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217
107화
달칵.
그 소리는 작지만 분명했다.
마치 거대한 열쇠 구멍의 일부분이 된 것처럼 온몸이 시큰거렸다.
사지가 회오리처럼 배배 꼬이는 감각이 듦과 동시에, 잡아당겨 길게 늘어진 반죽처럼 흐물흐물해졌다.
육신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태초부터 너는 이 자연의 일부였다는 듯이.
껍데기는 그저 그릇에 불과하다 말해주듯이, 모래처럼 쏟아져 내렸다.
부드럽게 풀어지는 살갗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허공에 몸을 맡겼다.
광활한 마나의 유수가 실처럼 내 위를 스쳤다.
이건.
‘전에도 느껴본 적 있는 감각.’
이겸이 준 못 반지가 발동되었을 때에도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위대한 자연의 흐름의 일부가 되어 둥둥 떠다니는 기분.
‘세상’과 ‘나’의 경계가 허물어지던 기운.
그러나, 그때와 지금이 명백히 다른 점은 한 가지였다.
“【무너트려】.”
내 의식이 제대로 존재한다는 것.
오감으로 내뱉은 진언이 우레처럼 창공을 뒤흔들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내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빛이 되고, 질서가 되어 어둠을 밀어냈다.
휘둘리지 않고, 빼앗기지 않고.
나는 철저히 그 빛 위에 군림해 있었다.
‘지지 않는다.’
어떤 것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이 힘은 오롯이 내 것처럼 느껴졌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오색빛깔의 섬광도 내 손짓 하나면 움직임을 멈췄다.
거꾸로 역류하거나, 가끔은 고래 물줄기처럼 샘솟기도 하며 도망치기에 급급한 검은 악을 후려쳤다.
사위에 자욱하게 꼈던 안개가 노이즈가 낀 화면처럼 번지며 사라져갔다.
내 모든 의지의 목표물은 이제.
‘단 하나 뿐.’
데엥― 데엥― 데엥―…….
오래된 괘종시계의 알림처럼 묵직한 종소리가 밤하늘 위로 울려 펴졌다.
순간, 싸우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낯선 소리가 들려오는 공중으로 치솟았다.
사뿐한 발걸음이 허공 위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아…….”
얕은 탄성들이.
살아 있음을, 아직 여기에 숨 쉬고 있음을 나타내는 새하얀 입김들이 터져 나왔다.
그 숨결들은 구름처럼 둥실 떠올라 곧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내게까지 맞닿았다.
그곳에는 온 하늘을 뒤덮을 만큼 거대한 금빛 시계판이 떠올라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세상의 시간을 관장하는 축이 내 발밑에서 움직였다.
수많은 톱니바퀴와 태엽, 나사들이 일관적인 균형을 맞춰 돌아가고 있었다.
그 구조는 아주 치밀하고 정교하게 짜여 자칫 하나의 부품이라도 비틀어지면 모든 것이 엉망으로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온이헌이 조종하는 그림자들마저 이 시계 가까이로 다가오는 일은 두렵다는 듯 주위를 뱅뱅 배회할 뿐, 내게까지 닿지 못했다.
그들 역시 자연의 일부.
‘멍청한 주인 대신 이 시계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
물론, 나 역시 이 시계가 어떻게 불려오게 되었는지 과정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단지 온이헌을 멈추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고, 빛이 의지에 공명하듯 이곳에 시계를 끌고 왔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건 정체불명의 수레바퀴가 내 [유니버스] 스킬처럼 ‘바깥’에서 왔다는 것.
그리고.
‘어디선가 학습된 것처럼 이 시계에 대한 모든 정보가 머릿속에 새겨져 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수많은 수식과 연산을 받아들이고 계산하는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나는 아주 작은 개미처럼 보이는 온이헌을 내려다보았다.
놈은 사령체들을 소환해 탑처럼 쌓아 내게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미끄러지길 반복했다.
