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64)
1.
후일담이 있다.
“모르는 천장이군…….”
하얀 빛에 휘감긴 뒤 내가 입에 담은 것은, 아마 인류 역사상 소설에서 가장 많이 써먹혔을 인용문 top 100 안에 들 대사였다.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내 시야에 들어온 풍경은 모르긴커녕 굉장히 익숙했으니까.
-오? ……오오? 왜 갑자기 여기 있는 거냐?
여긴 카페 플라네타리움.
한때 대도서관의 로비였으나 이젠 카페로 개장된 스테이지.
도서관의 드높은 천장 아래서 배후령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아, 보아하니 좀비 너 또 회의인지 뭔지에 불려나갔냐? 난 권한이 없어서 참관하지 못한 거고?
‘네. 그렇습니…….’
다, 라고 대답하려다가 문득 나는 장난기가 돌았다. 그리고 세상에서 장난을 치면 안 될 사람들을 꼽으라면 배후령은 꼴찌였다. 바로 시행으로 옮겼다.
[‘비명을 모으는 하늘’은 ‘검제’의 말을 긍정합니다.]그저 마음속으로 생각했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메세지가 흘렀다. 뭐, 이미 해본 일이었지만. 그래도 배후령 입장에선 처음으로 내 메세지를 받아본 것이다.
-……허.
배후령은 자기가 하려던 말도 잊고 나를 물끄러미 내려봤다. 시선에 담긴 감정은 다양했지만 또한 적나라했다. 흡족함. 그리고 일말의 회한.
-하긴. 그래. 이제는 너도 성좌로 완성될 때가 됐지. 짜식. 100살도 안 먹었으면서 벌써부터 별자리 행세라니, 많이 컸다.
‘에이. 아마 트라우마에서 보낸 시간까지 다 합치면 100년은 훌쩍 넘어버릴걸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댁이 생각한 대로입니다. 기둥들의 회의에 다녀왔어요. 이겼고요. 그 대가로 스킬들을 한차례 개정할 기회를 얻었네요.’
-뭐? 스킬 개정? 나 때는 그딴 거 없었어!
‘그야 댁은 기둥을 이긴 적도 없을뿐더러 기둥을 기억하지도 못하잖슈….’
-제기랄! 이건 헌터 차별이다! 왜 김좀비 새끼만 편애하는 거냐! 어-이! 기둥인가 탑주인가 아무튼 개자식들아! 김좀비한테 나눠주는 호의의 1/100이라도 나한테 줬으면 내가 지금 귀신 씨나락이나 까먹고 있겠냐아!
배후령은 정말로 자기 목소리가 탑에 닿는다고 믿는 건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런 우리를 향해 한 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어이. 빤질이.”
툭.
아르바이트복을 차려입은 남자였다. 업무 중인데도 질겅질겅 껌을 씹고 있었으며, 눈빛은 이게 정녕 사람 눈깔인가 싶을 정도로 시시껄렁했다. 존재만으로 인류의 평균 도덕률을 1% 하락시키는 남자. 누구겠는가?
유수하였다.
“왜. 말꼬리.”
“너 한창 탑 공략한다고 위에 가지 않았냐? 왜 갑자기 여기 있어. 아까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는데 눈 깜빡할 새에 엉덩이 깔고 있네.”
여긴 카페 플라네타리움에서도 꽤 구석진 자리였다. 손님들이 멀찍이 떨어져 있어,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다. 나도 얼굴이 많이 팔린 놈이니 아마 손님들이 눈치채면 난리가 날 거다.
“……기억하지 못하는 거냐?”
“엉? 뭘 기억해?”
유수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런가.’
당연했다. 기둥과 연관된 헌터들은 모두 기억을 잃는다. [태고의 지팡이]와 만났던 기억도, 내 심판 역할을 맡았던 기억도, 유수하는 기억하지 못한다.
당연하기 그지없는 사실이었지만— 어째서일까. 나는 조금 입맛이 씁쓸했다.
“야.”
그 씁쓸함을 삼켜서 목구멍 아래로 밀어넣었다.
“너 내가 춤추는 거 보고 싶냐?”
“…….”
유수하의 표정은 뭐랄까, ‘이놈이 돌은 거야 진즉에 알았지만 드디어 쳐돌음의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고 있군’이라 얘기하고 있었다.
“설마 짝도 있는 놈이 나한테 지금 클럽 가자고 꼬시는 거냐? 일 없어, 새끼야. 괜히 니네 공작이랑 엮였다가 피보는 건 나야.”
“미쳤어? 또라이냐? 클럽이 아니라 그냥 나 쪽팔리게 코사크 댄스 추는 모습 보고 싶냐고 물은 거다.”
“아니, 네 말이 더 또라이 같은데……. 흐음.”
그제야 유수하는 팔짱을 꼈다. 구미가 당긴 거겠지. 하지만 여전히 내가 장난을 치는 거 아닌가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공연한 의심은 아닌 게, 사실 장난쳐도 될 인류 목록에서 유수하는 배후령 다음 2위였거든.
