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07
106화. 고요한 여름 바다 (9)
가장 먼저 한 일은 내 일을 도와줄 강나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전말을 설명할 생각은 없다. 구태여 내 추측까지 들려줄 필요는 없으니까.
아무튼, 적당히 일에 필요한 정도만 정보를 전달한 것으로도 감사부에 오래 재직한 강나비는 금방 내가 원하는 바를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부장님 말은….”
강나비가 반쯤 남은 샴페인 잔을 둥글게 돌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리 구석진 곳이라고 해도 연회를 책임지는 용궁의 관리들은 시선을 두기 때문에 눈속임용으로 적당히 가까운 테이블에서 챙겨온 잔이다.
“몇 명인지도, 어디 소속인지도 모르지만, 이 안에 풍월주의 수하가 있다는 거지?”
“그래. 빈도 누군지 잡아내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있다고 했어.”
“으음…. 확실히 연회를 미끼로 사용하는 계획을 세운 게 용왕님이라고 했으니까 수하를 알고 있는 자도 용왕님밖에 없겠어. 빈에게는 계획 정도만 공유한 걸까? 이렇게 누군가를 찾아내려면 자기편부터 속이는 게 좋은 방식인 건 알지만, 알아내야 하는 쪽은 귀찮다니까.”
미간을 찌푸린 채로 찰랑거리는 사과 맛 샴페인을 물끄러미 보던 강나비가 속이 탄다는 듯이 꿀꺽꿀꺽 마셨다. 그러다가 한 번에 넘어간 탄산 때문에 목이 아프다며 작게 콜록거리더니 샴페인이 쥐꼬리만큼 남은 잔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부장님이 의심하고 있는 사람은 있어?”
“그게 있었다면 너한테 일하자고 불렀겠냐.”
“하긴 그렇겠네. 그렇지만 나도 딱히 수상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없었어. 연회에 참석한 사람, 그러니까 손님하고 직원들하고는 다 인사를 나눴는데, 유별난 행동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 수상한 사람은 더더욱 없었지. 게다가 모두 용왕님과 친분이 있는 것 같더라고.”
과연 강나비. 연회가 시작한 후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 수많은 사람과 말을 한 번이라도 다 해봤다는 거 아냐.
이쯤 되면 사교성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사람 사귀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수준이다.
잘했다고 한마디 건넬까 하다가 포기했다. 칭찬을 듣는 걸 좋아하는 강나비의 사기를 올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지금은 시간이 촉박하니까 뒤로 미루고 중요한 것부터 물어봐야 한다.
“용왕님과?”
“그렇지? 여기 오려면 초대장을 받아야 하잖아. 주최자가 내빈을 초대하는 데에 전부 신경 쓰는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이번엔 하셨더라고.”
“즉, 모든 손님은 용왕이 직접 초대장을 줬다.”
“바로 그거지.”
강나비가 잔을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딱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튕겼다. 그러더니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아서 그대로인 내 샴페인 잔을 자신의 것과 바꿔 들게 하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용궁 사람 중에서는 첩자, 음, 이렇게 표현해도 되겠지? 그런 자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네가 확신이 없는 얘기를 막 하지는 않을 테고…. 이유는?”
“주오랑 같이 일한 날에 들은 건데, 이 바다의 생물들은 하나같이 용왕님을 신으로 모신다더라고. 그러니까 용왕님은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기도 하지만 신앙을 받을 정도로 신뢰가 두터운 신에 가까운 존재라는 거야.”
강나비가 시선을 살짝 위로 돌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영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바다 생물들은 무슨 일이 생기거나 무엇에라도 기대고 싶은 상황이 되면 용신님을 찾는다’는 말을 더하며 강나비가 느릿하게 턱을 문질렀다.
‘그런다고 배신자가 없을 리가 있나.’
강나비의 말대로라면 단순히 왕에 대한 충심만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신도로서 따르는 바다 생물도 있을 법하다.
실제로 측근인 주오도 꽤 그런 경향을 보였으니까 내가 모르는 자 중에서는 정말 맹목적으로 용왕에게 매달리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맹목은 위험해.’
이성을 잃은 채로 푹 빠져 있다면, 그 순간의 판단은 정말 믿을 수가 없다. 특히 사람에 대한 맹목이라면 더더욱.
용왕이 무조건 옳다는 판단까지는 어떻게 무난하게 넘어가 볼 여지가 있지만, 한술 더 떠서 용왕을 위해 하는 모든 행동 역시 정당하다고 판단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게임에서는 협회에서도 그런 자가 있었지. 고생깨나 했었어.’
이게 다 유별나게 뛰어난 신여월의 카리스마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지금 그게 용궁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아찔하다.
