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American Dirt Spoon Gang Village RAW novel - Chapter (104)
미국 흙수저 깡촌에서 살아남기-104화(104/280)
클럽 파운더 3
그날 밤.
미아는 간결하지만 의미를 쏙쏙 알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문서를 만들어 보내왔다.
딱 봐도 3―4시간은 공들여 작업한 게 보일 정도.
나도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공부방 놈들 보내 놓고, 클럽 부스를 설치해도 되는지 학교에 문의도 했고, 아침에 학교 문 열자마자 허락도 받았다.
미아가 만든 자료를 수정, 보완해서 조례가 끝나자마자 미스터 칼에게 가져갔다.
“흠. 이제까지 내가 받은 많은 클럽 계획서들 중 단연 으뜸이군. 좋네. 일도 이 정도로 확실히 할 거라 믿는다. 이건 내가 클럽 총괄과 이사회에 제출하지.”
“감사합니다, 미스터 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큼. 그래. 나도 잘 부탁한다.”
점심시간.
[Asian Cultural Club]포스터 종이에 큼지막하게 적어 테이블 앞에 걸었다.
미아 역시 점심시간 땡 하자마자 와서 일을 거든다.
“저기, 제이든.”
“왜?”
“왜 내 요청에 바로 오케이 했어? 사실 거절할 거라 생각했거든.”
“헐. 완전 당당하게 내밀어서 거절하면 한 대 맞을 것 같았는데?”
“…….”
“농담이야, 농담. 넌 매사에 왜 그렇게 진지하냐? 어쨌든 입양인 클럽은 거절했잖아.”
“그래도 ACC 클럽 만드는데 끼워 주고, 부회장도 바로 시켜 주고.”
“특별한 이유 없어. 그냥 그 클럽은 안 될 거 같아서 이걸로 대체한 거 밖에. 이것도 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해 낸 거라 진짜 하게 될 줄은 몰랐어. 근데 그런 건 왜 물어 봐?”
“그냥… 혹시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인가 해서.”
“같은 마음? 그건 또 무슨 뜻이야?”
“넌 참 잘 지내더라. 늘 밝고, 당당하고.”
“너도 괜찮다며? 아닌 거야?”
“괜찮아. 괜찮은데….”
“요~ 이건 무슨 그림이야?”
그 순간 라이언이 본인과 비슷한 놈들 셋을 거느리고 등판했다.
친구라기보다는 진짜 보스와 쫄따구 같은 느낌이랄까?
“시비 걸지 말고 조용히 갈길 가라.”
“제이든. 너 여친 있다며? 이렇게 막 단 둘이 너무 가깝게 붙어 있고 그래도 되는 거냐? 미스 엘리가 뭐라고 안 해?”
“제이든! 너 여친이 있어?”
내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미아의 물음이 먼저였다.
하. 이놈의 인기.
“어. 여친 있어.”
“그. 그랬구나.”
“무슨 문제 있어?”
“아. 아니. 그냥… 너한테 여친이 있는 줄 몰랐어.”
“…라이언. 넌, 안 가고 뭐해? 뭐. 할 말 있어?”
“그. 그거 하나 줘 봐. 가입 신청서.”
“들어오게?”
“안 되냐?”
“그럴 리가. 몇 장이나 줘? 쟤네들 것도 줘?”
“일단 5장.”
“…우리 클럽이 특별히 가입 조건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나 받지는 않아. 너. 아시아가 어디에 붙어 있는 대륙인지는 알아?”
“헐. 미친 거야? 넌 도대체 날 뭘로 보냐? 당연히 알지. 니가 중국이랑 일본 사이에 쬐끄맣게 있는 한국에서 온 것도 알아!”
“풋. 여기 있다. 내일까지 다 작성해서 가져와. 금요일엔 오피스에 넘겨야 해.”
“오늘 밥스가든에 일하러 올 거지?”
“어.”
“그때 줄게.”
“그러든지.”
“그….”
“뭐? 할 말 더 있어?”
“아냐.”
뭔가 분명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라이언이 애꿎은 가입 신청서만 홱― 낚아채 갔다.
미아와 지 친구들을 의식한 행동이다.
암튼 보여지는 것에 목숨 거는 잘난 맛에 사는 놈이다.
무시하자.
곧바로 오디와 알렉스, 마커슨이 왔다.
“와. 벌써 가입자들 있는 거야?”
