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229
119화
“인사도 안 하고 나와도 되겠어요?”
묻자, 잠시 속눈썹을 내리깐 리오의 뺨 위로 촘촘한 그림자가 졌다.
간신히 군데군데 가로등이 켜진 골목길.
이제 얼굴도 다 까지고 랭킹 1위라고 땅땅 공표도 된 판이었으나, 혹시나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랭커들(특히나 백골)에게 붙잡힐까 나는 야반도주 행색으로 주위를 경계하는 중이었다.
누군가 이런 꼴을 보면 리오를 납치라도 하는 것 같겠지만, 그는 복면강도 모습을 한 채 골목을 넘나드는 나를 순순히 잘 따라오고 있었다.
담에 등을 붙이고 주위를 경계하는 뒤통수에서 대답이 흘러 나왔다.
“괜찮을 거예요. 같은 전장을 함께한 전우로서 고생했다는 마음은 충분히 전하고 나왔거든요. 그리고…….”
그가 어쩐지 홀가분한 투로 털어놓았다.
“저는 애초에 정식 길드원도 아니었구요. 사부님께서도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떠나겠구나, 짐작하고 계신 것 같았어요.”
그 말에는 흠칫 놀랐다.
원래 그런 태도였다고 봐야 할지, 아니면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꽤나 우호적이라 생각했던 길드.
백골은 랭킹 1위가 바뀐 상황에 대하여 강경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불과 몇 시간 전, ‘아직 정리가 끝마쳐지지 않았으니 주요 회의에는 이겸만 참여 하겠다’는 언질을 5대 길드와 랭커들에게 전달했을 때.
『비록 비공식적인 회담이긴 하지만, 이모아 헌터께서 자리해 주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상징적인 안도감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함께 해주시길 필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白骨』
가장 먼저 답변이 돌아온 백골은 돌려돌려 ‘개소리 말고 와라’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어지러운 화랑의 사정을 생각해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해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유일한 길드 2개가 딱 청렴과 백골이었는데.
‘백골이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지.’
되레 흔쾌히 ‘그래라’ 했던 건 지혜의 문해라 쪽이었고, 나머지는 중립적인 쪽에 가까웠다.
물론, 백골의 의견은 합당했다.
나 역시 모르는 척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회의고 뭐고 목록에 적힌 일들은 하나도 해줄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원래 선빵이 최고라고.
초창부터 기대할 마음의 싹을 잘라놓아야 했다.
누가 붙잡기 전에 바로 화랑의 보호 구역에서 빠져나온 이유도 그것이었다.
최종적으로 멋이라곤 하나도 없게 도주하는 인간이 되긴 했지만, 리오와 내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라는 걸 아는 송새벽이 그를 미끼로 나를 낚아채는 장면도 염두에 둔 복장이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허술하게 리오를 보내준다고?’
떠날 걸 짐작했다면 얘 주변에 경비라도 배치해서 한 번은 대면했을 거 같은데.
공과 사를 아주 딱딱히 구분하는 송새벽의 마음을 모르겠다고 생각할 즈음.
“이렇게 방패도 선물로 받았는걸요.”
그가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방패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우둘투둘 표면이 도드라진 게 느껴질 정도로 긁혀 있고, 생채기처럼 부딪힌 잔 흠이 빼곡한 백골의 방패.
그래도 좋다는 듯이 해사하게 웃는 얼굴을 보자니 조금 이해가 갈 것도 같았다.
얘를 미끼로 삼는다는 그런 불순한 생각은…….
‘나만 하겠구나.’
음. 납득이 됐다.
송새벽을 그대로 빼닮은 백골은 앞에서 정당한 이유로 대치하면 대치했지, 뒤에서 공작질을 부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특히나.
‘소중한 사람을 걸고.’
그런 건 내 전문이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듣자 하니 새벽도 꽤 리오를 아꼈던 모양이고, 처음에는 물가에 애 내놓은 것처럼 적응할 수 있을까 싶었던 백골 길드원들 사이에서도 잘 지낸 것 같았다.
