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71
73. LTCM?(1)
다이어리와 함께 전해진 미래에서 온 편지에서 우리나라를 제 이의 외환위기로 몰아넣은 주범으로 외국 투기자본인 LTCM을 지목했었다.
유서준은 그동안 LTCM에 대한 전의를 불태웠지만, LTCM이 무엇인지 언제 만들어지는 것인지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그 실체가 월가의 금융 회보에 실린 것이다.
물론 지금 이곳에 적힌 LTCM과 지금부터 30년이나 지난 후인 편지 상의 LTCM이 같은 기업 또는 펀드란 보장은 없었다.
그렇더라도 LTCM이란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의 눈을 번쩍 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회보에는 그리 구체적인 내용 없이 간략한 소개만 나와 있었다.
LTCM. 월가 유명인사 존 메리웨더가 설립한 펀드. LTCM(Long Term Capital Management)을 풀이하면 이름 그대로 장기 자금 운용 펀드였다. 93년 하반기부터 투자자금을 유치했고 94년 3월부터 활동을 개시했다. 일반 투자가는 투자할 수 없는 3년 만기의 폐쇄형 펀드였다. 최소 투자금은 1천만 달러.
초기 투자금으로 12억 5천만 달러를 모아 역사상 최대 초기 자본으로 출범했다는 기사였다. 투자 기관은 미국의 주요 11개 은행과 싱가포르 정부투자공사, 홍콩 토지개발공사, 대만 중앙은행, 방콕 은행, 쿠웨이트 국영 연기금, 일본 스미모토 은행…….
“이게 뭐야?”
유서준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서하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왜 그래?”
그가 가리키는 부분을 읽어본 서하나가 별일 아니란 투로 말했다.
“미국이란 곳이 원래 규모가 크잖아? 하긴 그렇다 해도 규모가 엄청나긴 하다. 보통 미국에서 주목받는 펀드의 초기 규모가 2천만 달러 안팎인 것을 감안하면 거의 100배 규모의 대형펀드네. 우와, 참여자도 엄청난데? 대부분 각국 중앙은행 수준이야.”
잠시 계산하던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12억 5천만 달러면 1조가량 되니까 우리의 몇 배냐? 우린 10억이니 계산이 안 되네.”
이제 막 자본시장이 개방된 우리나라와 미국이란 곳을 비교할 수는 없었다. 인구도 인구지만 수백 년에 걸쳐 자본을 쌓은 그들과 이제 가난에서 벗어난 지 수십 년에 불과한 우리나라는 자본력에 있어 비교 불가였다.
이를 고려해도 LTCM의 실체는 그를 좌절시키고 있었다.
“이게 가능한 이야긴가…….”
유서준은 고개만 저었다. LTCM은 대체 무엇을 하는 놈인지 괴물이었다. 자신이 맞서야 할 엄청난 적 앞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유서준의 반응을 이상하게 여긴 서하나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너무 과민 반응할 필요 없어. 우리도 언젠가는 저런 규모의 펀드를 운용하게 될 테니까.”
서하나가 그에게 힘내란 뜻으로 주먹을 불끈 쥐는 몸짓을 했다.
유서준은 그녀의 과한 몸짓에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속에 들어찬 찜찜함은 가시질 않았다.
**
북한의 서울 불바다 발언 이후 남북 긴장은 점차 고조되어 갔다. 탄도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강행하는 북한을 향해 미국 클린턴 정부는 북한의 영변 재처리시설, 원자로와 군사시설 폭격 계획을 세웠다. 미국은 한반도 전쟁을 기정 사실로하고 국내 미국 민간인 소개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동해에는 미국 항공모함이 자리 잡았다.
전쟁 임박에도 불구하고 주식시장은 그리 영향을 받지 않았다.
4월과 5월의 연이은 상승으로 다시 1월의 상승분을 회복한 증시는 여름이 시작되자 횡보 국면을 보였다.
6월 14일 전쟁 임박설이 흘러나오며 주식시장은 -2.1% 하락했다. 다음날인 6월 15일 역시 -1.4%가 추가 하락하며 주식시장은 900선이 무너졌다. 소문에는 미국이 설정한 영변 핵시설 폭격 디데이가 16일이란 소문이 돌았다.
