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3
3. 퓨처 다이어리(1)
따르르르-
“이번 정차역은 서울대 입구, 서울대 입구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2호선 지하철 안내원 음성이 흘러나왔다.
여기저기 앉아있던 사람들이 바쁘게 일어나 내리는 문으로 다가갔다.
객차의 중간쯤에 앉아있던 유서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머리 위 짐칸에 올려둔 커다란 보따리가 눈에 띄었다.
그는 남들이 보기에 우스꽝스럽게 큰 보따리를 들고 어깨에 커다란 가방을 둘러멨다. 크고 무거워 보이는 짐이었지만 놀랍게도 그가 잡는 순간 평범한 짐처럼 보였다. 바로 그의 커다란 체구 때문이다.
유서준의 키는 190에 육박했다. 거기에 다소 뚱뚱한 외형이라 남들에게 다소 위압감을 주는 커다란 체구다. 얼굴 인상 역시 미남형이 아닌 우락부락한 산적형이었다.
만일 순박하게 보이는 그의 표정과 눈빛이 아니었다면 그는 영락없이 깡패처럼 보였을 것이다. 물론 눈빛만 순박하다는 거다. 실제는 아무도 모른다.
유서준의 나이는 19세.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는 신입생이었다.
“휴.”
하차하는 사람들 꽁무니를 따라 지하철에서 내린 그는 한차례 깊은숨을 내쉬었다. 갓 시골에서 올라온 그에게 지하철은 쉽게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낯선 길이라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 위로 나가는 곳이란 팻말이 보였다.
어차피 사람들이 몰려가는 곳으로 따라가면 밖으로 나가게 되기에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겉모습과 다르게 다소 꼼꼼한 성격의 그는 몇 차례 안내판을 확인한 다음 계단을 올랐다. 날카로운 눈으로 째려보는 검표원에게 승차표를 준 다음 그는 밖으로 빠져나왔다.
오늘 3월 1일은 삼일절이자 일요일이었다. 공휴일과 겹친 일요일인 덕분에 지하철역 구내는 다소 한산했다. 어디로 나가야 하나? 항상 고민되게 만드는 것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가는 통로다. 그의 눈에 서울대, 관악구청 방면이라 적힌 안내판이 들어왔다.
지상의 풍경은 평범한 거리였다. 대략 8차선가량으로 보이는 넓은 도로가 사방으로 나 있고 빌딩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어디에도 그의 목적지인 서울대처럼 생긴 학교는 보이지 않았다. 역을 잘못 내린 것일까.
이럴 때는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유서준은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었다.
“아주머니, 서울대가 어느 쪽입니까?”
“저쪽으로 쭉 올라가면 돼요.”
그의 큰 체구에 다소 놀란 아주머니가 움찔하더니 고개 너머로 이어진 도로를 가리켰다.
유서준은 인사를 꾸벅했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예절 하나는 제대로 배웠던 그다.
학교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역 이름으로 미루어 분명히 부근에 있을 것이다. 무거운 짐이 다소 걸렸지만, 그는 씩씩하게 걸어가기로 했다. 사실 버스비도 아까웠다.
대략 십 분가량 걸었을까. 드디어 고개 정상에 올랐다. 그의 눈에 고개 아래쪽 먼 곳이 보였다. 그곳에는 그가 찾던 서울대 정문이 간신히 보이고 있었다.
“젠장, 뭐가 이렇게 멀어? 서울대역이라더니 정작 서울대는 역에서 이십 분 거리나 떨어져 있네. 완전히 속았어.”
손에 든 커다란 보따리가 원망스러운 그였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은 없기에 그는 터벅터벅 고개를 내려갔다. 고개를 오를 때에 비해 한결 편했지만, 지하철역 이름에 속았다는 분통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드디어 그의 눈에 서울대 정문이 들어왔다. 시커먼 철제 구조물이 높다랗게 세워진 특이한 문이었다. 마치 ‘샤’자처럼 생긴 이 정문은 서울국립대학교의 ㅅ, ㄱ, ㄷ 글자를 조형물로 바꾼 것이라 했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멋있는 조형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예술과 담을 쌓은 그의 눈에는 커다란 고철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유서준은 서울대 정문 앞에 도착하여 상념에 잠겼다.
‘누가 조국의 가는 길을 묻거든 눈을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서울대 관악 캠퍼스를 상징하는 이 문구는 그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이곳에 입학하기 위해 고생했던 지난 삼 년이 스쳐 지나갔다.
