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66
65화. 소리 없는 악몽 (8)
내가 한 일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게임을 할 때는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던 흑색 균열이었는데, 생각보다 빠르고 안전하게 공략이 끝났다.
기사단장 알렌이 완전하게 사라지고, 보상 상자도 사이좋게 하나씩 챙겼는데도 다소 늦게 나타난 출구가 거슬렸지만, 거기에 풍월주의 기운은 섞여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쪽의 수작이라는 의심은 접었다.
무사히 출구를 통해 균열을 빠져나가면, 전투로 인해 쑥대밭이 된 별관 앞마당과 내가 친 결계로 안전한 임시 대피소가 보일 것이다.
그래서 한 발자국이라도 빨리 나가서 지원에 손을 보태는 게 좋다는 생각으로 내가 제일 먼저 출구에 발을 디밀었다.
입구로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볼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이 가장 먼저 느껴졌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초여름의 더운 공기가 아닌 최이안의 후끈한 불의 열기였다.
“후배님, 옆으로 피해!”
최이안에게 특훈으로 굴려지던 몸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회피하고 있었다.
거대한 불덩어리가 무려 다섯 개나 내 옆을 지나서 뒤쪽으로 와르르 박히는 걸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보다가 최이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급하게 달려온 최이안이 내 어깨를 붙잡고 이리저리 살피는 걸 말리고 연달아 나오는 진예신과 신여월을 위해 한 발 더 출구에서 떨어졌다.
두 사람이 다 빠져나오고 균열이 완벽히 폐쇄되는 걸 보고 나서야 최이안의 꼴을 보며 질문을 했다.
“뭡니까? 제가 세운 결계는 멀쩡해 보이고, 마수도 이제 다 잡은 거 같은데 왜 불을 이쪽으로 던진 겁니까?”
“그으게…. 지금 좀 일이 생겨서, 앗, 저쪽!”
“자, 잠깐, 이안 선배! 제 어깨는 좀 놓으시고…!”
연신 눈을 굴리며 주변을 노려보던 최이안은 내게 대답을 하다 말고 갑자기 소리를 치며 불덩이를 또 던졌다.
하필이면 내 어깨를 잡은 채로 당기는 바람에 휘청거리며 최이안의 뒤쪽으로 이동 당했다.
콰과광! 그렇지 않아도 흉해진 앞마당에 뚜렷하게 추가되는 크레이터를 멍하게 보고 있자 저 멀리서 이시영이 날아와서는 우리 앞에 섰다.
“어서 오세요, 여월 님. 예신이하고 요한이도 안 다쳐서 다행이야.”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친근하게 말하는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신여월과 진예신도 반갑게 그를 맞았다.
“그래, 우리는 무사하다만, 상황이 영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거 같구나.”
“그러게요. 이안 군에게서는 제대로 된 설명이 나올 거 같지 않은데,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하아, 그게 말이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시영이 왼손으로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사이 세 개의 불덩어리가 다시 허공을 가르며 애꿎은 땅을 파괴했다.
이 난장판 속에서 평소라면 최이안을 바로 저지했을 윤혜아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가장 먼저 깨달았다. 그리고 그 뒤로 아무리 보호막을 쳐뒀다지만 임시 대피소가 지나치게 고요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둘 다 불길한 징조였다.
“처음에는 문제가 없었어. 요한이가 친 보호막은 튼튼했고, 균열이 두 개라서 숫자가 많기는 했지만, 마수가 엄청 강한 건 아니었거든. 거기에 이안이가 공략을 마치고 나온 후부터는 마수도 반으로 줄어서 바깥에 있던 두 팀은 오히려 안으로 들어갔어.”
이시영의 설명에 신여월의 시선이 내게 옮겨졌다. 결계가 마수 말고 외부에서 출입하려는 감응자도 막을 수 있느냐는 눈빛이었다.
“이 땅의 아이온이 아닌 다른 아이온을 지닌 것들을 막는 형태의 보호막입니다. 감응자는 모두 이곳의 사람들이니 각자 아이온의 성질이 다르다고 해도 출입할 수 있습니다.”
“아, 역시 그랬구나. 저희도 처음엔 출입할 수 없는 줄 알고 결계 근처에서 쉬는 걸로 정했는데, 하늘이랑 바다가 저쪽에 앉아서 졸다가 뒤로 넘어갔는데 들어가 지더라고. 아무튼, 두 팀을 먼저 안으로 보내고, 나머지 두 팀이랑 이안이, 나, 혜아 이렇게 있다가 흑색에서도 더 마수가 안 나오길래 나랑 이안이 빼고 전부 안으로 보냈어.”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삐리릭! 하고 알림이 오더라고, 유하 후배님한테서!”
신나게 불덩이를 던지다가 이제 포기했는지 최이안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성큼성큼 허공을 밟고 내 옆으로 온 최이안이 신여월을 쳐다보며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비상 연락이구나.”