“아직. 라이언이 5장 들고 가긴 했는데. 모르지.”
“니들도 빨리 써.”
“어.”
곧이어 교내 아시안 애들이 하나 둘 다가왔다.
9학년의 아시안들은 어차피 이곳에 다 있다.
나, 오디, 미아.
학년 당 3―4명씩 있는 아시안들이 와서 신청서를 가져가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가입해 버리기도 한다.
중국인 남자 2명, 베트남 여자 1명, 필리핀 여자 쌍둥이 2명.
― 근데 이거 가입하면 K-POP 댄스도 가르쳐 주냐?
― 난 포(Pho) 엄청 좋아하는데. 여기 오면 포도 공짜로 먹을 수 있어?
― 일본 애니메이션도 보여 주는 거야?
― 호주는 아시아에 속하는 거냐? 아님 그냥 독립된 개체인 거냐?
― 난 한국 좀비 영화에 관심 많은데. 셋플릭스 보면 한국 좀비는 달리기도 엄청 잘하잖아.
― 소니 손 초대 쌉가능?
.
.
.
생각보다 백인들의 반응이 상당하다.
대부분 호의적인 반응.
실제 가입한 학생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다가와 물어보는 것 자체가 관심 아니겠나.
오히려 부스에 있던 우리가 놀랄 정도다.
“난 곧 졸업이고, 새로 클럽 가입하기는 좀 그래. 이왕 만든 거 잘 됐으면 좋겠다. 내년엔 내 동생도 9학년 되니까 여기 꼭 들어가라고 전할게. 다들 힘내라.”
12학년에 한 명 있는 한국인 여학생이 와서 초콜릿을 주고 간다.
“고맙다. 잘 먹을게.”
“별말씀을. 니가 ‘그’ 제이든이지?”
“내가 제이든은 맞는데. ‘그 제이든’은 무슨 뜻이야?”
“멋지다는 뜻이야. 대입 끝나면 한번 만나자.”
“그래.”
멋지다는데 날 세울 필요 없지.
오디가 미아와 함께 가입 신청서를 정리한다.
“우와. 벌써 23명. 장난 아니다. 아까 라이언이 5장 들고 간 것까지 합하면 28명.”
“그 다섯 명이 다 가입하겠냐? 한 2명만 더해 놔.”
“오케이. 그럼 25명. 그래도 클럽 만든 첫날에 이 정도면 대박인 거야.”
“이제부턴 어떤 프로그램을 짜느냐에 달린 거야. 캡틴. 우리 언제 모여? 회의해야지. 근데 클럽 오피서들은 다 정한 거야?”
“음. 지금은 내가 회장, 미아가 부회장, 담당 샘은 미스터 칼. 이 정도지.”
“미스터 칼? 우리 미스터 칼?”
“어.”
“대박. 나. 총무할게.”
“그래. 오디가 총무.”
“그럼 난 홍보! 나한테 딱 맞지 않냐?”
“알렉스가 홍보. 마커슨 너는 뭐 할래?”
“근데… 나 아시아 문화에 대해 전혀 몰라. 근데 뭘 맡아도 되는 거야?”
“마커슨, 자신감을 가져. 다른 놈들은 알겠니? 나는 알겠어? 내가 볼 땐 캡틴은… 잘 모르겠지만 미아나 오디도 잘 모를걸?”
“알렉스, 걱정하지 마. 나 요즘 아시아 역사에 대해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마커슨, 그냥 일반 회원해도 괜찮아. 한 1년 보다가 내년에 오피서 해도 되지.”
“오케이. 그럼 난 그렇게 할게.”
.
.
.
좌판을 펼친 첫날이지만 시작이 좋다.
생각지도 못하게 클럽을 하나 만들긴 했지만 메이저는 디베이트다.
ACC는 문화 교류 차원, 디베이트는 경력 쌓는 용으로 사용하면 될 것 같다.
예전에 크리스틴이 고등학교 가면 본인 하기에 따라 엄청 바빠질 거라더니.
입학 한 달 만에 스케줄이 꽉 차 버린다.
시간 조율이 필요하겠다.
* * *
오후 4시 30분.
오늘도 메디슨네에 들러 엘리에게 인사를 하고, 밥스가든에 갈 준비를 했다.
우리 엘리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똥도 잘 싸고….
암튼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나는 중이다.
엘리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자전거를 타려는데,
― 빵빵.