용궁에는 풍월주의 파랑새가 들어올 수 없고, 바다 생물들은 육지로 나오는 경우가 드물어서 자주 나오는 빈이 특이하다는 평을 받으니까 풍월주가 손 쓰기엔 힘들 거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더니만.
빈의 염원과는 다르게 용궁 사람까지 죄다 용의선상에 올려두고 첩자를 걸러내게 생겼다.
괜히 속으로 혀를 차며 샴페인을 홀짝이며 생각에 빠져 있는 강나비를 불렀다.
“강나비, 네 말에 일리는 있지만 그렇다고 배제할 수는 없어. 특히 용왕님이 직접 모든 초대장을 건넸다고 했으니, 받은 모든 이는 용의자야.”
“으응, 그건 알지만….”
말끝을 흐린 강나비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용궁에 사는 이들은 크나 작으나 모두 용왕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들었거든.”
“누구에게서?”
“그야 빈이지. 물론 배은망덕한 자들은 언제고 있었지만, 그냥 여기 사람들은 안 그랬으면 좋겠어서….”
아이고, 선하기도 하지. 그 어린 나이부터 사회생활을 하고, 호되게 데인 경험도 제법 있는 주제에 사람에 대한 믿음이 그대로 있다는 게 놀랍다. 그야말로 그린 듯한 ‘영웅’의 모습이 아닌가.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며 멋쩍게 볼을 긁적이는 강나비를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깨를 움츠리는 강나비를 심드렁하게 응시하며 다소 무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다.
“네 마음을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공적인 일에 끌고 오지는 마. 첩자를 잡아내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잘 알잖아.”
“그렇지…. 이래 봬도 베테랑이라서 이성은 늘 냉철하게 유지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언제 심란해했냐는 듯이 생긋 웃은 강나비는 만약 첩자가 용궁 사람으로 밝혀지고, 그걸 빈이 알게 되면 그날은 바닷물이 빨갛게 변할지도 모른다는 농을 던졌다.
빈이 그 정도로 이성을 잃겠느냐는 내 말에 의외로 다혈질이라는 말을 비밀을 속삭이는 것처럼 작게 덧붙인 강나비가 연회장을 눈으로 쓱 훑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은 독심술이 있는 은서의 실적이 가장 좋지만, 나도 그에 뒤처지지는 않으니까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어, 부장님. 좋은 소식 가져올게.”
“그래, 부탁한다.”
“대신 나, 나중에 꼭 휴가 줘야 한다? 상여금으로 때우는 건 안 돼!”
“알았어. 푹 쉴 수 있게 넉넉히 빼줄게.”
“부장님한테서 확답을 들으니까 의욕이 막 샘솟는 기분이 드네!”
킥킥 악동처럼 장난스러운 웃음을 터트린 강나비가 진주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로 연회장을 응시했다.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날카롭게 뜬 눈은 금방 먹잇감을 골랐는지 평상시의 둥글둥글한 갈색 눈으로 돌아왔다.
어느 한 곳을 눈짓으로 가리킨 강나비는 저 사람부터 시작하겠다며 내게 넌지시 일렀다. 아까 유독 인형 용왕과 가까운 자리에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강나비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무리의 상태 파악까지도 다 끝냈었나 보다.
수확이 있길 바란다는 내게 자신만만한 웃음을 되돌려준 강나비는 새로운 음료수 잔을 하나 챙기다가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었다며 질문을 던졌다.
“호승이랑 세환이가 입장할 때 부장님이 없어서 물어봤었거든. 그랬더니 용왕님하고 독대하러 갔다기에 그런가보다~ 했었거든?”
“실제로 독대하고 왔다만.”
“의심한다는 건 아냐! 그렇지만 좀 이상해서 물어보는 거라고. 용왕님은 연회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상석에 자리를 잡으셨는데, 독대가 끝났을 부장님은 한참 뒤에 들어왔으니까 이상하네? 싶었던 거라고.”
입술을 비죽이는 강나비에게 용왕이 인형이었다는 말을 전할 수는 없었다.
이 비밀은 꽤 무거운 거고, 빈이 굳이 알고 있는 자의 숫자를 언급했다는 건 많이 퍼지지 않길 바란다는 뜻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용왕의 대역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쥐어진 패가 하나 늘었으며, 비장의 한수로 사용할 수 있게 됐는데 쉽사리 알려줄 수는 없다.
그게 절대 배신하지 않을 아군이라고 믿는 강나비라고 해도.
그래서 슬쩍 입술에 침을 바르곤 진실과 거짓을 반반 섞어서 대답했다.
“독대는 빨리 끝났어. 용왕님이 먼저 자리를 이탈하신 거고, 난 빈의 안내를 받으면서 아까 말해줬던 얘기를 들었던 거야. 빈은 풍월주의 수하가 용궁에 들어온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 했거든.”
