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455)
456화 모순 (3)
츠츠츳.
공간이 넓어진다.
녹음은 본디 제 영역을 되찾듯 어둠을 물들였다.
밤이 지고 해가 뜨면 어둠에 잠긴 세상이 색을 찾듯 그렇게 넓어졌다.
스스슥.
조화력은 색을 잃은 세상의 빛이 되어 준 것만이 아니라 수풀까지 자라나게 했다.
새싹이 잡풀이 되고, 황무지에 풀이 자라났다.
녹음이 우거진 동그란 세상의 중심.
우뚝 솟은 거대한 나무 한 그루.
울창한 가지가 더 높이, 더 멀리 뻗으며 제 영역을 과시하듯 그늘을 키웠다.
거대해진 나무의 기둥은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두어 그루의 나무까지 밀어내며 푸른 공간의 유일한 기둥이 되었다.
거대한 나무는 기둥만큼이나 가지도 굵어 사람 두엇이 걸어도 될 정도의 크기였는데, 그 위에 앉아 있던 사람이 긴 숨을 뱉었다.
“후우우우.”
참았던 숨을 뱉으며, 수호는 눈을 떴다.
“아오, 기 빨려.”
수호는 내재된 조화력의 9할을 쓰고도 크게 넓어지지 않은 면적에 혀를 찼다.
“효율 극악이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구에서 침식을 되돌리던 그때도 이 정도의 조화력이 들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수호시티를 제외하고 모조리 침식되어 버린 지구를 되돌리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그사이 분열되고 갈라진 남은 인류에 환멸을 느껴 백사를 통해 회귀를 결정했었다.
인류가 한 개체라면 그때 당시의 모습은 죽기 전의 환자를 보는 것 같았다.
수호가 원하는 건 아프기 전까지는 아니더라도, 회복이 가능할 정도의 인류뿐이다.
최소한 문명인으로 불릴 정도의 지성과 양심은 보존된 인류이길 빌었다.
그래서 회귀해버렸다.
“이거, 여기서 허비하는 사이 또 그 꼴 나는 거 아니려나…….”
주변을 둘러보니 근처 빼곤 전부 검은 공간일 뿐이다.
우주 공간에 홀로 떠 있는 기분.
쟁반 같은 풀밭과 우뚝 솟은 나무가 우산을 뒤집어 놓은 것 같다.
우산을 타고 우주를 떠다니면 이런 기분일까?
아무도.
무엇도 없다.
근원적인 외로움에 수호는 답답해지려는 마음을 쫓았다.
“그래도 회복은 차츰 되니까…….”
주변에 녹지가 커질수록.
풀들이 호흡하며 제멋대로 생명 에너지를 뿜을수록, 그것들은 다시 수호에게 흡수되어 조화력이 회복된다.
지금 주변의 침식을 몰아내고 녹지를 늘리는 건 일종의 투자다.
살아있는 식물은 생명 에너지를 뿜는다.
수호의 주변에 떠다니기 시작하는 녹색의 반딧불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나무정령.
생명의 근원.
수호의 조화력을 채워 주는 존재는 이들이다. 생명력이 충만한 행성에서는 언제든 얻을 수 있는 자원이지만, 이곳은 아니다.
이 넓은 행성에서 조화력을 보충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임시기지로 삼은 이 큰 나무 주변 일대가 전부다.
그것도 수호에게 신력이 있기에 자유로이 오갈 수 있었던 것이지, 다른 인간이었다면 이 한정된 공간에 갇힌 신세가 되었으리라.
반딧불 같은 나무정령들이 자석에 이끌리듯 수호에게 다가와 주변에 머물렀다.
그들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나눠 받고 나니, 소모되었던 조화력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초원을 조금 더 키울까?”
아직 저장된 조화력을 모두 소모하지 않았다. 비상시를 대비해 남겨 두었는데, 이것마저 전부 써서 초원을 키울지 고민되었다.
효율의 문제다.
초원이 더 커지면 나무정령이 더 많아지고, 수호의 조화력 회복이 더 빨라질 테니까.
“에이, 모르겠다.”
수호는 나무둥치에 기대어 멀리 보았다.
“어떻게 돌아가지?”
이 행성이 어디인지도 모르니, 돌아갈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루나 같긴 한데…….”
야누르의 귀환 지팡이를 써서 왔으니 분명 여기는 루나다.
문제는 이 행성은 다른 행성과 통하는 게이트 포탈은커녕, 아무런 던전 포탈도 열려 있지 않았다.
외부와 아예 단절되어버린 행성.
아니, 죽어버린 행성.
이 행성에서 탈출이 가능할까?
괜히 이런 행성에서 허송세월하는 사이 지구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침식……. 진행되진 않았겠지?”
지금 지구는 단 두 곳.
일본과 호주에 아주 작은 공간만 침식되었을 뿐이다.