누가 차를 빵빵거린다.
이 동네에서 경적(Horn)을 울리다니.
우리 엘리 이제 막 잠들었는데.
어떤 놈의 시키인지 보려고 고개를 번쩍 드니 라이언이다.
우리 집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아.
마크 아버지가 계시는구나.
“왜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고 난리야?”
“기껏 생각해서 와 줬더니.”
“뭐래?”
“타라고.”
“뭐?”
“자전거 위험하잖아. 그냥 내 차 타고 가자고.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올 때는?”
“걱정 마. 태워 줄 테니까.”
“이러는 이유가 뭐야?”
“아! 이유가 어딨어. 탈 거면 타고, 말 거면 말고!”
“그냥 가. 나 괜찮으니까.”
“칫. 그러든지.”
― 부우웅.
뭔 저런 놈이 다 있는지.
라이언이 진짜로 가 버렸다.
우리 공부방 놈들도 만만찮긴 한데, 저놈은 정말 지랄 맞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30분 후.
밥스가든(Bob’s Garden)에 도착하니 라이언이 볼이 뚱한 채로 기다리고 있다.
“제이든! 늦었잖아. 내 차 타고 같이 왔으면 안 늦었지.”
“2분 늦었다. 2분. 어우. 진짜 우리집엔 왜 온 거냐?”
“근데 너네집은 그 골목 끝이라던데. 왜 그 집에서 나와?”
“내 맘이지.”
“…엘리가 그 집에 있어?”
“스토커냐? 알려고 하지 마라. 딜런, 오늘은 뭐 하면 돼요?”
“어? 어. 저쪽에 쌓인 낙엽들 좀 모아서 포대에 담아 주고, 나무들 정리 좀 해 줘. 낙엽은 괜찮은데 나뭇가지들은 뾰족한 것들 많으니까 찔리지 않게 조심하고.”
“네.”
“딜런. 제이든 늦은 거 돈 차감해야 돼요. 꼭.”
“내가 2분 늦게 퇴근한다. 됐지?”
“…….”
라이언이 씩씩거리며 송풍기(Leaf blower)를 멘다.
라이언이 송풍기를 멨으니, 라이언이 송풍기로 모은 낙엽을 긁어모을 갈퀴와 담을 포대를 들고 작업장으로 향했다.
― 부우우우우웅.
나뭇잎을 모으는 송풍기는 무척 시끄럽다.
그리고 먼지도 많이 날린다.
라이언이 작업을 하면 내가 갈퀴로 모았고, 라이언이 포대 입구를 벌리면 내가 나뭇잎을 넣었다.
지난 주에도 느꼈지만 라이언이 생각보다 일을 잘한다.
“얘들아, 이거 마시고 잠깐 쉬어. 뭔 고딩들이 이렇게 일을 잘해?”
“와. 뭔데?”
“자. 소다(soda)지 뭐. 콜라랑 스프라이트, 루트비어(Root Beer, 맥주맛 나는 소다 음료) 있는데 뭐 마실래?”
“전 스프라이트요.”
“난 콜라.”
“오케이. 그럼 난 루트비어.”
스프라이트를 마시려는데 입이 쓰다.
손등으로 스윽― 입을 닦으니 먼지가 많이 묻어난다.
그 모습을 본 라이언이 바지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냅킨을 꺼내준다.
분명 처음엔 하얀색이었을 냅킨은 송풍기 먼지로 인해 누렇게 변해 있었다.
“어쩌라고?”
“입 닦으라고.”
“…이걸로?”
“아씨. 말든가. 나나 닦지 뭐.”
이것은 엿먹으라는 건가? 아님 신종 밀당인가?
― 슥슥.
“풋. 제이든. 라이언 저러는 거 지 딴에 잘해 주려고 그러는 거야. 얘가 맘에 드는 친구한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교육을 못 받아서 그래. 서운해하지 마.”
“딜런!”
“라이언, 내가 누누이 말했지? 말 예쁘게 하라고. 그렇게 하다간 싸가지 없다는 소리만 듣는다고.”
“내가 뭐! 딜런이 안 봐서 그래. 얘가 아까도 내가 일부러 지네 집까지 가서 라이드 해 주겠다는데 됐다고 꺼지라고 했다니까.”
“와. 야. 사람을 그렇게 모략해도 되는 거냐? 내가 언제 꺼지라고… 됐고. 사람이 정확히 말을 해야 알아듣지. 너 내가 그 시간에 안 나왔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그냥 오는 거지. 뭘 어째.”
