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404)
403화. 경배하라.
견고한 벽.
세워진 뒤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던 벽.
우주적인 존재라던 마혈왕도, 천상으로부터 직접 봉인된 대마귀 원시천마도 이 벽의 앞에서 좌절했다.
그저 강대하기만 해서는 이 벽을 무너트릴 수 없는 것이다.
힘의 문제가 아니다.
이 벽은, 그런 게 아니었다.
“얼마나 더 ‘완벽’하게 해내느꺄······그런 건가?”
방금 전, 나는 ‘잭 더 리퍼’의 생존을 더욱 완벽하게 완성했다.
단순히 시간을 단축한 게 아니라,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내가 놓쳤던 것.
생존에 눈이멀어 미처 해결하지 못했던 부분들.
떠올려보면, 내게는 미련이 있었다.
천 번이 넘는 ‘생존’을 완료했으나, 그 과정에서 미련이 남는 ‘4번의 생존’이 존재했던 것이다.
감히 불가해라 칭해질 수준의 난이도.
너무나도 어려웠기에 나 스스로 타협해야만 했던 이야기.
잭 더 리퍼의 이야기도 그 중 하나다.
······’빌헬름’의 생존도 마찬가지였다.
놓친 게 있다.
알면서도 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들이 있었다.
“이 벽은 내 미련이로군.”
나는 천상의 벽을 매만졌다.
앞으로 뭘 해야할지, 어떻게 해야할지 알겠다.
하나를 해결했으니 남은 3번의 미련을 마저 완성하면, 이 벽은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당장은 어렵다.
나는 양손을 마구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손을 좀 풀어야겠는데.”
목을 풀고, 어깨를 뒤로 젖혔다.
가장 큰 3개의 미련이 남았으나, 그렇다고 다른 ‘생존’에서 아쉬운 게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모든 ‘생존’을 재차 완성할 것이었다.
보다 완벽하게.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는건.
축복이다.
그렇기에, 지금 나는 너무나도 즐거웠다.
*
살귀를 죽인 살귀.
어둠 속에서 자신이 암살할 대상을 지켜보던 그는, 불현 듯 묘한 변화를 느꼈다.
‘이게 무슨······.’
눈앞에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지나가듯, 한 남자가 게임을 하고 있다.
그 안에서 플레이중인 캐릭터의 닉네임은 ‘잭 더 리퍼’.
박현명은 최선을 다해 잭 더 리퍼를 플레이했다.
될 때까지, 잠자는 시간마저 줄여가면서.
그에겐 그저 게임이었을 따름이나, 그 열정과 게임에 대한 사랑만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짓이다.
잭 더 리퍼의 생존 이야기는 이미 종결되었다.
다시 한 번 플레이한들, 과거가 바뀌진 않는다.
그럴진대······.
‘뭐냐, 이건.’
······왜 눈앞이 흐려지는가.
그는 살면서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감정의 변화도 없다시피했으며, 누군가를 위해 헌신한 적도 단언컨대 없었다.
하지만, ‘미련’은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미련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 미련을 고치고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도 존재할 터였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포기했다.
미련은 미련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고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네가 뭔데······.’
그 미련을, 다시 끄집어내는가.
과거에, 그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구하지 못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방법 외엔 생존이 불가능했으니까.
그가 생각해도 그랬다.
다른 수는 없다.
지금의 그가 돌아가도 똑같으리라.
그런데······.
‘구해냈다고······방법이 있었다고······?’
찾아냈다.
박현명은.
없는 줄 알았던 방법을, 포기했던 이야기를 구원해냈다.
분명히 0으로 보았는데, 0이 아니었다.
잭 더 리퍼는 작게 몸을 떨었다.
순간, 그의 세상에 격변이 찾아왔다.
그가 유일하게 포기한 한 가지.
0의 가증성을 돌파한 남자가 있었다
그가 가능하다면, 자신도 가능할 것이다.
동시에······잭 더 리퍼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의 눈에 별이 떠올랐다.
초월!
