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American Dirt Spoon Gang Village RAW novel - Chapter (113)
미국 흙수저 깡촌에서 살아남기-113화(113/280)
뜻밖의 재능 2
남의 집에서 샤워까지 하기는 좀 그렇지만 오늘은 너무 더럽다.
아직도 몸 여기저기에 솜사탕을 만들면서 묻어 나온 설탕 실 같은 것들이 엉겨 붙어 있다.
이 꼴로 자서 소파를 더럽히느니 샤워를 하는 게 낫지.
염치 불고하고 씻은 후 라이언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덩치가 비슷해서 그런가.
맞춤옷 같다.
딜런이 내 집처럼 사용해도 된다고 했다.
목이 마른 터라 주방에서 물을 따라 마시고, 칫솔까지 새 걸 꺼내 썼다.
나중에 갚아 주면 되지 뭐.
은은한 실내등이 거실을 감싸고 있다.
집 안에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그러면서도 충분히 아늑한 느낌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보통의 미국 집들엔 사진이나 그림을 넣은 액자가 상당히 많은데, 이 집은 벽지에 바로 프린트를 해서 붙여 두었다.
아마도 앞이 보이지 않는 엄마를 위한 배려인 것 같다.
밝고 은은한 회색빛의 페인트가 칠해진 벽에 가족들의 사진들이 직사각형으로 길게 그림처럼 프린트되어 있다.
마치 미술관에서 기획전을 여는 것처럼 세련되게 구성된 것이 누가 디자인한 건지 모르겠지만 제법 실력이 있다.
내가 생각보다 눈이 고급지다.
전생에 할 일이 없을 때면 미술관을 자주 들락거렸었 다.
그림을 수집하는 취미는 없었기에 구경만 했었지만 덕분에 안목은 제법 높다 할 수 있겠다.
‘설마 라이언이 이렇게 해 둔 건가?’
밤늦은 시간에 남의 집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그랬기에 일단은 들어가 잠을 청하기로 했다.
내일 아침에 물어보면 되겠지.
방으로 돌아와 보니 라이언은 아주 잠에 푹 빠져 있다.
이마를 짚어 보니 열이 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병원에서 처방받은 애드빌과 물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잠을 청했다.
― 딩딩디디딩. 딩딩디디딩.
알람 소리.
피곤하긴 했나 보다.
남의 집인데도 세상모르고 깊게 잤다.
라이언은 아직 자고 있다.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약과 물병이 비워진 걸 보니 밤사이에 먹은 모양이다.
“깨우지.”
나직하게 혼자 중얼거린 후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물건이나 가구가 많지는 않은데, 하나하나가 제법 세심하게 신경을 쓴 티가 난다.
그냥 덮고 잔 슬리핑 백만 해도 재질이 제법 괜찮다.
라이언의 깔끔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샤워 후 깨끗한 상태에서 한 번 덮고 잔 거지만 세탁기를 돌릴 수도 있겠다 싶어 개어 놓기만 했다.
이마를 다시 한번 짚어 볼까 하다가 어차피 어젯밤에도 열이 나진 않았으니 괜찮을 거 같아서 관뒀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라이언의 엄마가 부엌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
― 똑똑.
일부러 기척을 내었다.
“잘 주무셨어요?”
“어. 제이든이구나? 잘 잤니? 불편하진 않았고?”
“네. 덕분에요. 라이언도 괜찮은 거 같아 보여요.”
“그래. 푹 쉬면 괜찮겠지. 운동이 격하다 보니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더 심하지 않은 게 어디니?”
긍정적이시네.
“뭐 만드세요?”
“어. 아침 먹으려고. 시리얼도 있고, 여기 와플 반죽도 있고, 달걀도 있어. 뭐 먹을래?”
“와플이요?”
직접 와플 반죽을 했다고?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딱 와플 한 개 분량만큼의 반죽이 들어 있는 작은 용기들이 줄줄이 놓여 있다.
“와. 정확히 1개 분량씩이네요? 미스터 해밀턴께서 이렇게 해 두시는 거예요?”
“호호. 아냐. 그이는 시간 없어서 이렇게 못 해. 라이언이 해 두는 거야.”
“라이언이요? 대박.”
“맛이 제법 괜찮아. 먹어 볼래?”
“네. 제가 할게요.”
“아냐. 내가 해 줄게. 그러고 싶어. 제이든, 우리 라이언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나 좀 해 줄래? 애가 평소에 너무 바쁜 데다 학교 얘기를 거의 안 해서 내가 아들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서 그래. 학교 친구들하고는 잘 지내니? 워낙 말이 없어서 친구들이 몇이나 있는지 모르겠어. 그래도 풋볼을 하면 말이 없어도 친구는 사귈 수 있으니까 내버려 둔 건데.”
