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38
신필천하(神筆天下) 38화
금룡표국에서의 생활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무공이 뛰어난 진양은 표사들의 훈련을 도와주는 등, 비교적 가벼운 임무를 맡아 진행했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누구보다도 책임감을 가지고 표국의 일에 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인표는 도장옥과 정여립을 데리고 진양을 찾아왔다. 그는 다짜고짜 진양을 데리고 표국을 나섰다. 진양이 말을 타고 가면서 어딜 가는 것인지 물어보았지만 유인표는 그저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다며 빙긋이 웃기만 했다.
네 사람이 도착한 곳은 제법 너른 저택이었다. 그들이 내당으로 들어서자 마침 걸어 나오던 사내가 크게 기뻐하며 맞이했다.
“하하! 어서들 오시게!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네!”
진양이 가만 보니 낯빛이 불그스름하고 웃음소리가 호탕하면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것이 가히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얼굴만 본다면 오십대 중, 후반의 나이로 보였으나 체구가 탄탄하고 목소리가 우렁차서 그보다 젊은 듯 느껴졌다.
유인표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대장군?”
“하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었지. 음? 그런데 오늘은 새로운 얼굴이 보이는군.”
진양을 두고 이르는 말이었다.
유인표가 얼른 진양을 가리켜 소개했다.
“이번에 저희 표국에서 함께 일하기로 한 양 형제입니다.”
“호오! 유 아우의 안목에 들었으니 틀림없이 훌륭한 인재이겠군.”
유인표가 그저 웃어 보이고는 진양에게 고개를 돌렸다.
“인사 올리시게. 이분은 양국공(凉國公) 남옥(藍玉) 대장군이시네.”
그의 말을 들은 진양은 깜짝 놀랐다.
남옥이 누군가.
태조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건국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개국공신이 아니던가? 특히 명장 상우춘(常遇春)의 처남이었기에 더욱 유명한 그였다. 진양이 아무리 오랜 시간 천상련에 갇혀 지냈다지만, 남옥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보았다.
진양은 얼른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불초 양 아무개가 남옥 대장군님을 뵙습니다!”
“하하하! 거추장스러운 예는 집어치우시게나!”
남옥은 성품이 호방하고 자유분방한 자였다. 게다가 늘 자신감에 차 있었기에 목소리가 크고 우렁찼으며, 자못 거칠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기개가 남달랐다.
하지만 그런 만큼 난폭한 면도 없지 않아서 종종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림 영웅들을 매우 좋아했기에 자못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양진양이 꽤나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가 유인표를 돌아보며 말했다.
“사실 지금 이곳에 황태손 저하께서 와 계신다네. 벌써 돌아가시려고 했지만 내가 자네들을 만난다는 말을 듣고 저하께서도 뵙고 싶어 하시네.”
그 말에 유인표도 깜짝 놀랐다.
“저하께서요?”
“그렇다네. 금룡표국이라면 명실상부한 대명제국 제일의 표국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저하께서도 자네들을 한번 만나고 싶었던 모양일세.”
옆에서 듣고 있던 진양은 순식간에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기분이었다. 그저 유인표를 따라 아무 생각 없이 왔는데 이곳에서 황태손을 보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당시 명나라는 주원장의 아들 주표(朱標)가 병사해서 태손인 주윤문(朱允?)이 황제 자리를 이을 예정이었다.
그러니 진양은 물론 유인표 일행은 저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시절의 남옥은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지내고 있었기에 그의 집에 황태손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남옥은 네 사람을 이끌고 내당의 대청으로 들어갔다. 마침 탁자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던 소년이 남옥과 네 사람을 돌아보았다.
순간 진양은 그가 바로 황태손임을 알아보았다. 해맑은 얼굴과 총기 서린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는데, 몸에 걸친 옷은 능라주단(綾羅綢緞)으로 지은 것인지 번쩍번쩍 빛이 났다.
어찌 보면 언뜻 과격해 보이는 남옥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남옥이 그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이며 아뢰었다.
“저하, 금룡표국에서 온 자들입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유인표를 비롯한 네 사람은 즉시 무릎을 꿇으며 삼천세를 외쳤다.
