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203
202화. 취하고 싶은 날 (4)
같은 감정을 공유하면 그 대상에 대해 할 말이 많아진다. 처음 만난 상대여도 술술 대화가 잘 풀린단 소리다.
더불어 향수에 대해선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지 했던 부분이라 양신아가 폭탄만 떨어뜨리고 간 건 아니라고 애써 긍정적인 생각 회로를 돌렸다.
멍하게 눈만 끔뻑이던 고송찬이 뭐라도 말해보려고 끙끙대는 걸 잠깐 지켜보다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말을 꺼냈다.
“양신아 씨가 말씀하셔서 생각났습니다만, 그 향수 고향에 내려갔을 때 받으셨다 들었습니다. 원래 향수를 자주 사용하셨습니까? 저와 만날 땐 딱히 뿌리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엇, 소문이 부장님께 들어갈 정도까지 퍼졌습니까?”
눈을 휘둥그레 떴던 고송찬이 그때 사람이 많이 모여있긴 했다며 홀로 납득했다. 그런데 ‘부장님께 들어갈 정도의 소문’이라니. 애초에 협회에 퍼지는 말은 전부 나한테 들어오고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텐데.
의아함에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가 따끈한 차를 한 잔 따랐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송찬이 이어 붙이는 말에 시선을 올렸다.
“향수는 원래 잘 쓰지 않았던 건 맞습니다. 정확히는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뭐, 선물을 받은 김에 취미를 붙여보려고 했는데, 저하고는 썩 연이 없는 분야인 것 같습니다.”
좋은 향이 어떤 건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며 멋쩍게 웃은 고송찬이 소맷자락을 죽죽 잡아당기다가 내게 우물쭈물 질문했다.
“그런데 정말로 이 향이 짙습니까? 평범하게 꽃향기가 나는 향수라고 생각했는데 가끔 진하단 소리를 들어서 긴가민가합니다.”
“향에 대한 의견은 사람마다 다르니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옅은 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고송찬 씨께서 ‘가끔’ 들었다고 하셨으니, 저나 양신아 씨가 향에 민감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으음…. 어쩌면 아이온 향수여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윤 부장님이나 부협회장님이나…, 여하간 등급이 높은 분들이 오늘 향 짙네요,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던 거라서요. 어라, 그러면 양신아 씨는 그냥 향을 잘 맡으시는 걸지도….”
윤혜아 선배만이 아니라 진예신 부협회장도 고송찬의 향수 냄새를 맡았단 말이지. 고송찬의 중얼거림에 차를 호로록 마시면서 머리를 굴렸다.
‘혹시라도 이 향수에 문제가 있다면 맡은 사람들에게 영향이 분명히 있을 텐데….’
최이안 선배는 본부 건물에 잘 들어가는 편이 아니고, 협회장은 균열 공략이 아니면 집무실에서 잘 나오지 않고, 남은 S급인 이시영 선배는 심 선생님과 파트너십이 강해서 병동에 오래 있으시고….
“아이온 향수는 감응자 등급이 높을수록 강하게 느낀다고 들었는데, 저어, 부장님께서는 양신아 씨의 등급이 뭔지 알고 계십니까? 제게 짙다는 말을 해주신 분들은 전부 A급이 넘으셨는데, 양신아 씨의 등급은 들은 기억이 없어서….”
“오버 B급입니다. 일반적인 B급의 출력은 훨씬 웃돌지만, A급에는 미치지 못하는 정도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덕분에 협회에 강제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얘기하셨는데….”
초등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매해 의무적으로 아이온 검사를 받기 때문에 서로의 등급을 말하는 건 일상적인 일이라 하던 생각을 끊고 반사적으로 답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기억에 말끝이 약간 흐려졌다.
분명하게 기억하건대 이 얘기는 내가 양신아와 단둘이서 나눴던 게 아니라 특별부서가 해체한 기념으로 했던 회식 자리에서 양신아가 깔깔 웃으며 떠들었던 얘기다.
