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American Dirt Spoon Gang Village RAW novel - Chapter (103)
미국 흙수저 깡촌에서 살아남기-103화(103/280)
클럽 파운더 2
마커슨과 라이언의 일은 생각보다 잘 풀린 것 같다.
경찰관 3명이 돌아가면서 지켜봤다면 서로 원수지간이라도 친한 척을 해야 했을 거다.
학교 경찰관님들.
무섭다.
안 걸리게 조심해야지.
마음을 다잡고 보면대에 놓여 있는 바순 악보를 쳐다보았다.
총 5분에 걸쳐 연주되는 곡.
미스터 커나스 덕분에 악보를 보는 눈이 좋아졌다.
미스터 벤이 ‘Ride of the Valkyries’ 오케스트라 협주곡을 편곡한다고 할 때부터 원곡 악보를 봐 두었다.
그렇기에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악보가 얼마나 공이 들어간 것인지 바로 알았다.
미스터 벤, 말은 많지만 진짜 예술인으로서의 혼을 불사른 모양이다.
9학년쯤 되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악보를 보자마자 어느 정도 곡을 연주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
우리 학군은 4학년 때부터 밴드부가 시작된다.
따로 개인 레슨을 받지 않아도 학교에서 5년이란 시간 동안 밴드부에 몸담고 있다 보면 대충 하게 되는 거다.
그럼에도 오늘 악보는 조금 난해하다.
삑사리들이 자꾸 난다.
미스터 벤이 지휘봉을 마구 흔든다.
― 에헤이. 그게 아니라니까. 8분의 9박자라고. 8분의 9박자. 여기선 탁. 탁. 탁. 강렬한 사운드로 스타카토(staccato) 찍으라고. 다시 해 보자. 어? 호흡 크게 하고. 어려우니까 잘 따라와야 한다?
― 오케이. 다음. 클라리넷. 오늘은 모처럼 6명이나 있군. 좋아 좋아. 엠마. 니가 퍼스트체어니까 중심 잘 잡아 주고. 시이작!
― 와우. 역시 제이든. 오늘은 바순이 너 혼자라 더 손댈 게 없긴 한데. 카를로는 목요일 딱 하루 밴드라. 흠. 그때 리드 좀 잘 해 줘라. 다음엔 프렌치 혼!
.
.
.
고등학교 들어오고 이제 거의 1달이다.
나를 비롯해 공부방 9학년 놈들은 모두 주 5일 밴드 수업이 있는데, 오늘 처음으로 90분 꽉 차게 수업을 한 것 같다.
미스터 벤의 짙은 고동색 머리카락이 어느 순간 검은색으로 변했다.
땀에 절어 색이 진해진 거다.
“헉헉. 열정을 불살랐어! 좋았어. 다들 고생 많았다. 내일 보자.”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미스터 벤.
인사할 힘도 없는지 팔을 허우적거리며 우리를 쫓아낸다.
― 딩딩딩딩.
오늘 하루의 마무리를 위해 홈베이스에 들어섰다.
“오늘로 너희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딱 한 달이 되었구나. 내일부터는 종례 시간이 없으니 아침에만 잠깐 들러 얼굴도장 찍으면 된다. 특별히 부탁할 것이나 상담할 일이 있으면 들러도 된다. 내 교실은 언제든 열려 있다. 이상.”
9학년들이 고등학교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시간 한 달.
10학년부터는 아예 첫날부터 조례 시간만 있다고.
미스터 칼의 표정이 왠지 밝아 보이는데… 그동안 우리가 귀찮았던 걸까?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간다.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 미스터 칼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제이든, 무슨 할 말 있나?”
“네, 미스터 칼. 아시안 컬처 클럽을 만들려고 합니다. 클럽의 담당 선생님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허락하시면 자세한 내용들은 내일 서면으로 제출하겠습니다.”
“음. 좋아. 내일 이 시간까지 가져오도록. 보고 결정하지.”
“네,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승낙받은 것이나 마찬가지.
기분 좋게 스터디 홀로 갔다.
