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09
제108화
“삼보장주의 영애와 너와 호형호제한다는 도화각주는 무슨 관계냐?”
질문의 의도가 빤히 보였기에 진천은 실소했다.
“아주 가까운 사이요.”
진천의 답에 강민의 검미 사이에 한 가닥 세로주름이 파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작년에 퍼진 소문과는 달리 연인지간이 아니라던데.”
“그렇소.”
“설마 두 사람이 육체적으로 정을 통한 건 아닐 테지? 애정이 없는 남녀 간에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지 않더냐?”
강민의 노골적인 물음에 진천은 처진 눈을 치떴다.
“행여나 그녀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오. 불쾌해 하는 정도를 넘어 혐오스러워 할 테니까.”
강민은 집요했다.
“둘이 통정하지 않았단 말이냐?”
답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진천은 입을 닫았다. 그의 침묵을 긍정적인 답변으로 해석한 강민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어째서 일 년이나 그런 몹쓸 괴담이 돌도록 방치했더냐? 아니, 애당초 왜 기루의 주인 같은 천박한 자와 어울렸다더냐?”
진천은 가뜩이나 호감을 느끼기 어려웠던 강민에 대해 관계 호전의 기대감을 접었다. 그가 노미현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젊은 사내가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강민에겐 예의가 부족했다.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결여되어 있었다. 이는 강정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명가의 후예들이면서도 둘 모두 ‘천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설명해주기 싫었지만 행여나 강민이 노미현을 붙잡고 직설적인 질문을 퍼부으며 결례를 범할까봐 진천이 마지못해 그녀와 여상구의 인연에 대해 밝혔다.
“내 의형과 그녀의 모친은 다소 친분이 있었소. 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소. 그녀의 모친과 내 의형의 소년시절의 연인이 절친한 벗이었을 뿐이오. 나의 의형은 예전에 연인에게서 하나밖에 없는 친구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소. 그러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연인이 얘기했던 친구의 딸이 찾아와 의탁을 청하자 들어주었던 거요. 세간의 입방아에 일절 신경을 쓰지 않는 성정인지라 내 의형은 불미스러운 풍문이 돌아다니는 걸 내버려두었소. 그게 전부요.”
여상구의 첫사랑들 중 한 명이었던 주연은 노미현의 모친인 전하연과 어린 시절의 단짝이었다.
풍족한 포목점의 다섯 자식들 중 셋째였던 주연은 상인도 글을 배워야 한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집 근처의 서방(書房)에 다녔다. 전하연은 서방을 운영하는 퇴락한 문사의 외동딸이었다. 둘은 공통점이 많았다. 예쁘장한 용모에 강한 자존심, 그리고 고집불통의 성격까지 판박이였다.
처음엔 주위의 주목을 누가 더 끄는지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는 경쟁자였으나 두 소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둘도 없는 벗이 되었다. 성정과 취향이 너무나 비슷해서 말을 하지 않고도 뜻이 통했고 그런 대상을 만난 건 행운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서로 간에 지음이 된 소녀들의 우정은 유감스럽게도 오래가지 못했다. 사이가 틀어져서가 아니라 주연에게 닥친 불행이 그들을 강제로 떼어놓았던 탓이었다.
주연이 열두 살 때 저자에 발생한 화재는 포목점을 집어삼켰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들도 저승으로 데려갔다. 하루아침에 천애고아가 된 주연은 먼 친척의 주선으로 봉천 도화각에 동기(童妓)로 팔려가게 되었다. 주안을 떠나기 전날 두 소녀는 밤새 부둥켜안고 울었다. 전하연은 어떻게든 친구를 돕고 싶었으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주연과 전하연은 비록 몸은 떨어지더라도 서로를 위하는 마음만은 평생 변치 말자고 맹세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삼 년 후 전하연은 주연에게서 뜻밖의 서신을 받고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어찌어찌하다보니 도화각의 후계자와 연분을 맺었다며 주연은 매달 쌀을 보내줄 테니 받아주겠느냐고 물었다. 주연의 예상대로 전하연은 답신에서 그녀의 마음만 받겠다며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끼니를 잇기 어려울 만큼 궁핍했지만 전하연이나 그녀의 부친이나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남에게 손을 벌릴 위인들이 아니었다.
