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American Dirt Spoon Gang Village RAW novel - Chapter (148)
미국 흙수저 깡촌에서 살아남기-149화(148/280)
연적 2
잠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눈만 끔벅이던 마크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야, 크리스틴! 너, 그거 무슨 소리야? 제이든이랑 왜 헤어져?”
“헐. 마크, 내가 제이든이랑 헤어지겠다는데 네가 왜 난리야?”
“그건!”
“그건?”
“…….”
이그.
저 답답이.
결국 당사자인 내가 입을 열었다.
“상대가 누군데?”
“말 못 해.”
“진짜 사귀는 거야? 혹시… 우리 중에 있냐?”
“미친, 아니거든!”
“아, 야! 크리스틴, 혹시 그 시장이냐?”
마크가 참지 못하고 또 입을 연다.
“시장? 어느 시자…. 아, 미쳤냐?”
“왜? 그 정도면 잘 생겼잖아. 니 타입 아냐?”
“헐. 잘생긴 거로만 치면 제이든도 있고, 라이언도 있는데 내가 굳이 왜 헤어지겠냐?”
졸지에 소환당한 라이언이 몸을 쭈욱 펴며 헤벌쭉 웃는다.
잘생겼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좋지, 암.
마크와 크리스틴이 말다툼을 시작하면 다들 슬금슬금 몸을 빼 어느 순간 마커슨의 집으로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지금은 마커슨, 오디, 라이언, 헤나와 조나단 등이 꿈쩍도 안 하고 앉아 있다.
그만큼 크리스틴의 말이 충격이라는 뜻이다.
“그, 말 중에 미안한데 시장이 누군데?”
“시끄러, 오디!”
“난 알아. 그거 뮤지컬에서 시장 역할 맡은 12학년 잭슨 말하는 거지?”
“알렉스, 너는 참 모르는 게 없어. 그럼 크리스틴이 왜 이러는지도 알려 줄래?”
“크리스틴이 말했잖아, 다른 남자 생겼다고.”
“…….”
마크의 얼굴이 점점 붉어진다.
저 정도면 찐 당황한 거다.
“워워, 다들 진정 좀 하고. 크리스틴, 그래, 좋아. 헤어져. 어차피 아리아도 이젠 포기한 거 같고, 다른 애들도 이젠 관심 끈 거 같으니까.”
“제이든, 아니거든. 크리스틴 같은 미친년이 버티고 있으니까 그냥 조심하는 거지. 너 아직 인기 많아.”
“뭐어? 미친년? 제이콥! 오늘 죽을까?”
“…사실인데.”
“확! 씨.”
“그럼 뭔데? 진짜 남자 생긴 거 아니잖아. 우리가 맨날 너를 보는데 왜 갑자기 거짓말이야?”
“맞아. 진짜면 데려와 봐. 남친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너 설마 제이든을 진심으로 좋아해서 더 이상 거짓으로 사귈 수 없다는 뭐 그런….”
“알렉스, 시꺼! 혹시 그거 니 마음이냐?”
“아, 뭐래. 내가 라이언인 줄 알아?”
“헐, 여기서 또 왜 내 머리채를 잡아?”
“너 솔직히 말해? 그쪽이지?”
“그게 모태 솔로가 할 말이냐?”
“누가 모태 솔로래? 아니거든?”
“오호, 그러셔? 증명을 해 보든가. 여자애들이랑 맨날 어울려 다니는 것도 상당히 의심스럽단 말이지.”
“아항, 그러셨어? 사실 내 취향은 제이든 아니고 라이언 넌데? 어때? 우리 한번 사귀어 볼텨?”
“으악, 누가 이 새끼 좀 말려 줘.”
“그러게 알렉스를 왜 건드리냐?”
“여긴 도른자들의 모임인 건가?”
갑자기 크리스틴에게 물린 알렉스, 혼자 죽지는 않겠다는 일념으로 라이언을 물귀신처럼 잡고 늘어진다.
그 옆에서 혀를 차는 오디와 마커슨.
시답잖은 말들이 이어지는 동안 크리스틴의 고민이 끝이 났다.
“아, 다들 시꺼! 말하면 되잖아! 큼, 그 사람… 크리스 닮았어!”
“크리스를? 누가?”
라이언이 즉각 반응한다.
