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67
66화. 안개가 자욱한 골목
에피소드 9.
적갈색 벽돌로 이루어진 돌담길의 한중간, 일정한 거리로 길을 밝히고 있는 뿌연 가스등 하나가 깜빡 점멸했다.
희미한 불빛을 의지해 받은 지도를 펼쳐서 살펴봤지만, 주위가 모조리 똑같이 생긴 골목이라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가늠이 안 됐다.
‘미아 되기 딱 좋은 곳이라는 생각은 했지. 했는데 그래도 지도도 받고 설명도 들었으니까 괜찮을 줄 알았다고.’
획이 딱딱 나뉜 지도 위에 서툰 글씨체로 ‘집’이라고 쓰여있는 부분과 지금 서 있는 주변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래도 이쪽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줄곧 방향과 걸음 수를 기록하고 있었으니까 대충 이쯤 왔으려나 모르겠다.
현재 내 위치로 예상되는 지점을 손끝으로 문지르면서 지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지만, 기대하던 장소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안개가 더 짙어진 기분이 드는 골목 한중간에서 결국 나오는 한숨을 막지 못하고 내쉬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길 왔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 기껏 시간을 내어서 온 거지만, 현실 도피를 하고 싶어졌다. 사람이 너무 힘들면 모른 척하고 싶어질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막막한 심정에 고개를 들었지만, 태양도 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뿌연 안개가 사방을 가로막고 있을 뿐.
다시 한번 폐 깊숙한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뱉어버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저절로 이틀 전, 회의가 있었던 날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 * *
분명 묶어두었는데도 전혀 구속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자였다. 말을 할 때마다 표정 변화를 보여주는 것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가면이 섬뜩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신여월은 겁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어서 이 자가 인간이든, 마수든, 다른 생물체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에도 결계 안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을지도 모르는 신유하의 상태를 확인하고, 오늘 망해버린 회의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히길 원했다.
“나는 그대가 어떤 존재인지는 딱히 관심이 없다네. 보아하니 무력보다는 다른 재주가 있는 듯하고, 그걸로 결계 안쪽에 있는 아이들에게 해를 끼친 것 같은데, 맞는가?”
“으음, 내가 뭔가를 하지는 않았어. 말했잖아? 악몽은 소리 없이 찾아든다고. 그냥 저 안에 나를 이곳까지 불러올 정도로 맛있는 꿈이 있었을 뿐이야. 나는 그런 꿈을 먹으면서 살거든. 그런데 결계 때문에 저기로 들어가지 못했던 거야.”
아이는 하얀 신발을 허공에서 까딱까딱 흔들며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면이 활짝 웃는 모습으로 바뀌어서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신여월은 얼굴이 가려져서 전혀 상태를 파악할 수 없는 상대를 빤히 보다가 느릿하게 팔짱을 꼈다.
“꿈이라면 정신과 관련이 있을 텐데, 팔불출 같겠지만 우리 유하는 협회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정신 방벽이 높다네. 고작 잠이 들었다고 쓰러졌다는 신호가 오지 않는다는 얘길세.”
나태하게 허공을 뒹굴면서 신여월에게서 받은 큐브를 도르륵 도르륵 굴리던 아이가 가면을 바꿨다. 얼굴 전체에 커다란 물음표 하나가 박혀있는 기분 나쁜 가면이었다.
“그리고 그대가 꿈을 먹는다고 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은 먹을 것 같지 않은데 말이야….”
신여월이 여유로운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스르륵 흘러내리는 기다란 머리카락에 눈 한쪽을 가리며 약간 서늘한 기세가 풍겼다.
“그대, 악몽을 키울 줄 알지?”
가면 위로 느낌표가 크게 떴다가 이내 한껏 기뻐하는 표정의 얼굴 가면으로 변했다. 아이는 연신 손뼉을 치면서 즐거워하다가 신여월의 앞으로 둥둥 날아갔다.
이시영이 다급하게 속박한 줄을 당겨서 제어하려고 했지만, 신여월이 그냥 두라며 만류했다.
모순적이지만 묶여 있음에도 자유롭게 공중에 떠 있는 아이는 신여월의 눈과 자기 가면의 높이를 맞춘 채로 깔깔 웃었다.
“눈치 정말 빠르네~ 난 너처럼 말하지 않아도 아는 애들 좋아해.”
어떤 표정도 없는 새하얀 가면이 달그락 움직이다가 멈췄다.
곧이어 당장이라도 뭔가를 먹고 싶어 하는 배고픈 표정이 됐다. 그러다가도 익살스러운 피에로처럼 반쪽은 웃는 눈이 됐고, 나머지 반쪽은 우는 눈이 되었다.
아이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신나게 말했다.
“맞아! 난 꿈을 먹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졌지. 날 만든 어머니께서는 꿈을 이용한 주술이 특기셔서 말이야. 다른 술사들처럼 힘을 조절해줄 매개체로 나를 만든 거야. 물론 어머니의 실험 정신이 투철하시다 보니 아주 공교롭게도 내가 자아를 가지게 됐지만.”
