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tation Druid RAW - Chapter (476)
477화 허공록 (2)
만박자.
강호 무림에 수많은 고수들이 있고 은거한 기인이사들이 많다지만, 그중에 만박자는 특별했다.
은거한 강호인들 중에서도 만박자는 전설적인 취급을 받는지라, 반쯤 영물이나 신선 취급을 받고 있는 존재였다.
“그는 인생의 목적이 오직 진리의 탐구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던 자예요.”
만박자의 인생 자체를 보여주는 말로, 은거 전 그가 종종 내뱉는 말이었다.
다른 무림인들이 전쟁을 통해, 자기 수련을 통해 자신을 증명해 역사에 이름을 남길 때, 만박자는 세상에 대한 진리 탐구를 통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역사에 증명하며 남들과 특별한 축복을 받았죠.”
“으음, 알고 있습니다. 유명한 일화이니……. 그는 진리를 탐구할 시간을 정산받았지요.”
“맞아요. 만박자는 살아 있는 신선이라 불리기도 하지요.”
그는 은거한 전대 고수지만, 은거하지 않기도 했다.
“분명 또 어딘가에 계실 터인데…….”
지금도 어딘가 강호를 주유하고 있을 만박자다. 그는 역용은 물론 변체환영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고수라, 스스로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직접 나서기 전엔 찾기 어렵겠지요.”
“혹, 신니께서는 알고 계신 바가 있으신지요?”
“불경 외는 늙은 비구니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분이 종적을 감춘 지 벌써 반 갑자는 지났건만.”
“후, 그렇지요? 혹시나 하여 여쭤 봤습니다.”
아쉬워하는 중언개를 보며 태사신니가 드물게 먼저 물었다.
“맹주께선 어찌하여 만박자를 찾으시는지요?”
“강호 무림에 그가 모르는 게 없지 않습니까? 혹, 맹이 설립되기 이전의 소식을 아는지 하여…….”
“맹이 존재하기 이전이라면 너무나 까마득한 일인데, 어찌하여 그것이 궁금하십니까?”
“후, 모르겠습니다.”
중언개는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태사신니는 그저 담담한 신색으로 중언개를 기다려 주었다.
그의 고뇌는 깊어졌고, 혈교의 비룡을 구경하기 위해 몰렸던 맹의 무사들도 모두 돌아갔다.
역사의 눈이 자리한 후원엔 중언개와 태사신니만이 남았고, 해가 산마루에 걸려 노을이 지려 할 때쯤 중언개가 입을 열었다.
“아!”
호법 아닌 호법을 서고 있던 태사신니는 무언가 깨인 듯한 중언개의 표정을 보며 축하했다.
“심마는 물렸는지요?”
“심마가 아닙니다.”
중언개의 얼굴엔 흥분으로 인한 홍조마저 번지고 있었다.
“나는 깨달은 겁니다.”
“오, 성취에 진전이 있습니까?”
태사신니는 그답지 않게 깜짝 놀랐다.
화경의 경지는 현세에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니까.
그 뒤가 현경인데, 그것은 역사의 축복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꿈의 경지다.
현경의 경지는 오직 구천 행성에서 단 한 명에게만 내려지는 축복이자 구천 행성 최강자라는 증명이니까.
역사의 축복 외에 현경의 경지에 오를 방법이 있다면 이야말로 무림의 혁명이다.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그런 깨달음이 아닙니다.”
늙은 거지의 얼굴은 고양감이라기보다는 부끄러움을 담고 있었다.
“제가 맹 이전의 기록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단 한 번도, 난 단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의혹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태사신니는 말없이 중언개를 지그시 보았다. 그것이 왜 문제라는 말인가?
“인지하지 못한 게지요. 단 한 번도. 누구나 상상하고 궁금해 할 법하건만, 난 우리 무림의 기원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품지 못했습니다. 신니께서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노납은 맹주의 말을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태사신니의 반응에 중언개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태사신니마저 아무런 위화감이 없구나.’
오랜 고수인 그녀가 이 정도면 다른 이들은 어떠할까?
한번 깨우친 의문은 꼬리를 물고 다른 의문을 불러왔다. 확인해 보아야 한다.
“무림의 정보에 귀가 밝다는 소생조차 단 한 번도 의문을 품지 않았으니, 세상에 누가 있어 그 기원에 대해 궁금해했겠습니까?”
