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86
185화. 오렌지색 일기장 (4)
내가 잠깐 기절한 사이에 모의를 이미 끝내놨던 것인지 진예신의 정신머리를 걱정하는 날 제외하고선 그 누구도 진예신의 발언에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어리벙벙하게 굴 때를 틈타 모의를 실행할 심산이었는지 저들끼리 화기애애하게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내일 협회에서 보자며 떠들어댔다.
‘누구 마음대로? 내가 이렇게 순순히 넘어가 줄 것 같아?’
하지만 이진아를 재우고, 내 속을 바싹 태운 친구 둘을 집으로 보내는 계획은 찬성이었기에 일단 양순한 척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대화 사이로 끼어들었다.
“부모님들께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 쟤들은 제가 바래다주고 오겠습니다.”
“요한 군도 든든한 보디가드지만, 운전할 수 있는 제가 좀 더 낫지 않겠어요? 자택까지 거리도 있는데, 제가 편하게 데려다주고 올게요.”
“번거롭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일은 제가 끌어들였으니까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마무리 지어야 도리에 맞죠. 저한테 맡기고 요한 군은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고 여기서 푹 쉬고 있어요. 진아 양이 잠들 때까지 말동무를 해줘도 좋고, 또….”
약간 말끝을 흐린 진예신이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열쇠 하나를 꺼내서 내게 휙 던졌다.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걸 잡아채자 진예신은 작게 키득거리면서 턱짓으로 거실 바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는 안 됐지만, 이번엔 들어가 있어도 돼요. 그 안에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건드려도 되고, 읽어도 좋으니 부디 마음 편히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제가 무엇을 할 줄 알고 꼭꼭 숨겨두셨던 걸 넘기십니까.”
“뭘 해도 상관없다니까요? 설령 요한 군이 너무 화가 나서 방화를 저지른다고 해도 괜찮아요. 다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면, 겉표지에 숫자만 표기된 오렌지색 노트만큼은 한 장도 빠뜨리지 않고 다 읽어달라는 것 정도예요.”
진예신이 경악할만한 이야기를 온화한 얼굴로 나긋나긋하게 했다.
내 성깔이 그리 썩 좋지 못하다는 건 나도 인정하는 바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난다는 이유로 남의 집을 불태우지는 않는다. 진예신은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게슴츠레하게 그를 노려봤지만, 진예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 키의 열쇠고리 부분을 검지에 걸어 빙빙 돌리며 방긋방긋 웃었다.
그 화사한 낯짝에 대고 차마 험한 말을 할 수는 없어서 그냥 한숨만 푹푹 쉬었더니 원수 같은 친구 두 놈은 깔깔 웃었고, 이진아는 조막만 한 양손으로 입을 막고선 어깨를 떨었다.
아주 이 집에 내 편은 없다 이거지. 성질 같아서는 대놓고 공연히 심술을 부렸겠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하필이면 이 집에 있는 인간들은 내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라서.
결국, 짧게 숨만 뱉고 빨리 각자 할 일을 하라고 눈으로 재촉할 따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진예신은 더 늦으면 내일 등교에 지장이 간다며 친구들을 데리고 빠르게 나갔고, 이진아는 반쯤 감긴 눈을 끔뻑이다가 내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왜 그래? 재워줄까?”
“저도 이제 혼자 잘 자요…! 그게 아니고 다른 건데….”
훈련하다가 아예 지쳐서 곯아떨어져도 간혹 악몽을 꾸는 탓에 종종 곁을 지켰던지라 자연스럽게 물었더니만, 이진아는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휙휙 흔들더니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게 꼭 이걸 말해도 되는 건지 아닌 건지 고민하는 눈치여서 잠자코 기다렸는데, 늘 빠른 결단을 내리는 이진아답게 금방 단단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말을 이어 붙였다.
“저기 안에 뭐 있는지 저 알아요. 부협회장님이 살짝 보여줬었거든요. 오빠한테는 비밀이라고 했는데, 이제 오빠도 들어가도 된다고 했으니까 말할래요.”