“정확히는 정신을 잃으면 자동으로 날아오는 메시지죠. 유하 후배 님은 워낙 조심성이 많아서 꼬맹이 시절에 받았던 호신벨을 개조해서 가지고 다니잖아요. 그것도 꼬박꼬박 아이온 배터리 충전해서 기절하면 바로 연락이 가도록. 그러니까 이 말인즉슨.”
최이안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턱짓으로 임시 대피소를 가리켰다. 보호를 위해 세운 결계가 도리어 내부를 위험 지대로 만든 걸까. 착잡한 마음이 들어서 이를 앙다물었다.
“저 내부에 지금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났단 얘기죠. 그래도 여기 S급이 둘이나 있는데 이런저런 시도는 해봐야 하잖아요?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는 방안은 제일 뒤로 두고, 이 근방을 수색했죠.”
“어차피 협회 내부고, 보다시피 이 근처는 죄다 파괴되는 바람에 수색할 것도 별로 없었어. 특수처리를 하지 않는 이상 마수가 시체를 남기는 것도 아니니까 전투 흔적 빼고는 깨끗했지.”
“그런데 갑자기!”
최이안이 손뼉을 짝 맞부딪치며 목청을 높였다.
“드륵드륵하고 이상한 소리가 울리지 뭐야. 그래서 냉큼 확인했더니 요런 게 나왔답니다.”
붉은 아이온에 감싸인 큐브가 최이안의 손짓에 따라 둥둥 떠올랐다. 수상한 물건은 손으로 만지지 않는다는 원칙을 최이안은 잘 지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어지간히도 저게 이상하게 느껴졌나 보다.
“이안 군이 한 말에 따르면, 그 큐브가 혼자서 움직였단 얘기네요?”
“네에~! 그리고 녹음이라도 된 건지 사람 말도 나왔다니까요.”
“뭐라고 나왔나요?”
“숨바꼭질하자고요.”
진예신의 관심이 좋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최이안의 얼굴에 짜증이 순간 어렸다가 사라졌다. 최이안의 성격상 다른 놀이면 몰라도 숨바꼭질은 영 맞지 않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다.
움직임이 없는 큐브를 눈으로만 확인하고 이시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시영은 꺼림칙하다는 표정으로 큐브를 보면서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더니 정제된 말을 꺼냈다.
“일단은 이 큐브의 주인을 A라고 할게. A는 일단 협회 사람이 아니래. 자기는 여기 한국 사람도 아니고, 다른 곳에서 왔는데 우리의 실력을 보고 싶었다고 했어.”
“실력, 말입니까?”
“그래. 정확하게 그렇게 말했어. 그래서 친구들에게 도와달라고 요청을 했고, 그 친구들이 오늘 이곳에 균열을 여는 걸 도와줬대. 솔직히 말하면 전부 거짓말 같았어. 사람이 균열을 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잖아? 하지만 여월 님이 쫓고 계시는 풍월주라는 자가 계획한 일이라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느껴지더라. 그래서 일단은 A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보기로 했어.”
고개를 끄덕이며 이시영의 말이 다 맞다고 긍정하던 최이안이 말끝을 받아 대화를 이었다.
“A가 그러더라고요. 나는 숨바꼭질을 좋아해. 숨는 것도 잘해. 그러니까 우리 내기를 하자. 너희는 숨어 있는 나를 찾고, 나는 저 결계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고. 진 쪽이 이긴 쪽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야. 라고요.”
“그래서 이 주변에 불을 그렇게 던져대신 겁니까? 숨어 있는 사람에게 맞으라고?”
“으응, 그렇지. 사실 반쯤은 화풀이였지만.”
최이안이 내 매서운 시선을 피하며 헤프게 웃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짓을 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내가 다칠 뻔한 게 미안한가 보지?
못마땅하게 그를 쳐다보자 최이안이 데굴데굴 눈을 굴리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걸었다.
“그런데 후배님. 저 결계는 마수처럼 이 땅의 생명체가 아닌 것만 못 들어간다고 했잖아.”
“네.”
“그럼 이 A라는 애는 마수일까? 저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는댔는데.”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마수라고 한다면, 균열 밖으로 나온 마수라는 얘기가 되는데, 이성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만약 진짜로 큐브를 통해 연락을 시도한 A라는 자가 마수라면 게임 속의 타임라인이 몹시 앞당겨진 게 된다.
그쪽은 협회 측에서 일어난 일들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닌 풍월주 측의 실험 결과이니 예상보다도 적의 세력이 크고 강하단 소리도 된다.
이 가정도 영 좋지 못하지만, 소설과 게임에서 나오지 않은 변수가 A여도 문제가 있다.
난 아직 나를 이 세계로 불러들였다고 주장한 수상한 자들에 대해 조사를 제대로 못 했거든. 변수가 늘어나는 건 사양하고 싶다고.
그래서 A의 정체를 밝히는 일보다는, 이 자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지로 대화의 화제를 돌려버렸다.
“다만 그 A라는 사람이 제가 만든 결계를 통과하지 못했다고 했으니 시도를 위해 한 번은 결계에 닿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자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진짜? 정말? 지금 당장 찾을 수 있어?”
“제가 세운 결계니까 출입하려고 한 자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닿지 않았다면 못 하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마시고 잠시 기다리십시오.”