지금, 그는 분명히 초월했다.
별을 얻지 않았지만, 성각자의 부름조차 없었지만.
‘1.3%.’
흑왕을 죽일 가능성.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기 시작했으니.
*
흑왕은 이맛살을 구겼다.
백왕, 그리고 ‘절망’의 힘을 손에넣고, 비로소 완전해졌건만.
‘거슬리는군.’
묘하게 거슬리는 무언가가 있었으니까.
인식의 안과 밖, 그 교묘한 사리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잡아내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다시 나타나서 신경을 긁고 있다.
분명한 것은.
‘나를 노리고 있다.’
흑왕, 그의 암살을 노리고 있다는 것.
기척을 감추고 드러내는 게 확실히 인상적인 실력이다.
다크엘프들 따위는 감히 발끝에도 따라오지 못할만큼 능숙하다.
아마도 수백, 수천, 혹은 그 이상을 죽여온 암살자.
하지만, 그렇기에, 자신과의 실력차를 모를 리가 만무했다.
무엇보다······.
암살이란 들통나면 소용없는 짓이다.
한데, 이미 들켰음에도 놈은 자신을 노리고 있다.
‘일부러 드러냈다. 자신의 기척을. 존재를. 내가 인시토록.’
답은 하나뿐이다.
실력의 차가 압도적임을 알 텐데도 암살자는 자신을 당당하게 밝혔다.
······어이가 없었다.
모습을 보인 순가부터 암살은 암살이 아니다.
다른 의도가 함께 섞여있다고 봐야할 터.
“···유도하는 거냐?”
흑왕은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놈이다.
암습도, 정면대결도, 모두 소용없는 짓임을 알고서 그를 유도하고 있다.
흑왕을 죽인 최적의 장소로.
대놓고 낚싯대를 드리우며 낚시바늘을 물어주라고 애원하는 기색이다.
이런 종류의 암살자는 처음 겪어본다.
허나······.
‘그래봤자 역효과일텐데.’
미궁의 어디로 유도한들 어차피 자신의 손바닥 안이다.
‘절망’의 힘은 전염성에 있다.
에이션트 피닉스도, 심지어 엘프들마저도 ‘절망’의 힘에 전염되어 꼭두각시처럼 그를 따르고 있었다.
닿은 모든 것에 강제로 절망의 세포를 이식하는 것이다.
피닉스의 불은 검은 재처럼 까맣게 흩날렸고, 엘프들도 검은 짐승들과 같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그러니, 미궁의 어떤 장소와 괴물을 내놓아도 결국 흑왕의 힘을 불려주는 행위에 불과하다.
흑왕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놈의 의도에 어울려주었다.
자신을 어디로 유도하여 암살하려하는지 퍽 궁금했으니.
끼릭!
꺼억! 꺼어억!
머지않아 흑왕과 그의 군단은 ‘인형’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인형의 군단이다.
인간과 비슷한 형상이지만 생명체가 아니었다.
묘하게 뒤틀린 자세들.
하지만 느껴지는 불길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오호라.’
보자마자 알았다.
이 인형들은, 자신과 ‘절망’의 천적이다.
특히 저 중심에 있는······.
“더러운 먼지들이 찾아왔네?”
한 여자.
악마······아니, 악마보다 훨씬 더 고상한 존재다.
뭐라고 해야할까.
말로 정의하기 힘들지만, 저것은 틀림없이 ‘종의 기원’과 관련있는 생명체다.
흑왕은 여자를 보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흑호족과 백호족이 평생토록 찾아 헤메던, 모든 ‘진화’의 뿌리를 알 수 있는 해답이 지금 저기에 있었다.
‘저것’은 순수한 근원이다.
하여, 그 무엇도 침범할 수 없다.
저 인형들도 생명체가 아니기에 전염되지 않는다.
절망의 힘도, 흑왕의 능력도.
허나 ‘저것’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의 군단은 그야말로 무적이 되리라.
갖고싶다.
미치도록, 손에 넣고 싶다!