“나도 모르는 걸 네가 안다니까 조금 놀랍긴 한데…. 부협회장님하고 약속한 거 아냐? 어차피 나도 이제 들어갈 거니까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렇지만 오빠한테는 비밀 안 만들기로 한 약속이 먼저니까요! 그리고 지금 말하려는 건, 저 안에 있는 것보다는… 으음, 나랑 부협회장님이 한 일? 그런 거예요!”
미간을 찌푸리고선 말을 고민하던 이진아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벌떡 일어섰다. 순간적으로 이진아의 왼쪽 손등이 하늘빛으로 반짝 빛나더니 영롱한 빛깔의 아콰마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특하기도 해라. 으레 베테랑 감응자들이 그러하듯이 마석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도 밖으로 형상화하는 법을 연습한다고 하더니 그새 노력했나 보다.
칭찬의 의미로 작게 손뼉을 치자 이진아가 가슴을 쭉 펴고 어깨를 으쓱였다가 부루퉁하게 나를 쳐다봤다.
“아이참, 칭찬은 좋지만, 나중에 해주세요! 저 졸리니까 빨리 말하고 자러 갈 거라고요.”
“그래, 조용히 들을게.”
“좋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닌데요. 저 지휘봉 말고 새로운 무기 형태 소환하고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여름밤이 알려줬는데도 어려워서 끙끙대고 있었는데, 부협회장님이 그거 보여줬어요. 오렌지색 노트.”
요만한 공책이었다며 이진아가 손대중으로 어림잡고는 아콰마린을 한 번 톡 건드렸다. 대개의 마석이 그러하듯이 물방울의 여름밤도 자신의 감응자를 몹시 좋아했기에 가벼운 손짓에도 충실하게 모습을 바꿨다.
새하얀 몸체에 아콰마린이 장식된, 도무지 무기라고 짐작하기 힘든 깜찍한 디자인의 헤드셋이 이진아의 목에 걸렸다.
첫 번째 무기의 형태가 지휘봉이고 주문도 모두 보조계열이라 두 번째 무기 형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모두의 예상을 깬 무기다. 무려 탐지계열로 이진아가 쟁취해낸 근성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뭐…, 아직 미숙해서 잘 꺼내지는 않지만, 첫 번째가 지팡이고 두 번째가 낫인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해.’
마석의 첫 번째 무기 형태가 마석 본연의 성질과 가장 어울리는 모습을 취한다면, 두 번째 무기 형태는 감응자의 성향과 염원이 반영되어 나타난다는 게 정설이다.
난 내가 치유사라는 것에 불만은 없었지만, 공격이 부재하다는 점을 계속 신경 써서 그랬는지 누가 봐도 공격형으로 보이는 낫이 두 번째 무기 형태로 나타났다.
그런데도 난 여전히 치유와 보조 주문만 있었는데-물론 무기 형태가 달라져서 발동하는 범위나 방식이 바뀌긴 했다-, 이진아는 아예 새로운 형태의 주문까지 만들어냈으니 나보다 어린 제자가 더 끈기가 있는 건 맞지 않을까.
풍월주를 없애는 데에 도움이 될 훌륭한 변수로 잘 크고 있는 이진아가 그저 기특해서 웃는 얼굴로 보고 있으려니까 이진아가 헤드셋을 머리에 쓰면서 입술을 비죽거렸다.
“오빠는 내가 요걸로 꺼내면 맨날 언니 같은 얼굴을 해요. 이게 그렇게 이상해요?”
“설마. 처음 성공했을 때도 말했지만, 아주 잘했어. 주문 계열이 달라질 정도의 변화는 굉장한 거라고 했잖아. 네 언니 같은 얼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냥 볼 때마다 흐뭇해서 그래.”
“히히, 그래요? 그럼 다행이구….”
이진아가 헤드셋을 만지작거리며 쑥스럽게 웃었다. 봄이랑 자주 붙어서 놀더니 애교스러운 말투도 옮았는지 말끝을 둥글게 만 이진아가 이제 진짜 잘 시간이 다 되어 간다며 비장한 얼굴을 했다.
얼른 할 말을 다 해야 한다며 헤드셋 여기저기를 톡톡 두드린 이진아가 청명한 아이온을 눈가에 두른 채 입을 열었다.