“어우, 무슨 말씀이세요. 라이언 엄청 인기 많아요.”
“정말?”
“네. 남자고 여자고 다 좋아해요. 내셔널가드들까지 눈독 들일 정도라니까요. 라이언 사물함엔 매일 사탕이랑 캔디가 붙어 있고요. 이번엔 아시안 컬처 클럽에도 가입했고….”
나는 내가 아는 것을 한껏 부풀려 라이언의 좋은 점들을 나열했다.
그동안 알렉스와 함께 보낸 세월이 10년이다.
진실을 예쁘게 포장하는 기술을 많이 전수받았다.
― 훌쩍.
환하게 웃으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는 미세스 해밀턴.
“어머, 이런. 내가 주책을, 미안해.”
“아니에요. 암튼 아들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진짜로요.”
“고마워. 말만 들어도 정말 기쁘구나. 라이언이 정말 좋은 친구를 두었어. 가끔 놀러 와 줄래?”
“네. 시간 될 때 한 번씩 찾아뵐게요.”
“그래그래. 고마워.”
그때 라이언이 머리를 긁으며 나타났다.
“어우, 시끄러워. 두 사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니 와플 이야기. 머리는 괜찮아?”
“어. 괜찮아. 와플 맛있지?”
“그러게. 맛있네. 반죽 비율은 직접 개발한 거야?”
“인터넷에 널린 게 레시핀데 뭘 직접 개발해. 그냥 별표 많은 거 보고 따라 한 거야. 엄마, 오늘 컨디션은 어때요?”
“나? 난 좋지. 걱정 마.”
“그럼 들어가서 쉬어요. 여긴 내가 알아서 치울게. 식사는 하셨어요?”
“어. 방금 다 먹었어. 그리고 여긴 내가 치울게. 머리도 아프다면서.”
“아니에요. 진짜로 괜찮으니까 들어가서 쉬세요. 내가 안 하면 제이든이 할 거고.”
“그, 그럴래? 그럼 엄마는 들어갈게.”
“네. 쉬세요.”
서로를 아끼는 건 확실한데, 관계가 좀 이상하다.
미세스 해밀턴이 못 이기는 척 레일을 더듬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야. 엄마를 왜 쫓아내?”
“뭘 쫓아내? 쉬시라고 하는 거지. 보다시피 엄마가 앞이 안 보이시니까 부엌에 있으면 걱정된다고. 여기 얼마나 위험한 게 많은데. 그리고 엄마가 우울증도 살짝 있다고.”
“흠. 내가 너네 엄마라면 좀 서운할 거 같은데? 니가 엄마한테 기대지 않는 건 좋은데, 엄마를 너무 아이 취급 하면서 보호하는 건 좀 그런 거 같다.”
“내가 언제 엄마를 애 취급 했다고….”
“눈이 안 보여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어. 아무것도 못 하게 막고, 쉬라고만 하면 나라도 우울증 오겠다.”
“!”
남의 가정사에 이러쿵저러쿵할 수는 없다.
라이언이 생각보다 놀라는 것 같지만 더 이상은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와플이나 먹어. 니 말대로 설거지는 내가 해 줄 테니까.”
“아냐. 엄마가 걱정할까 봐 그냥 해 본 말이야. 나중에 내가 천천히 하면 돼. 그냥 냅둬.”
“됐다. 어서 먹기나 해. 근데 저 사진 벽지는 니가 만든 거냐?”
“어. 예쁘지? 이래 봬도 내가 한 미적 감각 하거든.”
“어. 예쁘다.”
“진짜?”
“속고만 사셨나. 어, 예뻐. 혹시 아트 쪽으로 과외 같은 거 받았어?”
“풋볼 하는 놈이 무슨 아트. 그런 거 받아 본 적 없어.”
“그럼 타고났다는 소리야?”
“뭐래?”
아무래도 내가 라이언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한 것 같은데.
“다음 학기엔 꼭 미스 젠다 수업 들어라. 그 선생님 고등학교로 옮겨 오고 완전 날아다닌다더라. 가서 한번 테스트라도 받아 봐. 내가 보기에 너 확실히 재능 있어.”
“미스 젠다? 아. 옛날에 중학교 때 릴리랑 한판 붙었던 선생님? 그 선생님이 실력은 괜찮다고 했었지.”
“붙긴 뭘 또 붙어. 그땐 릴리가 좀 예민했었던 거지. 둘이 신경전을 벌이긴 했었지만 미스 젠다 잘못은 아니었어.”
“헉. 너 그 자리에 있었어? 생라이브로 본 거야?”
“어. 우리 수업 중이었어.”
“와. 얘기 좀 해 줘 봐. 나 그때 원정 경기 가 있던 때라서 말만 들었잖아. 릴리는 왜 그랬던 거야?”