유서준은 강원도 시골의 소규모 남자 고등학교를 나왔다. 시골에서 공부를 꽤 했다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그는 학교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전교 일등을 맡아서 했다. 그러나 전국의 고등학생이 모두 경쟁하는 학력고사는 다른 문제였다. 그와 비슷한, 아니 더 우수한 학생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특히 강남의 학생은 무시무시했다.
결국 그가 받은 학력고사 점수는 340점 만점에 282점. 다소 어려웠던 올해 학력고사에서 서울대 하위권 학과나 유명 사립대 상위권 학과를 갈 수준이었다.
그는 평소 경제에 관심이 많았다. 세상을 움직이는 동맥이라고 할 수 있는 금융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그는 유명 사립대의 경제학과나 경영학과를 지원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의 학교 담임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이 한사코 반대했다. 무조건 서울대로 진학하여 학교 이름을 빛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시골에서도 서울대 입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그를 설득했다.
결국 뜻을 굽히고 유서준은 서울대 철학과에 합격했다. 고등학교의 명예를 위해서는 최상의 선택이었지만 그의 적성이나 희망과는 동떨어진 선택이었다. 어쨌든 지금 새로운 출발을 맞이하게 되는 시점에서 그는 그런 아쉬움을 모두 떨치고 힘을 내야 했다.
정문을 통과한 그의 눈에 좌우로 뻗은 순환도로가 들어왔다. 여전히 건물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백만 평 부지의 서울대가 넓다는 말만 들었지 이렇게 많이 걸어야 할 줄은 몰랐다. 그는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온 자신을 탓했다. 역시 아는 것이 힘이란 말은 틀리지 않았다.
공휴일이라 오가는 차마저 없어 지나가는 학생에게 기숙사의 위치를 물었다.
학생이 왼쪽으로 나 있는 고갯길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길을 따라 30분가량 걸으세요.”
“으악!”
유서준은 좌절하고 말았다. 지하철역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많이 걸었는데 또 걸어야 한다니. 그것도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처음부터 택시를 타지 않은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그가 서울대에 온 것은 오늘이 두 번째였다. 입학지원서는 고등학교를 통해 내었기에 대학교를 방문할 일이 없었다. 서울대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면접 때였다. 하지만 그때는 학교 선생님의 승용차로 왔기 때문에 지금처럼 헤매고 다닐 일이 없었다. 승용차에서 내려 면접을 본 건물로 바로 들어간 것이 전부였다.
“헉헉. 이게 뭐야.”
서울대 교정을 크게 한 바퀴 돌고 있는 순환도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간 끝에 그는 기숙사에 도착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새롭게 입학한 신입생이 곳곳에 보였다.
그는 수속절차를 마치고 배정된 숙소에 짐을 풀었다.
곧바로 침대에 쓰러졌다. 너무 피곤했다. 그는 준비 없이 서울대로 온 첫날을 반성했다.
저녁 무렵 간신히 일어난 유서준은 기숙사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었다. 밥은 나름 괜찮았다. 집을 떠나 배고픈 상태라면 무엇이든 맛있지 않을까.
식당 옆에 매점이 눈에 띄었다.
매점에는 먹을 것부터 문구류까지 간단한 생필품을 팔고 있었다.
문득 그의 눈을 끄는 다이어리 하나가 보였다. 고동색의 가죽 표지가 덮인 두터운 다이어리였다.
뭔가 기이한 느낌이 일순간 몸을 휘감았다. 온몸을 자극하는 전류가 모든 감각기관을 찌릿찌릿하게 두드리는 느낌이랄까. 그는 다이어리에서 묘한 운명적인 인연을 느꼈다.
유서준은 미간을 모으며 다이어리를 주시했다. 특별할 것도 없이 평범했다. 그럼에도 강력하게 그의 마음을 끌었다.
“이거 드릴까요?”
한참을 보고 있자니 매점 아가씨가 물어왔다.
가격이 다소 비쌌지만 유서준은 다이어리를 샀다. 이왕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만큼 자신의 생활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다이어리 표면은 매끈했다.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훌륭했다. 그는 만족스러웠다.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보내는 첫 밤은 다소 낯설었다.
2인 1실의 기숙사는 중간이 칸막이로 구분되어 있고 각 구역에 침대, 옷장, 책상 하나씩이 전부였다.
창밖이 어두워진 시각에 방안에서 작은 학습용 전등 하나만을 켰다.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은 이전과 달리 기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내일 입학식을 하고 정식으로 대학생이 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상이 시작될 것이다. 시골과는 다른, 도시의 생활이 시작될 것이다.