3년 전, 졸업과 동시에 제시카와 결혼하고 플로리다로 날아간 크리스.
한때 본인의 우상이었기에 라이언에게서도 바로 반응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크리스틴이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버렸다.
“으하하하, 크리스틴! 누구 인생 망칠 일 있냐? 그 사람이 너랑 사귀면 그 사람 잘린다고. 그거 범죄야.”
“누가 사귄대? 그냥 내가 임자 없는 여자라는 것만 알려 주고 싶은 거야. 근데 너 내가 누구 말하는지 알고 그러는 거야?”
“어, 알지. 오늘 내셔널가드들 바뀌었지. 한 명이 크리스랑 닮긴 했더라. 근데 성격은 완전 다르던데. 아, 맞다. 그 사람 약지에 반지 끼고 있었는데, 못 봤냐?”
“…씨바.”
못 봤구만.
크리스틴이 성질을 내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지금 이 순간, 엄청나게 쪽팔릴 거다.
우리 모두의 고개가 마크를 향했다.
대충 분위기를 파악한 마크가 혼자 씨익― 웃고 있다가 우리의 시선에 화들짝 놀란다.
“뭐? 뭐! 왜!”
“그만 재고 고백해라. 무슨 남자 새끼가 간이 콩알만 해 가지고. 아님, 티를 내지 말든지.”
“…무섭다고!”
“그건 그래.”
“크리스틴 안 무서워하는 사람은 제이든 밖에 없을걸?”
“나도 쟤는 무서워.”
“…….”
오늘 공부방 모임은 이상하게 끝이 났다.
그래서 나는 크리스틴이랑 계속 사귀는 거야? 마는 거야?
끝을 모르겠네.
***
일주일 후.
크리스틴은 화가 잔뜩 나서 공부방으로 들어섰다.
예쁜 얼굴에 험한 말이 쉼 없이 튀어나온다.
별로 놀랍지는 않지만.
― 아, 씨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까? 개&^^*R$R@##$ 새끼!
이유는 이렇다.
나에게 헤어지자는 폭탄 발언을 한 다음 날.
크리스틴은 기어이 내셔널가드 부스에 가서 그 군인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확인했다고.
그래도 혹시 몰라 대놓고 물었단다.
사귀는 사람이 있냐고.
― 아, 이거? 동생이 장난으로 끼워 준 거. 끼고 있으면 귀찮은 일이 없어서 편해. 여자들이 대시를 많이 하거든. 근데 왜?
그 말을 듣자마자 우린 모두 알았다.
그 새끼 양아치라는 걸.
정말 웬만한 관계가 아니고서는 남자 손에 반지가 끼워지지는 않는다.
크리스틴만 몰랐을 뿐.
그 후로 크리스틴은 평소보다 더 뻔질나게 내셔널가드 부스를 찾았고, 어제는 그 귀한 핫바까지 얻어먹었단다.
그런데 오늘.
늦잠을 자서 스쿨버스를 놓쳤고, 이왕 늦은 거 오전 6시에 문을 여는 파네라에 들러 엄마와 아침을 먹었다고.
거기서 봤단다.
그 군인이 여자의 차를 얻어 타고 와서 함께 아침을 먹고, 학교까지 차를 얻어 타는 걸.
거기까진 동생이니 그럴 수 있다 싶었다고.
그런데 학교에 도착한 여자가 운전석 창문을 열고 뭐라고 말하니 출근하던 군인이 되돌아와 여자와 키스를 나눴다고.
아주 행복에 찌든(?) 모습이었다는 희한한 말을 내뱉었다.
“야, 헤나. 너 마크랑 키스할 수 있어?”
“으아아악! 뭐래. 미쳤어? 으엑, 생각만 해도 소름 돋아.”
“나도 소름 돋거든? 너 반응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갑자기 기분 나빠지네?”
“그래, 이게 남매거든? 어디서 남매 흉내를. 확! 고소해 버릴까 보다!”
“하, 야, 뭐라고 고소할 건데? 크리스 닮아서 들이댔다가 거짓말에 낚였다고?”
“…마크, 너 요즘 엄청 거슬리는 거 알지?”
“언제는 아니었고?”
“그건 그래.”
“근데 크리스틴, 그럼 너 제이든이랑 계속 사귀는 거야? 아님, 깨진 거야?”
“…….”