우리는 8학년 때의 일을 끄집어내 한참 수다를 떨어 댔다.
그 후 라이언이 자랑하던 뒤뜰에 가서 라이언이 감각적으로 꾸며 둔 화원도 구경했다.
엄마의 상황을 고려해 적재적소에 배치한 식물들과 벤치, 작은 분수까지.
이런 건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니다.
확실히 감각이 있다.
― 띠띠띠띠.
그리고 급하게 울리는 현관 키패드 눌리는 소리.
“라이언!”
라이언의 아버지, 미스터 해밀턴이 돌아왔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3일간은 무조건 아무 생각 말고 푹 쉬라고 했어요.”
“그래. 오는 길에 딜런하고 통화했지. 정말 고맙구나, 제이든.”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정말 정신없이 달려왔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두 눈에 핏발까지 서 있는 미스터 해밀턴.
이럴 때는 빨리 빠져 주는 게 맞다.
인사를 하고는 나왔다.
나오고 보니 자전거가 없네.
돌아가기도 애매하고.
그냥 걷기로 했다.
어차피 같은 타운쉽이다.
1시간 안에는 집에 가겠지.
그나저나 참 특이한 집안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건 확실하다.
그런데 사랑의 방법이 묘하게 비틀려 있다.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너무 깊어 혹시라도 상대를 상처 입힐까 말조심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서로 대화 자체를 하지 않고 있더라고.
라이언은 어릴 때 1년이나 아팠고,
라이언의 엄마는 앞이 안 보이고,
라이언의 아빠는 너무너무 바쁘다.
집 안 곳곳을 저렇게 관리하면서 학교도 가고, 운동도 하고, 밥스가든에서 일도 하는 라이언.
본인도 자신이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서로에게 너무 귀한 존재들이라 하고 싶은 말도 폐가 될까 참고, 화가 나거나 걱정되는 일이 있어도 참고, 서로에게 최선만 다하는 관계.
아무래도 저 가정은 한 번쯤 크게 싸움을 하든, 대화를 하든 저 관계가 깨져야 할 거 같다.
라이언이 아프니 라이언의 아빠도 한동안 일을 쉬겠지.
라이언 역시 쉬어야 할 거고.
그러다 보면 가정의 문제가 눈에 들어오게 될 수도 있을 거다.
서로를 생각하는 사랑의 깊이가 깊으니 잘 해결될 거라 믿는다.
* * *
집에 돌아왔다.
어쩐 일인지 엄마가 화장을 곱게 하고 있다.
“엄마. 어디 가요?”
“어. 아들은 잘 갔다 왔어?”
“네.”
“잠깐. 근데 어떻게 왔어? 설마 거기서 여기까지 걸어온 거야? 내 이놈의 집구석을. 가자, 가서 따져야지. 아무리 그래도 자기 애 아파서 돌봐 준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그냥 보내?”
“정신이 없어서 그렇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도 않았고. 오랜만에 걸으니 좋았어요.”
“왜 엄마한테 전화 안 했어?”
“이럴까 봐 안 했죠. 진짜 어디 가는데 그러고 가요?”
“…….”
“어? 뭐지? 수상한데? 그러고 보니 그 옷도 첨 보는 건데요?”
“잘… 어울리니?”
“완전. 데이트 가요? 드디어 남자 생긴 거?”
“어우. 그런 거 아냐. 아니다, 맞나? 암튼 남자랑 둘이 밥 먹는 건 맞아.”
“착해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뭐 하는 사람인데요?”
“간호사. 한군데 소속돼서 일하는 사람은 아니고 여기저기 필요한 데 다니면서 일해 주는 간호사 있잖아. 트래블링 너스(Traveling Nurse). 이번에 우리 병원에서 좀 오래 있었는데 이제 다른 주로 간다고 가기 전에 같이 밥이나 먹자고 해서.”
“바람둥이 아니에요?”
“그니까 그런 관계 아니라고.”
“바람둥이라도 만나고 오세요. 마음은 쉽게 주지 말고.”
“어우, 진짜. 넌 애가 무슨. 암튼 무슨 말을 못 해요.”
“어어? 그럼 안 되는데? 가족이니까 더 할 말은 하고 살아야 된다고요.”
“네네. 다녀올게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요.”
“너나 하세요.”
“네엡!”
그러고 보니 우리도 라이언네 가족과 크게 다르지 않네.
다만 좀 어수선하고, 밝은 성품의 엄마 덕에 마음 표현을 많이 한다는 게 좀 다른 건가?
오지랖은 그만두자.
모처럼 집 정리나 해야겠다.
라이언 집을 보고 나니 우리 집 왜 이렇게 엉망이냐.
일단 청소부터.
청소기가 어디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