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1)
붉은 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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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보라가 솟구쳤다.
-키이에에에!
고블린이 길게 비명을 질렀다.
나의 시간 속에서, 비명은 끊기지 않았다.
-이제 한 마리째다.
공중에 피가 튀었다. 붉은색. 핏물은 빗물과 색이 같았다. 핏방울이 아직 허공을 유영하고, 빗방울이 미처 떨어지지 못할 적에, 핏물과 빗물 사이에서 세상은 붉은색이었다.
나는 검을 고쳐잡았다.
-다음엔 왼쪽 놈부터 처리해.
그리고 휘둘렀다.
-크에에에에!
두 마리째.
첫 번째 고블린이 다 죽기도 전에, 두 번째 고블린이 베였다. 한 순간이었다. 오른편과 왼편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괴물들은 내 검을 보지도 못하고 양쪽에서 나란히 비명을 질렀다.
한 마리가 죽을 즈음하여 또 한 마리.
다시 한 마리가 죽을 즈음해서 또 다시 한 마리.
-에에에에!
-에, 에에에에!
-키이이이이!
괴물의 비명이 끊어지기 직전, 다른 괴물이 새로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므로 내 주변에서 비명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검의 연주.
내 검은 비명의 합창을 연주하는 지휘봉인 양했다.
-1초 지났다.
배후령이 말했다.
-검을 휘두를 때 끊어서 휘두르지 마라. 공자야. 일격과 일격을 따로 분리하지 말고, 이어라. 이어서 베라.
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베어라. 위에 있던 검이 아래로 갔다고 해서, 네 검격이 끝난 게 아니야. 음악과 다를 바가 없어. 그렇게 생각해봐라. 하나의 음(音)이 낮게 내려앉았다면 다만 다시 올라오기 위함이다.
비명이 울렸다.
-이어라! 검이 아래로 내려갔다면 다시 동작을 이어서 위로 베어라. 그러면 네 검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다.
다시 1초가 지났다.
-검이란 시간의 싸움이다! 미숙한 자는 기껏해야 1초밖에 지배하지 못해. 한 번 휘두르면, 그걸로 끝이지. 눈이 멀었어. 다음에 어떻게 검격을 이어야 하는지 몰라. 반면에 조금 더 숙련된 자는 5초를 지배할 수 있다.
적은 피를 흘렸고.
내 몸은 숨을 흘렸다.
-시간을 놓치지 마라!
핏물이 다 흐르기 전에.
숨결이 다 흐르기 전에.
-낭비하지 마라! 한 명의 적을 베었다고 끝난 게 아니야. 아무것도 안 끝났어. 다음에 네가 어디로 검을 휘둘러야 할지 미리 알아두란 말이다! 평소에 사람은 시간을 그냥 흘려보낸다. 하지만 검사는 그러면 안 돼! 1초를 버리지 마라. 온전히 1초를 살아라.
적의 핏물과 나의 숨결 사이로, 칼날이 흘렀다.
-검사란 검으로 사는 자를 말한다.
검을 휘둘렀다.
-어디 1초를 사는 것이 쉬운 줄 알았냐. 네가 정말로 살고 있느냐.
검을 휘둘렀다.
-사람은 시간을 흘려보낼 때 살아 있는 게 아니야. 무언가에 시간을 바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거다. 공자야. 너는 검사다. 그러니 너는 검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다시 검을 휘둘렀다.
-더 불태워라!
고블린이 할퀴어서 내 팔뚝에 피가 터졌다. 아. 정신이 아찔해졌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나는 검을 휘둘렀고, 정면을 노려보았다.
-키에에에!
-그르르, 그르···.
-크오오오오!
무수한 괴물들.
붉은 먼지구름 너머에서 괴물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무수한 적의. 무수한 악의. 나의 몸을 씹어먹고 나의 피를 마시려는 괴물들. 그것들은 붉은 비를 뒤집어쓴 채 내게로 달려들었다.
-이제 10초다.
이것이 10초.
여기까지가 겨우 10초.
-더 불태워라. 공자야. 삶을 흘리지 말고 불태워라.
나는 칼자루를 있는 힘껏 잡았다.
-네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거다.
그리고 포효했다.
우오오오오오!