허공에서 몸을 튕겨 한 바퀴 구른 아이는 결계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노래하듯이 종알거렸다.
기묘하게도 진예신과 비슷한 느낌의 어조여서 나도 모르게 슬쩍 진예신을 바라봤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이를 보면서 검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튼, 내가 잘못이 없는 건 맞아. 내가 내 입맛에 맞게 악몽을 진하게 농축시키는 편이긴 한데 이번 건 내 의지로 이뤄진 게 아니거든. 봐봐, 나는 저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해서 너희한테 숨바꼭질까지 제안했잖아.”
“제 의지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럼 지금 이게 단순한 자연현상이라도 되느냐?”
“비슷하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단지 내가 있는 것만으로도 악몽은 영향을 받아서 크기가 커지긴 하거든. 게다가 여기 있는 악몽은 원래부터 먹음직스러웠다니까? 난 움직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도 저어 멀리서 날아올 정도로 컸다고.”
신여월 앞에서 깐족거리던 아이는 이번엔 내 앞으로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가면을 봤다가 히죽 웃는 얼굴로 변한 모양새에 입을 꾹 다물었다. 아이는 속삭이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악몽 때문에 이곳까지 온 건 사실 부차적인 거야. 난 기왕이면 여기서 너를 보고 가려고 했어. 어머니께서 널 아주 궁금해하고 계시거든.”
“저는 당신도, 당신의 어머니라는 사람도 모릅니다.”
“그렇겠지! 벌써 알면 큰일이 난다고.”
화들짝 놀란 표정의 가면이 나타났다가 이번에는 짓궂은 표정의 가면이 나타났다.
“그래서 네가 이쪽을 눈치채기 전까지는 어머니도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거야. 너, 물고기를 건드려 버렸는걸.”
자아가 있는 매개를 만드는 어머니 술사에 내가, 건드린 물고기?
특이한 조합이지만 짐작 가는 바가 있다. 위후를 해치려고 했고, 견달래의 파트너로 추정되는 저주가 특기인 술사다.
내가 해주 하는 동안 위후가 읽었던 주소로 직접 찾아갈 수고를 덜었으니 좋다고 말해야 하는데,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견달래의 날개가 마을에 있었던 것도 그렇고, 하필 하고 많은 감응자 중에서 치유사인 위후를 노린 것도 그렇고. 영락없이 풍월주 밑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아닌 건가?’
유별나게 최근에 연속으로 그들을 만나서 그렇지, 원래 풍월주와 그 밑의 수하들은 신비주의다.
철저하게 신상을 보호하고, 모든 일을 비밀리에 처리해서 지금까지 협회 사람 중에서는 직접 풍월주와 치고받고 싸웠던 신여월 말고는 모습을 제대로 본 사람이 드물 정도다.
게임에서 배신 루트를 정석적으로 탔을 때도 풍월주 밑으로 적을 옮긴 이후에는 외출을 극도로 자제했었고, 어떤 루트에서는 아예 협회에 가입조차 하지 않고 연혜훈처럼 미등록 감응자로서 풍월주 밑에서 일하기도 했었다. 그때에도 신비주의를 고수했던 건 말해야 입만 아프다.
‘풍월주 스스로 이 땅을 못 밟으니까 부하들을 대신 이용했고, 처절할 정도로 부하들 신상을 감췄었어. 풍월주에게 맹목적인 부하들도 당연하게 따랐었고. 하지만 견달래와 일을 한 게 분명한 술사가 이렇게 허술하게 정체를 드러낸다고?’
수상하기 짝이 없는 아이 하나가 왔다지만, 아이온을 읽을 줄 아는 감응자에게 있어서 이 아이를 실마리 삼아서 주인이 있는 장소를 추적하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대놓고 자신의 주술 매개체를 내돌렸다는 건, 어떻게 해서든 제 일에 훼방을 놓은 나를 한 번 보겠다는 거거나, 풍월주를 광신도처럼 따르지 않는 부하이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다소 크다. 혹은 풍월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다른 세력이거나.
‘물론 전부 아닐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
어쨌든 지금 중요한 점은 결계 안쪽의 협회 사람의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이고, 이 아이를 잘 이용해서 풍월주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모아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다.
뭐든 우선순위는 첫 번째부터 차례로 해결해야 하므로 신여월이 문답했던 것처럼 나도 아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만일 당신이 숨바꼭질에서 이겨서 결계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면, 저 안의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얌전히 쓰고 있던 야구 모자를 휙 벗은 아이가 그걸 허공에 띄우더니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빗었다.
인공 생명체라는 것을 알고 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실처럼 생긴 머리칼은 금방 엉킨 것이 풀리며 차분하게 돌아왔다.
“내가 악몽을 싹 먹어 치우니까, 얘들은 여기서 낚시나 하는 거지, 뭘. 물론 꿈은 균형이 맞아야 하는 거라서 말이야. 내가 악몽을 싹 먹으면 길몽만이 남거든?”