“황태손 저하를 뵙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그러자 주윤문이 그들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번거로운 예는 접어두시오. 오늘 이렇게 만나서 모두 반갑소.”
“황공하옵니다, 저하.”
유인표는 시종 몸 둘 바를 몰라 고개를 조아렸다. 반면 진양은 자신보다 한두 살 어려 보이는 이 황태손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마냥 들뜬 마음만은 아니었다. 진양의 아버지는 호유용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었다. 때문에 현 황제의 직계손인 주윤문이 마음에 들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적당히 예를 차리며 어울렸다.
황태손 주윤문은 바깥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유인표에게 이것저것 물어가며 열심히 이야기꽃을 피웠다.
반면 그는 양진양이 자신을 별로 어렵게 대하지 않자 오히려 호감을 가지게 됐다. 모두들 자신에게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리는데 진양만큼은 조금 달랐던 것이다.
한동안 이야기를 나눈 주윤문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그대들을 만나 안목을 크게 넓혔소. 다음에 다시 보면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눕시다. 만나서 반가웠소.”
유인표 일행은 그저 머리를 조아리며 몸 둘 바를 모를 뿐이었다.
남옥을 비롯한 유인표 일행은 대문 밖까지 나와서 그를 배웅했다. 주윤문이 호위를 대동한 채 궁으로 돌아가자 이들은 다시 내당 대청으로 돌아왔다. 그런 후 남옥은 하인을 시켜 술상을 크게 차리도록 지시했다. 곧 갖가지 음식들로 장만한 술상이 차려졌고, 유인표 일행은 융숭한 접대를 받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남옥은 이야기가 무르익어 가고 점점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하자 갑자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인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장군께서는 어찌 이리 한숨을 쉬십니까?”
“아무것도 아닐세.”
남옥이 손을 휘저었지만 표정만큼은 여전히 어두웠다. 유인표가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러지 말고 말씀해 보시지요. 소제가 불초해서 근심을 해결해 드리진 못할지라도 이야기 상대는 되어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남옥이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내 일전에 북평(北平:지금의 북경)에서 연왕(燕王)을 만나보았네. 한데 그의 행동거지가 황제와 다름없더군. 나중에 황권에 큰 위협이 될까 염려된다네.”
뜻밖의 이야기가 나오자 유인표는 내심 놀라고 말았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오래전 호유용 사건이 발생한 뒤 황제는 무고한 사람까지 연루해서 모두 죽였다. 이미 죽은 자가 일만 오천여 명에 달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인만큼 민감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것이 좋았다.
유인표가 애써 좋은 말로 달랬다.
“기우라고 생각하십시오.”
하지만 남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좋겠네만…… 풍수를 볼 줄 아는 사람의 말로는 연(燕) 땅에 천자의 기가 서려 있다고 하더군. 이러니 내 어찌 안심할 수 있겠나? 일전에 태자 전하께도 말씀드린 적이 있네만, 오히려 황제 폐하께서는 나를 의심하더군. 젠장!”
“대장군, 혹 숨어 듣는 귀가 있을까 봐 두렵습니다.”
이윽고 유인표가 자중을 요구하고 나서자, 남옥도 술잔을 비우며 분을 가라앉혔다.
그 역시 민감한 시기라는 것을 의식했는지 금방 화제를 돌렸다.
“표국이 습격을 당했다고 들었네.”
“예, 혈사채의 습격이었는데…….”
“흥! 그 도적놈들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는가 보군!”
남옥은 좀 전의 울분이 혈사채로 옮겨졌는지 짐짓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유인표가 말을 이었다.
“해서 보름 후에 혈사채를 찾아가 볼까 생각 중입니다. 그 배후에 조직이 있는 듯한데, 아직은 전혀 가닥이 잡히지 않는군요.”
“그렇군. 그럼 나도 자네를 돕도록 하지.”
