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became the younger sister of the villain RAW novel - Chapter 97
97화
리오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 말을 작게 읊조리기만 했다.
그 모습이 뭔가를 다짐하는 것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는, 한 번도 그에게 내 계획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준 적 없었다.
그래도 옆에 뚫린 입들이 세 개나 되니 대충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놈들이 전부 그 미친 종교와 연관되어 있거나, 자신이 어떤 괴물인지도 모르는 인간들인 것을.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박살 내기 위해 움직인다는 것쯤은.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없을까요.”
그가 눈을 마주치며 조심히 물어왔다.
나는 아주 단칼에 리오의 기대를 잘라냈다.
“최대한 눈에 띄지 마요.”
지금 리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봤자 좋을 게 하등 없었다.
나야 어차피 한 번쯤은.
이모아로 살아남기 위해, 언젠가는 ‘너 죽고 나 살자’ 느낌으로 가야 하니까 그 시기를 조금 앞당겼을 뿐이지, 명암 놈들을 물 먹인 뒤 여파를 걱정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이번 일로 모든 뿌리를 뽑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타격을 입은 명암이 무너질 가능성.
그로 인해 살아남는 사람들이 생길 가능성.
서사와 인과율이 무너지고, 또 누군가를 죽게 만드는 포탈들이 발생할 가능성.
거기에 리오까지 끼어든다면…….
‘그건 좀 문제가 있다.’
안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세워 올린 젠가를 확 무너트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다음은 좀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번 싸움에서 모든 포커스는 철저히 나에게 쏠려야 했다.
리오도, 화랑도, 채본도 아니고.
‘오직 나에게.’
생각해보면 그를 완벽히 상황에서 배제하는 게 가장 베스트였다.
근데, 멀쩡한 사람을 어디 가둬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공공연히 모두가 아는 예언 장소라면 그도 등장할 게 뻔한 일.
그렇다면.
“어디서 나를 발견했는데 내가 위험해 보이거나, 급박해 보여도 오지 않기. 차라리 그 시간에 사람이나 하나 더 구해서 안전하게 돌려보내기.”
“…….”
“약속해요.”
이건 최대한의 부탁이었다.
짧은 침묵.
짐짓 진지한 얼굴로 생각하던 리오가 조용히 한 손을 내밀었다.
뭐. 악수라도 하자고? 영문도 모른 채로 분위기를 맞춰 손을 내밀자.
“……뭐 해요?”
튀어나온 새끼손가락이 똑같이 내 새끼손가락을 가져가 얽었다.
꼭 걸어 잠근 모습이 마치 자물쇠처럼 견고했다.
얼빠져 묻자 리오가 되레 더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이게 이 세계에서는 약속의 맹세라고…… 절대 깰 수 없는 증표라고 그러던데요.”
“누가요?”
“포탈에서 구해줬던 아이가요.”
“푸핫.”
속절없이 웃음이 터졌다.
내 태도에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는지 무안한 얼굴이 손가락을 풀어 손을 다리 밑으로 숨겼다.
리오의 손목을 붙잡았다.
“맞아요. 이렇게 하는 거.”
그 손을 가져와, 다시 새끼손가락을 꼭꼭 걸었다.
“그러니까 절대 어기면 안 돼요.”
가볍게 손을 놓았다.
아직 감촉이 남은 새끼손가락을 매만지던 리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19일이면…… 다음 날이 채희 님 생일이네요.”
생일.
나조차도 잊고 있던 사실에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이름을 말한 이후, 리오를 만날 때마다 잠깐씩 스쳐 가듯 나눴던 ‘내’ 이야기를 기억한 모양이었다.
리오는 이모아가 아닌 ‘윤채희’에게 관심이 많았으니까.
어디에 살았는지, 좋아하는 게 뭔지, 보고 싶은 사람은 없는지.
그리고.
