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16)
16
괜히 세상에 선물 카드가 존재하는 게 아니다.
선물도 선물이지만, 그 말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도련님이 글을 모르니 이건 입으로 직접 말해야 했다.
‘보자, 가장 흔한 게…….’
나는 머리를 싸매면서 고민했다.
‘오다 주웠다? 아니지.’
아무리 ‘황성의 밤’이 오래된 작품이라도 이건 너무 구린 대사였다.
그런 의미로 좀 더 감동적인 멘트를 연습해보았다.
“오다 구웠다?…….”
이건 반말이니 기각.
“……오다 구웠습니다?”
너로 정했다.
나는 몇 번이나 ‘오다 구웠습니다’를 연습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후가 노곤했는지 도련님은 그 긴 시간 내내 깨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흘러, 나도 하품이 슬슬 났다.
‘요새 근무 시간을 늘려서 무리하긴 했지…….’
잠을 깨기 위해 슬렁슬렁 침소를 걷다가 언니가 함께 준비해준 꽃다발 앞에 섰다.
‘꽃점이나 봐볼까.’
그렇다면 무슨 꽃점을 볼까 고민하다가 하나를 딱 떠올렸다.
‘아, 그게 있지.’
말이 씨가 된다고.
매일 나를 싫다고만 하니 반대로 말하는 편이 좋겠다.
나는 꽃잎을 하나하나 떼며 말을 이었다.
“도련님은 나를 좋아한다.”
“…….”
“도련님이 나를 향한 마음을 숨김, 내 도련님이 나를 심각하게 좋아해서 곤란하다, 도련님이 날 너무너무너무…….”
“야!”
휙!
내게 날아오는 베개를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피했다.
‘정말 오랜만에 베개네.’
내심 반가워하는데, 도련님이 씨근덕거리며 내게 따졌다.
“넌 내가 우습지?”
“도련님, 하나도 재미없는데요. 맨날 이불 속에만 계시는데 제가 뭘 보고 웃겠어요. 아니면 저도 그 안으로 초대해주시면 안 돼요?”
네에에?
나름대로 애교를 부려봤는데 효과는 별로 없었다.
그는 오히려 어림도 없다는 듯이 나를 쏘아보더니 이불에 들어갔다.
참 일관성 있네. 근데 오늘은 꽤 후덥지근한데 진짜 답답하지도 않나.
아무튼, 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해야 했다.
나는 손에 든 쿠키 봉투를 의식하며 비장하게 다가섰다.
“저, 도련님.”
“…….”
“대답 안 하시면 부르실 때까지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거예요.”
“……뭔데.”
그래도 긍정적인 변화가 하나 있다.
바로 이처럼 그가 내 말에 열에 일곱은 전보다 빠르게 대답해주는 것이다.
나는 어깨를 쫙 펴며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물 준비해왔습니다.”
당장 버려, 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이상했다.
의외로 그가 이불 사이로 눈을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내가 꺼낸 쿠키를 한참이나 빤히 응시했다.
그 반응에 나도 신이 나서 평소보다 더 주절거렸다.
“도련님, 도련님. 저 살면서 쿠키 처음 만들어봤어요. 왜 만들었는지 아세요? 예, 모르시죠. 저도 몰랐는데 오늘이 꽃의 날이라고 하더라고요. 여기, 덴카르트 전통이래요.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꽃을 상징하는 무언가를 주는 게요. 자, 받으십쇼.”
그는 이 돌덩이가 설마 쿠키였냐, 라는 경악의 눈으로 쿠키를 바라보다가 이럴 거면 왜 굳이 물어봤느냐, 라는 얼굴이 되어 나를 노려봤다.
나는 헤헤 웃다가 도련님의 손에 쿠키를 쥐여줬다.
그러고는 짜증을 부리려는 그에게서 다시 쿠키를 휙 낚아채 빼앗아버렸다.
난데없는 줬다 뺏기에 도련님의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쿠키를 반으로 똑 쪼개서 하나는 내 입에, 하나는 그의 입에 넣어버렸다.
불시에 쿠키를 먹게 된 그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몸만 멀쩡했으면 나를 한 대 패버려도 이상치 않을 눈빛이군.
“잘 먹을게요. 역시 저는 다른 사람보다 도련님이 주신 게 제일 맛있네요.”
바람직한 선물 주고받기였다.
그러나 도련님은 쿠키를 돌처럼 씹어 넘기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하지.
어차피 그 잘난 황태자와 서브공들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캐릭터라 놀랍지도 않다.
‘그나저나…… 서브공이라. 슬슬 등장할 때가 되긴 했는데.’
쿠키를 마저 오독오독 씹으며 흥미롭게 생각했다.
먼저, 덴카르트 방계의 그놈이 있었다.
‘등장 시기가 이쯤이었는데, 이번에 오려나?’
* * *
‘얼어 죽을 플라워 데이.’
마넬라노 스텔은 창밖의 무르익은 녹음을 바라보며 욕설을 뱉었다.
그는 마강석 설원으로 둘러싸인 북부 끝에서 동남부의 심장까지, 가는 길만 꼬박 일주일은 소요되는 대장정에 올랐다.
제 의사와 무관한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예로부터 덴카르트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올해는 특별히 가문 간의 화합을 다지기 위해 귀족들을 저택에 초대해 접대한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부모는 무척 기뻐하였으나, 그에게는 썩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가서 대단한 이득이 있겠는가.
존경하는 블리반도 없다니 다른 흥밋거리도 없었고. 아카데미 과제로 하던 고대 석판 해석도 이미 끝낸 지 오래였다.