* * *
점심시간엔 알렉스와 오디도 오겠다고 설레발을 치더니, 수업이 끝나니 잊은 모양이다.
스터디 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미아와의 약속 시간까진 20분 정도 남았다.
숙제를 꺼냈다.
오늘은 영어 에세이 쓰기와 수학 워크시트 1장.
에세이는 컴퓨터로 작성한 후 이메일로 선생님께 보낸다.
하지만 지금은 컴퓨터가 없으니 캘큘러스 AB를 꺼냈다.
한국에서처럼 노트 하나 가득 풀어내지 않는다.
계산기에 이미 장착되어 있는 각종 문자열들을 공식에 맞게 이리저리 누르다 보면 작은 화면에 그래프가 그려진다.
그거 그대로 그래프 페이퍼(Graph paper, 모눈종이)에 옮겨 그리면 된다.
물론 어떤 공식을 적용했는지 등의 풀이식은 적어야 한다.
계산기가 100불 넘는 거라 처음 살 때 좀 비싼 게 흠이긴 하지만 공부의 양은 절대적으로 줄어든다.
프리알지브라를 시작할 때 사면 이과 계열에서는 박사 과정까지도 쓰는 거니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겠다.
쪽지 시험은 물론이고, 후에 SAT를 칠 때도 계산기는 필수다.
1장짜리 수학 숙제가 끝나는데 걸리는 시간은 정확히 15분.
영어 에세이 숙제를 손으로 쓸까 하다가 관뒀다.
아무래도 랩탑(Laptop, 노트북)을 장만할 때가 된 모양이다.
지난주에 밥스가든에서 벌은 돈 120불에, 모아놓은 돈 200불 정도를 꺼내면 쓸 만한 랩탑을 살 수 있겠지.
고등학생이 되면 대부분 랩탑을 들고 다닌다.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 혹은 공강 시간에 숙제를 하면서 사용하기도 하고, 역사나 생물, 영어같이 랩탑이 허용되는 클래스에서 사용하기도 한다.
요즘엔 랩탑 보다 ‘태블릿 노트’를 더 선호하긴 한다.
무엇보다 가볍고, 수업 시간에 화면 때문에 얼굴을 가릴 일이 없으니 선생님들도 더 좋아한다.
사실 학교에서 크롬북을 빌려주기는 한다.
9학년 때 빌리면 12학년 졸업할 때 반납하면 된다.
크롬북은 용량이 적고, 설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거의 없어서 신청 안 한 건데 뒤늦게 후회가 밀려온다.
웹 쇼핑몰을 뒤져 보려는데, 미아가 도착했다.
“미안. 우리 홈베이스 선생님이 워낙 말이 많으셔서. 오늘이 9학년 종례 마지막 날이라고 어찌나 이것저것 잔소리가 많은지. 스쿨버스 타야 하는 애들이 많아서 겨우 끝났다니까.”
미스터 칼은 상남자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오늘 종례는 진짜 3분도 안 걸린 거 같은데.
“괜찮아. 덕분에 수학 숙제 다 했어.”
“와. 진짜? 너 캘큘러스 AB 듣는다며?”
“어.”
“난 아직 알지브라 2인데. 그것도 우리 부모님은 대단하다고 맨날 칭찬하셔. 다른 형제들은 다들 일반수학만 듣거든.”
“형제들도 있어?”
“어. 1남 3녀 중 둘째야. 입양은 나 혼자고, 나머지는 친자식. 부모님이 결혼기념일로 인도 여행 갔다가 날 만났거든. 고아는 아니었고… 부모가 팔았다고 하더라고. 그 뒤로 지금 부모님한테 오는 데까지는 한 1년 정도 걸렸대.”
“…….”
“뭐.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아시아 쪽 입양은 좀 쉬웠잖아. 특히 우리는 많이 시골이었어서. 요즘엔 좀 어려워졌다고는 하더라만 그래도 백인들 입양하는 것보다야 쉽겠지. 큼. 암튼 다들 찐 가족처럼 잘해 줘.”
“그래. 다행이네.”