“으음, 맹주께서는 그것이 만박자라 여기시는 게지요?”
“그렇습니다. 헌데 대화하다 보니 다른 이들도 과연 그것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품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이제부터 한번 알아봐야겠습니다.”
들뜬 열망마저 느껴지는 중언개의 얼굴을 보며 태사신니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맹주께서 그리 의욕적이시니 노납 또한 기쁘구려. 나무관세음보살.”
“…….”
타인의 감정에 대해 저리 공감하는 태사신니가 기원 이전의 기록이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들어 놓고도 회피하는 것 같은 모습에, 슬슬 피어오르던 위화감이 기름을 끼얹은 듯 불탔다.
‘아예 호기심을 거세당한 것 같은 기분이 아닌가?’
자연의 섭리가 그러하다.
육지에 사는 인간이 바닷속이 어떠한지 가보지 않고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상상할 수는 있는 일 아니겠는가?
헌데, 어찌하여 그 궁금증마저 생기지 않았는지 모를 따름이다. 의혹은 의심이 되어 중언개의 마음에 불을 지폈고, 조급한 마음이 일었다.
“무림의 일에 도움이 된다면 이 노납이 기꺼이 돕지요. 은거한 친우들을 만나 만박자의 행방을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신니께서 도와주신다니 든든합니다.”
중언개는 태사신니와 일별하고는, 항상 맹주를 따라다니는 호위무사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무림맹 이전의 무림에 대해 알고 있느냐?”
“금시초문입니다.”
“어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느냐?”
“예? 그야…….”
“되었다.”
대답이 궁색해 말을 아끼는 무사를 일별하고는 걸었다.
장서각에 들른 무림맹주가 장서각주에게 같은 질문을 하였으나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맹주.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시오? 차라리 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언제부터였는지 궁금해하지 그러시오?”
장서각주의 말에 중언개가 무릎을 쳤다.
“내 말이 그 말일세! 너무나 당연하게 떠 있는 저 태양도 언제부터 저리 떠 있었는지 궁금하거늘, 어찌하여 우리 무림의 역사에 대해 그간 궁금해하지 않았나 하는 걸세.”
“허허허, 별게 다 궁금하시오. 강물이 흐르듯 그리 존재했겠지요.”
“으음. 장서각주의 말은 잘 알았네.”
여전히 심통한 표정의 중언개가 떠나자 장서각주가 그를 배웅하며 별일이라는 듯 하늘을 보았다.
눈부신 태양을 보며 피식 웃었다.
“혈교가 난리인 마당에 별 대수롭지 않은데 맹주가 힘을 쓰니, 이 맹이 어찌 될는지…….”
맹주전에 돌아온 중언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장서각주를 만나고 다른 맹의 고수들도 만나고 왔다.
‘모두가 같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중언개는 깨우친 사람의 답답함을 느꼈다.
어찌하여 홀로 이리 답답한 심경인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여겼더니, 이것은 혹 심미가 아닌가?
견월망지라 하였다.
홀로 달을 가리키는데 모두가 손가락만 보고 있는 꼴이 아닌가? 어찌된 일인지, 하나도 자신의 본뜻을 이해하는 이가 없었다.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처럼, 혹은 모두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애초에 모두의 눈엔 달이 보이지 않는 것과 진배없으리라.
눈뜬 봉사의 심정이 이러할까?
더없이 기쁜 와중에 모두가 장님인 것을 알고 좌절하는 마음이 이러할까?
홀로 눈뜬 장님은 더없이 외로워졌다.
“나 또한 어쩌면…….”
혈교의 부교주가 그리 압박하며 물어대지 않았으면 깨우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와의 대면이, 대화가, 그 압박감이 단초가 되어 중언개를 깨우쳤다.
깨우치고 보니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한 번도 품지 않았던 의문.
그저 마몬족과의 전투와 역사에 이름하나 남기기 위해 한 투쟁의 세월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왜 그토록 역사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마치 뒤가 없는 사람처럼 도전하고, 투쟁하고, 명성을 얻으며 역사에 이름 한 줄을 올렸다.
그러지 못하면 마치 죽는 것처럼…….
아니, 죽음도 불사하며 역사에 남길 바라니,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에 쫓기고 있는 느낌마저 받았다.
‘무엇을 위해?’
중언개는 탄식을 뱉었다.
“아, 만박자의 심정이 이러했겠구나.”