‘이 미궁의 나의 천국이로군.’
흑왕은 미소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이 미궁이야말로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게 있는 장소였으니까.
*
“넌······뭐냐.”
황금 가면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 찬란한 황금률을 두른 채 빛나는 존재.
전설의 드루이드 알비노를 보고서.
“너 같은 존재가······아직도 판게니아에 남아있다니!”
알비노는 강했다.
너무나도, 차원이 다르게.
멸악의 거인도, 칼날용신도, 알비노에 비하면 어린아이 장난이다.
마치······먼 옛날, 멸망의 출현 이전에 존재한 ‘찬란한 존재들’처럼.
하지만 멸망의 출현과 함께 그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멸망은 자신에게 위협이 될 모든 걸 제거했으므로.
그나마 남은 자들도 심연에 가라앉아 ‘찬란함’을 잃었다.
그러니, 아직도 알비노와 같은 존재가 판게니아에 남아있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상식을, 한계를 넘어섰다.
황금 가면은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넌···너는 ‘멸망’의 출현 전에 존재했던 괴물이구나. 들어본 적이 있다. 전설의 드루이드 알비노······! 하지만 멸망에게 죽었다고 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이야기는 와전되는 법이지. 나는 그저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알비노를 전력을 개방했다.
외신의 힘을 흡수한 사신교의 간부들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당연한 것이다.
그가 ‘전설의 드루이드’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멸망’의 저주는 이 세계를 억제하고 있다. 내 목표는 그 저주에서 세계를 해방시키는 것.”
멸망의 저주.
심연을 생성하고, 용신을 광룡으로 만든 건 극히 일부다.
가장 큰 저주는 ‘세계의 억제’다.
멸망의 출현 전과 후로 대륙의 무력 레벨은 급격하게 낮아졌다.
종족마다 정해진 상한선이, 한계가 생겼다.
그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선 종의 구분을 버리고 괴물이 되거나, 균열의 탑 혹은 별을 찾아 차례대로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균열의 탑’이다.
그곳을 정복하고, 그곳에 ‘세계수’를 피워내야만 억제의 저주가 사라진다.
그게 가능한 건 ‘박현명’밖에 없다.
“‘외신’들은 천상의 개입과 멸망의 출현만을 가속한다. 그러니···그 주도자인 네놈을 살려둘 순 없겠구나.”
화아아악!
알비노의 몸을 둘러싼 황금률이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
멸망의 출현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그 전에도 이미 ‘전설’로 추앙되던 드루이드.
비록 멸망과의 대결에서 도망쳤으나······.
황금률의 드루이드 ‘박현명’을 찾아낸 이상, 더는 숨지 않을 것이다.
“······.”
황금 가면의 두 눈동자가 급격하게 떨렸다.
모든 간부가 죽었다.
알비노와 각주들의 손에.
생사를 알 수 없는 황금 여우를 제외하면.
도합 9명의 간부가 사실상 살해당한 것이다.
저 드루이드는 그가 여태껏 경험한 적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감히 판게니아의 최정상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니라.
그리고.
씨익!
언제 그랬냐는 듯, 황금 가면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모든 간부가 죽었다.
말인즉슨.
······마침내 모든 정통을 흡수했다.
-키르케르카카카카캌!
어느덧 모든 정통의 흡수를 끝마친 황금 가면의 정통이, 몸을 급격하게 불려가기 시작했다.
터질 듯이 부풀어오른 정통의 몸은 이내 둥글게 변하더니.
쩌어억!
몸의 중심이 벌어지며, 눈동자가 나타났다.
저 모습은.
······’눈’이다.
정통은 이내 거대한 ‘눈’이 되었다.
뜨여진 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알비놀를, 그리고 황금 가면을.
세상을.
“아아.”
그것을 보며, 황금 가면은 전율했다.
이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경배하라.”
입을 열었다.
전율이 멈추질 않는다.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 지금 그의 앞에 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완성이 도래한 것이다.
“황제폐하께서 마침내 눈을 뜨셨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