대부분을 잃었던 지난번에 비해서는 아주 양호한 상태.
여러모로 그때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침식을 일으키는 주체인 블랙맨과 블랙비스트.
그것들을 많이 수습했다.
본디 자기들끼리 서로 잡아먹으며 힘을 합쳤어야 할 그것들은 마석이 되어 수호에게 흡수되었다.
블랙비스트의 마석은 차마 흡수하지 못하고 쿠로에게 모두 주고 왔다.
자신의 자아가 아닌 쿠로의 마석까지 흡수하면 정말 수호로서의 주체성까지 잃을 정도의 거부감이 들었으니까.
본디 주인이랄 수 있는 쿠로에게 주고 왔을 뿐이다.
친우의 과거 죽음과 기억을
친우에게 주었다.
그러고 보니 야누스 이 녀석은 신계에 갔을 터인데, 쿠로에게 해코지를 하는 거 아닐까?
“가 보긴 해야 하는데, 여기서 발목이 잡혔으니…….”
수호는 문득 든 생각에 벌떡 일어섰다.
파팟.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무성한 가지가 차지한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초원을 나섰다.
검은 공간의 경계까지 와서야 하늘이 보였다.
“…….”
어째서 이 행성에 태양이 비추고 있는가?
해를 보는 수호의 눈이 뜨겁다.
“…….”
이글거리는 태양이 눈에 가득 담겼다.
“아오, 눈 따가워.”
수호는 결국 포기하고 고개를 숙여 눈을 문질렀다. 눈물이 나고 있지만 그의 얼굴은 웃고 있다.
“이거, 잘하면 가겠는데?”
이 행성은 아직 세계와 접점이 있다.
지구와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분명 신계와 연결되어 있다.
‘쿠로가 신계에 있으니까.’
포탈 없이는 행성 간 이동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신계라면 포탈 없이도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천지.’
그것은 쿠로의 영역이자, 그가 사명처럼 지키던 곳.
지구를 내려다보는 창이 되어 주던 신비경이다.
신계에서 지구를 볼 수 있는 그 신비경은 또한 지구의 영물이 신수가 되어 등천하는 입구이기도 하다.
수호가 백룡으로 변해 신계에 재진입했을 때처럼.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루나와 신계가 연결되어 있다면 말이다.
“되겠지?”
조금 꺼림칙한 것은 이곳 루나로 올 때 수호가 기절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루카로 갔을 때도, 미드얼이나 구천에 갔을 때도 수호는 동기화를 겪었다.
그것은 분명 단절된 세상과 수호가 연결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데 이곳 루나는 그런 동기화 과정이 없었다.
이미 동기화되었든지.
할 필요가 없든지.
어느 경우가 되었든,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행성 간 연결을 담당하는 네트워크 기능 같은 것이 아예 고장 났다면…….
수호는 검은색뿐인 침식된 행성을 보며 턱을 긁적였다.
“당연한 건가?”
모든 공간이 침식되어 죽어버린 행성.
고장 나지 않으면 이상하지.
죽어버린 행성엔 관리자도 관리 툴도 없다.
수호의 시선이 커다란 나무에 가 있었다.
“정 안 되면 뭐…….”
세계수 야누르의 고향 행성이니 그녀와 어찌 해보면 되지 않을까?
여전히 그의 인벤토리에는 야누르의 지팡이가 있으니까.
“어쨌든 등천부터 해 보자.”
신계와 이곳 루나의 연결점이 있다면 세상을 비추는 거울, 신비경 천지를 통해 신계에 오를 수 있다.
수호가 막 백룡으로 변신하려 할 때였다.
[사장님.]머릿속에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수호가 웃었다.
“미소!”
[네, 저예요!]수호는 즉시 스킬을 시전했다.
영적으로 연결된 신목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수호와 연결된 신목.
세계수 가이아의 주변이 옅게 보이기 시작했다. 전보다 시야가 더 넓어진 것이, 가이아의 영향력이 더 커진 듯싶었다.
‘이러다 지구 전체를 다 볼 수 있으려나.’
처음 스킬을 배웠을 때는 나무기둥 주변만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나무 그늘 아래 방대한 공간 정도가 보였다.
나무 기둥에 손을 얹고 있는 김미소의 모습과 그 주변에 구경하고 있는 늑대 몇과 똬리를 틀고 있는 백사와 엎드려있는 구미도 보였다.
그 사이에 뱀파이어 차이와 비서실장 이소진도 함께했다.
‘하긴, 안 되는 게 이상한 거지.’
신계의 구천 행성에 있을 때도 미소와 통신할 수 있었는데, 이곳 루나라 해서 다를까.
이것은 행성 간의 네트워크가 아닌, 수호와 미소의 의식의 편린 한 조각이 연결되었기에 가능한 수단이다.