성문이 무너져서 단지 빈틈이 되어버린 그곳에, 전장의 한복판에, 이 전쟁의 최전선에, 나의 포효가 울렸다. 성벽 위에서 화살을 쏘던 병사들이 움찔거렸다. 먼지구름에서 달려오던 괴물들이 멈칫했다.
-그래. 씨발, 그거지.
배후령이 낄낄 웃었다.
-이제 쫌 좀비 면상에서 벗어나네. 새끼!
나는 정면을 향해 뛰었다.
-그오···?
잠깐 발이 멈춰버린 고블린부터 노렸다. 촤아악! 그놈이 반응하기도 전에 모가지를 날려버렸다. 고블린은 아가리를 벌린 채 머리가 공중에 치솟았다.
나는 검을 휘둘렀다.
-크르, 르.
다음엔 옆에서 멀뚱거리는 오크를 노렸다. 서걱! 그놈이 미처 몽둥이를 들어 올리기도 전에 오크의 머리를 칼날로 찍었다.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검을 휘둘렀다.
‘조금 더.’
스켈레톤을.
‘조금 더.’
또 다른 고블린을.
‘조금만 더.’
수많은 오크를.
‘더! 조금만 더!’
무수한 괴물을 향해서.
‘보아라!’
검을 휘둘렀다.
‘나를 보아라!’
살아 있다.
검을 휘두를 때 나는 살아 있다.
-크오오오오오!
오우거.
붉은 먼지구름에서, 거대한 몽둥이를 휘저으며 오우거가 나타났다.
한 번. 두 번. 괴물이 몽둥이를 움직일 때마다 돌풍이 불었다. 무너진 성문에 자욱하게 가라앉았던 먼지구름이 바람에 날려 흩어졌다.
오우거의 몽둥이질에 자잘한 고블린 따위가 휘말렸다. 퍼억! 어느 고블린은 그대로 날아가서 성벽에 부딪혔다.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고블린은 곤죽이 되었다.
그렇다. 저놈에게 동료애 따위는 없었다. 동족애조차 없으리라. 누군가에 대한 동정도, 연민도, 자비도 없었다.
그러므로 놈은 짐승이었다.
추악한 짐승.
-우오오오오!
짐승이 사납게 울부짖었다.
오직 나만을 향하여 이빨을 드러냈다.
‘와라.’
그리고 이곳에는 일인의 헌터.
짐승을 노리는 사냥꾼이 있었다.
‘보여주마.’
쿠웅!
오우거가 발을 내디뎠다.
아슬아슬하게 무너지지 않고 버틴, 성벽의 귀퉁이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쿠웅!
추악한 짐승은 거대한 발을 가졌다. 그것이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땅이 흔들렸다. 제국을 지키던 성벽이 무너졌다. 지축을 흔들고 장벽을 무너트리면서, 오우거는 이곳을 향해 돌진해왔다.
-발로 땅을 디뎌라.
그러나.
-눈으로 앞을 보고.
해야 할 일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검으로 적을 베어라.
나는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쿠웅!
거대한 짐승이 발을 디뎠다. 그때를 노렸다. 내 몸뚱어리를 날려버리고자 오우거가 몽둥이를 치켜든 순간, 나는 녀석의 정면에서 칼날을 비틀었다.
하얀빛.
성검의 빛이 오우거의 눈가에 파고들었다.
-그오오오!
이미 오우거는 몽둥이를 휘둘러버리고 난 뒤.
녀석이 공격의 경로를 바꾸기란 어려웠다.
‘왜.’
시간이 한없이 길어져서 순간이 된 지금.
나는 몽둥이를 피해 오크한테 쇄도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그딴 새끼한테 EX급 스킬을 주었던 거냐.’
염제 유수하에 대한 생각을.
그에게 회귀 스킬을 내려준··· 이 탑에 대한 생각을.
‘뭐 대단한 성인(聖人)일 필요도 없었다. 조금만 더 상식적인 놈. 조금만 더 멀쩡한 사람한테 스킬을 주기만 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그런데 왜. 왜 하필이면 그딴 싸이코패스한테.’
부우우웅!
오우거의 몽둥이가 내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주 잠깐 성검의 빛에 눈이 멀어버린 나머지, 공격이 빗나간 것이다.
덕분에 찰나의 빈틈이 생겼다.
‘설마··· 그런 거냐?’