“대장군께서 도와주신다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하하하! 아우가 곤란한 일을 당했는데 내 어찌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유인표가 오늘 남옥을 찾아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우선 금룡표국이 습격당한 것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은 유설을 비롯한 표두와 표사를 모두 죽이려고 했다. 이는 금룡표국의 근간을 흔들어 버리겠다는 뜻이 아니고서야 힘든 일이었다.
금룡표국은 강호 무림에서도 제법 영향력을 행사하는데다, 남옥과 같은 고위 관료들과도 친분이 두터운 곳이었다.
때문에 어지간한 배포로는 금룡표국을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는 것은 필시 배후에 큰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이리라.
그렇다고 혈사채를 치기 위해서 표국에 소속된 무인들을 대거 보낼 수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금룡표국이 맡고 있는 많은 일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한데 남옥이 도와준다면 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아무리 간 큰 도적이라도 대장군의 명으로 찾아오는 사람들마저 내칠 수는 없을 것이기에. 만약 그랬다간 반란을 일으킨 것과 진배없는 행위리라.
그래서 유인표는 그동안 혈사채에 대해서 나름대로 사전조사를 하고, 남옥이 비교적 한가할 때를 살펴 그가 흔쾌히 도와줄 수 있을 시점에 찾아온 것이다.
남옥이 문득 소리쳤다.
“흑표(黑表), 이리 나와보아라!”
그러자 한쪽 모퉁이 그늘에서 흑의를 걸친 사내가 스윽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진양을 비롯한 표국 사람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마치 귀신처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남옥이 사내를 향해 말했다.
“너는 내일부로 금룡표국의 일을 돕도록 해라. 일이 마무리되거든 돌아오라.”
“알겠습니다.”
흑표라 불린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고는 물러가려고 했다. 그러자 남옥이 다시 그를 불렀다.
“어딜 가느냐? 이제 금룡표국을 도울 것이니 인사라도 나누어라. 유 아우, 이자는 내가 거둔 아이인데 무공이 제법이라네. 지금은 내 호위를 맡고 있네만, 언제 내가 호위를 붙이고 다니던가? 하하하!”
유인표는 빙그레 웃으며 흑표를 살펴보았다. 대략 삼십대 초반의 나이로 보였는데,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범상치가 않았다.
“과연 보기만 해도 강한 기운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하! 그런가? 하지만 유 아우에게는 안 되겠지.”
“그럴 리가요. 저는 이제 기가 쇠해서 물러날 때가 됐지요.”
“음? 날 앞에 두고 못하는 소리가 없군!”
“하하하! 사실인 걸 어쩝니까? 대장군님이야 아직 기운이 넘치시지요. 하지만 보잘것없는 저보다는 아마 양 형제가 한 수 위일 겁니다.”
그 말에 남옥이 진양을 다시 돌아보았다.
물론 그 역시 처음 진양을 보았을 때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지긴 했다.
하지만 아직은 나이가 어려 보여서 크게 눈여겨 두지는 않았다.
한데 지금 유인표가 이토록 진양을 추켜세워 주니 문득 호기심이 일어났다.
“흐음, 그렇다면 이 기회에 양씨 아우의 무공을 한번 견식해 보는 건 어떤가? 양씨 아우가 괜찮다면 여기 흑표와 함께 대련을 청해보고 싶네만.”
느닷없는 제의에 유인표는 물론 진양도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진양이 다시 흑표를 돌아보니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오기가 솟았다.
‘저 사람은 날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데 내가 지레 겁을 먹을 이유는 없겠지. 한번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것을 보고 진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불초 양 아무개, 흑 형님께 한 수 가르침을 받아보겠습니다.”
그러자 남옥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고, 유인표도 손으로 수염을 쓸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도장옥과 정여립 역시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진양이 내당으로 가서 서자 흑표도 마주 선 채 포권을 취했다. 진양이 소지하고 있는 무기가 없었기에 흑표 역시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았다.
진양은 천천히 지둔도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물론 도가 없는 만큼 수도(手刀)를 이용한 자세였다. 한데 흑표는 기수식을 취하고 나서도 전혀 공격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무림 선배로서 내게 선공을 양보할 생각인가 보구나. 좋다, 그럼 먼저 가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