“그 공책을 제가 전부 다 본 건 아니에요. 부협회장님이 몇 장만 읽어줬으면 좋겠다고 보여줬던 거고, 부탁할 일이 있다고 하셨거든요.”
“부탁?”
“사람을 찾는다고 했어요. 공책에 적혀있는 사람.”
이진아가 허공을 향해 주욱 선을 그었다. 그러자 홀로그램으로 된 가지각색 크기의 화면이 우수수 떠올랐다.
SF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진아는 반투명한 화면을 이리저리 옮기기도 하고, 자판을 누르는 것처럼 두드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입은 꾸준하게 말을 이었다.
“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고, 사람이 아닌 동물도 있었고, 또 장소도 섞여 있었는데요. 한창 비가 많이 내릴 때 알아봤던 거라서, 여름밤이 쉽게 도와줘서 저 전부 찾았었거든요.”
‘물방울의 여름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물과 상성이 아주 좋은 마석은 특이하게도 비가 내리는 날에 유독 ‘탐지 범위’가 넓어지는 특성이 있었다.
이진아가 어려서 받아들이는 정보량의 절댓값이 아직 적은데, 그걸 고려하고서라도 성능이 말도 못 하게 좋았다.
게임 속에서도 있었더라면, 진즉에 해피엔딩을 봤을 거라고 느낄 정도로 정보 탐색에 특화된 마석이란 얘기다.
“난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오빠는 알 거 같아요.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오늘 간 곳, 거기 망각의 도시? 라면서요? 거기도 내가 찾아냈던 곳이거든요! 분명 부협회장님이 나한테 부탁했던 것들이랑 관계가 있을 거라고요.”
“그래, 지금 자세하게 들으면 좋겠지만 힘들 거 같으니까 일단 누굴 찾아달라고 했었는지만 말해줘. 나머진 내가 부협회장님이랑 잘 얘기해볼게.”
“네! 잠깐만요, 여기다가 제가 따로 저장했었는데….”
이진아가 몇 개의 화면을 휙휙 넘기더니 어떤 하나를 앞에 두고선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손끝으로 천천히 위에서부터 아래로 화면을 짚어가면서 이름들을 쭉 읊었다.
“청풍, 사천, 홍도, 천평, 수원, 성산, 금호, 동명…, 음, 여기까진 지명인데 사람이라고 나왔던 이름이었고요.”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몰라도 특정 지역명을 가명으로 삼아 활동하는 제3 세력권의 사람들이다. 진예신은 그들과 아는 사이처럼 보였고, 실제로 홍도와는 가끔 연락한다고 했었는데 왜 물어봤지?
문득 궁금증이 생겼지만, 이건 진예신이 답해줄 문제였기에 이진아의 이어지는 말을 귀담아들었다.
“담홍도, 소건행, 견달래, 목천향, 연혜훈. 이 사람들이 오빠랑 싸운다는 사람들이죠? 어디에 있는지가 아니라 머물렀는지 알려달라고 하셔서 찾았었고요.”
그래, 우리가 만났던 도시의 관리자인 담홍도 씨는 풍월주의 사람이 맞았구나. 진예신은 원래 그 사실을 알았던 것 같고.
게임과 소설에서 조명하지 않았던 이들은 나도 모른다는 점이 새삼스럽게 답답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았던 건, 터주? 가 있는 땅이었어요. 대부분의 산이랑 이름 있는 바다들이었는데…. 이건 나중에 제가 따로 오빠한테 종이에 써서 줄게요! 오빠한테도 필요하죠? 부협회장님도 가져가셨거든요!”
해맑은 이진아의 말에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서늘한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며 진예신이 거실로 들어왔다.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왔지?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는 나와 허둥지둥 헤드셋을 없애는 이진아를 번갈아 응시한 진예신이 킥킥 웃었다.
“아, 정말이지. 요한 군도, 진아 양도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다니까요. 이래서 내가 여러분들을 좋아해요.”
난데없는 고백에 심장이 뛰었다. 설렘이 아니라 공포로. 참고로 말하는데, 이건 나만이 아니라 이진아도 마찬가지다. 지금 애 얼굴이 퍼렇게 질렸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