온이헌의 악들은 태양 아래서 파사삭 흩어지는 바퀴벌레들처럼 주인을 버리고 도망치고 있었다.
꺼진 땅 밑으로. 어두운 응달 곁으로 숨어들었지만 이제 내게는 아이들의 놀이 장난처럼 보이는 것에 불과했다.
이 공간의 주도권은 전부 내게 있었다.
반경 안에 있는 모든 빛의 권위를 지닌 인간으로서, 고압적으로 온이헌에게 충고했다.
정말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진짜 ‘전력’으로 막아야 할 거야.”
달을 가리고 있는 구가 조금씩 저물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멈춰라】.”
째깍, 째깍, 째깍, 째깍, 틱.
틱.
틱…….
균일하게 움직이던 초침이 무언가에 걸린 것처럼 잔 떨림을 내며 한 자리에 머물렀다.
그리고.
“……멈췄어.”
누군가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바람도 멎어 버린 것 같은 적막한 공간에서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히 울렸다.
그 말대로였다.
온이헌이 가진 모든 것은 정지했다.
끊임없이 뭉개지고 합쳐지던 사령체도, 지면을 새까맣게 잠식한 기운도, 사람들의 발목을 잡아끌던 검은 손도, 갈퀴도, 가시도.
전부 다.
마치 사진 속에 찍힌 정물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사이에서 움직이는 건 온이헌 뿐이었다.
그의 얼굴이, 드디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 얼굴이 훨씬 보기 좋네.”
명백히 조소하는 태도로 온이헌에게 달려들었다.
하나의 물결처럼 마나 속에 녹아든 나는 그의 몸을 파도처럼 밀어 덮쳤다.
놈이 숨 쉬는 모든 구멍으로 빛이.
그리고 빛으로 변한 내가 스며들었다.
“【정화】.”
강렬한 족쇄처럼 놈의 목을 조였다.
작은 세포처럼 분열된 섬광은 온이헌의 숨구멍을 하나하나 틀어막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새까만 덩어리로 똘똘 뭉친 놈의 암흑이 구역을 빼앗기지 않으려 발버둥 쳤지만, 미약한 효과일 뿐이었다.
사과를 씹어 삼키는 뱀처럼 나는 어둠을 성큼성큼 집어 먹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용솟음치는 섬광이 신경으로 연결된 모든 곳이라면 빠짐없이 순회할 것처럼 온이헌의 몸 속을 휩쓸고 지나갔다.
놈이 검은 기운을 채우는 속도보다 광휘가 놈의 내부를 희석시키는 속도가 빨랐다.
마침내, 모든 게 빛으로 물들었다 생각했을 때.
나는 아주 깊고 뻥 뚫린 거대한 구멍 앞에 도달해 있었다.
그곳은 너무 황량하고, 공허하고, 허무해서 빛을 둘둘 둘러싼 나마저도 오한이 들 정도였다.
나를 호위한 섬광들이 먼저 경계하듯 안쪽으로 향했지만, 곧 그 끝을 알 수 없이 새까만 심연 속에 자취를 감췄다.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모든 의지를 잃어버린 채 무상함에 잠식될 것 같은 짙은 절망이 느껴졌다.
구우우우…….
침입자를 알아챈 것처럼 구멍이 낮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찌그덕. 찌그덕.
팔만 남은 검은 손들이 질척한 체액을 남기며 구멍 안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헐거운 손아귀가 어서 들어오라는 듯 내 발목을 잡아끌었다.
바깥에서 느꼈던 것만큼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서 있는 중심을 흔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나는.
“안 그래도 갈 거야.”
귀찮은 벌레를 떨어트리듯이 다리를 한 번 털어내고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가, 정말 녀석의 근원이다.’
그런 직감이 본능적으로 스쳤기 때문에.
깊숙이 진입할수록 진득하고 소름끼치는 시선이 늘어났다.
힘의 차이를 아는지 함부로 다가오진 않았지만 목 뒤로 들러붙는 감각이 점점 더 꺼림칙해지고 있었다.
