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S-Class Suicide Hunter RAW - Chapter (397)
2.
꽃밭이 크게 갈라졌다.
[100층에 입장합니다.]갈라진 꽃밭 깊숙한 곳으로부터 무언가가 솟구쳐올랐다.
그것은 거대한 거울이었다.
사람을 비추기에는 너무 컸다. 사열한 일개 군단을 통째로 비추어 낼 수 있을 만한 신화적인 크기였다. 테두리는 수정이 돋아나 울퉁불퉁했으며, 면은 앞뒤가 똑같이 섬뜩할 정도로 침침한 보랏빛이었다.
지옥의 장벽처럼 나와 검제 사이를 가로막은 그 거울에는 아홉 개의 열쇠 구멍이 나있었다.
[열쇠를 꽂아주십시오.]나는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걸어가서 열쇠 구멍들 앞에 섰다.
거울은 유리와 달라 그 너머를 비출 수 없는 법이라지만, 검제가 건너편에서 나와 똑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어쩐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당신이 드리운 그늘과 그 안에서 숨을 쉬는 이들에 의한 첫번째 열쇠]나는 첫번째 열쇠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강한 사람이었습니까?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습니까?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까? 안타까운 사람이었습니까?
+
나는 열쇠를 꺼내어 그 첫번째 구멍에 꽂았다.
“나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건너편에서는 검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기다리고 싶은 사람이었다.”
철커덕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거울의 명도와 채도가 한 층 올라갔다.
선명해진 보랏빛 거울은 다음 질문을 떠올리고 있었다.
+
[당신의 뒤를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에 의한 두번째 열쇠]당신에게 사도들이란 어떤 존재였습니까?
도구였습니까? 연인이었습니까? 가족이었습니까?
+
나는 두 번째 열쇠를 꽂았다.
“나의 사도들은 저와 동등한 벗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건너편에서는 검제의 대답이 들려왔다.
“내 사도들은 내 동생 같은 놈들이었다.”
거울의 명도가 한 차례 더 요동쳤다.
+
당신에게 신이란 어떤 존재였습니까?
+
“방심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러니까 당연히 발전할 수도 있는 사람들.”
“스승님을 만나지 못한 채 살았더라면 나도 그렇게 되었을 것 같은 놈들.”
네 번째 열쇠, 다섯 번째 열쇠를 차례대로 꽂아 나갔다.
“솔직히 조금은 후회했습니다. 안타까웠어요.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탑을 오르지 않고 적어도 잿빛 거미에게 어떤 결말이 주어질 때까지 남아 있었더라면. 조금 더 제가 무언가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글쎄다. 나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언젠가 네가 첫번째 파도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처럼, 회색이도 자신이 살고 싶은 데로 산 거야. 내 94층 열쇠였던 녀석도 그런 의미에서는 마찬가지였지. 남을 원망하지 않는 자는 온전히 자기 발로 걷는 자들이고, 자연히 남의 어깨를 빌리지도 않는 자들이니까.”
“저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는 것은 기뻤습니다. 그리고 무서웠어요. 제 삶의 단면 하나하나에 대해 저 자신조차 몰랐던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악의적인 왜곡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오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완전히 컨트롤 할 수 있다고, 통제 하에 있다고 여겼던 저 자신이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신화가 된다는 건 단순한 이야기꺼리가 된다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가는 일이지. 사람들은 아무래도 좋은 옆집 아저씨가 치질에 걸렸는지 무좀에 걸렸는지 같은 걸로 싸우지 않아. 하지만 그 아저씨가 대머리라면, 그리고 이야기하던 녀석들이 대머리를 좋아한다면 이때부터는 좀 이야기가 복잡해지지. 사람들은 싫어하고 경멸하는 자들을 배제하기 위해서만큼이나 좋아하고 존경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싸운다. 그리고 전쟁의 원인이 된다는 건 참 거지같은 거야.”
철커덕, 철커덕.
떠오르는 문구들과 그에 맞는 열쇠를 꽂아 넣는 작업들은 어느덧 그렇게 거울을 사이에 둔 채 벌어지는 나와 검제의 문답이 되어갔다.
“저는 혼자가 아니었구나 느꼈습니다. 아마 탑주가 저랑 내내 함께하고 있었겠지요. 탑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때에 이르기까지 쭉이요.”
“앙. 그리고 아마 지금도 보고 있겠지. 어이~ 아지매~ 보고 있수~? 우리 곧 그리로 갑니다~”
“……아 좀. 음. 좌우간, 그렇게 보고 있을 거면 좀 진작에 구해주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때, 탑주와 처음 만나 그 사상에 대해 들었을 때처럼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러니까 무티아가 보여주었던 다른 세계선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요. 누군가가 어떤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곧 다른 이가 얻을 수도 있었던 그 기회의 가능성을 박탈하는 일이지요.”
“흐음.”
