사장님께 부탁해 한번 시험해 보죠.”
“주인님의 명이라면 기꺼이.”
잠깐 대화하며 휴식하니 혈색이 돌아온 김미소는 즉시 일어섰다.
“후우, 가자.”
편하게 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자신의 수고로움은 얻은 이익에 비해 아주 작은 희생이다.
무려 신과 대화하고, 먼 세계의 사정까지 알지 않았나.
“고 박사님 부르고, 시드니에 연락해.”
“넵.”
이소진이 휴대폰 하나를 꺼내 바로 건네주었다. 벨소리가 두 번 울리기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데이브 닐슨입니다.]시드니 시장 데이브 닐슨의 목소리는 정중했고, 또한 초조했다.
“김미소예요. 급하니 용건만 전하겠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침식 구역은 당분간 늘지 않을 겁니다.”
[정말입니까? 드디어 원인 파악을 해내셨군요!]기다리던 소식인지라 시드니 시장은 격앙된 음성을 내뱉었다.
지금 지구에 산재한 많은 위기들 가운데 수호 길드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없다.
핵에도 끄덕하지 않는 신급 군주를 해치울 수 있는 G급 각성자를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수호 길드다.
일개 길드라 하기에는 수호 길드의 위상은 도시, 그 연합체인 국가 이상이다.
그런 수호 길드에서 유일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
접근하는 생명체를 모조리 죽여버리는 침식. 지구에 단 두 군데 발현된 침식 구역이 문제다.
데이브 닐슨 시장이 이토록 침식에 대해 잘 아는 것은, 하필 시드니 인근에 그 구역이 들어서서다.
세계에 단 두 곳인데 그중 하나가 하필 시드니라니.
불운도 이런 불운이 없다.
수호 길드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앞마당에 터진 것이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비는 신목으로 봉인해 두는 것뿐이다.
그 신목은 수호 길드와 수호성을 두르고 있는 나무성벽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어 핵무기로도 터트리지도 못한다.
그런데 얼마 전 그 봉인이 풀리며 침식 구역이 엄청나게 늘어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후,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원인을 알았다면 이를 회복할 방법 또한 알고 계십니까?]데이브 닐슨의 말에 김미소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사장님이 돌아오셔야 알 것 같네요.”
데이브 닐슨은 ‘실망’ 따위의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하는 게 맞다.
상대는 세계 정점의 단체.
수호 길드의 부사장이니까.
“전할 말은 하나입니다. 침식 구역에 눈먼 생명체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세요. 당분간 침식의 확장은 없을 겁니다.”
[당분간이라 하심은…….]좀 전만 해도 후련해하던 데이브 닐슨의 음성이 다시금 불안해졌다.
“세상에 확정적인 것은 없습니다.”
김미소는 잠깐 입에 담을 말을 고심했다.
‘사장님이 어떤 선택을 하실지 모르니까.’
김미소가 수호의 명을 수행하기만 하는 자였다면 지금 부사장의 자리에 앉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수호의 의중을 미리 파악하고 앞서 행해 놓는 자.
“위기 신호 감지는 길드에서 파악 가능하니, 최악. 정말 최악의 상황에서는 호주 전 지역의 소개령도 생각해 두셔야 합니다.”
[아!]데이브 닐슨의 짧은 탄식은 그의 지금 심정을 대변했다.
“혹여, 그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시드니시티의 시민들의 피난을 적극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데이브 닐슨의 영혼 빠진 대답에 김미소는 조금 희망을 주었다.
사람은 공들여 이룩한 것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지면 모든 것이 싫증 나기 마련이다.
어차피 폐허가 될 시티라면 누가 공들여 지키려 하겠는가?
“플랜비도 염두에 두어, 계획을 세워두시라는 의미에서 전한 말입니다. 침식에 생명체가 제물로 던져지지 않는 한은 침식 구역이 확장될 일은 없을 겁니다.”
[후, 알겠습니다. 시티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 구역을 방호해 내겠습니다.]“네, 그럼 무운을 빌죠.”
세계수가 위치한 야수의 쉼터.
숲길을 걷다 통화하다 보니 이미 입구다.
야수 쉼터의 입구에 세워진 에펠탑 같은 모습의 본사.
그 입구에 고상운 박사가 상기된 표정으로 김미소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기다리셨어요?”
“그럼요.”
“들어오시지 않구요.”
“어유, 저는 아직 조금 그래서……. 하하.”
야수 쉼터는 수호에게 길들여진 야수들이 지내는 곳이다.
명칭으로서 야수 쉼터로 명명한 것이 아니라 이는 수호의 스킬이다.
수호가 마음먹으면 야수가 어디에 있든 소환할 수 있지만, 역소환한 야수는 수호가 지정한 야수 쉼터로 돌아온다.
이곳엔 부상당한 야수들이 빠르게 상처를 회복하는 효능도 있다.
야수들에겐 ‘영역’이기에 외부인의 접근을 당연스럽게 꺼려한다.
수호시티 외성은 길드 외부의 사람들도 자유로이 왕래하지만, 내성엔 수호길드 내부 사람들만 접근이 허용된다.
야수 쉼터는 더욱 은밀해 소수의 길드 사람들만 출입할 수 있고, 세계수 가이아 근처는 수호의 사제와 기사 정도만이 접근을 할 수 있다.
야수들이 스스로 그리 경계하며 자신들의 ‘영역’을 지켜낸다.
고상운에게 있어 야수들은 익숙한 이웃이지만 아직은 무서운 맹수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8성 포탈을 찢고 나오는 재앙급 몬스터 ‘신급 군주’와 비슷한 수준의 신수들이 수호 길드에 여럿 있으니까.
언제나 세계수 근처를 배회하며 지키는 백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일곰, 구미, 후왕 등등 벌써 신수들이 여럿이다.