그날 특별부서 사람 중에서 불참자는 없었으니까 고송찬도 들었을 텐데, 왜 모른다는 말을 한 거지? 의심이 들불처럼 번졌지만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붙였다.
“아까는 차라리 A급 판정이 나서 협회에서 일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면서 웃으셨습니다. 아무래도 연말이 다가오니까 양신아 씨도 일이 많이 고되나 봅니다.”
양신아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진실, 하지만 그 시점은 과거 회식 날이 기준이니까 ‘아까’라는 말은 거짓. 그리고 연말이라 고되진 것 같다는 감상도 거짓. 왜냐면 양신아는 현재 상사가 공석이라 일이 절반으로 줄어서 살판난댔거든.
가장 효과적인 거짓말은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은 말이며 그 말을 꺼낼 땐 자연스러운 표정이 생명인 법. 반 정도 빈 찻잔을 내려놓고, 설핏 웃으며 고송찬과 눈을 마주했다.
“하긴 연말이 바쁘긴 합니다. 부장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지만 모두가 바쁠 시기니…. 그나저나 두 분 일찍 오셨다더니 그새 아주 친해지셨나 봅니다! 저도 좀 부지런히 올 걸 그랬습니다.”
고송찬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더니 제 몫의 후식으로 나온 커스터드푸딩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아직 내 거짓말도 쓸만한지 얼굴을 보아하니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도 않은 것 같고, 오히려 훌륭하게도 고송찬은 내 의도대로 ‘자신이 오기 전에 했던 대화’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다. 양신아가 돌아오기 전에-일부러 나가준 만큼 넉넉하게 시간을 보내고 올 테지만-확실하게 고송찬이 수상하다는 증거를 잡아야 올해의 마지막이 안전해진다.
“고송찬 씨까지 일찍 오셨다면, 대화를 오래 하는 게 아니라 식사를 빨리 끝마쳤을 겁니다. 물론 지금처럼 식사 후의 시간은 더 길게 가질 수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래도 제가 제일 늦어서 민망하다고 해야 하나…. 각오는 했지만, 예상보다도 사람이 훨씬 많아서 놀랐습니다.”
“날씨도 좋지 못했으니 다들 대중교통을 이용한 걸 겁니다. 그나저나 양신아 씨가 계시는 자리에서는 말하지 못하던 고민은 뭡니까? 혹시 제게도 말 못 할 개인적인 고민거리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냥, 그으, 창립기념 행사에 제가 팀장 역할을 진짜 맡아도 괜찮을까, 긴장해서 오히려 큰일을 만드는 게 아닐까, 그런 고민이어서….”
창립기념 행사에는 정부 측 인사는 물론이고 민간인까지 잔뜩 참여하니까 약한 모습은 보여주면 안 될 것 같았다며 고송찬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난 적당한 부담감은 일의 효율을 높인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고송찬이 배신 용의자로 지목되기 전까지만 해도 충분히 팀을 이끌 역량이 되고 책임감이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보안부에서 고송찬은 평판이 좋은 사람이고, 지금까지 올라온 보고서에는 흠결 하나 없었으며 기념행사 준비도 빠릿빠릿하게 잘 했다.
지금은 걱정이 넘쳐서 횡설수설하는 터라 미덥지 않게 보이긴 하는데, 팀원들 앞에서는 듬직하게 지시도 잘 내리는 걸 몇 번 보기도 했고.
그랬기에 사감을 최대한 배제하고-배신자일 확률이 9할이지만 그게 일을 못 했다는 건 아니니까-쌈박하게 대답해줬다.
“고송찬 씨가 맡은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잘 하셨습니다. 행사가 끝나면 포상 휴가를 드릴 생각으로 일정을 점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부담스러워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헉. 휴가라니…! 혹시 저희 팀 모두가 받는 겁니까?”
