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24
제123화
진천은 천천히 수십 구의 시체가 널브러진 곳으로 걸어갔다.
목불인견의 참상이었다. 온전한 시신은 하나도 없었다. 난도질당한 복부에서는 내장들이 흘러내렸고 얼굴들은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갈가리 찢겨있었다. 그들은 여상구가 팔들을 자르고 단전을 깨뜨렸던 마인들이었다.
진천은 장왕에게 쫓겨 달아날 때까지만 해도 목숨이 붙어있던 마인들을 그 지경으로 만든 이, 혹은 이들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운신이 가능하리라 예상했던 고량의 행사는 아니었다. 그가 손을 썼다면 비수나 칼 대신 주먹을 사용했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마졸들의 짓일 리도 없었다. 마도의 종자들답게 무력해진 상전들에게 그동안 당했던 멸시를 그런 식으로 앙갚음했을 가능성을 아주 배제하긴 어려우나 진천이 보기엔 서산일출만큼이나 낮았다.
진천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서는 마인들을 저토록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한 이들을 비난할 수가 없었다.
마인들의 시신에서 몸을 돌린 진천이 황금 전각 좌측의 별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별채에서 이십여 보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선 진천이 문득 물었다.
“혹시 내 동료들의 행방에 대해 아는 바가 있소?”
진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진천은 창틈으로 몇 쌍의 눈이 그를 지켜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별채로 걸어올 때부터 그들의 숨결이 급격히 가빠졌었다.
진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들의 친구요.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소.”
별채 안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낮은 목소리로 갑론을박을 벌이던 무리가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지더니 문이 열리고 하얀 그림자가 밖으로 나왔다. 화려한 궁장을 입은 묘령의 여인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가 고와 절색이라 불려 손색이 없는 미모를 자랑했으나 표정이 싸늘하고 눈동자엔 독기가 서려있어 표독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당신이 그들의 친구라는 증거라도 있나요?”
용기를 쥐어짠 듯 불안하면서도 앙칼진 목소리였다.
진천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반문했다.
“세 명이 있지 않았소? 한 명은 말랐고 다른 한 명은 체격이 좋으며 나머지 한 명은 잘 생겼소.”
여인이 탐색하듯 진천의 얼굴을 훑었다. 그러다 별안간 서늘한 눈매를 찡그려 더 가늘게 만들더니 탄성을 발했다.
“아! 당신은 혹시 아까…….”
여인이 말끝을 흐렸지만 진천은 뒷말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진천은 여인의 눈썰미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경황 중에 공중에서 뛰어내린 그를 보고 기억한다는 것은 고도로 훈련받은 무인들이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그는 특징이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는 범상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목전의 여인이 무리의 대표로 나선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소. 나는 아까 위에서 내려왔던 사람이오.”
여인은 신중했다.
“그런 것 같긴 한데……. 그렇다면 옷이 왜 달라졌죠?”
진천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소. 그보다 이건 어떻소?”
진천이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멈춰라!”
여인이 가느다란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러더니 바닥에 엎드렸다.
“은인을 몰라 뵈었습니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각양각색의 의복을 갖춘 여인들이 터진 둑의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들도 최초의 여인을 따라 진천에게 절을 올렸다.
진천은 여인들을 말렸다.
“이러지 마시오들. 받들기 어렵소.”
여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진천은 그와 대화를 나눴던 여인을 먼저 일으켰다. 여인은 그의 힘에 저항하지 않고 기립했다.
“다른 분들도 일어서시오.”
여인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하나둘 엉거주춤 일어섰다. 진천은 그들의 숫자가 최소한 오십을 상회함을 알아차렸다. 일부는 별채에서 대기 중이었을 터였다. 그러다 마인들이 ‘판’을 갈면 그들에게 머리가 깨진 여인들을 대체하러 나와야 했을 것이었다. 두려움에 간을 졸이고 있었을 여인들의 처지를 생각하니 진천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오?”
진천의 질문에 용감하게 맨 먼저 별채 밖으로 나와 그와 말을 섞었던 여인이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다소곳한 목소리도 대답했다.
“저는 임하은(任河銀)이에요, 은인.”
“임 소저였구려. 나는 진천이라고 하오.”
“알고 있어요.”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인들 중 하나가 그의 별호를 큰소리로 외쳤을 때 들은 모양이었다. 강호 최고의 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하남신룡의 본명을 모르는 이는 없을 터였다.
“내 동료들이 어떻게 됐는지 아오, 임 소저?”
