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ver Eyes Under Black Feet RAW novel - chapter 203
마주 선 사내 둘의 안광이 번뜩였다. 장내는 흥분으로 가득했으나 릴리만은 이 비현실적인 광경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이건, 이건 불공평해요!”
릴리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이게 어떻게 재판이 될 수 있는가. 전혀 공평하지 못한 처사였다.
“시작!!”
자할이 힘껏 외치고 뒷걸음질을 치자 기다렸다는 듯 사내들의 날붙이가 부딪혔다.
“핀!”
릴리는 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마치 이 상황을 말려야 한다는 듯 말이다. 그러나 핀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설령 누군가가 중재할 수 있다고 해도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는 이곳만의 절차와 방식이 있다. 그것을 거스를 수는 없다.
승기는 순식간에 기울었다. 광대뼈에 푸른색 문양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는 사내가 제 어깨도 채 넘지 못하는 체구의 말총머리 사내의 가슴팍을 순식간에 갈라 버린 것이다. 릴리는 제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눈앞에서 사람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것을 보자 정신이 혼미하였다.
자할은 더없이 호탕하고 시원하게 웃었다. 관중들이 손뼉을 치며 사내의 이름을 연호했다.
알탄! 알탄!
“루거의 처와 그의 재산은 이제 모두 알탄의 것이다!”
자할이 알탄의 손을 들어 주자 작고 거무스름한 여자가 뛰쳐나와 와락 그의 목을 껴안았다. 그녀의 남편은 온전치 못한 주검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데도 아랑곳없이 사내의 목에 매달린 채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내의 몸을 적시는 피가 누구의 것인지 제대로 알고는 있는 것일까. 제 남편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뜨거울 터였다. 그럼에도 일말의 슬픔이나 동정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내조차 슬퍼하지 않는 이의 죽음을 누가 슬퍼해 주겠는가. 모두가 새롭게 짝지어진 두 남녀를 축하해 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치 결혼식이라도 치르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망자에 대한 예의도 없었다.
분명 그 역시 누군가의 친구이며 형제였을 텐데 이미 루거라는 사내의 존재는 완전히 잊혀진 듯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자 같았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처사예요.”
릴리는 도리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정말 말도 안 돼요. 전혀 공정하지 못해요.”
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혼인한 여자와 정을 통한 사내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동정받아야 마땅한 이는 죽은 루거다. 만일 누군가 죽어 송장이 되어야 한다면 그렇게 되어야 할 사람은 알탄이어야 하고 말이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공정하다 생각하는 것 같은데요.”
핀은 제 입가에 떠오른 웃음도 가리지 못한 채 대답했다. 그런 핀도 릴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쉽게….”
너무나 쉽게 사람을 죽인다. 그것을 방지하고 만류해야 할 영주란 자는 오히려 나서서 판을 깔아 준다. 미개한 방식이다. 이런 식이라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아무리 캘던과 떨어진 사막의 도시라 한들 이토록 사회의 구조와 제도가 다르단 말인가. 지성과 도덕으로 판가름해야 할 일을 오로지 힘과 본능에 맡기다니.
“이것은… 이것은 투로의 방식인가요?”
릴리는 애써 침착한 투로 물었다. 이것이 투로의 방식이라면 곧 카르낙 발투만의 근간을 이루는 뼈대이기도 했다.
“네. 그럴 겁니다, 전하. 이곳은 이제 투로의 성이니까요.”
투로에겐 여자가 귀하다. 여자가 귀하기 때문에 그를 두고 잦은 다툼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여자는… 누구보다 강한 사내를 자신의 남편으로 맞이하고 싶어 하리라. 생존과 번영의 본능이었다. 강한 짝을 만나 우월한 유전자를 후대에 물려주려는 것은 말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카르낙 발투만이 성장했다. 무질서하고 저들끼리 칼을 겨누다 언제 죽어도 이상치 않은 상황 속에서. 무자비하기로 소문이 난 발투만 왕의 방식은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를 둘러싼 집단의 문제였다. 과연 이러한 배경이 발투만의 왕위를 굳건하게 지지해 줄 수 있을까. 그에게 도움이 되는 환경일까?
“어떠십니까, 전하. 이제 국왕 폐하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셨는지요?”
핀의 목소리에는 조소가 섞여 있었다. 이것이 카르낙과 그를 둘러싼 사내들이 공유하는 그들만의 세상일까. 난폭하고 단순하고 무자비하기 그지없는 세상이었다. 자신이 살아온 세상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곳에서는 비록 하찮은 존재일지라도 죽음을 맞게 되면 함께 슬퍼하고 아파하고 영면을 기원했다.