“모두 고생하셨으니 날짜는 다르더라도 전부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고송찬 씨 혼자서 받고 싶으신 겁니까? 그런 거라면 의견을 존중해드릴 수 있습니다.”
대신 훗날 누군가 단독 휴가에 대해서 이유를 묻거든 고송찬 씨가 원했다고 솔직하게 대답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실제로 휴가를 주려고 계획하고 있다가 배신자로 용의선상에 오르자마자 그의 부재를 가정하여 바쁜 와중에 새로이 일정을 짰던 기억이 떠올라서 부린 심술이다.
그러자 농담을 능청스럽게 넘기는 법 따위는 모르는 고송찬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리곤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면서 절대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며 비명처럼 외쳤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이라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아서 차분하게 남은 차를 마시는 척 찻잔으로 입을 가리며 고송찬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13월에는 쉴 틈 없이 바빠서 이번 보안팀의 인원을 한 번에 쉬게는 못하지만, 날짜를 띄엄띄엄 고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한 손이라도 거들면 일이 수월하니까 고송찬 씨만 휴가에 가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고….”
“아아, 차, 차라리 저만 휴가를 안 가겠습니다, 부장님…! 13월에도 뼈 빠지게 일할 테니까 부디 재고를…!”
“아, 아흐흡…. 아, 이래서 윤 선배님이랑 양신아 씨가 고송찬 씨를 놀리는 게 재밌다고 했었나 봅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설마 지금 하신 말씀이 농담이셨다거나…?”
찌르면 찌르는 대로 펄쩍 뛰는 모양새에 결국 웃음 참기를 실패했다. 내가 들어도 이상한 웃음소리에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이자 고송찬이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허탈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덕분에 하고 있던 고민이 전부 사라진 느낌이라며 고송찬이 해탈한 부처 마냥 웃었고, 난 그런 그의 꼴이 퍽 웃겼던지라 흐느끼듯이 어깨를 떨다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부장님께 즐거움을 드렸다니 참으로 다행이라는 말까지 꺼낸 고송찬이 여전히 쥐고 있던 디저트 스푼을 비로소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말을 더했다.
“저, 그런데, 그…. 제가 부탁드렸던 분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됐는지 물어봐도 괜찮습니까?”
“담홍도 씨에 관한 것이라면 망각의 도시 보고서에 작성한 것 외에 다른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균열 공략 이후 만남을 가지기로 했으나 행방이 묘연해진 터라 제자리걸음이 됐다는 쪽이 더 맞겠습니다마는.”
“보고서는 저도 읽었습니다!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다고 되어 있었는데, 뭔가 특별한 말을 한 건 아니었던 겁니까?”
“본래 마을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 정도는 했지만, 그 외에 별다른 건 없었습니다.”
그야 새로 보고서가 올라오면 가장 먼저 1차 점검하는 게 보안부니까-보호소 결계의 유지‧보수를 파악하기 위해-당연히 읽었겠지. 어쩐지 다급한 목소리로 묻는 고송찬을 물끄러미 보면서 말을 이었다.
“고송찬 씨는 본래 경찰이셨고, 민중의 지팡이 역에 오랜 시간 계셨으니 시민의 부탁에 쩔쩔매는 건 이해합니다만, 담홍도 씨에 대해 유달리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묻고자 하는데.”
달칵. 일부러 소리가 울리도록 찻잔을 내려놓았다. 멀찍이 문 바깥으로 양신아로 추정되는 인기척이 잠깐 났다가 슬그머니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속으로 가볍게 감사를 전하며 긴장한 티가 역력한 고송찬에게 질문을 던졌다.
“담홍도 씨에 대해서 본래 알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고송찬 씨.”
나는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을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협회의 정보 레이더 위로 올렸다고 의심하고 있다. 이를테면 본래라면 내년에나 일어났을 협회장 암살미수 사건의 빌드업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