“오냐. 어르신 앞에서 재롱을 떨어보겠다는데 지켜봐 주는 것도 인지상정이지. 어디 한번 여기 카페에서 해—– 지금 뭐 하는 거야,
미친놈아!?”
“코사크, 댄스를, 추고, 있다만!”
“그만해! 씨발, 아. 여기 쳐다보지 마라! 나랑 눈마주치는 새끼는 앞으로 커피 시킬 때마다 거기에 뭐 들어가는지 불안하게 만들어주마! 어! 1초 이상 바라보면 가래침이고 3초 이상은 씨발 나도 몰라! 야! 야! 거긴 왜 또 계속 쳐다봐?!”
유수하가 소리를 꽥 질렀다. 무슨 난리인가 쳐다본 손님들도 유수하의 살벌한 시선과 마주치자 지레 겁을 먹고 고개를 돌렸다. 카페 플라네타리움의 명물이 된 미남 알바생은, 지금 시점에선 미모보다 성깔로 유명해져 있었다.
“후우……. 와, 씨. 또라이 새끼. 추란다고 해서 진짜로 춤을 춰?”
“어. 코사크 댄스를 추는 정도라면 네가 언제든 원할 때마다 춰주지.”
“너 왜 이래? 뭐 잘못 먹었냐…?”
“아니. 그냥 내가 춤 춰주는 걸로 네가 이 세상을 조금 더 살아볼 만하다고 느낀다면 까짓거 춤 정도는 춰주자 싶어서.”
“…….”
마침내 유수하의 표정이 정점에 이르렀다. 못 들을 걸 들어버렸다는 얼굴이었다.
“맙소사. 정말로 미쳤군. 아니, 미친 거야 이미 미친놈이었고. 미친놈이 또 미치면 뭐라고 불러야지?”
“유수하. 난…… 너에게 춤을 춰줄 수 있는 신이란다.”
“평범한 헌터가 미쳤으면 자경단에 신고라도 하지, 명색이 서열 1위라는 새끼가 미쳤으면 이건 어디다 신고를 하면 되는 거야? 진짜 이반시아 공작가에 연통을 넣어야 되나…?”
유수하는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중얼거린 말에선 정작 진지하게 받아들일 구석이라곤 없었지만, 딱 한 군데, 내가 처음 들어보는 내용이 있었다.
“서열 1위? 무슨 소리야. 나 아직 2위인데.”
“어? ……아아. 그렇군.”
유수하는 눈썹을 찡그리면서 ‘그러고보면 이 놈은 아직 몰랐던가’ 하고 생각에 잠겼다. 왠지 모르게 귀찮음이 그득그득 담긴 한숨을 쉬면서 말이다.
“가 봐.”
“어디를?”
“바빌론 광장. 스마트폰으로 보면 간단하겠지만 넌 폰도 안 들고 다니잖냐. 어차피 너 여기 계속 있으면 손님들이 난리칠 일밖에 없다. 괜히 귀찮아지기 전에 꺼져.”
유수하는 휘이휘이 손을 내저었다. 그가 말한 대로 나는 스마트폰을 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유수하의 등을 한번 두들겨주고(덕분에 명치를 후드려맞았지만 까짓 거 뭐 맞아줬다. 겁나 아프네), 1층으로 전송해 갔다.
그리고 광장에 도착한 나는, 허공에 거대하게 떠 있는 홀로그램을 목격하게 되었다.
+
1위. 사왕
2위. 검성
3위. 흑룡주
4위. 독사
5위. 백작
6위. 이단심문관
7위. 성기사
+
“…….”
나는 우두커니, 광장 한가운데에 서서 서열표를 올려보았다.
“어, 저기 저 사람 혹시…….”
“사왕 아니야?”
“에이. 돌아왔다는 얘기도 없는데 설마.”
“잠깐 공략을 멈추고 쉬러 왔을 수도 있지! 봐! 진짜로 얼굴이 똑같아. 여기 사진이랑 비교…….”
웅성웅성.
광장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을 오가고 있었다. 막 10층에 도전하던 시절에 비하면, 아니, 자신이 4000일의 회귀를 결심했던 미래에 비해서도, 바빌론 광장은 훨씬 활기가 넘쳤다.
거대길드들은 침탈 대신 협력을 선택했다. 10층, 20층, 30층, 40층, 끝없이 펼쳐진 농토와 새로운 시장들은 탑에 영원한 신대륙을 약속했다. 라비엘은 나의 연인이었고, 우부르카는 나의 아들이었다. 절차는 엄격했고 정책은 정밀했다. 거대길드들과 현지 세력들의 협력 아래, 탑은 번영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광장에 오가는 것은 바깥세상에서 건너온 인류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이반시아 공작가에서 선출한 제국 유학생, 독사를 따라 천무문에 들어온 귀인족 길드원, 혈화극의 유행을 선도하는 지정족 전사 등, 다양한 종족들이 길을 걸었다.