“담부터는 연락을 해. 라이드 해 주려는데 내 차를 타겠냐고 물어도 보고.”
“…….”
― 띠리리링.
라이언의 휴대폰이 울린다.
갑자기 표정이 급 해맑아지는 라이언.
이제까지 본 중 가장 높은 톤으로 전화를 받는다.
― 어. 어디? 진짜? 어. 지금 가지. 당연. 기다려 꼭! 어디 가면 안 돼!
“딜런. 나. 가.”
“아빠 왔어?”
“어.”
“이번엔 언제 간대? 또 바로 간대?”
“몰라.”
“그래. 얼른 들어가. 밥 사장님께는 내가 말해 줄게.”
“어. 고마워. 딜런.”
“어어.”
“제이든. 내일 보자.”
“그래. 운전 조심하고.”
“…니가 걱정 안 해 줘도 되거든.”
아.
급 피곤하다.
또 다른 철없고, 성질 못된 어린이가 나타난 느낌이다.
“라이언 아빠가 물류 배송하거든. 저놈 어릴 때 1년 아팠다고 했잖아. 병원 빚이 어마어마하게 나왔는데, 그거 아직 청산을 못 해서 쉴 틈 없이 전국을 돌고 있어. 플로리다도 갔다가 캘리포니아도 갔다가 뉴욕도 가고.”
“…….”
“세상에서 아빠를 젤 좋아하는데, 아빠 얼굴 보는 날이 얼마 없어서 아빠만 온다면 저렇게 좋아서 날뛰는 거야. 학교에서 수업하다가도 튀어온다니까. 저놈 성격이 저렇게 천방지축인 것도 감정 컨트롤하는 걸 못 배워서 그래.”
“…….”
“아빠가 오면 너무 좋고, 가면 너무 싫고. 그런데 자기 때문에 생긴 빚이라 생각하니 가지 말라고 잡을 수도 없고. 그 마음이 복잡하지 않겠냐? 다행이 풋볼에 재능도 있고, 생긴 것도 멀쩡하니 붙어 있는 친구들은 있는데, 마음 터놓고 지내는 친구는 없는 거 같아.”
“…….”
“잘 좀 해 줘라. 너한테 꽤 기대고 싶은 눈치더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딜런이 주저리주저리 라이언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마커슨 같은 놈이 또 나타났다.
내 전생이 짠해서 그런가 이런 놈들이 나타나면 외면하기가 힘들다.
미치겠네.
라이언 해밀턴
딜런이 남은 루트비어를 쭈욱 마시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안 되겠다. 오늘은 너랑 나랑 일해야겠다. 빨리하고 가자.”
“네.”
딜런과 일을 하는데 왠지 재미가 없다.
그새 라이언의 천방지축이 익숙해졌나?
시끄럽게 떠드는 녀석이 없으니 일의 진척은 빠르다.
“오늘 수고했다. 금요일에 봐.”
“네.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 끼이이이익.
어느새 일을 끝내고 자전거를 타는데, 라이언의 지프차가 급하게 달려와 멈춰 섰다.
“제이든, 스탑! 기다려!”
“뭐 놓고 갔어? 왜 다시 왔… 어? 안녕하세요?”
“안녕, 니가 제이든이구나.”
덩치도 좋고, 인상도 좋은 아저씨가 보조석에서 내린다.
머리카락을 완전히 밀어 버린 민머리라 라이언과 닮았는지 아닌지 구분이 잘 안 간다.
눈동자 색이 짙은 푸른색이라 라이언의 아버지가 아닐까 짐작만 될 뿐.
“네. 제이든 패터슨입니다.”
“라이언 해밀턴이다. 아. 나는 라이언 시니어 해밀턴이고, 라이언은 라이언 주니어 해밀턴이지.”
미국인 중에는 아빠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할아버지와 아들, 손자가 같은 이름을 가지는 경우도 가끔 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부를 때나 문서 작성 같은 때 굉장히 번거로울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이름을 짓는지 모르겠다.
그저 자기애가 넘쳐서 그런가 보다 할 뿐.
“헤이. 미스터 해밀턴. 어떻게 왔어요?”
“아. 딜런. 잘 지냈어? 밥은 퇴근했고?”
“그럼요. 연락해 드려요?”