초조한 심정을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물었던 진천은 임하은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안도했다. 그녀의 표정이 밝아지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물론이에요, 은인. 그분들은 저희가 비처에 숨겨두었어요.”
임하은이 종종걸음으로 앞장섰다.
별채로 들어간 진천은 절로 쓴웃음이 났다. 여인들이 친인들을 숨겨둔 곳은 옷장이었다. 여염의 여자들은 걸칠 엄두조차 못 낼 요상한 의복들을 걷어내니 의형인 여상구를 비롯한 친인들 셋이 나란히 누워있었다. 너무나 허술한 조치에 진천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렸다. 어쨌거나 마졸들에 앞서 그가 발견해서 천만다행이었다.
옷을 들어내던 임하은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여상구가 눈을 똑바로 뜬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천은 의형의 동공에 담긴 살기에 혼이 나간 임하은을 달랬다. 뒤늦게 진천의 존재를 알아차린 여상구의 눈빛이 사르르 풀렸다. 임하은을 진정시킨 진천은 입을 벌릴 수 없는 의형과 눈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어찌 되었는가, 아우님?
‘잘 되었습니다, 형님.’
‘가린은?’
‘그도 무사합니다.’
‘설마 장왕을 죽인 겐가?’
‘아닙니다. 따돌렸을 뿐입니다.’
‘대단하네. 정말 대단하이. 아우님 걱정에 죽지도 못했구먼.’
‘그런 말씀 마십시오, 형님.’
‘허허, 알았네. 그럼 이제 마음 놓고 기절하겠네.’
여상구가 눈을 감았다.
진천은 수레를 찾아 바퀴를 떼버리고 그 위에 친인들을 눕혔다.
작업을 하며 진천이 임하은에게 물었다.
“혹시 나보다 앞서 마졸들이 오지 않았소?”
“왔어요.”
고량을 내려놓던 진천이 고개를 들어 임하은을 보았다.
“그들이 별채를 수색하지 않고 그냥 갔단 말이오?”
“네. 왜냐하면 달아나기 바빴거든요.”
진천은 임하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누구로부터 말이오?”
임하은이 아직 진천의 품에 들린 고량을 가리켰다.
“그 분으로부터요.”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주겠소?”
“저 분이 황금전으로 들어오던 악귀들에게 무어라 호통을 치더니 옆에 있던 석상을 치자 석상이 박살이 나고 그걸 본 악귀들이 줄행랑을 놓았어요.”
“마졸들의 수가 많았소?”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이삼십 명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들이 달아나며 소리를 질렀소?”
“네. 사신(死神)이 쳐들어왔다고 고함을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진천은 전후사정을 짐작했다.
고량은 다리를 다쳐 운신이 어려웠을 터였다. 장왕이 여상구에게 날린 장공의 여파에 휩쓸린 충격으로 내상을 입었을 공산도 컸다. 그 상태에서 마졸들을 맞이해야 했으리라. 그가 혼절하지 않은 것은 천운이었다. 그랬다면 그를 포함한 세평회의 삼인 모두 횡액을 면치 못했을 터였다.
문을 넘어 들어오는 마졸들을 본 고량은 대웅의 수법을 차용했을 것이었다. 정상적인 무력을 펼칠 수 없는 상태였기에 무력시위를 통해 마졸들에게 겁을 주려 했음에 분명했다. 뻔한 수였지만 보기 좋게 통한 건 그때만 해도 살아있었을 마인들이 내지르는 악다구니가 역으로 고량에게 이득으로 작용했던 덕분이었다. 하늘같은 상전들의 처참한 모습과 석상을 일격에 깨부순 고량의 무위가 상승효과를 거두며 마졸들에게 공포감을 안겼음에 틀림없었다.
고량으로서는 행운의 연속이었다. 만약 그가 멀쩡한 상태였다면, 그래서 마졸들과 싸우려들었다면 역불급이었을 터였다. 그도 절정의 무인이지만 일류무사 수십 명을 혼자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마졸들이 달아나며 천지문으로 달려오고 있던 다른 마졸들에게 ‘사신의 왕림’을 경고한 것도 복운이 아닐 수 없었다. 전력을 다한 승부수를 띄운 고량에겐 또 다시 무력을 과시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마졸들이 달아난 후엔 어떻게 됐소?”
진천의 질문에 임하은이 안절부절못했다. 진천은 그녀의 오해를 바로잡아주었다.