‘생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따지고 보면 참 공교로운 날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런 게 지금 무슨 상관이라고.’
엉덩이를 뗐다.
나는 지금 윤채희가 아니라, ‘이모아’로 살아남기 위해 아직 가야 할 곳들이 많았다.
리오와 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언제나 조심스러웠고, 의도적으로 윤채희가 아니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니까.
“그러게요. 끝나면 파티라도 해야 될까 봐.”
가벼운 우스갯소리로 리오의 말을 넘겼다.
나를 배웅하려 엉거주춤 일어서는 그를 보며 문지방을 밟고 고개를 까딱였다.
“다치지 말고 조심히 다녀요. 저 사람들 얼른 보내고.”
그러나 뜻밖에도, 리오는 그 말에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주춤거리는 태도.
불가사의한 불쾌함이 또 스멀스멀 몰려왔다.
“왜요?”
생각보다 날카롭게.
따지듯 튀어나온 목소리에 나조차도 놀랐지만, 딱히 사과할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저 새끼들도.
“인질한테 진짜 정이라도 들었나?”
결국에는 명암과 한통속이기 때문에.
조금 멍청해 보이고, 그 집단에 깊게 속해있지 않은 말단이라지만 나에게는 이태환이나 저 교인들이나 똑같은 존재들이었다.
놈들의 손아귀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죽어서도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내내 나의 밤을 괴롭혔다.
감지 못한 눈들이.
그러나, 리오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저는, 단지…….”
발을 돌려 다시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럴 때는 물러서는 일도 없다.
리오는 그저 고요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관철하기 위해 숨을 이어갈 뿐이다.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간 길이 너무 멀어 돌아오기 겁났던 사람들. 멈춰줄 존재가 사라진 사람들.
당장 오늘 죽어도 아무도 모를 허공이었다가…… 톱니바퀴 같은 가치라도 부여받은 사람들이요.”
“…….”
“저 사람들 역시 이 세계의 피해자.……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야기.
각자의 사정.
내가 알던 게임과 이 세계의 가장 다른 점은 그것이었다.
모두에게는 이야기가 있고, 누군가를 섣불리 안다고 말하지 못하게 된 것.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함부로 이해한다고도 말할 수 없게 된 것.
하지만 나는.
“또.”
이번만큼은 인정할 수 없었다.
꽈악. 날카로운 손톱이 하얗게 질리도록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또, 자기 탓이라고 하네.”
이 상황이 조금 지겨웠다.
“리오. 윤산영.”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리오가 있다는 게 가끔은 너무 다행이면서도, 가끔은 너무 싫었다.
꽁꽁 묶어둔 목소리를 떠오르게 하는 그가 거슬렸다.
「채희야, 세상은 결국 선한 것들이 모여 움직이게 돼 있어.」
「네가 베푼 다정이 아무도 모르게 네게로 돌아오는 날이 올 거야.」
「스스로를 구하는 건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이야.」
「채희야, 엄마는…….」
나는 그것들을 단 한 번도 믿은 적 없었다.
코끝을 찌르는 향냄새. 국화. 어두운 밤, 불현듯 눈을 떴을 때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숨죽여 우는 엄마.
그런 것들만 남아 어린 윤채희는 생각했다.
선함은 아무것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때로는 분노가 사람을 살게 한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했건, 어떤 상황에 처했건, 남들을 이용해먹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난.”
침을 삼키는 목구멍이 홧홧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피해 보는 세상이 엿 같아.”
그리고 멍청하게 당하는 사람들 역시.
“짜증 나고.”
안개처럼 덧붙였다.
리오는 아무런 말도, 하물며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목표가 같다고 해서 모든 이유가 같을 수는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수평선을 달리고 있었으니.
“이건 내 생각. 마음대로 해요.”
리오가 어떻게 움직이든 내 계획을 망칠 수는 없었다.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활짝 연 문 위로 찬바람이 뺨을 내리쳤다.