마침 북한을 방문하여 협상을 조율하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 핵 재처리시설 중단에 따른 협상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주식시장은 급반등하기 시작했다. 16일에는 반대로 +1.1%가 올랐고 17일에는 다시 2% 가까이 오르면서 900선을 재탈환했다.
대부분 종목이 상승한 17일 오후, 서하나는 모니터를 보며 다음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약 한 달간 전쟁의 공포로 억눌렸던 주가가 반등의 기지개를 켜면 주가는 브이자 곡선을 그리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약 한 달 동안 하락의 염려는 접고 상승만 보며 달리면 될 것이다.
그녀는 낙폭 과대인 몇몇 종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서하나 씨? 요즘 잘 되시나요?”
익숙한 한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그녀의 눈앞에 캔커피 하나가 놓였다.
서하나는 고개를 들었다.
명동 인베스트먼트 자산관리 담당인 심정국이었다. 유서준과 서하나도 자주 명동 인베스트머니에 들렀지만, 그쪽 직원도 자주 놀러 왔다. 그중에서 팀장인 고동찬과 심정국은 유달리 자주 나타났다. 업무가 비슷해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도움 될 수 있었기에 마다할 일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갑자기 불쑥 나타나면 당황스러웠다.
서하나가 심정국을 빤히 쳐다보자 심정국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서준이는 자리에 없네요?”
“아, 대표님께선 외근 나가셨어요.”
“하하, 그렇군요. 그럼 여유 많으시겠어요.”
심정국이 말한 의미는 상사가 없으니 잠시 놀아도 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있는 캔커피를 따며 서하나에게도 눈짓했다.
서하나는 앞에 놓인 캔커피를 따고 한 모금 마셨다. 일에 열중하다가 마시는 커피는 역시나 맛이 일품이었다.
“커피 맛있죠?”
“그렇네요.”
서하나는 다소 딱딱한 어투로 대답했다.
심정국이 슬쩍 그녀의 모니터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요 며칠 폭삭했다가 다시 반등하는데 안 다쳤어요?”
“저희는 그런 잔파도는 그리 신경 안 써요.”
서하나는 이미 심정국에 대한 내용을 유서준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유서준과 내기하다가 욕심에 하한가 종목을 잡고 폭삭 망했었다는, 거기에다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하다는 것까지.
심정국은 유서준과의 내기에서 패한 것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유서준이 딱 한 번의 매매를 통해 번 소액의 수익으로 이겼기에 그는 치사하고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폄하했다.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유서준이 독자적인 자문사를 차리고 나섰으니 그가 눈이 뒤집힐 만했다. 게다가 이영호 대표가 투자에 참여하며 뒤를 돌봐주는 것까지 알았을 때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를 좌절하게 만든 것은 서하나의 존재였다. 탤런트 뺨칠 만큼 예쁜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 유서준과 한 사무실에서 콩닥거리는 것을 보니 내기보다 더한 인생 자체를 패배한 느낌이었다.
어쨌든 심정국은 한 층 위인 SJ 투자자문사에 자주 놀러 왔다. 유서준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서하나를 찝쩍대기 위해서였다.
오늘처럼 유서준이 밖으로 나가고 없을 때면 그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처럼 행동했다.
“하하, 저는 어제오늘 증권주를 좀 땡겼습니다.”
심정국이 호기롭게 말했다.
서하나도 대수롭지 않게 그의 말을 받았다.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심정국의 눈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훑으며 다시 물었다.
“펀드 운용 후 수익률이 대충 어떻게 되시나요?”
서하나의 눈이 모니터에서 떨어져 심정국을 향했다. 다소 얍삽하게 생긴 역삼각형의 쥐 같은 얼굴이란 생각을 했다.
“글쎄요, 개업 후 주가가 좀 올랐으니 저희도 비슷하게 벌었을 거예요.”
심정국의 입술이 벌어지며 한바탕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 저는 좀 많이 벌었습니다. 지수 상승의 두 배는 될 겁니다.”
심정국은 자랑하며 서하나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그녀의 반응은 그의 기대와 달랐다. 그래서 어쩌라는 식의 관심 없는 반응이었다.