서로 부둥켜안고 체온을 나누며 그렇게 죽음에서 온기와 희망을 얻고는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죽음이란 발밑에서 채는 돌부리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성가시면 치워 버리면 그만인 것이었다. 아직 까마득하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카르낙 발투만의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릴리가 다시 방으로 들어섰을 때 카르낙은 잠에서 깨어나 막 식사를 하던 참이었다. 그는 자신이 깨어나길 기다린 자파와 마주 앉아 일찍부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선 릴리는 자파의 몸에 밴 지독한 알코올 냄새부터 맡아야 했다.
“왕비 전하!”
호쾌하고 우렁찬 목소리였다. 자파는 술잔을 번쩍 들며 그녀를 반겼다.
“어때요! 전하! 같이 한잔하시렵니까!”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새하얀 이가 매끈하게 드러났다. 자파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으니 근심만 가득하던 마음속에 즐거움이 샘솟았다. 자파가 제 옆의 의자를 탕탕 두들기며 손짓했다.
“자! 전하! 여기 상대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게 만드는 사내였다. 투로들은 다른 엘버그인들처럼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고 딱딱한 캘던성과는 다르게 이곳은 소탈하고 솔직하고 유쾌하여 늘 생기가 넘쳤고, 그런 하게너성의 매력은 릴리를 사로잡았다.
태양처럼 뜨겁고 에너지가 넘치는 투로들이 좋았다. 그들의 커다란 덩치, 귀가 얼얼할 정도로 소란한 목소리, 자유분방하고 어쩌면 무례해 보이기까지 하는 행동 방식도 좋았다. 바로 그 점이 릴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들의 무질서함을 바로잡아야겠으면서도 그들의 방탕함은 그대로 두고 싶었다.
릴리는 투로들의 천박함이 좋았다. 저에게 다가와 아무렇지 않게 술잔을 건네고 깔깔깔 웃음을 터트리고, 머리를 조아리거나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 좋았다. 한 가지를 지키면서 다른 한 가지를 깨트릴 수 있을까. 그 균형을 유지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손대는 순간 와르르 무너지고 마는 걸까.
자파는 은잔 가득 붉은 과일주를 따라 릴리의 손에 쥐여 주었다. 호방하게 웃는 입가 아래의 턱수염엔 미처 닦아 내지 못한 과일주 방울들이 이슬처럼 달려 있었다.
“자요. 자고로 술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마셔야 제맛이죠!”
“…저는 술을 잘 못 해서요.”
릴리는 곧 넘쳐흐를 듯 찰랑거리는 액체를 조마조마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자파는 다시 호방하게 웃었다. 그는 무엇이든 즐겁게만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 왕비 전하께서는 식수가 충분한 곳에서 자라셨나 봅니다! 이곳은 물이 귀해 누구든 술을 마신답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다요! 곡물과 과일 찌꺼기들로 발효시킨 알코올이 아니었다면 모두들 갈증으로 말라 죽었을 겁니다!”
그러니 자파가 늘 고주망태가 되어 있다고 원망만 할 수는 없다. 그저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갈증을 쉽게 느끼고 또 음료를 많이 마셔야 하는 사람일 뿐이니.
그라타의 그 풍부한 과일과 식수를 아주 조금만이라도 이곳에 가져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몸을 담그고 적시고 쏟아부어도 차고 넘치는 것들인데 이 대륙에 아주 조금만이라도 가져올 수 있다면. 그라타의 하늘 위의 비구름을 단 몇 조각이라도 떼어 오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릴리는 잔 속의 술을 조금 홀짝이고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재판이 있더군요.”
마침 자파도 있고 하니 작심했던 이야기를 꺼낼 좋은 기회였다.
아아, 하고 자파가 반색했다. 그는 자초지종을 알고 있었던 듯 말린 고기를 씹으며 대뜸 물었다.
“그래서 누가 이겼습니까?”
“알탄이란 사내요.”
푸, 하고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카르낙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럴 줄 알았지. 팔자 폈다고 게을러진 탓이야. 그 둔한 몸으로 어떻게 알탄 같은 젊고 패기 넘치는 사내를 이기겠어.”
카르낙은 무료한 얼굴로 소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제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릴리의 낯빛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무슨 재판이었는데?”
별것 아니야, 하며 자파가 운을 띄웠다.
“루거의 처가 알탄과 눈이 맞았거든. 그런데 이 알탄이란 놈은 내세울 게 제 다리 사이에 달린 물건과 멀쩡한 몸뚱이밖에 없는 빈털터리란 말이지. 그래서 루거에게 결투를 신청한 거야. 여자와 재산을 차지하고 싶어서.”
릴리는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전해 들은 이야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그악스럽다.
“그럼 루거가 재판을 요청한 것도 아니란 거예요?”
“예. 뭐, 결과적으로 결투를 승낙했으니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만….”