나는 뛰었다.
‘유수하가 아니면 탑을 정복할 수 없다는 거냐? 정상에 군림하려면, 무조건 그놈 같아야 한다는 얘기냐.’
허공으로 날아든 나를 보고 오우거가 눈을 크게 떴다.
괴물은 다시 몽둥이를 쓰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웃기지 마라!’
보여주겠다.
‘내가 염제를 대신해서 20층을 깨주마.’
스무 번째 스테이지만이 아니었다.
‘30층도.’
마흔 번째 스테이지도.
‘50층도.’
예순 번째. 일흔 번째. 여든 번째. 아흔 번째.
바야흐로 아흔의 아홉 번째 스테이지라도.
‘일백의 층까지!’
마침내 정상에 발을 디딜 때까지.
‘보여주마!’
그러므로.
[당신의 존재가 한층 더 뚜렷해집니다.]나는 검을 휘둘렀다.
[헌터 김공자의 레벨이 성장합니다.]칼날은 정확히 오우거의 목을 갈랐다.
피보라가 치솟았다.
괴물의 가죽은 단단했으나 내 검보다 날카롭진 않았다. 괴물의 명줄은 질겼으나 내 오러보다 무뎠다.
오우거는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어떻게근 팔을 휘둘렀다. 곱게 죽지 못하겠다는 것일까. 새삼 당황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저 다시 한 번, 일격을 가했다.
오우거의 목이 떨어졌다.
쿠웅!
그것보다 조금 늦게, 괴물의 몸이 쓰러졌다.
[당신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시나브로 붉은 먼지가 가라앉았다.
-키르르으···.
-키이, 기! 기이이.
괴물들이 보였다. 무너진 성문으로 쏟아지던 몬스터들. 영원히 무수할 것만 같았던 괴물들은, 언제부터인가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짐승이 무너진 모습을 보고 겁을 먹은 것이다.
정적.
빗물이 내리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제국의 병사들은 성벽 위에서 나를 바라보았으며, 마왕의 괴물들은 자꾸 발을 헛디뎠다. 사위가 조용했다. 눈길이 다가오고 발길이 물러서는 그곳에 나는 홀로 서 있었다.
-축하한다.
배후령이 씩 웃었다.
-30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옆을 지나쳤다.
뒷모습만 보고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검은색 정장. 하얀 머리. 검성이 물웅덩이를 밟으며 질주했다. 이 탑에서 가장 강한 사냥꾼은, 검을 뽑아 넓게 횡으로 휘둘렀다.
촤아아악!
단칼에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목을 잃었고, 수십 마리의 오크가 허리를 잃었다. 그리하여 수십 줄기의 피분수가 일제히 치솟았다.
1초. 2초. 3초.
잠깐에 불과했지만, 그 잠깐에 나는 보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줄기보다 하늘로 치솟는 핏줄기가 더 진했음을.
“······.”
검성이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자아낸 피보라를 뒤로 한 채.
노인이 입술을 열었다.
“——.”
잘 알아듣지 못했다.
아직 나의 시간은 느렸다.
“음.”
내 상태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눈치챈 걸까.
검성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러를 실어서 말했다.
“—훌륭했다.”
노인이 칼자루를 들었다.
비가 내렸다.
빗물이 붉었으므로, 물이 흐르고 난 다음에도 검은 붉었다.
“내 이름은 마르쿠스 칼렌베리일세. 젊은이여.”
그것이 노인 나름의 예(禮)임을 나는 깨달았다.
“······.”
내가 입을 다물었다.
두 번째.
랭킹 1위의 헌터한테 직접 이름을 듣는 것은 이걸로 두 번째였다.
첫 번째 경험은 아직 내가 1층에서 방황하고 있었을 때.
어느 구석진 골목에서 염제가 나의 머리를 쥐어잡고 속삭였다.
-내 이름은 유수하다.
-잘 가라.
그날 나는 죽임을 당했다.
오늘 나는 두 번째로 이름을 들었다. 서로 다른 이름이었고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
문득, 나 자신 또한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리고 첫 번째 경험에서 내가 결코 하지 못했던 일. 절대로 하지 않았던 일을, 지금의 나는 할 수 있음을 알았다.
“제 이름은 김공자입니다. 어르신.”
오늘.
나는 이름을 말하였다.
3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