“아냐아냐. 담에 오면 만나지 뭐. 뉴욕 가는 길에 잠깐 들른 거라 새벽 일찍 출발해야 해. 오늘은 라이언이 제이든이란 친구를 꼭 만나야 한다고 하도 난리를 쳐서 급하게 온 거야. 먼저 들어가. 우리도 바로 갈 거야.”
“하하. 제이든, 정말 멋진 친구죠. 라이언이 사람 보는 눈은 있잖아요. 그럼 저 먼저 갈게요.”
“하하. 그래. 그래. 담에 보자고.”
라이언이 항상 밥 아저씨가 자기 아빠 친구라고 하더니 직원들도 종종 알고 지내는 사이인 모양이다.
딜런이 차를 타고 출발해 버렸다.
― 휘이이잉.
9월 중순이라 밤 온도는 차갑다.
자전거 타고 가려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가야 한다.
“내일은 비가 오려나. 달도 없고, 날이 어둡네. 너만 괜찮다면 우리가 태워 줘도 될까? 자전거는 거치대에 실으면 되는데.”
“네. 저야 감사하죠.”
“칫. 내가 태워 준다고 할 때는 괜찮다더니.”
“라이언?”
“아. 그냥 말이 그렇다고. 추우니까 빨리 타.”
라이언이 후다닥 운전석에 올라탄다.
“제이든. 니가 보조석에 타. 내가 뒷좌석에 탈 테니.”
“아. 네.”
자전거를 싣고 자리를 잡았다.
라이언이 천천히 운전을 시작한다.
자전거로 이동하면 30분이지만 차로 가면 10분 거리밖에 안 된다.
시니어 라이언이 굳이 이 밤에 저 천방지축을 따라 다시 일하는 곳으로 온 것은 아마 내 호구조사 때문일 것이다.
차에 타자마자 뒷좌석에 앉은 라이언의 아버지가 앞쪽으로 몸을 내민다.
운전이 직업이신 분이 안전벨트 안 하시냐고요.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질문이 쏟아진다.
“그. 제이든. 이런 말 하면 기분 나쁠지 모르겠는데, 난 니가 아시안이라 정말 좋구나. 사람들은 물류배달을 하면 혼자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냐. 진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돼. 그리고 내가 만난 대부분의 아시안들은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했지.”
“…….”
“라이언이 전화로 베스트 프렌드랑 같이 밥스가든에서 일하게 됐다고 해서 당연히 백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니가 있어서 솔직히 좀 놀라긴 했다. 반갑다. 진짜.”
“베스트 프렌드요?”
“어. 아냐? 흠. 고등학교 가서 사귄 제일 친한 친구라던데?”
미친 건가?
기가 막혀 라이언을 힐끗 보았지만 내 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귀까지 빨개진 걸 보면 이 상황이 엄청 부끄러운데, 딱히 아빠를 제지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보통 같으면 아빠에게 ‘그만해라’라는 등의 짜증을 냈을 텐데.
의외다.
“맞아요. 베스트 프렌드. 삽질하다 친해졌죠.”
“그래. 남자들은 삽질하면서도 친해지고 그러는 거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못하는 게 없다고? 우리 라이언에게 이런 멋진 친구가 생기다니. 정말 기쁘구나. 하하하.”
“음. 운동은 모르겠고. 일단 공부는 잘해요.”
“아하하하. 대놓고 자기 공부 잘한다고 하는 아시안은 첨 본다. 으하하하. 다들 지나치게 겸손하던데. 당당하고 좋아. 난 말이야. 사실 라이언이 풋볼을 그만뒀으면 좋겠어. 애가 어릴 때 좀 아팠거든. 들었지? 근데 9학년인데도 주전으로 발탁됐다고 하니 그만두라고 할 수도 없고. 나름 속을 썩이고 있는 중이지.”
멕이는 건가?
풋볼에 대한 건 자랑처럼 들리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진심인 것 같긴 하고.
애초에 이제는 졸업해서 플로리다로 가 버린 크리스를 따라 한 거라고는 했는데.
그나저나 라이언은 왜 이렇게 천천히 운전하는 거야.
“제이든. 학생들이 모두 너랑 친구하고 싶어 한다며? 그런데도 우리 라이언이랑 제일 친하게 지내 준다니 정말 고맙구나. 혹시 우리 라이언 괴롭히는 친구들은 없니? 풋볼 선수라 크게 걱정은 안 하지만 그래도 애가 성정이 착하고, 조용하니 나쁜 놈들이 건드릴까 항상 걱정이란다. 학군 점수가 낮은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거든?”