“당신들이 마인들을 처단한 일을 묻는 게 아니오. 나는 다만 이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었던 거요.”
“아! 그분은 악귀들을 쫓아낸 직후 바로 쓰러졌어요.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달려 나갔어요. 물러갔던 악귀들이 다시 몰려올까봐 저희가 은인들을 포화각(包花閣)으로 모셨어요. 그리고 아까 그곳에 숨겨둔 거예요.”
“그랬구려. 고맙소, 임 소저.”
임하은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저희가 드릴 말씀이에요. 원수를 갚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저희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진천은 위화감이 들었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치부하고 넘기기엔 임하은의 음성이 너무나 비장했다.
“소저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잖소?”
진천의 질문에 여기저기서 숨죽인 흐느낌이 들렸다. 그러고는 장내가 곧 눈물바다가 되었다.
울음을 삼키며 임하은이 대답했다.
“저희는 갈 데가 없어요, 은인. 악귀들에게 몸을 더럽힌 저희를 누가 받아주겠어요? 은인들이 떠나시면 저희는…….”
말을 잇지 못하는 임하은을 바라보던 진천은 잊었던 악몽이 되살아났다.
진천이 아직 열 살이 되지 않았던 시절이니 지하미로를 사분(四分)했던 패거리들이 창인의 지배권을 두고 존망을 건 전쟁을 벌이기 전이었다.
당시 창인은 지옥이었다. 창인에 흘러온 자들의 구 할은 마도나 사파, 혹은 흑도 출신이었다. 그들에게 겁간은 일상다반사였다. 삿된 무리는 밀림까지 들어가 이족의 여인들을 무시로 범하곤 했다.
어린 진천은 악인들에게 변을 당한 후 치욕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인들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그 끔찍한 장면들은 그의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기억의 벽에 깊이 새겨졌다.
훗날 철이 든 진천은 이상한 점을 알아냈다. 악종들에게 피해를 입은 여인들 중 오직 중원에서 온 이들만이 자결했다는 것이었다. 이족의 여인들은 아무도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
진천은 그 차이가 여인들의 성향만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인식이나 태도에서 비롯된 바도 적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족은 악인들에게 몹쓸 짓을 당한 이들을 보듬고 돌보았다. 그들에게 그 여인들은 불의의 사고로 몸과 마음을 다친 가여운 친족일 뿐이었다. 반면 중원 태생의 여인들과 그들의 친인들은 악몽의 책임을 당사자의 것으로 여겼다. 일부는 심지어 피해를 입은 여인들에게 죽음으로써 욕됨을 씻으라며 자진을 종용하거나 강요하기도 했다. 진천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사고방식이자 행태였다.
진천이 소속된 일파가 창인을 평정한 후 겁간의 죄를 범한 자들을 거세와 종신형으로 다스리는 율법이 정해지고 시행되자 그런 참극들은 단번에 사라졌다. 진천의 뇌리에서도 어린 날의 악몽이 차츰 지워졌다.
진천은 자신의 순진함을 반성했다.
“임 소저, 그리고 모두들 들어주오. 만약 이곳에서 더 살기 어렵다면 주안으로 오오들. 알고 있는지 모르나 한때 인생의 밑바닥까지 추락했던 삼보장의 노덕 대인은 절망의 세월에서 빠져나와 많은 선업을 펼치고 있다오. 주안에 와서 그 분을 도와주면 어떻겠소? 여러분이 노 대인의 선업에 동참해준다면 나도 정말 기쁘고 고맙겠소.”
임하은이 물었다.
“그 어르신이 우리를 받아주실까요?”
“물론이오. 일손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니 쌍수를 들고 환영하시리라 장담할 수 있소. 나와 여기 내 친인들도 마찬가지요. 식구가 불어나면 우리로서는 반갑지 않을 수 없소.”
어느새 여인들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진천이 그녀들을 둘러보았다.
“의논들을 해보구려. 내 제안에 응하는 분들이 있으면 주안까지 갈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하겠소.”
얼마 지나지 않아 결론이 나왔다. 총 쉰일곱 명의 여인이 주안 행을 결정했다. 빠진 이들은 넷뿐이었다.
진천은 두 시진가량 천지문에 머물며 마차와 경비 등 여인들을 주안으로 데려가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대부분의 하인들이 달아나버려 애를 먹었지만 그럭저럭 마무리를 지은 진천은 새벽녘에야 친인들을 실은 수레를 짐처럼 지고 가린이 기다리고 있을 만상석굴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