“설령 그 누군가가 그게 자신이 가질 수 있었던 가능성이라는 사실조차 모른다고 해도, 시간을 되돌린 사람만은 그걸 어렴풋이 느낄 겁니다.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요. 과연 이것이 최선인가. 정말로 모두에게, 정말로 영원한 견지에서 이것만 이 최선의 길이었는가.”
“좀비야, 들리니? 네가 시간을 되돌릴 때마다 만들어진 무수한 피해자들의 비명소리가. 네가 그 날 그렇게 행동한 바람에 나비효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복수자가 뚜벅뚜벅 너를 향해 걸어오는 파멸의 발자국 소리가.”
“모든 것을 한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과 똑같아요. 탑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거꾸로 모든 것을 감당하기로 했지요. 반면에 저는, 무언가를 함으로써 제가 한 것으로 인해 개변된 인과들을 전부 감당하기로 했습니다. 그걸 두고 저를 탓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제가 짊어져야 할 짐이겠지요.”
“그건 너무 오만한 소리다. 뭔 생각으로 하는 말인진 알겠는데….”
“그러고 보면 검제 당신은 어쩔 겁니까? 회귀할 수 있다면 회귀할 거예요?”
“회귀하면 뭐 후회할 일이 안 생기더냐?”
철커덕.
“아뇨. 보통 더 크게 생기더라고요. 그 후회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지만, 금세 또 더 큰 후회가 앞을 가로막고. 계속 그 반복이예요.”
“거꾸로, 그냥 살면 그런 일이 안 생기더냐?”
철커덕.
“과연. 확실히.”
“그래. 회귀하든 안 하든, 결국은 똑같은 거야.”
철커덕.
“아무리 그래도 똑같다는 건 조금.”
“달릴 수 없는 사람한테 달리기 선수는 특별한 능력자처럼 보이겠지. 시간을 달릴 수 없는 녀석들한테 회귀자는 괴물처럼 보일 거다. 하지만 그래봤자 결국 다 똑같은 사람이야.”
“약제사가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하지만 그거야말로 너무 오만한 말 아닙니까? 약제사도 오만함으로는 어디 가서 안 꿀리는 사람이기도 했고요.”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그 무언가로 인해 죽을 수도 있게 된다는 거다. 다른 녀석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은 겪을 일 없는 방식으로 고통받지. 그 점에서 세상이란 공평한 것이다.”
철커덕.
“검제 양반.”
“가령 너는 아직 네 스승을 살릴 수 있었다면 하고 생각하겠지?”
…….
“아무리, [첫번째 파도는 가고 싶은 곳으로 갔어요]하고 말을 해도. 심지어 거기에 완전히 납득을 해도,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설득해야 하지 않느냐? 아니라고는 하지 마라. 나는 네가 잠에 드는 모습과 깨어나는 모습을 계속 지켜봐왔으니까.”
“맞는 말씀이예요.”
나는 한숨을 지었다.
어느덧 거울은 거의 투명해져 있었다. 아무리 투명한 거울이라 해도 그 너머를 비추지는 못하는 법이어서, 나는 검제를 볼 수 없었다. 다만 거울에 비치는 나를 보았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저는 고민합니다.”
“음.”
“오늘 좀 바람이 차갑구나 하고 느낄 때마다. 밤볼리나랑 독사랑 셋이서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 사들고 먹으며 걷던 중에 꽃집에서 모란꽃을 볼 적마다. 스승님이 지금 살아계시면 얼마나 좋을지, 사실 당장이라도 스승님을 살릴 수 있는 게 아닐지를 생각합니다.”
“안다.”
“결국은 그러지 않기로 해요. 그것이 스승님을 진정코 위하는 길이라고도 생각하고요. 하지만 다시 자고 일어나보면 또 한 번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하지만 죽은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바라지 못하는걸. 그런데도 그냥 죽은 채로 놔둔다는 것이 정말 그 사람을 위한 길일까? 그거야말로 내 자기만족이 아닐까?]”
“안다.”
“[스승님을 되살리면, 그야 스승님께서는 나를 용서하시지 않겠지. 하지만 그거야말로 정말 내가 고통받고 끝나는 문제 아닌가. 나는 결국 그게 무서운 것 뿐인 게 아닌가.]”
살아있으면, 살아 계시면, 언젠가 스승님은 다시 행복해지실 수도 있으시지 않을까.
“스승님의 묘소 앞에서… 그 붉은 모란꽃 앞에 아홉 세계를 담아 절을 하는 동안에도 내내 떠올랐어요.”
“…….”
“이중적이죠. 모순적이고요. 참 꼴사납고 또 한심하지요. 아마 제가 살아가는 동안 그 고민이 사라질 날은 없겠죠.”
“오히려 날이 갈 수록 더해가겠지. 아까 너도 슬쩍 말했지만, 이제 넌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잿빛 거미에 대해서도 또 한 번 생각할 것 아니냐.”