주연은 소각주의 동의를 받았으니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알려달라는 당부로 아쉬움을 달랬다. 전하연은 장차 도화각의 안주인이 될 친우의 복운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가 엉뚱하게도 마령 문가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연이 마령 문가의 젊은 영웅 월영도 문찬우의 첩이 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전하연은 왠지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신분이 급상승한 친구를 질시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성정을 알고 있어서였다.
주연은 그녀처럼 일편단심 형이었다. 한 번 정을 주면 절대로 변심하지 않을 여인이었다. 얼마 전까지 도화각의 소주에 대한 사랑을 열렬히 고백하던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자의로 안겼을 리 만무했다.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몇 년 후 주연에게 닥친 비극을 전해들은 전하연은 어린 날의 친우가 가여워 몇날 며칠을 눈물로 지새웠다.
진천의 말을 들은 강민이 구겼던 인상을 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녀 같은 미인이 도화각주 같은 늙은이와 노닥거릴 리가 없지. 듣자하니 요녀처럼 주안술을 익혀 환갑이 넘었으면서도 서른 살로 보인다면서?”
진천이 경고했다.
“입조심하길 바라오. 내 의형은 무례를 참아주는 분이 아니오.”
강민의 검은 동공에서 시퍼런 안광이 번득였다.
“지금 나를 겁박하는 게냐?”
진천의 눈빛도 단단해졌다.
“의형의 면전에서 그런 소릴 하면 필히 화를 내실 거요. 그러면 나는 말리지 않겠소.”
강민이 콧방귀를 꼈다.
“흥, 누가 도화각주 따위를 겁낼 줄 알고. 어디 데려와 봐라. 그자의 얼굴에 대고 방금 전과 같은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 부을 테니까.”
진천은 전날과 달리 지나치게 경박한 강민의 언행이 노미현과 관계있음을 알았다. 여인에게 홀린 사내는 자기를 과시하려는 흥분 상태에 빠지기 쉬운 법이었다. 어쩌면 강민은 여자 경험이 전혀 없을 수도 있었다.
강민과 달리 강정은 진천이 정말로 여상구를 부를까봐 전전긍긍했다. 강민의 무위가 초절정에 들어섰다고 하나 화월도군의 팔을 자른 태극마선을 감당할 수 있을는지는 심히 의문이었다. 게다가 삼보장엔 파혼도를 묵사발 낸 인면요괴에 수라도를 일초에 운신불능으로 만들었다는 남천도왕의 손자까지 있지 않은가. 여기는 원주가 아니고 적진이라 해도 무방할 삼보장이니 몸을 사려야 마땅했다.
“굳이 잡스런 자들과 어울릴 필요가 없지 않으냐, 민아. 우리는 할아버님의 명을 이 아이에게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 할아버님께서…….”
강민이 그의 자중을 바라며 임무를 상기시키는 사촌 형의 말을 잘랐다.
“나도 아니까 구구절절 떠들지 않아도 돼, 형.”
강정에게 재갈을 물린 강민이 진천을 직시했다.
“할아버님의 말씀을 전하마. 한 번만 말할 테니 새겨들어라. 금월(今月) 말일 진시(辰時)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말고 너 혼자 그 낭떠러지로 오라고 하셨다. 그곳이 어딘지는 알 거라고 하시더구나.”
“…….”
“어째서 응답이 없느냐?”
“가도록 하겠소.”
용건을 마친 진천이 몸을 돌리자 강민이 그의 등에 대고 으르렁거렸다.
“내가 너에게 약세를 보인다고 착각하지 마라. 원래 너를 다시 보면 그 자리에서 그날 못 다한 승부를 끝 낼 참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보름 후 정맹에서 중요한 비무가 잡혀있기에 지금은 너와 칼을 섞을 수 없다. 이점 오해 없도록.”
진천은 아무런 대꾸도 주지 않고 방을 나갔다.
해가 서산에 기울자 빨간 노을이 하늘 가득 번졌다.
여상구를 대신해 반나절 동안 노덕의 호위무사 노릇을 하고 온 진천은 삼보장 정문을 들어서며 처진 눈을 치떴다.
“왜 그러는가?”
노덕의 질문에 백와옥으로 눈길을 준 진천이 대답했다.
“그들이 아직 가지 않은 모양입니다.”
“자네의 외사촌 형들 말인가?”
“네, 대인.”
강민과 강정에 대한 진천의 감정을 잘 알지 못하는 노덕이 반색했다.