“예에?”
나도 모르게 혀가 꼬인다.
이쯤 되니 이 아버지 푼수인 게 확실하다.
확― 진실을 불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한 달에 한 번 정도 겨우 만난다는 이야기를 좀 전에 들었는데, 인정상 그럴 수는 없지.
“큼. 학군 점수가 좀 낮은 건 이 지역 시민들의 소득수준이나 부모들의 학교 행사 참여도 때문인 것 같아요. 프리 런치를 먹는 학생들이 많고, 부모들이 생계로 바쁘다 보니 학교 행사 참석률이 저조할 수밖에 없는 거죠. 뭐. 간혹 험한 친구들도 있긴 하지만 규율이 빡세서 다른 친구를 괴롭히거나 하는 일은 잘 없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와아. 넌 진짜야.”
“네?”
“제이든. 우리 라이언 좀 부탁한다.”
뜬금없이?
이 맥락 없는 대화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뭐라 대답을 못하고 있자 시니어 라이언이 내 어깨를 붙잡는다.
“나도 알아. 우리 라이언이 몸은 잘 쓰는데 공부는 좀 못하지. 네 말대로 내가 사느라 바빠서 애 어릴 때 책을 못 읽어 줬거든. 넌 뭐랄까? 사용하는 단어가 다른 것 같아. 성격도 진중한 데다 말도 가려할 줄 알고. 게다가 알바까지. 우리 라이언이 너처럼만 자라준다면 정말 소원이 없겠구나.”
“…….”
“라이언 주니어 해밀턴.”
“왜?”
“이 친구를 잃지 않도록.”
“걱정 마. 아빠. 내가 말했잖아. 내 베스트 프렌드라니까.”
“그래그래. 아빠가 이제야 진짜 한시름 놨다. 하하하. 잠깐이지만 집에 들르길 잘 한 거 같아.”
“…자주 와.”
라이언의 아버지 라이언.
자신이 채워줄 수 없는 부분들을 이런 식으로 채워 왔구나.
라이언이 왜 카피캣이 되었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 탁. 덜그럭.
“라이언, 태워줘서 고맙다. 내일 학교에서 보자.”
“어. 내일 보자.”
“미스터 해밀턴,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뵙겠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그래그래. 들어가라.”
라이언의 차에 매달아 둔 자전거를 내린 후 인사를 했다.
그새 보조석으로 자리를 옮기는 라이언의 아버지.
부자간의 정이 돈독하다.
갑자기 라이언의 가정환경이 궁금해졌다.
라이언에게서 아직까지 ‘엄마’라는 단어를 들어 본 적이 없다.
내일 알렉스에게 물어봐야겠다.
졸지에 라이언의 베스트프렌드가 된 날이었다.
* * *
다음 날 점심시간.
오늘은 나와 미아의 점심시간이 서로 다르다.
미아가 오디와 함께 먼저 ACC 클럽 부스를 펼쳐 두었고, 뒤에 내가 알렉스와 함께 이어받았다.
점심을 받아와 대충 먹고, 가입 신청을 받았다.
어제보다는 적은 수였지만 그래도 5―6명이 왔다갔다.
“밥스가든 일은 할 만하냐? 요새 공부방에 너 없는 날 많아서 다들 불만이 많아. 돈 벌어서 뭐 할 거야?”
“이그. 일주일에 고작 이틀이다. 그냥. 랩탑 사려고.”
“랩탑? 까짓 거 내가 우리 집 금고 털어?”
“아서라. 이제 디베이트 트립도 거의 매주 있을 거고, 이거 ACC도 꾸려가야 하고, 우리 엘리 맛있는 것도 사 줘야 해. 고등학생씩이나 돼서 매번 엄마에게 손 벌릴 순 없잖아. 용돈 벌어야지.”
“역시 우리 캡틴. 난 그냥 엄마한테 받을래.”
“하하. 그래라.”
― 탁.
그 순간, 라이언이 종이쪼가리 하나를 탁― 내려놓는다.
어색해 죽겠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면서도 표정은 거만하기 짝이 없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하고 싶은 모양이나 엄청 어설프다.
“아버지는 잘 가셨냐?”
“…어. 새벽에.”