입양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정식으로 기관에 문의해서 절차 하나하나 밟아 오는 경우는 3―4년 이상 걸리기도 하지만 안 그런 경우는 몇 개월 만에도 가능하다.
가난한 아시아의 나라는 좀 더 쉽다.
미아의 말에서 걸리는 건 ‘찐 가족처럼’이다.
지금의 가족들이 아무리 잘해 준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장벽이 있는 거다.
내가 어릴 때 엄마와 밖에 나갈 때마다 느끼던 그런 감정들.
부모 형제가 같은 인종이면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른 형제들이 없기에 집에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지만 미아는 집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는 모양이다.
왜 ‘입양인 클럽’을 만들자고 했는지 살짝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어찌됐든 가족들이 잘해 준다고 하니 불편함 속 다행이다.
“그거. 좋은 거 같아.”
“어? 어떤 거?”
“아시안 컬처 클럽 말야. 내가 인도인이긴 하지만 인도 문화 잘 모르거든. 가끔 인터넷으로 찾아 보긴 하는데. 그래도 잘 모르겠더라고.”
“어릴 때 왔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한국말도 잘하고, 그쪽 문화도 잘 알아? 한국에서 산 시간은 얼마 안 된다고 들었는데? 너 3학년 때 한국 정부에서 학교로 책도 막 배달받게 하고 그랬다며?”
“음. 난 전생을 기억하거든.”
“뭐? 진짜? 니 전생은 어땠는데? 와. 신기해.”
“그걸 믿으면 어쩌겠다는 거냐?”
“…….”
처음 만남부터 너무 어두운 이야기를 줄줄 뱉어 내기에 분위기 전환하라고 건넨 농담이었는데 그걸 진지하게 받다니.
식겁했다.
“빨리 시작하자. 액티비티 버스는 타야할 거 아냐.”
“어. 그래.”
“일단 이름은 아시안 컬처 클럽이고, 줄여서 ACC. 담당 샘은 미스터 칼이 해 주실 거 같고. 9학년부터 12학년까지 우리 학교 학생들 중 아시안 전부 다 가입한다고 해도 총 15명. 그거 가지곤 좀 부족하니까 아시아 문화에 관심 있는…”
“모임은 일주일에 한 번은 임원 모임하고 2주에 한 번 정도 모이는 거 어때?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이나 분기에 한 번 정도 크게 행사를 열어서…”
“그럼 회비는…”
.
.
.
내가 전체적인 그림을 잘 그린다면 미아는 그 속에서 구체적이고 세세한 방안을 잘 짜는 스타일이었다.
1시간이 그냥 훅 지나갔다.
액티비티 버스 올 시간이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니 미아가 우리가 끄적거리던 종이들을 챙긴다.
“이건 내가 집에 가서 정리해서 이메일로 보내 줄게. 바로 확인하고, 잘못된 거 있으면 연락 줘.”
“내가 해도 되는데.”
“아냐. 나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해. 문자할게.”
“그래.”
공부방 놈들과는 또 다른 든든한 조수가 생겼다.
고등학생이 되니 인간관계들도 늘어나고, 생활 반경도 넓어지는 것 같다.
집에 도착하니 공부방 놈들이 이미 와서 베이스먼트에 깔려 있다.
이제는 우리 집이 아주 공공장소가 된 것 같다.
미세스 베서스가 돌아가시면서 남겨 준 공부방이라 쫓아낼 명분도 없네.
어떻게 보면 집이 비는 경우가 잘 없으니 든든하기도 하고, 그냥 늘어지며 쉬고 싶은 경우엔 좀 귀찮기도 하다.
다행이 다들 눈치는 있어서 베이스먼트에서 1층으로 올라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출입구도 아예 베이스먼트로 통하는 것만 이용하고.
“어이. 제이든. 왔냐?”
“언제 왔어?”
“학교 끝나고 바로 왔지. 오늘 크로스컨트리 없었잖아.”
“거기 샌드위치 먹어. 할머니가 싸 줬어.”
“마커슨. 할머니께 늘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
“니가 해. 바로 옆옆집인데 뭘 나한테 말하라고 시키냐?”
