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405)
405화. 황제의 피를 이은 자.
세상은 한 번 멸망했다.
대륙은 심연으로 가라앉았으며 아무런 희망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시기, 쌍둥이 여신 ‘피나’가 아직 오염되지 않은 땅을 심연의 바깥으로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기적이었다.
극악하기 짝이없는 멸망의 저주를 일부이나마 피해낸 것은.
그렇게 하늘로 떠오른 땅, 판게니아.
하지만 초창기의 판게니아는 무법천지였다.
풀 한포기 없이 죽어버린 대지.
서로를 잡아먹지 않으면 생존은 불가능했다.
또한, 땅을 떠올리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대륙 곳곳이 조각나 있었다.
혼란했다.
혼돈이었다.
가까스로 ‘워프’를 이용한 땅의 연결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판게니아의 질서는 어지러웠다.
특히 인간들은 그 경우가 더욱 심했다.
-구제국의 멸망!
-모든 영웅들의 죽음!
···그들을 이어줄 구심점이 없었으므로.
뭉치긴커녕 서로를 약탈했고, 나약한 인간들은 가장 먼저 타종족의 먹이가 되었다.
그 상이, 엘프는 ‘태초의 숲’에 자리를 잡았다.
다수의 종족들은 남부와 북부로 흩어졌다.
태초의 숲에는 유일하게 남은 ‘세계수’가 있었고, 북부와 남부엔 강력한 지도자가 있었으니까.
백호족과 흑호족 말이다.
그 뒤로도 수많은 종족이 강자들을 중심으로 뭉쳤다.
하지만 인간들은 아니었다.
인간들은 노예가 됐다.
찬란한 문명을 번성시켰던 그들은, 가장 먼저 최하위의 종족으로 낙인찍혀 유린당했다.
인간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이대로면 멸종하고 말 터.
-부디 우리에게도 강력한 지도자를!
하여, 인간들은 갈망했다.
바라고, 또 바랐다.
그리고······마침내, 나타난 것이다.
초대 아르혼 제국 지배자.
『그는 11개의 알을 품에 안은 채, 빛을 타고 내려왔다.』
초대 황제가 빛을 탄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등장한 즉시 인간들을 규합했다.
가장 먼저 구제국의 유지를 잇는 아르혼 제국을 세웠다.
그들을 유린하던 종족들에겐 강력한 철퇴를 내렸다.
뿐만인가.
심연에 가라앉아 유실된 마법과 각종 지식을 전파시켰으며, 무너진 규칙을 일으켜세우고 다시금 인간을 중앙 대륙의 초강자로 우뚝서게 만들었다.
너무나도 강력했기에, 모든 종족이 경배했다고 한다.
그 힘은 찬란했던 구시대의 강자들도 빛바래질 수준이었다고 했다.
최하위 종으로서 잡아먹히던 인간들은 어느덧 최상위포식자가 되었다.
다른 종족들은 역으로 제국에 공양을 바쳤고, 엎드려 빌었다.
하지만 황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영원한 잠에 빠졌다.
11개의 알을 아르혼 제국에 남기고서.
-모든 영혼의 정령을 부화시켜라.
-황금의 정령이 ‘문’을 열고, 모든 영혼의 정령이 하나가 되면, 비로소 황제가 눈뜨리라.
제국은 필사적으로 알의 부화에 열을 쏟았다.
11개의 알을 부화시키기 위해선 ‘그릇’이 될 인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아냈다.
물론 정교한 그릇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한 그릇은 장인의 손길로 하나하나 만드는 것이다.
‘복제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데르시안’가문의 주도 아래, 수도 없이 많은 ‘복제인간’이 생성되었다.
하지만······실패했다.
영혼의 정령의 그릇이 될 인간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금단에 손을 댔다.
-황제의 피로 복제인간을 만들어야한다.
잠든 황제.
그의 피를 가진 인간을 만들기로.
허나, 황제의 피는 너무나도 강력했다.
황제의 피로 복제된 인간은 모두 폭발해버렸다.
수천, 수만, 어쩌면 그 이상.
셀 수 없이 많은 숫자를 반복하고 시간을 보냈으나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포기를 외칠 무렵.