“그래. 자주 전화드려.”
“안 그래도 그러고 있거든?”
“흠. 한 장이네? 가져갈 땐 다섯 장 가져가더니.”
“그. 다른 애들도 데려올까 했는데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아서.”
“잘했어. 하고 싶은 사람만 오면 돼. 음. 일반 멤버들은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주 월요일 아침에 모임 있고, 임원이면 일주일에 한 번 월요일 홈베이스 시작 전 10분 정도 모일 거야. 넌 뭐 할래?”
“…임원.”
“임원은 총 7명이고 현재 잡부 남았어. 할래?”
“어. 그건 뭐 하는 건데?”
“점심은 먹었고?”
“어? 어. 금방.”
“그럼 앉아.”
“뭐?”
“잡부 한다며? 임원이면 바로 일 시작해야지. 조금 있으면 마커슨 오니까…아. 저기 온다. 마커슨!”
마커슨이 오다가 라이언을 보고는 손을 흔든다.
생각보다 반가워하는 표정.
“어? 라이언? 너도 ACC 가입한 거야?”
“어. 잡부하래.”
“오오. 나도 잡분데. 좋다. 좋아. 난 파워포인트나 홍보 영상 같은 거 만들 거야.”
“잡부가 2명이나 있어?”
“아니. 3명인데? 여기 알렉스까지. 우리 캡틴은 회장, 미아는 부회장, 오디는 총무. 나머지는 다 잡부야. 캡틴. 잡부 몇 명이나 더 뽑을 겨?”
“이제 시작하는 건데 3명이면 충분하지. 이제 ACC 임원진 모집은 끝.”
“뭐야? 독재야? 같이 의견을 교환하는 게 아니고 제이든이 하자면 그냥 끝인 거야?”
“어. 끝이야.”
“…….”
“그럼 둘이 앉아서 신청서 받아. 우린 수업 있어서 간다.”
“어. 제이든, 오늘은 공부방에 와?”
“늦어. 오늘 디베이트 모임 있어.”
“그래. 그럼 우리 먼저 가 있을게.”
“어.”
우리의 대화를 유심히 듣는 라이언.
“근데 너네 공부방 클럽 말야. 어디서 모이는 거야? 엄청 자주 모이는 거 같은데?”
“아. 그거.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듣고 나와 알렉스는 자리를 떴다.
“제이든! 이쪽으로 와 봐! 챌린지 하자. 챌린지.”
“수업 가야 해요. 다음에요.”
“핫바 줄게. 옆에 친구도. 알렉스 맞지?”
“수업이요!”
군인 1과 2가 붙잡는다.
수업을 핑계로 도망쳤다.
붙잡히면 귀찮다.
* * *
방과 후 디베이트 모임.
오늘 모인 총인원은 20명.
라틴 선생님이자 디베이트 전담 선생님인 미스터 크롭스키도 함께다.
그리고 디베이트의 회장은 12학년 ‘아벤 세샨’으로 인도인이다.
현재 우리 학교 12학년엔 5명의 아시안이 있다.
그리고 그 아시안 학생들은 대부분 클럽의 회장이나 부회장 직함을 갖고 있다.
백인들이 주로 스포츠나 취미 쪽 회장을 맡고 있다면, 아시안들은 주로 머리 쓰는 쪽이다.
수학올림피아드, 과학올림피아드, 디베이트, 체스, 스펠링 Bee, 북클럽, TSA, HOSA 같은 것들은 주로 아시안들, 펜싱이나 낚시, 드라마 작가, 뮤지컬, 마술 같은 것들은 주로 백인이 많다.
흑인들은 농구나 트랙에 집중적으로 포진해 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현재 우리 고등학교에 만들어져 있는 클럽은 대략 70개.
그중 몇 개는 이름만 있는 가짜 클럽이다.
“우리 오피서. 제이든. 어서 와.”
“어서 와.”
.
.
.
환영 인사가 지나가자 곧바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있을 디베이트 참석 때문이다.
“토요일 아침 7시 10분 정각에 버스는 떠날 거야. 절대 늦으면 안 돼. 남자는 정장, 여자는 단정하게 입고. 머리도 최대한 깔끔하게 넘겨. 구두 신어야 한다는 건 다들 알지? 점심은 10불이고, 돌아오는 시간은 오후 7시. 저녁은 없어.”
고등학생이 된 후 첫 번째 디베이트 클럽의 대회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