최이안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덩이를 난사한 걸로는 화가 아직 덜 풀렸나 보다.
하긴 최이안은 협회를 꽤 아끼는 사람이고, 자기 팀인 강하늘과 강바다를 끔찍하게 챙기는 사람이니까 지금 상황 자체가 스트레스일 거다.
행동과 말이 가벼워서 그렇지 최이안이 가벼운 사람인 것도 아니고.
큐브에 호기심이 생긴 신여월이 최이안에게서 큐브를 넘겨받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진예신을 내버려 두고서 결계로 다가갔다.
결계의 내부가 비치도록 조절해서 임시 대피소의 모습이 훤히 드러나 있지만, 내 눈에는 담쟁이로 뒤덮인 돔 형태의 결계가 선명히 보였다.
왼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오른손은 결계 가까이 뻗은 후 눈을 감았다.
‘일단 안에서 밖으로 나간 사람은 없어. 들어간 사람들은 이시영이 말했던 그대로야. 쌍둥이가 제일 먼저 들어갔고, 그 후로 공략 4팀과 6팀, 마지막으로 5팀과 7팀, 윤혜아가 들어갔네. 그리고 그 뒤로…. 아, 이거구나.’
아주 희미하지만, 처음 느끼는 이질적인 기운이 잠깐 스친 게 확인됐다.
결계는 이 기운을 외부의 것으로 판단해서 들여보내지 않은 것 같은데, 너무 작고 여린 기운이라 나로서는 제대로 잡아내기도 버거웠다.
간신히 특징을 읽어서 그 끝을 따라가자 근처에 숨어 있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잡으면 좋지. 티를 내면 도망갈 것 같아서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옆으로 다가온 이시영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의아해하는 그에게 손가락으로 속박이라는 단어를 그의 팔뚝에 쓰고는 위치를 알렸다.
‘북, 7m’
이제야 확인이 끝난 것처럼 눈을 뜨자 눈치 빠른 이시영은 바로 알아듣고는 중지에 끼워진 반지를 반 바퀴 돌렸다.
하늘을 향하고 있던 푸른 사파이어가 바닥으로 향하는 것과 동시에 사슬이 좌르륵 내려오면서 펜듈럼으로 변했다.
순식간에 내가 말한 위치로 날아간 펜듈럼이 이시영의 고유 주문인 ‘운명의 실타래’가 발동되면서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앗. 잡혔네.”
듣는 사람도 무기력해질 정도로 나른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렸다.
허공을 묶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푸른 사슬 안쪽으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인기척을 없애주고, 몸을 투명하게 해주는 외투를 입고 있었나 보다.
“치사해라…. 결계 주인이 잡는 건 반칙이잖아.”
낯선 사람은 얼굴 전체를 가리는 하얀 가면과 푹 눌러쓴 야구 모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공중에 떠 있어서 신발 바닥까지 아주 잘 보였는데, 밑창이 하나도 닳지 않은 새하얀 캔버스화가 특징적이었다.
거기에 소년인지 소녀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고 마른 아이는 목소리도 대단히 어렸다.
아니, 아이가 맞나? 묘하게 너무 정적인 느낌이 드는데.
“그래도 난 원래 주인을 만나러 온 거니까 그쪽이 이긴 거라고 해줄게.”
그러니까 우리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 속박을 푸는 건 어떻겠느냐며 아이가 공중에서 묶인 몸을 느리게 뒤집었다.
이시영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민하다가 신여월에게 고개를 돌렸고, 우리의 협회장께서는 큐브를 아이 쪽으로 휙 던지며 말했다.
“이건 그대의 것이겠지? 우선 받게나. 가지고 있으려니 영 찜찜한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어라, 돌려줘서 고마워. 이건 내가 맡아둔 거라서. 평범한 인간이 가지고 있기엔 조금 재미없는 물건이기는 하지.”
“그러는 그대는 인간이 아니라는 뜻인가?”
“으응, 글쎄. 겉은 인간인걸. 난 인간이 좋고.”
묶인 채로도 태평하게 대화를 나누는 아이와 시종일관 차분한 신여월을 번갈아 보다가 문득 아까부터 내가 무엇에 위화감을 느꼈는지 깨달았다.
저 아이는 소리가 없다. 스스로 내는 목소리를 제외한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봄과 계약한 이후로 나는 원하기만 하면 인간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는데도.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당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숨소리도, 심장 소리도.”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속에서 아무런 무늬도 없이 그저 하얀 원형이던 아이의 가면이 휙휙 돌아가더니 웃는 얼굴의 가면으로 변했다.
“아하하, 눈치가 빠르네.”
아이는 공중에 마치 평평한 판이라도 있는 것처럼 배를 깔고 누워서 꽃받침을 했다.
그 모든 행동이 연극을, 무성영화를 보는 것처럼 전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악몽은 원래 소리 없이 찾아드는 거니까.”
그러니 제멋대로 굴어도 조금은 이해해 달라며 아이가 가면을 다시 한 바퀴 돌렸다. 곤히 잠든 얼굴의 가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