“잘 됐구먼. 지난번의 불상사는 깨끗이 털기로 한 모양일세. 하긴 북천도왕께서 자네를 품기로 하셨으니 이제 서로 낯을 붉힐 일은 없을 테지. 그분의 용단으로…….”
쓴웃음을 짓고 있던 진천이 노덕의 말을 중단시켰다.
“죄송하지만 아직 외조부님의 의도를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대인. 어쩌면 혼을 내시기 위해 부르셨을 지도 모릅니다.”
“허허, 설마 그러기야 하겠는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나쁠 건 없을 듯싶으이.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는 법 아닌가. 속을 풀고 나면 조손지간에 정이 쌓일 걸세.”
노덕의 예견대로 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보았지만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되면 좋겠습니다.”
노덕은 처소인 청와옥으로 향하는 대신 원주 강가의 신성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다며 백와옥으로 갔다. 진천은 그와 동행하지 않고 마당에서 갈라졌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으로 보아 백화옥 내부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한 듯했다. 노덕이 홀로 들어가더라도 괜찮을 것이었다.
노덕과 헤어져 청와옥에 들어선 진천은 대웅의 방으로 갔다. 기척을 내지 않고 가만히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 구석에 앙상한 두 팔로 무릎을 껴안고 애벌레처럼 웅크린 대웅이 보였다. 진천은 염려한 대로 그가 나가있는 동안 대웅에게 무언가 사달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필시 그의 외사촌들과 관련된 일일 터였다.
“뭐 하냐, 대웅.”
진천의 질문에 멍하니 있던 대웅이 와락 눈물을 쏟았다.
“나는 죽어야 돼, 천. 나는 살 가치가 없는 물건이야.”
진천은 울먹이는 대웅을 일으켜 침상에 앉혔다. 그의 몸에서 지린내가 진동했다.
“무슨 일인데?”
대웅은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릴 뿐 좀처럼 실토하려들지 않았다. 진천은 그들 닦달하지 않고 인내심 있게 달랬다. 이윽고 대웅이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자가 제멋대로 청와옥에 들어왔어. 오전에 그 자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루 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는데 하필이면 요강을 비우러 잠시 나갔을 때 딱 대면했지 뭐야. 그자가 거기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나는, 아……, 나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냥 참을 걸. 그자가 쏘아보는 바람에…….”
새삼스레 봉변이 떠오르는지 대웅이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진천은 요령부득인 그의 설명을 얼기설기 엮어 전모를 이해했다.
대웅이 말하는 ‘그자’는 강민임에 분명했다.
사전 통보도 없이 청와옥에 들어온 강민은 복도를 어슬렁거린 모양이었다. 진천은 그가 기운을 철저히 갈무리하고 있었을 거라 추정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웅이 방 밖의 외인을 감지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다만 강민이 대웅을 목표로 청와옥에 들어섰을 거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누군가 귀띔해주지 않은 한 강민은 대웅이 그곳에 기거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을 터이고 더욱이 그가 심각한 고질병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대웅을 보자마자 강민은 그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었다. 철곤귀는 변장술의 대가라도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특이한 외양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었다.
대웅을 본 강민은 반사적으로 사나운 투기를 발산했을 터였다. 그러지 않아도 강민의 등 뒤로 삐죽 솟은 쌍도를 보고는 잔뜩 주눅이 들었던 대웅은 요강을 떨어뜨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대웅은 원주 강가의 젊은 칼잡이가 전날의 비무에서 진천과 평수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쏘아내는 내기에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었다.
웃지 못 할 일이었으나 진천은 쓴웃음이 났다. 강민도 대웅의 반응에 황당해 했으리라.
단지 요강을 쏟으며 엉덩방아를 찧은 것으로 끝났다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대웅으로서는 불행하게도 더한 참사가 잇달았다. 강민의 손이 칼을 뽑기 위해 위로 올라간다고 여긴 대웅은 오줌으로 흥건한 바닥에 바짝 엎드려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때 노미현이 나타난 것은 운명의 장난이었다.
이해난망의 상황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노미현은 침착하게 강민을 데리고 청와옥 밖으로 나갔다. 망연자실해 있던 대웅은 그녀의 찰랑거리는 생머리가 눈앞에서 사라진 직후 기억이 끊겼다.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다 진천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