실제로 리오는 만날 때마다 새로운 공격 포지션. 새 스킬 같은 것들을 배워 와서 나를 놀라게 만들기도 했으니까.
순한 눈으로 방패의 양각 조각을 매만지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묻고 싶은 게 생긴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쉽진 않아요?”
혹시나 이상한 샛길로 빠지기라도 할까봐 최대한의 감정을 덜어, 순수하게 현재의 감상을 듣고 싶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솔직히 말해서는 그가 그렇다고 답해도 그럼 돌아가라거나.
끝나면 다시 백골로 보내주겠다거나 하는 입에 발린 말은 해줄 수 없었다.
최종 보스를 만나기 위해서 내게는 반드시 리오가 필요했고, 만약, 모든 계획이 성공해 엔딩이 난 이후라면…….
‘그다음이 어떨지는 나도 모르니까.’
그럼에도 나는 궁금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인간처럼 미세한 두려움이 기저에 깔려 있으면서도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모르는 게 없을 거라고 자만했던 리오의 마음이.
한 번도 내 예상에서 벗어난 적 없던 리오의 예상치 못한 행동들이.
전에 없던 새로운 관계를 스스로 만들어낸 지금, 어떤 게.
‘리오에게 좋은 일인지.’
하지만.
‘그가 정말로 아쉽다고 말하기라도 한다면.’
이 세계에 조금 더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다고 이야기 한다면.
그 땐 어떡하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머릿속이 조금 멍해졌다.
줬다 빼앗는 게 제일 나쁘다고.
내가 바꾼 이야기의 삶이 더 마음에 든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나는…….
순간 곁에 있는 리오가 지구와 달만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다시 윤채희의 정신을 지표면에 딱 발붙이도록 끌고 들어온 것 역시 리오의 목소리였다.
그는 내가 걱정한 모든 상상들이 무색해질 만큼 단단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요.”
잔잔한 눈빛이 덧붙였다.
“백골에게 도움을 청한 이유도 채희 님에게 어떻게 하면 더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다였는걸요. 물론 모두 좋은 사람들이고, 제게는 은인 같은 분들이지만…….”
설핏 나를 곁눈질 하는 시선.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었는데, 어느새 처음 마주쳤던 거리 위보다 훨씬 앳된 티를 벗은 얼굴이 작게 미소 지었다.
“진짜 제 이름을 아는 건 채희 님 뿐이니까요.”
싸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쓰러진 가로수에도 낙엽은 흔들리고, 무너진 건물에도 빛은 들었다.
모든 것이 달라져도 기필코 달라지지 않는 것이 내 앞에 서 있었다.
***
그리고, 밤새 걷고 걸어 도착한 곳은.
“여기 입니까?”
동그란 눈으로 묻는 리오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고풍스러운 현판.
멋스럽게 삐쳐 있는 기와지붕.
그러나.
‘테이프로 둘둘 말려있는 표지판.’
어째 달라진 거라고는 조금 더 테이프의 숫자가 늘어난 것뿐인 것 같은 성균관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나름 한국 마나의 기둥이랍시고 양쪽 다 철저히 수비를 했는지 크게 건물이 부서지거나, 무너진 곳은 보이지 않았다.
먼저 오른쪽.
그러니까, 내가 갈 마술 협회의 상태를 살펴보자면.
‘뭐야 저거. 촛불 띄워놓은 거냐?’
아직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곳이 많아 깜깜한 건 알겠는데, 실력을 자랑하듯 건물 주변으로 둥둥 올려놓은 촛등이 바람을 따라 깃발처럼 펄럭였다.
머리카락이 싸대기를 칠 정도로 몰아치는 강풍에도 용케 꺼지지 않는 걸 보면서 차암.
‘할 일도 없나. 마나 낭비 미쳤다.’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안 비밀이다.