세상의 진리를 찾아 떠돈다는 그가 받은 고통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모두가 관심도 없고, 물어도 모르며, 보여 줘도 보지 않는 상황에 말이다.
중언개는 붓을 들었다.
“눈뜬 자가 있다면 찾아야지. ”
중언개는 외유를 나가 있는 대제자를 대신한 개방의 제자 하나를 불렀다.
“필사해 모든 도시와 마을에 내 걸어라.”
“네, 맹주님.”
이런 일은 맹의 무사들보다 개방의 거지들이 낫다.
제자가 글을 소중히 받아 나가고, 중언개는 눈을 감았다.
‘혈교의 일은…… 후, 내가 안다 한들 어찌할 수도 없는 것.’
혈교가 무엇을 위해 구천 행성에 왔건 고민 자체가 무의미하다.
대응 자체가 무소용이니, 그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맞춰 주기만 하면 된다.
그리 생각하니 저들은 무림맹과 마몬왕국을 초토화시키고도 별다른 요구사항이 없는 관대한 점령군이 아닌가?
‘사천당문주의 신변 보호야 본디 맹의 일이라 할 수도 있지 않나?’
무려 그 혈마와 의형제를 맺어 구천을 떠나 지구에 터를 잡은 사천당문.
그 문주가 쓰러져 의식이 없이 돌아왔으나, 어찌 되었든 그냥 저들의 요구대로 잘 보살피기만 하면 된다.
이제 곧 구천의 무림 진영 모든 마을과 도시에 방이 내걸릴 터이니, 지금은 괜히 생각해 머리만 아픈 혈교의 일보다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화두부터 처리할 때이다.
‘누구든 나오겠지.’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눈뜬 장님이건, 정체를 감추고 지금도 강호 무림을 주유하고 있을 만박자건 말이다.
“하오문주를 만나야겠군.”
뇌옥에 갇힌 습격자들이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
와이번으로 변한 동수의 가슴과 등, 허벅다리 옆으로 저마다 탑승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 등 위에 자리한 탑승석.
쐐애애애애액!
미칠듯한 바람이 불어와 안면을 때리고 있었다.
“으어어어어.”
SS등급 각성자 이성우는 압력에 저절로 입술이 벌어져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다 겨우 입을 다물었다.
턱에 힘을 빼는 순간 세찬 바람은 입안에 들어와 볼을 풍선처럼 부풀릴 터다.
아무리 각성자가 초인이라 한들, 무려 신수급 와이번이 비행하는 속도는 무지막지했다.
눈을 뜨면 눈알이 빠질 것 같아 꼭 닫고 있지만 눈물이 미친 듯이 흩날리고 있다. 코에서 나오는 콧물은 신경 쓸 틈도 없다.
아니, 손발이 꽁꽁 묶여 애초에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아까부터 참아 왔던 소변은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벌써 지렸으니까.
“아오, 찝찝해 죽겠네. 속도 늦출까요?”
와이번으로 변해 미칠 듯한 속도로 날고 있던 동수의 항변에 김미소가 미소지었다.
“괜찮아요.”
김미소가 조화력을 끌어올리자 그들을 공격하던 바람은 부드럽게 갈라져, 탑승석엔 미풍 정도의 시원한 바람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허윽, 허윽!”
바람이 사라지자 거친 숨을 뱉은 이성우가 눈물로 흐린 시야를 정돈하기 위해 눈꺼풀을 빠르게 깜박였다.
나무로 된 탑승석에 앉은 이는 둘.
‘빡빡머리, 마녀.’
명진 스님과 김미소 부사장이었다.
명진은 명상하듯 눈을 감고 앉아 있고, 김미소는 생글거리며 다가왔다.
“아직 한참 더 가야 하니, 우리 대화나 해 볼까요?”
“…….”
대화는 얼어 죽을.
고문이겠지.
입을 꾹 다문 이성우를 보며 김미소의 미소가 짙어졌다.
“허락을 받았어요. 사장님은 더 이상 이성우 씨를 크게 생각하질 않네요? 이제 당신의 효용가치는 제가 판단해도 된다는 거죠.”
“…….”
“무슨 말인지 모르세요?”
“…….”
침묵하는 이성우를 보며 김미소의 미소가 사라졌다.
“가치가 없으면 지금 죽게 될 거예요.”
“……시발.”
이성우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회귀마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