-서, 성공했다!
-황제의 피를 이은 최초의 아이다!
황제의 아들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문제는 그 무렵, 아르혼 제국이 혼돈의 시기였다는 것이다.
초대 황제의 출현으로부터 벌써 수백년이 훌쩍 지난 시점.
여전히 황제는 잠들어있었고, 흩어진 가문의 힘들은 너무나도 비대해져 자신이 주인임을 부르짖던 시절이었다.
황제의 빈 자리를 더는 두고볼 수가 없었던 게다.
···다시금, 구심점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구심점이 될 아이가 탄생했다.
계획대로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터.
하지만 황제의 아들은 그들의 생각과 달리 너무나도 유약했다.
-착해빠졌어.
-마법도, 검도, 학습능력조차도······무엇하나 재능이 없다.
-정녕 초대 황제의 피로 연성된 아이가 맞단 말인가?
-이 아이가 황제가 되면 제국은 더 크게 분열될 것이다.
-다시 만들자.
-초대 황제폐하의 피가 아니라, 저 아이의 피로.
황제의 아이는 여러방면에서 부족했다.
평범하지조자 못한 둔재.
어떠한 방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반푼이.
그러나 그들에겐 시간이 없었다.
황제의 피로 다시 복제인간을 만든들,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수백, 수천 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이의 피를 사용했다.
복제된 아이의 피로 또 다른 복제를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졌다.
문제는 ‘그’의 연성에 아이의 피만 사용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빠른 성장과 더 강력한 힘, 카리스마를 위해 ‘인간’이 아닌 다른 것들이 합쳐졌다.
이윽고 탄생한 아이는 그들의 바람대로였다.
누구보다 똑똑했고, 강인했으며.
-어, 알이······알이 깨어난다!
11개의 알 중 하나가 마침내 반응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평범한 인간의 아이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탄생한 직후부터 자신을 인식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복제품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작, 복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너를 원망한다.’
아이는 자신을 복제시킨 존재의 완벽한 대체제가 되었다.
황제의 피로 만들어진 아이는 처형의 대상이 됐다.
제국을 탈출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나벨룽의 숲’에 들어가 죽었다고 알려졌다.
···이후, 복제된 아이는 ‘황금 가면’을 썼다.
동시에 사신교를 만들고, 자신과 같은 복제인간들을 모았으며, 다른 알들을 부화시킬 그릇을 찾아냈다.
복제인간들은 이미 수백년동안 판게니아 대륙 곳곳에 흩어져있었고, 그들 중 ‘그릇’이 될 존재들이 충분히 등장했기 때문이다.
11개의 알은 모두 부화했다.
사신교는 더없이 강성해졌다.
······문제는 그 시기, ‘기사왕’이 출현했다는 것.
‘빌헬름······!’
기사왕의 이름은 빌헬름이었다.
하지만, 빌헬름의 얼굴은 분명히 자신과 같았다.
놈이다.
나벨룽의 숲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자신의 원본!
치가 떨렸다.
분노가 치밀었다.
아직도 살아있을 줄이야!
살아서, 자신을 욕보이고 있다.
놈이 살아있는 한 자신은 그저 복제품일 뿐이었다.
반드시 죽여야한다.
살려둬선 안 된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 빌헬름을 죽이고자 했다.
하지만 놈은 항상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머지않아 빌헬름은 ‘대원정’을 일으켰다.
‘대원정에서······죽었다. 이번에야말로 죽었을 터다.’
제국은 기사왕에게 아무런 원조도 하지 않았다.
대원정에 참가하지 않고, 도리어 참가한 자들이 뒤에서 그를 배신토록 만들었다.
용병들을 조종하고 병사들을 겁먹게 하였다.
결국, 대원정을 실패했다.
정확히 말하자면······실패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빌헬름은 결코 기사왕 따위로 영원히 회자되어선 안 됐으니까.
영웅이 되어선 안 됐으니까.
놈은 땅속에 묻혀서 사라져야만 했으므로······.
-영웅회라······오냐, 너희들을 진짜 영웅으로 만들어주마.
빌헬름의 업적을 묻을 인간들을 발굴해냈다.