어쩐지 리오를 데리고 들어가기가 조금 쪽팔리다는 생각이 들 무렵, 눈동자만 굴려 이번에는 왼쪽.
그러니까 여기는…….
‘청렴.’
연과 학이 있을 도술협회의 쪽이었다.
이해운부터 온이헌까지.
그들이 화랑에게. 그리고 내게도 참 많은 도움을 줬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나 연이 친구라는 이름으로 내게 보여준 믿음과 지지는 다 갚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내가 그녀에게 이런 마음을 받을 정도로 뭘 해줬었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고.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많은 생각들이 뭉쳐서.
하지만 지금은 뭐랄까.
‘그냥 인사하러 갈 정도로 낯짝이 뻔뻔하진 않지.’
내가 농땡이 치는 만큼 실질적 랭킹 2위의 역할을 맡게 될 그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따져보면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는 셈인데, 무슨 표정을 보게 될까 살짝 무섭기도 했다.
아무리 이모아의 탈을 뒤집어쓴 윤채희여도,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미움 받는 건 좀 싫어서.
어쨌든.
‘내 선택이 당신들에게도 선물이 되길.’
잠시 바랐을 뿐이었다.
착잡한 입맛을 다시며 두리번대고 있는 리오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새벽 4시가 가까워지는 시간.
마술 협회 건물들은 당연히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가끔 장지문 안 쪽으로 흔들리는 촛불 빛이 새어 나오긴 했지만, 그것도 그냥 조명처럼 보였을 뿐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진 않았다.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되는 거예요?”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묻는 리오에게 답하는 대신, 존경각의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
“…….”
음. 별거 없군.
기와 건물 내부를 스윽 둘러본 뒤 리오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들어와요.”
현자들의 도서관인 존경각 안은 종종 불꽃이 타닥거리는 소리만 들렸을 뿐, 말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나는 내 집 마냥 일렬로 늘어져 있는 고서 책꽂이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군데군데 책을 읽다 쓰러진 것처럼 코 고는 현자들을 마주치긴 했지만, 가뿐히 넘어주면 그만이었다.
리오는 처음 보는 광경에 신기한 눈으로 나무 기둥 사이를 지나다녔다.
가끔 아무 책을 꺼내 낡은 종이를 후루룩 넘겨보다가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꽂아두기도 했다.
그에 비해, 나는.
“광포의 송곳니…… 이건 아니고. 광학의 이해. 쓰읍, 이건 좀 쓸모 있을 거 같고.”
중얼거리며 척척 장서들을 뽑아 품에 들었다.
이게 내가 이곳에 도착한 이유였다.
이 존경각이야말로 살아 있는 마법의 본고장!
모든 스킬들의 고향!…… 이라고 말할 정도로 정보들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전에 [마나 파도]를 얻으러 왔을 때에는 굳이 쓸 데 없이 고급 스킬들을 익히느라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는데, 지금은.
‘보스 만나러 가야 되니까.’
적당한 채비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등급도 SSS고. 진짜 게임 같았으면 당장 레이드를 뛰어도 나쁘지 않은 상태지만.
‘나는 목숨이 한 개니까 말이지.’
코를 훌쩍이며 다른 고서들을 우수수 뽑았다.
서둘러 뒤로 붙은 리오가 돕겠다며 품 안의 고서를 덜어갔을 때에는 흔쾌히 고맙다고 전해줬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채희 님.”
조용히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리오는 이미 쌓인 책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아니. 상체보다 한 두 배 정도는 책을 들고 있었다고 해야 될까.
“아, 미안요.”
내가 정신이 팔려가지고. 하하.
멋쩍은 목소리로 반쯤 고서를 나눠 들려던 차, 리오는 몸을 흔들어 그게 아니라는 신호를 보냈다.
뒤이어.
“무슨 소리가 납니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요.
경계 어린 투로 이야기한 그가 책을 내려놓았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