차별도 있겠지. 경멸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외정(外政)을 맡아 끝없이, 끝없이 탑을 오르는 동안, 동료들은 내정에 모든 땀과 피를 쏟아주고 있었다.
적어도 수많은 테러가 벌어져 폐허로 변해버린 바빌론 광장 따윈, 우리의 세계에선 없다. 나는, 우리는, 단 한뼘의 폐허라도 이곳을 잠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어어? 저거 봐!”
누군가 한 사람이 손을 들어 홀로그램을 가리켰다. 반응은 미미했다. 대부분의 행인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손끝으로 가리킨 서열표에선, 명백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돌릴 만한 변화가.
치지지직-
홀로그램에 노이즈가 끼더니 돌연 글자가 바뀌었다.
+
1위. 비명을 모으는 하늘
2위. 검성
3위. 흑룡주
4위. 독사
5위. 백작
6위. 이단심문관
7위. 성기사
+
마치 내가 이곳에 와서 자기를 봐주길 기다렸다는 듯, 서열표에 올라간 내 호칭이 변하였다.
두세 사람이 그 변화를 목격했다. “어어?” 사람들의 관심을 본능적으로 이끄는 마력이 “어?”라는 발음엔 있었다. 수십 명의 행인들이 시선을 돌렸고, 순식간에 “어어?”는 광장 전체로 전염됐다.
“뭐야? 비명을 모으는 하늘?”
“저긴 사왕이 있던 자리인데.”
“사, 사왕이 죽은 거 아냐? 그래서 서열표에서 삭제된 거면….”
“세상에. 사왕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사왕이 죽었다고?”
“사왕이 뒈짓했다고?”
“사왕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아아아아!!”
친애하는 탑의 시민 여러분, 참으로 모범적인 정보의 왜곡 과정을 보여주고 계시군요….
“그럼 비명을 모으는 하늘은 뭔데?”라거나 “설마 사왕이 죽었어도 갑자기 새로운 헌터가 1위를 차지할 리는 없잖아”라든지 “저기 서 있는 사람이 사왕 본인 같은데…” 같은 목소리도 있었으나, 내가 죽었다는 루머에 모든 소수의견이 파묻혔다.
그렇게 4분 정도 광장이 들끓었다.
“정말!”
소란을 뚫고 제일 먼저 내게 달려든 사람은, 흑룡주였다.
정확히 말하면 달려든 건 아니었다. 흑룡주의 특기인 [순간전이] 스킬을 써서 바로 내 옆에 나타난 것이었다.
“오자마자, 사고를 치지 않으면, 넌 성이 안 차니!?”
“하이루. 방가방가.”
“……그건 또 무슨 개밥그릇 긁어먹는 소리야?”
“모르셨어요? 요즘 이게 최신식 인사래요.”
“뭔 헛소리……. 아니. 됐어. 너를 상식적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느니 차라리 마지노선에 보병을 들이박지. 오랜만에 돌아와서 한다는 짓이, 서열 1위 헌터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퍼트리는 거라니!”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
좀 억울했다.
난 그저 새로운 이명을 얻었을 뿐이고 루머는 여기 행인들이 퍼트렸다. 아마 행인들 중에 흑룡 길드원이 있었겠지. 소란을 듣자마자 곧바로 흑룡주한테 달려가서 보고를 올렸을 테고. 덕분에 흑룡주는 5분이 되기도 전에 순간전이를 해온 거다.
‘그나저나 오랜만이라.’
역시 다른 동료들도 천국층의 일을 기억하진 못한다. 만약 기억했다면 흑룡주와도 이야기를 공유했을 테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게요. 오랜만이에요. 다른 동료들은 그동안 잘 있었어요?”
“……응? 무슨 얘기야.”
그렇게 생각했으므로, 흑룡주의 반응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꼭 몇 달은 얼굴을 못 본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백작이랑은 바로 며칠 전에 만났잖아?”
나는 순간적으로 얼이 빠졌다.
“……네?”
“네? 는 무슨. 얘기 들었어. 천국층이라고 했지? 그렇게 무서운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턱턱 올라가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거야. 심판역이 널 배신했으면 어쩔 뻔했어?”
눈썹이 떨렸다.
우리를 둘러싼 행인들 사이에선 소란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흑룡주가 직접 나타나서 나와 툭탁거리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만약 내가 진짜 사왕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고, 따라서 ‘사왕이 죽었다’라는 소란은 금세 잦아들었다.
행인들과 정반대로, 내 마음은 거세게 흔들리기만 했다.
“자, 잠깐만요. 어떻게 기억을…….”
“그건 본인이 설명하도록 하겠네.”
뚜벅.
발소리가 다가왔다.
“어려운 방법은 아니었다네.”
나는 멍하게 고개를 돌렸다. 고양이귀를 쓴 상련 길드원들이 양옆으로 누군가를 호위하며, 구경꾼들 사이로 길을 만들었다.
그곳에선 백작이 부채를 쥔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36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