야수들은 레벨업을 통해 야수, 영수, 영물을 부를 수준을 넘어, 제물로 신격을 가진 몬스터를 사냥하면 그 능력을 뺏어 스스로 신수로 진화한다.
지금 지구는 8성 던전의 잦은 출몰과 브레이크로 신급 군주들이 너무 출몰하여, 모든 도시들이 포비아 상태라 해도 빈말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적인 위기감은 한반도만은 예외였는데, 야수들이 자발적으로 성밖으로 나가 사냥하고 식량을 구하다 보니 어지간한 몬스터들은 제대로 세를 형성할 수가 없었다.
몬스터를 규합하는 군주, 그 위의 신급 군주가 출현하면 신수와 야수들이 몰려가 사냥해버리니, 외려 수호의 야수들 중에 점점 신수로 탈각하는 영수가 늘었다.
한반도는 야수들이 단단히 지켜주니, G급 각성자들이 마음 놓고 타 도시로 파견 갈 수 있는 이유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수호 길드 내에서도 세계수가 자리한 야수 쉼터는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옛날 사람들이 괜히 신당에 가면 조심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저한테도 그렇지요.”
“으음.”
김미소는 무어라 대꾸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그녀에게 경외의 대상은 오직 수호 하나였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쳐지기에 대사제인 그녀 또한 만만찮았기에 제 입으로 말하기 민망했다.
‘사장님도 이러한가?’
김미소 본인은 제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별다를 것이 없다고 여기나, 타인들은 자신을 이미 인간으로 보지 않는 자들도 있다.
그런 경외심이 묘한 선민의식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짙은 외로움이 함께 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오래된 나무나 짐승을 기리거나 제사를 지내는 게 영 틀린 풍습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죠.”
고상운 박사의 말에 김미소도 동의했다.
“어쨌든,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고상운 박사의 음성엔 은근한 기대감이 가득했다.
“사장님이 루나에 계세요.”
“예? 루나 행성은 지금 이곳 아닙니까?”
“저도 생각이 복잡해 고 박사님의 조언을 듣기 위해 불렀어요.”
다름 아닌 수호 길드 부사장이자 인간계 1인자라 할 수 있는 그녀의 말에, 고상운의 얼굴은 감격스러움이 가득했다.
“이, 일단 자리를 옮기시죠.”
“네, 박사님 연구실로 가죠.”
“누추하지만 모시겠습니다.”
고상운의 안내에 김미소와 이소은 차이가 내성 공간으로 이동했다.
조금 걷자 혈석 보관소 옆에 커다란 건물로 들어갔다. 드워프의 제작소도 있고, 장순필의 대장간도 있는 이곳에 고상운의 연구실도 자리했다.
100평 정도 되는 사무실이 고상운에게 배정된 역사 연구실.
일하고 있던 조교들은 길드의 실세인 부사장의 방문에 허둥지둥했지만, 고상운이 대충 물리고는 김미소를 이끌고 자신의 집무실로 이끌었다.
혼자 쓰기엔 넓은 개인 룸이지만 여기저기 벽면마다 가득 붙은 메모지가 공간을 좁게 만들었다.
“여기 앉으시지요.”
“네, 일단 사장님과 나눈 대화부터 들려드리죠.”
김미소는 수호와 있었던 대화와 지금의 상황을 모조리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를 찬찬히 듣던 고상운은 짧은 탄식을 뱉었다.
“허, 이 무슨 고약한.”
사장님이 야누르의 귀환 지팡이를 써서 루나로 귀환했다. 문제는 루나 행성을 뺏은 지구가 아니라, 침식뿐인 행성에 갔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사장님은 지금…….”
고상운은 테이블 한쪽에 있는 바둑 세트를 보곤 이끌리듯 그것을 끌어왔다.
바둑판 위에 흑돌을 와장창 쏟아버리곤 말했다.
“이게 본디 루나라고 하지요.”
“으음.”
고상운은 바둑판 위의 흑돌을 우르르 쓸어버리곤 깨끗한 바둑판 위에 백돌을 부어버렸다.
“이것이 루나를 뺏은 지구라고 치는 겁니다.”
“형세가 같죠.”
김미소는 고 박사의 비유가 적절하다 여겼다.
고상운은 바둑판 위에 가득인 백돌 두 개를 집어들고 흑돌 두 개를 올렸다.
“이 두 점이 침식이라 하면 상황이 맞지요.”
“그렇죠.”
고상운은 손에 치워둔 백돌 두 개를 비어 있는 바둑알 그릇 하나에 담았다.
“여기 빈 그릇에 백돌 두 개를 땄죠.”
“아!”
김미소가 눈을 치켜떴다.
“빈 통이 그럼!”
“지금 사장님이 계시는 곳이겠죠.”
“…….”
“전에 혼백에 대해 이야기해 드린 걸 기억하십니까?”
지금 고상운이 바둑판을 두고 비유한 것은, 오래도록 그가 고심해 온 연구가 있기 때문이다.
“행성은 그냥 땅이고, 루나와 지구를 이루는 정신체 비슷한 것이 있다면…….”
고상운의 말에 김미소의 시선은 빈 통에 머물렀다. 한참을 한쪽 그릇에 담긴 백돌 두 개를 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다.
“통을 가득 채우려면 흑돌을 주워도 될 텐데, 왜 백돌을…….”
고상운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이건 제가 비유를 든 겁니다. 이렇지 않을까 하고…….”
“잠깐만요!”
김미소는 불현듯 차이에게 시선이 갔다.
그녀의 출신지였던 타이베이.
그곳에 최초 출몰했던 검은색 포탈.
“마계…….”
김미소는 머리가 복잡해져, 서둘러 세계수로 다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