대답하는 자파의 얼굴은 태연하다 못해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일을 해괴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파니릴리 저 하나뿐인 듯싶었다.
“루거가… 신청한 재판이라고 생각했어요. 보통 그게 이치에 맞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억울한 사람은 그쪽이 아닐까, 하고….”
“억울할 게 뭐가 있겠어요? 이제 낡은 배는 버리고 튼튼한 새 배에 승선하겠다는데…. 안 그렇습니까?”
자파가 짓궂은 눈웃음을 쳤다. 카르낙은 등받이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한쪽 손을 들어 제 정수리에 올리니 단단한 흉곽이 더 널따랗게 펴졌다. 예전 같았다면 코웃음을 치며 자파의 말에 동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어쩐지 자신의 처지에 대입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 배로 갈아탄다…? 파니릴리가…? 젊고 혈기 왕성한 애송이에게…? 이런 시발?
“글쎄, 자파. 그건 좀 생각을….”
“생각은 무슨 놈의 생각? 그냥 쫄리면 뒈지는 거지 무슨.”
릴리가 끼어들어 카르낙 대신 답했다.
“엘버그의 법에 따르면 간음은 중죄예요. 아내는 자신의 남편에게 헌신할 의무가 있어요. 남편 역시 아내를 충실히 보살필 책임이 있고요.”
자파가 작은 눈을 깜빡거렸다.
“간음이 뭐야?”
카르낙은 자파가 알아먹기 쉽게 설명했다.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랑 떡 치는 거.”
“아아.”
그는 아는 척했다가 이내 ‘응?’ 하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리라.
“물론 엘버그에서 그 어떤 것보다 지켜지지 않는 법이란 것은 알고 있어요. 사실상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는 것도요.”
그 법을 가장 많이 어긴 것이 바로 알기어스 선왕. 제 아비란 자였다. 그 아비가 간음을 하여 태어난 결과가 바로 파니릴리 자신이고 말이다. 그러니 지레 찔려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제가 알기로 엘버그인들은 그 누구보다 발정 난 개새끼처럼 여기저기 씨를 뿌리고 다녔는데 말이죠. 참 알면 알수록 희한한 족속들입니다. 안 그래요? 지키지도 못할 법도는 왜 만들어 놔? 변태야? 어길수록 흥분돼서 그러는 건가?”
할 말이 없다. 제가 벌인 일도 아닌데 릴리는 낯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엘버그. 세상 꽉 막힌 듯 온갖 규율과 법도는 다 만들어 놓고, 하고 다니는 꼴은 여기 투로들만도 못하다. 그래. 차라리 미개하다 치자면 투로들보다 엘버그인들이 더 미개했다. 미련하고 멍청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엘버그인인 자신이 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은 감히 없다. 누가 누구에게 훈계를 늘어놓는단 말인가.
“이제 새로운 왕이 들어섰으니 엘버그의 좆같은 법도 바뀌어야죠. 무엇보다 그 간음인가 뭔가부터 없애십쇼. 별 해괴한 법이 다 있습니다그려.”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카르낙이 골몰한 끝에 말했다.
“간음을 중죄로 다스리는 거. 이왕이면 하게너의 재판 방식을 따오고 싶군.”
그래야 그 개새끼를 합법적으로 아주 잘게 다져 버릴 수 있으니.
“…그건 중죄로 다스리는 게 아니에요. 그냥 더 힘센 놈이 다 가져가는 게임일 뿐이죠.”
그런 거라면 더더욱 괜찮다. 누가 됐든 걸리기만 하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쫄리면 뒈져야지 뭐.”
문득 머릿속에 세바스탠이 떠올랐다. 그 얼굴만 희멀건 밀가루 반죽 같은 놈. 하여간 걸리기만 해 보라지. 용광로에 처넣어 줄 테다.
“엘버그에 어울릴 만한 법도는 아닌 거 같은데요, 폐하. 무엇보다 에이가가 가만있지 않을걸요.”
“어쨌든 간음은 나빠. 엄하게 다스릴 거야.”
몰라. 다 모르겠고 어쨌든 좆같다 이거야. 너무 몰입이 심하게 된다. 마치 자신이 당한 일인 것처럼 카르낙은 가슴이 펄떡거렸다. 대상도 없는 분노에 으드득 이가 갈렸다.
“차라리… 간음을 저지른 자들은 지위를 박탈하고 어디… 멀리 유배를 보내는 건 어때요? 아니면 어디 감옥에 가두거나… 그게 아니면….”
“그건 안 돼. 그런 일로 아내와 떨어져 지낼 순 없지. 어쨌든 나쁜 놈은 멀쩡히 남편이 있는 여자를 홀린 그 새끼잖아.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