다음 목적지는 청렴.
유일하게 예언이 진짜임을 아는, 연이 있는 곳이었다.
***
그리고, 채널대책본부의 총장실.
여기에 들어온 게 얼마 만이더라.
도 학은 견디기 어려운 침묵 속에서 잠시 생각했다.
길드 마스터들을 불러 봤자 회의실.
못해도 각성 센터라던가, 아니면 대접의 의미로 연 조찬 만남이 대부분이었는데.
‘시커매. 사람이 까매도 너무 까매.’
어수선한 시선으로 총장실 내부를 흘깃거렸다.
벽지부터 흑요석 데스크, 암석 바닥, 하물며 창틀까지.
중앙에 놓인 가죽 의자 뒤로는 국기와 채본의 정의와 결기를 상징하는 흰색 깃발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학의 맞은편에는…….
“…….”
“케흐흠. 큼. 아, 안이 좀 건조하네…….”
이겸이 마주 앉아 있었다.
그는 들어온 순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을 뿐, 그 뒤로는 단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곧은 자세를 유지했다.
함께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상위 랭커로서 같이 미션에 차출된 적도 여러 번이고.
길드끼리 교류도 있는 화랑은 좋은 동료이자 믿음직스러운 전우였다.
하지만.
‘영 딱딱하단 말이지.’
거기서 끝.
다른 마스터들처럼 개인적인 친분을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다.
이겸은 언제나 가장 높은 곳에서, 홀로 서 있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자기 할 일만 잘하면 되지.
학은 머쓱하게 홀짝홀짝 비서가 내온 차를 들이켰다.
서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지만, 이곳에 둘만 불려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예언.’
중구를 담당하는 화랑이 불려온 건 당연한 일이고, 저번 예언에 속했던 청렴도 마찬가지다.
도 학이 불편한 눈치로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해운 총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사과는 겉치레일 뿐.
이 방의 누구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중앙 의자에 앉은 그녀가 어떤 서두도 없이 입을 열었다.
“묻을 생각입니다. 이번에도.”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거란 믿음이 기저에 깔린 본론이었다.
전과 다르지 않은, 태연한 선언에 도 학이 반박했다.
“하지만 총장님, 이번이 벌써 두 번째입니다. 세 번째, 네 번째 예언이 등장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불안해하는 사람들의 수도 저번보다 훨씬 늘고 있고…….”
“총력을 쏟아 예언의 근원지를 파악하는 중이니 그때까지만 고생해주시면 됩니다.”
“이태원처럼 다음이 있다면요?”
그의 얼굴로 시선들이 엇갈렸다.
학은 이미 한 번 겪어 봤음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은 아는 것들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여기 모인 사람들은 그걸 막아내야 할 ‘의무’가 있는 자들이었다.
이 당연한 걸 왜 자신이 설득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학은 아주 천천히.
하나하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나갔다.
“예언 포탈이 터진 후, 똑같이 더 큰 사고로 이어진다면요.”
“…….”
“그냥 모두에게 예언의 진위여부를 알리고, 먼저 시민들을 대피시키는 것이…….”
“도 학 길드장님.”
이해운 총장이 말을 잘랐다.
뱃속이 서늘해질 정도로 냉엄한 시선이 그를 꿰뚫었다.
“우리가 지키는 건 대한민국. ‘서울’입니다.”
그녀가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댔다.
이런 소모적인 토론이 피곤하다는 듯,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건조하게 말했다.
“체제가 무너지면 국가도 없고, 국가가 무너지면 국민도 없죠.”
충고하듯 학의 어깨를 눌러 잡았다.
“행동의 주체.”
“…….”
“그걸 다시 한번 재정립하시는 게 우리의 대화에 좋겠군요.”
그녀가 딱딱하게 굳은 학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어 번 두드렸다.
“조용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해운 총장이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 뒤로 흰색 깃발이 잠시 나부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