그 매개를 세계수 가이아가 맡을 뿐.
“무슨 일이야?”
[침식이 진행되고 있어요.]“…….”
수호는 세계수 근처 외엔 전부 안개처럼 뒤덮여 볼 수 없는 상태가 안타까웠다. 지구에 세계수를 수십 그루 심으면 전부를 볼 수 있으려나.
답답한 건 답답한 거고, 지금 당장은 해결 불가능한 일이다.
“블랙맨에게 당했나?”
수호가 최대한 블랙맨의 원흉이 되는 무덤을 수습했다곤 하지만 그 모든 죽음을 수습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신수를 죽이면 9성 던전인 블랙포탈이 남겨지고, 그것이 브레이크를 일으키면 블랙맨이나 블랙비스트가 튀어나온다.
[아니에요. 아직 추가로 발견된 침식 구역이나, 처리 불가능할 정도의 블랙맨은 없어요.]장재식이 블랙맨에게 당한 뒤부터 수호길드는 블랙맨의 처리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신수를 죽이고 남은 블랙포탈에 진입해 블랙맨의 전력이 약하면, 그대로 공략 포탈을 소멸시키고, 아니면 바로 귀환석을 이용해 도망오는 것이다.
아직은 훌륭히 처리해내고 있지만, 언제 공략 불가 레벨의 블랙포탈이 나타날지 모른다.
그 블랙포탈이 터지면, 블랙맨이 지구에 헌신하니, 그 또한 걱정거리다.
[하지만 곧 오시긴 하셔야 해요. 신수들 숫자만큼 블랙포탈도 늘고 있어요. 사장님이 안 계시니 조마조마해요.]“가려고 했지.”
[그래서 말인데, 지금 어디 계신 거예요? 먼저 지구로 돌아가신다면서요?]“그랬지. 루나로 왔네.”
[네? 어, 루나가 지구 아니에요?]“나도 그런 줄 알았지.”
[……그래서 지금 지구가 아니라는 거죠?]“맞아. 루나야. 이 행성 전체가 침식되어 있어.”
김미소는 고민을 길게 이어가지 않았다. 지금은 침식된 남의 행성 걱정할 때가 아니라, 우리 행성이 침식되는 걸 걱정해야 할 때니까.
[지구가 더 문제예요. 블랙맨이 나타나서 침식시킨 게 아니라. 기존에 침식된 구역 중 한 곳이 크게 늘어났어요.]“응? 어디? 재식이 싸운 곳?”
[아뇨. 호주예요.]장재식이 블랙맨을 해치우고 의식을 잃은 곳은 일본이다.
“거기가 갑자기?”
[네. 갑작스럽게 그 공간이 원형으로 확장되었어요. 아주 크게요. 원인을 찾지 못했어요.]“크게? 얼마나?”
[축구장 네 배 정도 되는 것 같아요.]수호는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나무와 초원.
우산 같은 그 녹음을.
“어……. 잠깐만.”
수호가 더디게 회복되고 있는 조화력을 다시 내뿜어 녹지를 늘렸다.
츠츠츳.
경계가 넓어지며 무색의 공간이 색을 찾는다.
경계보다 1미터는 더 커진 공간.
고작 1미터라지만, 이미 원이 넓다 보니 내재하고 있던 조화력을 모두 소진해 버렸다.
“후우. 지금 좀 더 늘었나?”
[잠시만요.]수호가 의식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세계수 기둥에서 손을 뗀 김미소는 비서실장 이소진과 무어라 말하더니 화들짝 놀라 다시 기둥에 손을 얹었다.
이윽고 다급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큰일 났어요! 방금 다시 침식의 영역이 넓어졌어요.]“…….”
[블랙맨의 접근도, 몬스터의 접근도 없어요! 아무런 생명체도 접근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늘었어요! 맙소사. 사장님, 어서 돌아오셔야 해요.]“어, 그…… 난 거 같은데.”
“아니, 그 침식 내가 늘린 것 같다고.”
[…….]“곤란하네, 이거.”
야누스가 그리 말했었다.
본디의 지구를 오크와 드래곤들에게 줘 버려 미드얼이라 칭했다.
루나를 뺏어 지구로 삼았다고 했는데…….
“여기, 아무래도 지구이면서 루나 같은데.”
[대체 그게…….]잔뜩 흥분했던 김미소도 마음을 가라앉혔다. 침식의 확장 이유를 알지 못해 두려웠고, 당황스러웠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면, 더불어 사장님이 제어하고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그녀의 머리는 맹렬히 회전했고, 지난 대화를 되짚으며 가설 하나가 떠올랐다.
아니, 그 이전에 확인해야 할 시급한 최우선 과제가 떠올랐다.
“그래.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장재식.
그의 영혼이 있다면 이곳뿐이다.
신계로 오르기 전 해야 할 일이 하나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