심정국은 내친김에 한마디를 더했다.
“크크, 적어도 트레이더라면 이익을 볼 때는 확실하게 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서하나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녀는 심정국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자신을 부각해 그녀에게 뭔가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이 보였다.
서하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희는 많은 수익보다 안정적인 수익을 추구합니다. 리스크를 많이 지면 수익도 올라가겠지만 고객이 그것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희 대표님과 저는 지난 7년간 손실이 난 해는 없었습니다. 그쪽은 어떻죠?”
서하나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심정국에게 꽂혔다. 심정국이 움찔하며 한발 물러섰다. 그는 작년에 꽤 큰 손실을 보았다. 그중 일부는 유서준과 했던 내기 때문이었지만.
심정국은 그녀의 눈빛을 받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쳐다보자 압도되어 입을 열기조차 힘든 데다 작년의 손실은 그의 경력에 지대한 발목을 잡고 있어서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손을 흔들며 물러났다. 내심은 욕이 끓었으나 겉으로는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다음에 다시 뵙죠. 갑자기 바쁜 일이 생각났습니다.”
돌아가는 그를 바라보며 서하나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
유서준은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래도 LTCM의 실체를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았다. 회보에 나온 LTCM이 과연 먼 훗날 국가를 위협할 그 LTCM이 맞는지.
물론 제대로 확인할 방법은 없다. 설사 그렇다 해도 알아보는 것 자체가 손해 볼 일은 없고 선진 금융기법을 배울 기회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서하나와 회의를 하던 말미에 LTCM 건을 꺼냈다.
“미국에 흥미로운 펀드가 하나 있어요.”
“뭔데?”
유서준은 금융 회보의 LTCM 기사를 손으로 짚었다.
“금액이 큰 대형펀드라는 것을 빼면 특별한지 모르겠어.”
서하나는 부정적이었다.
“아뇨, 특별해요. 어떤 회사이기에 각국 중앙은행이 투자를 할까…….”
유서준과 서하나의 관계는 미묘했다.
지금까지는 서하나가 선배였기에 서하나는 유서준에게 말을 놓으며 편하게 대했다. 그러던 것이 유서준이 투자자문사를 차리면서 그녀의 상사가 되자 관계가 이상하게 되었다.
서하나는 LTCM 기사를 유심히 살피면서 유서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LTCM 자체보다 유서준의 반응에 더 관심이 있었다. 적어도 그가 외국의 펀드에 이런 식의 관심을 보인 것이 처음이었으니까.
“미국에 확인하러 가고 싶은가 보구나?”
“확인이라기보다…….”
말을 흐리는 그를 향해 서하나가 냉큼 말했다.
“선진기법을 배워보고 싶다는 거지?”
유서준이 제대로 핵심을 찍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핑계로 미국 여행도 하고 싶은 것일 테고…….”
유서준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그가 LTCM에 대해 경계하는 마음을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최근 들어 대학생의 유럽이나 미국 배낭여행이 유행처럼 불고 있었다. 그녀는 유서준이 대학 때 해외로 나간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보다 시야를 넓히기 위해 한번 돌아다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언제로 준비할까?”
“가능한 한 빠를수록 좋겠죠. 대학생들 여름방학 시즌이 시작되면 비행기 표 구하기도 만만찮을 거니까.”
“알아볼게.”
돌아서는 그녀에게 유서준이 말했다.
“서부장님도 함께 가는 것으로 해두세요.”
“응?”
의외의 말에 서하나가 깜짝 놀랐다. 그녀는 빙그레 미소만 짓는 유서준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러났다.
그녀는 유서준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서하나는 자리에 앉아 LTCM 본사의 위치를 확인했다.
“미국 뉴욕에서 북으로 약 20km, 코네티컷주 그리니치에 본사가 자리하고 있다고…….”
그녀는 지역명이 다소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금방 그 이유를 깨달았다.
미국 코네티컷주. 그곳에는 아이비리그로 유명한 예일대학교가 있었다. 바로 김현아가 유학을 가 있는 그 대학이었다.
서하나의 입술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물론 유서준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