지루함을 풀기 위해 구두 밑창으로 바닥을 탁탁, 치는 행위에 백작부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지적은 하지 않았다.
그가 다른 사람들 눈에는 완벽한 백작가 자제의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미소를 갈무리한 백작부인은 마주한 백작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마넬라노의 귀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스쳤다.
“……자기 성도 쓸 줄 모르는 놈이 후계자라고요?”
언제 따분했냐는 듯, 그의 샛노란 눈동자가 번쩍였다.
색다른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의 얼굴이었다.
“그렇단다. 덴카르트 부인만 낯을 들기 어려워졌지 뭐니. 게다가 귀하게 구한 가정교사들에게도 물건을 집어 던진다더구나. 그래서 가문의 서명이라도 제대로 하겠어?”
백작부인은 애석하다는 어조로 말했지만 후련함이 얼핏 비쳤다.
아들의 고약한 성미는 그녀로부터 물려받았다.
“거기에 다리를 못 쓴다고 하더구나. 명실상부 덴카르트의 실패작이지.”
콧소리를 낸 그녀가 말했다.
‘역시 근본도 없는 사생아야.”
이어서 마넬라노를 향한 시선에는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선명히 빛났다.
그는 다방면에서 뛰어난 수재로 벌써 황가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모친의 간지러운 말을 걸러 들으며 마넬라노는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
‘아무래도 재미있는 일을 벌일 수 있을 것 같네.’
기대하던 순간이 되자 마넬라노는 먼저 공작부인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또래의 사촌들과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다들 비슷한 꿍꿍이가 있는지 눈빛에 비열함이 득실거렸다.
얼추 인사를 나눈 소년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2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굳게 닫힌 문 앞에서 그들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은발 시종을 만났다.
“환영합니다, 도련님들. 에드릭 도련님의 시종 로벨입니다.”
썩 훌륭한 자세에 흠잡을 데 없는 태도로 인사를 했다만, 그에겐 가소로울 뿐이다.
그 주인에 그 시종이라고.
보나 마나 기본도 안 되어있는 놈이겠지.
마넬라노는 친절함을 가장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공자께 인사를 드리러 왔다. 열어.”
그런데 그다음, 마넬라노는 당황하고 말았다.
시종이 갑자기 자기 입술 위에 긴 검지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 표정이 황궁 도서관 사서보다도 엄중하고 엄격했다.
“쉿.”
……뭐지, 뭔데 저러지?
도대체 무슨 일이지, 혹시 공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소문으로만 듣던 발작인 건가, 의원이 진료를 보는 건가, 때를 잘못 고른 건가.
영식들이 혼란스럽게 바라보는데 시종이 엄숙하게 말했다.
“지금은 우리 도련님 낮잠 시간입니다.”
마넬라노는 순간, 오는 길이 너무 고돼서 헛소리를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다른 영식들의 멍한 얼굴을 보면 그의 귀만 잘못된 건 아니었다.
언제 당황했냐는 듯, 그는 평정심을 되찾았다.
‘낮잠 시간이라……. 그래, 천한 출신으로 자랐었으니 귀족 접대의 중요성을 알 리가 있나.’
품위를 지키며 맞이하긴커녕 단잠에 빠진 게 더 어울리긴 했다.
그는 다시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렇군. 언제 깨어나시지?”
“그건 저도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도련님 드시는 약 기운이 원체 강해서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시종은 대단히 송구하다는 듯이 한 손을 가슴에 얹었다.
깔끔하고 정중한 태도였다.
하지만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마넬라노는 애초에 거절에 익숙한 인간이 아닌 것이다.
마넬라노는 잠시 어쩔까 생각했다.
결론은 금세 나왔다.
따지고 보면 물러나는 게 옳다. 저택에 초대받긴 했어도 그 방의 초대는 받지 않았으니.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그가 차선을 선택했다.
“공자가 깨어나면 우리에게 전하…….”
“아……. 저기, 블리반 경!”
그때, 시종이 조금 전과 다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 반가운 목소리가 영식들 사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뭐, 블리반 경?!
검은 사슬 기사단의 단장, 일찌감치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제국의 검 블리반 카르텔.
귀족 소년들의 영원한 선망 대상 아니던가.
특히 마넬라노는 덴카르트의 역대 전사들만큼이나 검술에 특출한 만큼, 관심이 깊었다.
그는 바로 시종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급히 돌렸다.
‘공작의 부름으로 영지를 떠났다더니 설마 벌써 귀환한 건가.’
그런데 마넬라노의 기대는 금방 사그라들었다.
블리반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험악한 사내라고 했는데, 눈앞의 사내는 수련화처럼 청초하기만 했다.
기사보단 차라리 성자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생긴 것만큼이나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온 그를 향해 시종이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 아니시지만, 검은 사슬 기사단의 아리프 경이시네요? 안녕하세요.”
“예, 로벨 군. 여신의 축복이 가득하길. 아리프 브로이어입니다.”
속았다는 불쾌함도 잠시.
마넬라노는 자신들에게 묵례하는 아리프를 탐색했다.
‘아리프 브로이어, 무너져가는 브로이어 남작가에서 배출된 가장 훌륭한 전사…….’
그의 기억에 의하면, 저자는 유순한 눈매와 달리 상당한 실력자였다. 앞에서 약간의 흠이라도 잡히면 곤란한 상대란 뜻이었다.
‘고작 이따위 일로 구설에 오를 순 없지.’
마넬라노는 웃는 낯으로 짧게 인사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