판게니아에 빠르게 그들의 소문이 퍼진건, 모두 황금 가면이 주도한 일이다.
빌헬름의 위업을 퇴색시킨 후 영영 매장할 작정이었다.
『막심.』
『그라시아.』
『마스터.』
『다크스타.』
『흑요.』
『반희.』
『루시퍼.』
『빌헬름.』
이들 전부, ‘황금 가면’이 선택했다.
처음의 소문은 빌헬름이 혼자 ‘대원정’을 주도한 게 아니라, 이들과 함께 시작한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여덟 명의 영웅들로 희석시킨 이후.
그들의 이름을 사람들이 궁금해하면, 곧이어 실망하고 말 테니까.
연이은 실망은 이내 빌헬름에게도 닿을 테니.
예컨대 막심은 쓰레기 용병이다.
그라시아?
대원정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마스터.
이기적이고, 자기자신밖에 모르는 성격이상자. 누군가를 착취하는데 능하며 절대로 영웅이 될 수 없는 놈이다.
다크스타.
제대로된 업적 하나 없이 항상 도망치기 바쁜 겁쟁이였다.
흑요, 반희······과거가 화려하다. 음지에서 생활한 경력이 길다.
루시퍼.
악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이들의 끝에 ‘빌헬름’이 존재한다면, 과연 그를 ‘기사왕’이라 드높일 수 있겠는가?
아니면 같은 쓰레기로 매장당할까.
대원정은 사실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저런 놈들이 주도했으니 실패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리라.
빌헬름은 모두의 원망을 받으며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었다.
영영토록.
‘그런데 왜?’
······그런데 왜, 빌헬름의 이름이 다시 들리기 시작하는가.
세렝게티가 나타나고, 원탁의 기사단이 부활하며.
빌헬름의 업적이 재조명되고 있다.
놈의 흔적이 다시금 판게니아에 나타나고 있었다.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팬텀. 처음부터 네놈을 죽여야했다.’
황금 가면은 깨달았다.
빌헬름을 지우는 일에 선행되어야만 했던 필수조건이 바로 ‘팬텀’의 제거였다는 걸.
팬텀, 란돌프.
12번째 정통의 후견자인 척을 하며 유유히 나타나, 그를 농락했다.
정체를 숨긴 채 몰래 힘을 키워, 빌헬름과 관련된 업적을 재조명해냈다.
······자신이 빌헬름의 복제인 걸 알고서 그런 것이다.
그가 ‘복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우스웠을까.
너무 쉽게 속아버린 그가.
팬텀인지조차 모르고서 황궁을 열어줬던 그가.
사신교의 만찬회에 초대해, 전부를 보여줬던 그가······!
웃겨서 어쩔 줄을 몰랐을 테다.
하지만.
‘더는 속지 않는다.’
미궁을 박살내고, 란돌프를 죽여 팬텀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겠다.
악의 화신인 놈을 살려둘 생각 따윈 터럭만큼도 없었다.
게다가, 팬텀은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다.
‘내가 빌헬름보다 뛰어나다.’
빌헬름보다 자신이 더 뛰어났으니까.
태생부터 그랬다.
더 완전하도록 설계되고 완성되었다.
유약하기 짝이 없던 빌헬름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울 정도였다.
그 증거가 바로 지금이다.
‘황제폐하께선 빌헬름이 아닌, 나를 선택하셨다.’
황제가 눈을 떴다.
그의 바로 옆에서.
빌헬름이 아닌, 자신을 선택한 것이다.
자신이야말로 활제의 후계자임을 천명한 것이었다.
힘이 느껴진다.
황제와 자신이 하나가 되었음이.
온전하게 ‘문’이 열렸음이!
지금이야말로······.
“내가 황제다.”
오롯한 황제가 되었다.
아르혼 제국의 2대 황제는 빌헬름이 아닌, 그다.
황금 가면은 가면을 벗었다.
절반은 빌헬름의 얼굴이고, 나머지 절반은 타버려 흉흉하기 짝이 없으나.
“내가······진짜다.”
이제, 그는 진짜가 되고자 했다.
더는 숨길 필요도, 숨을 필요도 없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