야구 모자를 뒤로 돌려서 챙이 뒤통수를 향하게 만든 아이가 가면을 톡톡 두드렸다. 새하얗던 가면이 까맣게 물이 들고, 그 위에 새빨간 하트 문양이 떠올랐다.
“좋은 꿈을 꾸는 사람들은 일어나지 않으려고 하더라고.”
“길몽까지 전부 드시면 멀쩡해진다는 소리로 들립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인 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서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뚝 끊긴 대화가 어색해서 아이만 쳐다보는데, 별안간 아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이의 가면은 과녁처럼 동그란 원이 두 겹 둘린 특이한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너는 물고기 때문에 어머니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건 이쪽 잘못이지만, 어머니께서는 딱히 너랑 척지고 싶은 게 아니거든.”
술사의 주술 매개체라고 하더니 자아가 따로 생겼더라도 주인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말투와 행동은 그대로였지만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바뀌어 버린 아이는 이전까지 하던 말을 잇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전달해주는 말을 내뱉듯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지만 잘못은 잘못이니까 사죄의 의미로 어머니께서 이번 일은 책임지고 해결하신대. 결계를 풀어주면 내가 꿈을 조절할 거고, 다들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얘기야. 아, 그리고 말이지. 어머니께서는 당신들이 풍월주라고 부르는 사람의 부하 같은 게 아니야. 위후에 관련된 일은 단지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던 것뿐이고, 잠깐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을 뿐이거든. 친구들이 조금 반대를 하긴 했지만.”
구구절절 이어지는 말에 신여월이 비로소 인내심이 끝나버렸는지 팔짱을 풀고서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가 내 앞에 있었던 터라 내 옆자리로 오게 된 신여월은 아이의 가면을 불만스럽게 노려보면서 혀를 찼다.
“거참 죄인이 혓바닥이 길구나. 직접 일을 해결해주겠다니 정상참작은 해주겠지만, 너는 이대로 협회 감옥에 갇힐 거란다.”
“내가 이번 일의 배후를 이야기해 준다고 해도?”
“당연하지 않니. 누군가 수작질을 벌인 것쯤 알고 있었단다.”
신여월이 견고하게 세워져 있는 결계를 풀라고 눈짓하며 아이의 목덜미를 짐승 드는 것처럼 낚아챘다. 대롱대롱 들린 아이가 발버둥을 쳤지만, 신여월의 힘에는 이길 수가 없었는지 곧 축 늘어졌다.
이시영이 눈치 좋게 신여월이 들기 편하도록 속박 주문을 조절했고, 나는 협회장의 지시대로 결계를 거뒀다.
“협회 내부에는 균열이 발생할 수 없도록 늘 손을 보고 있는데, 별관에서 회의 중에 열린다니. 상황이 너무 작위적이지 않으냐. 그런 짓을 할만한 담이 있는 건 당연히 풍월주 그자뿐이라고 생각했지.”
신여월은 물건을 다루는 것처럼 아이를 건물 쪽으로 내밀었고, 아이는 말한 것은 지키려는 셈인지 양손을 쭉 뻗어서 큐브를 공중에 띄웠다.
자기 혼자서 돌아가던 큐브가 딱딱 소리를 내며 맞춰지더니 임시 대피소에서부터 어마어마하게 불길한 기운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척 봐도 아이로 인해 부피가 더 커졌다는 악몽이었다.
위후의 마을에 걸린 저주를 해제할 때, 물고기 조약돌의 깊은 곳에 있던 작은 기운과는 차원이 다른 양이었다.
‘봄은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아서 단순히 내 짐작으로 그게 저주의 기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악몽의 기운이었나.’
큐브로 빨려 들어가는 기운을 보다가 임시 대피소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심장 소리를 찾아 귀를 기울였다.
잠들어 있는 자들의 일정한 심박수에 안도하기도 잠시, 큐브가 다시 달그락 소리를 내며 돌아가더니 이번에는 몹시도 따스한 기운을 쭉쭉 빨아들였다.
그때 신여월이 나지막하게 하던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네가 하는 말을 듣고 있노라니, 요한이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는 네 어머니라는 자가 이 일을 주도했고, 그자와 함께하는 친구들에게 뭔가 증명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싶더구나.”
“…왜.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주 드물게, 영원의 눈물을 꺼내지 않고 눈에 아이온을 모아 강화한 신여월이 아이를 내려다봤다.
투명한 다이아몬드인 마석과 똑같이 영롱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진실을 토해내야 할 것처럼 엄격하고 싸늘한 기세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다정하게 초승달 모양으로 눈매를 휘며 신여월은 미소를 지었다.
“마석의 절반이나 품고 있는 주술 매개체 주제에 네가 너무 무능하기 때문이란다.”
그 미소에서 나온 말이 몹시도 날카로워서 듣는 대상이 아닌 나도 아플 정도인 게 문제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