“그래. 니가 오늘 하루 힘들었지? 할머니께 내가. 굳이. 가서 잘 말씀드릴게.”
“어우야. 캡틴. 내가 할게. 예쁘게. 군소리 없이.”
“오늘 마커슨 벌 받은 거 비밀이래.”
“이 동네에서 그게 가능할 거 같냐? 하루빨리 자수하고 광명 찾아.”
“…꼭 그래야 할까?”
“너 요즘에도 맞고 다녀?”
“이젠 컸다고 자주는 안 때려. 가끔 등짝 정도지. 하나도 안 아파. 근데 너네 그거 아냐? 유럽인들도 애들 엄청 때려. 나 전에 할머니랑 월마트 갔다가 어떤 백인 아줌마가 2살짜리 정도로 보이는 여자애 뺨때리는 거 봤다니까.”
“프렌치지?”
“오. 마크. 어떻게 알았어? 프랑스어 하더라고.”
“나도 들었어. 프랑스랑 스위스 같은 데서도 애들 훈육 엄하게 한다고 하더라. 우리 집은 어릴 때부터 다락방에 가두었거든? 근데 이게 진짜 공포다? 차라리 한 대 맞고 말지. 으으. 그 작은 다락방에 갇혀 있다 보면 평소엔 신경도 안 쓰던 작은 소리들까지 진짜 무섭게 느껴진다니까.”
“그래서 크리스틴이 성격이 저렇게 된 거구나?”
“…마크으! 한동안 잠잠하다 했지?!”
타임아웃이나 그라운드라는 불리는 미국식 체벌.
3살 미만일 때는 의자에 꼼짝없이 3분 동안 앉아 있게 시키기도 하고, 벽을 보고 서 있게도 한다.
킨더부터는 보통 일정시간 동안 다락방이나 본인방에 가두고 나오지 못하게 한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들락거리던 공간이 형벌로 바뀌는 순간 무서움이 찾아오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괜히 폐쇄공포증을 많이 앓는 게 아니다.
진짜 차라리 한 대 맞고 마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제이든, 그래서 아시안 컬처 클럽은 진짜 해 보려고?”
“어. 생각보다 할 만할 거 같아. 미아가 내용 정리해서 보내 준다고 했으니까 기다려 봐야지. 너희들도 다 등록할 거지?”
“당연하지. 누가 파운더인데.”
“오케이. 근데 처음엔 20명 정도 이름 필요하지 않아?”
“맞아.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5명이라도 처음 설립할 때는 20명은 필요해. 우리 다 합해도… 중학생인 헤나랑 조나단 빼고도 너까지 8명밖에 안 되는데. 제이든, 괜찮겠어? 선생님은 정해졌고?”
“걱정들을 말아라. 20명은 무슨. 내가 볼 땐 50명도 금방 모일걸?”
“알렉스. 너무 낙관하지 마. 사람 모으는 거 생각보다 어려워.”
“일단 내일 점심시간에 부스 만들어서 기다려 봐야지. 학교에 있는 아시안들 다 하면 대충 15명 정도 되는데, 그중 반 정도는 등록하겠지. 선생님은 미스터 칼이 해 줄 거 같고.”
“역시. 우리 캡틴은 다 계산이 섰어. 할 수 있을 거야.”
“맞아. 우리 캡틴! 할 수 있다!”
“알렉스, 마커슨. 그거 뭐지? 너희는 이미 우리 클럽 멤버야. 내일 점심때 부스로 와야지.”
“다. 당연하지.”
“나도 당연히 부스로 가려고 했어. 오디는?”
“뭐래. 쟤는 이미 사인업까지 끝났는데.”
“내가?”
“어. 아시안이잖아. 일단 9학년 아시안은 너랑 나, 미아까지 총 3명밖에 없는데 당연히 들어와야지. 아냐?”
“어우. 맞지. 난 이미 ACC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었어.”
“으하하하. 쟤 언제부터 저렇게 능청스러워졌대?”
오늘도 공부방 놈들은 왁자지껄하다.
고민이 많던 마커슨도 평소와 다름없는 것 같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