유서준은 매점에서 산 다이어리를 폈다.
묘한 인연이 느껴지는 물건.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는 오늘 하루를 일기장에 적어 기념하고 싶었다.
그는 깊은숨을 내쉰 다음 천천히 다이어리에 글을 적어나갔다.
‘1987년 3월 1일 일요일. 서울대학교 기숙사에서 보내는 첫날 밤이다. 오늘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앞으로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 지금부터 내 인생에서 일어날 주요 사건을 이 다이어리에 적을 생각이다. 이 일기가 언젠가는 나의 삶에 작은 보탬이 되어주지 않을까.’
그는 짧게 다이어리를 산 감회를 적은 다음 펜을 내려놓았다.
문득 그는 건너편 공간을 바라보았다. 2인 1실이므로 건너편 공간에도 분명히 누군가가 입주해야 했다. 하지만 아직 비어 있었다.
“내일이면 누군가가 들어오겠지.”
유서준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말똥말똥한 정신을 강제로 재워야 했다.
그렇게 대학 입학 첫날밤이 지나갔다.
유서준이 잠이 들었을 때 책상 위에 놓인 다이어리 옆에서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흐릿한 고동색 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점차 그 고동색 빛은 형체를 갖추며 뚜렷해졌다.
놀랍게도 그 자리에는 그가 샀던 것과 똑같은 다이어리가 세 권 놓여졌다. 차이점이라면 세월이 오래 흐른 듯 낡았다는 것뿐이었다.
**
[1987년 3월 2일]유서준이 눈을 뜬 것은 아침 7시가 약간 넘어서였다.
하품을 늘어지게 한 그는 이곳이 평소 자신이 일어나던 집이 아니란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는 수건을 비롯한 세면도구를 챙기고 하루를 시작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아침을 먹으러 나가려던 그의 시선이 책상 위를 향했다. 그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응?”
어제 샀던 다이어리 옆에 똑같이 생긴 다이어리가 세 권 놓여 있었다.
이곳은 그의 방이고 분명히 어젯밤에 잘 때 방문을 잠그고 잤었다. 누구도 들어온 적이 없고 들어올 일도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뭔가 이상했다.
더구나 똑같은 모양의 다이어리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는 다소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면서 유심히 다이어리를 살폈다.
일단 표지는 다소 낡았다. 어제 그가 산 다이어리는 반짝반짝 빛나는 새것이었지만 이 다이어리는 오랜 세월이 지난 흔적이 역력했다.
그는 다이어리를 펼치기 위해 손을 가져갔다. 다이어리에 손이 닿는 순간 짜릿한 전기가 통하는 느낌이 일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는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처음 다이어리를 매점에서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이한 느낌이 전해졌다.
유서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낡은 다이어리를 펼쳤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것은…….”
놀랍게도 낡은 다이어리의 첫 장에는 그가 어젯밤에 썼던 그 내용이 적혀있었다.
*
1987년 3월 1일 일요일. 서울대학교 기숙사에서……(중략)
*
그는 황급히 어제 산 다이어리를 펴 대조를 했다.
양쪽으로 눈을 굴리던 그의 입이 벌어졌다. 똑같았다. 그가 쓴 글 그대로, 그의 필체 그대로였다. 단지 오랜 세월이 흘러 글자의 색이 바랜 느낌이랄까.
“이게 대체 뭐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유서준은 앞이 깜깜해졌다. 똑같은 다이어리가 두 개였다. 그런데 하나는 시간이 흘러 낡은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을 때까지 시간은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황급히 다음 장을 넘겼다.
*
1987년 3월 2일 월요일. 입학식을 했다. 학교 대운동장이 학부모를 비롯한 손님들로 북적댔다. 이제야 진정한 대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점심때 입학서류를 내러 학과사무실에 갔다. 담당자가 자리를 비워서 기다리란다. 1시간이나 기다려서야 담당자가 돌아왔다. 짜증 났지만 어쩌랴. 볼일을 끝내고 기숙사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메뉴는 돈가스와 백반. 입학 축하 기념 특식이란다.
문제는 늦게 간 바람에 먹고 싶었던 돈가스가 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백반을 먹었다. 학과사무실 담당자가 엄청 미웠다. 그 자식만 아니었어도.
밤에 룸메이트가 왔다. 물리학과 1학년 구인혁이라 했다. 좀 이상한 녀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