내가 저주를 푸는 데에 집중해서 독대는 실제로 빨리 끝났고, 빈이 강제로 취침시켰으니까 용왕이 먼저 자리를 빠져나간 것도 맞다.
그 이후의 시간은 빈과의 대화에 할애했고, 빈은 풍월주를 싫어하니까 결론적으로 강나비에게 진짜 거짓을 말한 건 없다. 아주 조금 몇 마디만 숨겼을 뿐이니까 이 정도면 당당해도 되지.
표정 변화 없이 뻔뻔한 내 얼굴에 강나비는 알쏭달쏭한 얼굴로 연신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러면 이해가 가. 그나저나 부장님, 빈이랑 매우 친해졌구나? 꽤 편하게 대하는 것 같아.”
“조금 대화를 나눈 정도야. 빈은 괜찮은 사람이니까 친분을 쌓아서 나쁜 것도 없고.”
“아하하, 그래, 그렇게 알아둘게. 그럼 난 이제 진짜 일하러 가볼게. 부장님은 뭐할 거야?”
“너랑 비슷한 일. 그전에 애들한테 얼굴 좀 비춰놓고.”
신나게 연회를 즐기고 있는 박호승과 이세환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강나비는 협회의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는 테이블을 보더니 자신은 전쟁터의 한가운데로 돌진하는데, 부장님은 가장 안전하고 신뢰가 유지되는 곳으로 간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빨리 움직이라며 재촉하자 농담도 안 통한다며 작게 웃은 강나비가 사뿐사뿐 목표로 한 인물에게 다가갔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무리로 끼어들어 십년지기라도 되는 것처럼 넉살 좋게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을 잠깐 보다가 나도 발걸음을 돌렸다.
성큼성큼 윤혜아가 중심이 된 탁자로 다가가자 한창 떠들고 있던 박호승이 얼른 여기 앉으라며 제 옆의 의자를 두드렸고, 수박을 흡입하고 있던 이세환이 반색하며 이제 오냐며 반겨줬다.
오냐며 반겨줬다.
“잘 있었냐.”
“보면 알잖아~ 음식도 다 맛있고, 사람들도 다 친절하더라고? 꽤 재밌게 있었지.”
“으응, 먼저 말 걸어주시는 분들도 많았어….”
이런 파티라면 몇 번이고 참석할 수 있다며 말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그러냐고 대꾸해준 뒤, 윤혜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윤혜아는 악력으로 참외를 반으로 뚝 가르면서 별일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윙크했다.
“나비랑 구석에서 얘기하는 거 봤어. 할 일이 생긴 거지? 모처럼 연회인데 고생이 많네, 요한아.”
“할 일이기는 한데, 사서 하는 고생에 가깝습니다.”
“어머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의욕이 퍽 있는 것 같은데? 뭐야? 나도 한 손 거들까?”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합니다.”
인력은 언제나 환영이다.
무르지 않고 대번에 내가 호의를 받자 윤혜아가 잘못 걸렸다며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더니 참외 한 조각을 입에 쏙 넣었다.
우물우물 씹으면서 강나비가 여러 그룹을 휘젓고 다니는 모양새를 보던 윤혜아는 무슨 일인지 알겠다며 꿀꺽 참외를 삼키고선 씩 웃었다.
“지금 하는 일은 알 거 같으니까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협회에서 들을게. 일단 여기에 수상한 사람이 들어온 거지? 나비는 그거 가려내려고 돌아다니는 거고?”
“네, 대충 그렇습니다.”
“우리한테 직접 손해를 끼치는 건 아니고?”
“당장은 그렇지만, 이후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좋아. 협력할게. 대신 9월에 있을 보고서에 내 이름 한 번 빼주기! 괜찮지?”
꿍꿍이가 잔뜩 담긴 말을 내뱉는 윤혜아의 얼굴은 평상시의 어른스러운 낯이 아니라 장난기 가득한 어린애 같은 낯을 하고 있었다.
괜히 불안해졌지만 윤혜아의 안목은 필요했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기쁘게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때 주오와 얘기하던 박호승이 불쑥 끼어들었다.
“수상한 사람 찾는다고?”
“뭐야, 듣고 있었냐. 협회 일이니까 넌 신경 안 써도 돼.”
“같은 테이블이라 다 들린 거거든? 그리고 이왕 들었는데 좀 도와줄 수도 있는 거고~”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노려본 박호승은 금방 표정을 바꿔서 의기양양하게 눈웃음을 쳤다. 까딱거리는 검지가 심히 거슬렸다.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 할 걸?”
“내가? 너한테?”
“그럼~! 나 수상한 사람 찾은 거 같거든~”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는 박호승의 말에 테이블에 정적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