어느새 완연한 어둠이 찾아든 구멍 안은 사방의 경계가 보이지 않아 그냥 검은 판 위를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첨벙.
‘첨벙?’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허벅지까지 물이 차오른 후였다.
뒷걸음질 쳤지만, 땅이라고 생각했던 그곳 역시 이미 새카만 웅덩이였다.
물은 빠르게 불어나 어느새 명치께를 짓눌렀고, 묵직한 기운에 숨쉬기가 어려웠지만 나는 앞으로 걷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반드시 있다.’
다가오지 못하도록 힘을 짜내 막는 것만 봐도, 놈이 숨기고 있는 게 이곳에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덧 물은 목까지 차올랐다.
가끔 고개를 쳐들어 호흡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갑갑해져왔다.
그때.
“내가 악한가요?”
나와 똑같이 목까지 잠겨 있는 인영의 뒤통수가 보였다.
새하얀 백금발이 어둠 속에서 선명히 나부꼈다.
놈은 다시 한번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정말로 당신보다 악한가요?”
출렁.
파도치는 물결이 턱 끝에 맞닿았다.
“아니.”
나는 온이헌의 뒤통수에 대고 답했다.
“너랑 나는 똑같아. 절대적인 선, 절대적인 악. 그런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지. 대신.”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너랑 내가 다른 점은.”
공허 위로 떠 오른 금형의 문자들이 찰칵, 찰칵.
사슬 소리를 내며 어둠을 묶었다.
“너는 증오로 움직인다는 거고.”
별 같은 빛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구원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뿐이야.”
파아아앗!
새카만 물이 찬란한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광휘가 휘감은 해일은 어느덧 머리끝까지 차올랐고, 심연을 희게 밝혔다.
나는 투명한 물속에서 안으로.
더 깊은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온이헌을 끝까지 눈에 담았다.
마침내, 후드득.
놈의 뒷모습이 액체처럼 녹아 사라졌을 때.
그의 몸이 경련하듯 거세게 뛰어올랐다.
“쿨럭, 쿨럭. 큭, 커헉……!!”
온이헌은 검은 피를 왈칵 쏟아냈다.
한번 시작한 게워냄은 비단 입에서 토해져 나오는 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눈으로, 귀로, 코로.
온이헌이 지닌 암흑이 내부를 잠식한 빛을 견딜 수 없다는 듯 바깥으로 질질 흐르고 있었다.
끈적한 검은 물이 놈의 턱가로 느릿하게 맺혔다.
그건 아주 오랫동안 곪아 터진 진물 같기도, 수 없는 시간을 거쳐 고이고 썩어 찐득해진 웅덩이 같기도 했다.
털썩.
결국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무릎 꿇은 놈의 머리 위로 달빛이 아스라이 비쳤다.
나.
그리고 온이헌은 알고 있었다.
“끝났어.”
전부 끝났다.
흩뿌려져 있던 마나를 뭉쳐 다시 형체를 되찾은 나는 온이헌의 앞에 섰다.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듯이 검은 안개를 자신의 주변으로 끌어당기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잠시 온이헌의 몸을 감쌌다가 다시 흩어졌을 뿐.
더 이상 뭉쳐지지 않는 공허처럼 하늘 위로 흩어졌다.
그가 간헐적으로 밭은 숨을 내쉴 때마다 찢어진 상처 부위로 새하얀 빛이 새어 나왔다.
온이헌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
회색빛 탁한 기운으로 물든 놈의 연기들이 짓밟힌 눈처럼 툭, 투둑.
지면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우르르릉.
귀가 찢어질 듯한 우렛소리가 울렸다.
꽈아아아앙!
내리꽂힌 전격을 몸을 던져 막아낸 내 앞으로, 배신감이 점철된 눈을 한 이겸이 서 있었다.
탄내 나는 검은 손바닥을 대충 털어낸 나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이지 마.”
온이헌을 보호하듯 막아섰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