“예에.”
“짜식.”
나는 거울에 난 열쇠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구멍은 이제 하나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열쇠 구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때였다.
쾅 소리와 함께, 그 열쇠 구멍으로부터 칼끝이 튀어나왔다.
“…….”
나는 그 칼을 알았다. 칼이라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그것은 검제가 사용하는 칼이었다.
개복치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칼날이 비스듬히 비틀렸다. 얇아진 거울은 마치 분위기를 읽은 것처럼 쩌억, 금이 가, 설탕처럼 파스스 무너져 내렸다.
보랏빛 유리 눈이 내리는 속에 검제가 있었다.
검제는 내게 검끝을 겨눈 채 말했다.
“누가 마인이 아니랄까봐 그런 심마를 품고 앉았느냐.”
“댁이 정파답게 무심한 겁니다.”
“이 몸이 원체 좀 쿨하기야 하지. 얼마나 쿨한지 찌질거리면서 궁상떠는 놈 보면 대가리를 깨고 싶어져요 이 형이.”
“가능하시겠어요?”
“이제 와서 비로소 가능해진 일이지.”
거울이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아홉 번째 열쇠 구멍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거기에 꽂힌 검제의 검도 그대로였다.
검제는, 펼쳐진 꽃밭만큼이나 찬란하게 웃고 있었다.
“한판 뜨자.”
“…….”
나는.
“그럴 필요가 있겠어요?”
“나는 별 필요 없다. 니가 필요한 거지.”
…….
“나는 말이다. 네게 제법 이른 단계부터 감명을 받았더란 말이다.”
“제가 워낙에 좀 쩔어주는 재능을 갖고 있긴 하죠.”
“그래. 너무 쩔어서 표백제 넣어 비벼 넣어도 주름이 안펴지더라. 그치만 그렇게 주름투성이여도 말이지. 진짜 너한테 감탄했던 게 있거든.”
검제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그 아이들을 위령해주었다.”
10층.
그가 했던 말, 내가 했던 행동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건 내가 떠올리지 못한 발상이었다. 그리고 네가 보여주지 않았다면 쭉 나는 떠올릴 수 없는 방법이었을 거야. 그걸 본 내가 뭘 느꼈는지 아냐?”
“뭘 느꼈는데요?”
“[아. 내 스승이 나를 볼 때 이랬나?]”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잠시 후에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검제의 얼굴에는 내게 익숙한 표정이, 하지만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표정이 떠있었다.
“분하더라고.”
나는 이 남자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지금 처음 알았다.
검제는 다시금 선이 굵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에는 아직 잔향처럼 분함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네놈이 할 수 있는 거면 나도 비슷한 것을 할 수 있겠지.”
“검제 양반.”
“나는 칼을 쓰는 걸 제일 잘 하니, 한다면 칼로 해야 하지 않겠냐.”
검제는 검끝을 까닥였다.
“와라. 위령해주마.”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나는 그냥 말했다.
“귀신은 댁이었으면서.”
“이젠 아니거든. 그리고 위로해준다고 말하면 닭살 돋잖아.”
“거 좀 돋으면 어떻다고….”
“공자야, 이제부터 내가 너를 위로해주마….”
“으아아아악!! 완전 개닭살!!”
“경고했다 내가.”
“젠장….”
바람이 불었다.
이름 모를 꽃잎들이 확, 흩날렸다.
그곳에서, 부서진 거울 너머에서, 아홉 번째의 열쇠 구멍 건너편에서 검제가 말하고 있었다.
“나의 별호는 검제(劍帝). 태음굴의 밑바닥에서 벼려진 칼로서, 태양진인의 제자로 정파의 정기를 이어받은 자. 그리하여 만검세계(萬劍世界)라 불리던 세계에서 천하제일인으로 공인 받은 자다.”
검제劍帝.
출신, 만검세계萬劍世界.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정파正派.
“한 수 청하마.”
나는.
나는 거울이 깨어지기 전에, 그 거울에 비치던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기억했다. 검제가 때려주고 싶을 만큼 한심한 얼굴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그럴 수도 있다.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웃으려고 했다.
잘 되지 않았다.
사람이란 슬플 때 뿐만 아니라 기쁠 때 역시 울고 싶어지는 것이다.
“저의 이명은 비명을 모으는 하늘. 장차 이 탑의 저승을 맡게 될 이로서 다른 별호는 명천. 이반시아의 달. 사자세계의 백사자이자, 아수라들의 수호신. 천마의 법통을 이어받은 적법한 마교의 소교주….”
아니지.
나는 고쳐서 말했다.
“마교의 교주입니다.”
명천마命天魔.
출신, 사자세계獨子世界.
지상제일인至上第一人.
마교魔敎.
“한 수 붙지요.
비무比武.
개시開始.
39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