미아의 물음에 크리스틴이 선뜻 대답을 못 하고 나를 본다.
아무리 가짜 연애라도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가 번복하려니 창피한 거겠지.
“근데 그걸 왜 물어봐?”
“그게… 애들이 물어봐.”
“뭐?”
“애들이 물어본다고.”
“애들이 어떻게 알고? 제이든, 니가 얘기했어?”
“아니.”
“하아, 크리스틴, 애들이 어떻게 알겠냐? 너 진짜 미친 거처럼 내셔널가드 부스에 들락거렸잖아.”
“내가 거기 들락거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우리 학교에 내가 직업 군인에 관심 있다는 거 모르는 사람도 있어? 잠깐, 그렇게 티가 났어? 그럼 그 새끼도 이미 눈치 깠겠네?”
“그걸 말이라고. 하아, 저거 완전 똥멍충이 아냐!”
“야아! 마크! 진짜 저게, 아, 아니다. 내가 지금 너랑 싸울 타임이 아니지. 가만 보자. 그러니까 이 새끼가 날 완전 갖고 놀았다, 이거지? 내가 반지 이야기했을 때 여친 있다고 했으면 내 성격에 깔끔이 물러나지 그렇게 질척댔겠냐고. 하아, 이걸 어떻게 요리하지?”
크리스틴의 눈이 무섭게 반짝거린다.
머릿속으로 온갖 수작질이 떠다니고 있는 게 분명하다.
위험을 감지한 아이들이 슬금슬금 몸을 빼낸다.
도망가는 게 상책이지.
이번만은 나도 빠지고 싶었다.
크리스틴이 자주 똘짓을 하긴 하지만 누군가를 함정에 빠뜨리거나 못살게 구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감이 안 좋다.
도망가야….
“제이든.”
“어? 왜?”
“우리 계속 사귀는 사이인 거 넌 괜찮아?”
“어, 어. 난 괜찮아.”
“오케이, 그럼 나 너 좀 이용한다.”
“…뭘 하려고?”
“귀찮게 안 해. 사실 외모나 능력 면으로만 보면 네가 그 새끼보다야 훨씬 낫잖아. 게다가 연하고. 으하하, 어우, 통쾌하다.”
“쟤 벌써 뭘 했어. 이 상황에 통쾌가 말이 되냐?”
“시꺼. 제이든, 담에 내가 부르면 재깍 달려오도록.”
“제이든, 저 수작에 넘어가지 마라. 저건 진짜 천사처럼 생겨서 하는 짓은…. 악! 야, 크리스틴!”
한 대 맞을 줄 알았다.
상대가 마크가 아니라 제이콥인 것이 의외였지만.
요즘 제이콥이 크리스틴을 살살 약 올리는 경우가 늘고 있다.
설마 제이콥도 크리스틴을?
그럴 리가.
아마 혼자 속앓이하고 있는 마크가 안타까워서 그러는 걸 거다.
그나저나 크리스틴.
크리스를 진짜 좋아하긴 했었나 보네.
생긴 게 좀 닮았다고 그리 쫓아다닌 걸 보면 말이다.
성격은 완전 딴판이던데.
쟤도 남자 보는 눈 좀 길러야 할 텐데.
옆에 이렇게 훌륭한 남사친들이 깔려있는데도 보는 눈이 저리 없다.
그런 눈은 나도 키워 줄 수 없는 눈이라 안타까울 뿐.
***
그 후로 크리스틴은 한동안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다.
뭔가 꼼꼼히 계획을 세우는 모양인데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누군가를 괴롭히는 성정이 아니다.
혼자 계획하고, 망설이고, 괴로워하다 처음부터 다시 계획 짜고를 반복하고 있겠지.
가만두는 게 상책이다.
***
시간은 흘렀고, 드디어 뮤지컬 시즌이 도래했다.
몇 달 동안 연습하던 것들을 토해 내는 순간.
티켓은 오픈하자마자 무섭게 팔려나갔다.
말했잖아.
여기 완전 시골 깡촌이라고.
놀거리가 정말 부족하다.
40분 거리의 시내에는 뮤지컬 공연장이 있긴 하다.
하지만 우리는 촌놈들이라 그런 데 일부러 찾아가고 하지 않는다.
사실 뮤지컬 공연장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거다.
학교에서 하는 공연은 가격도 10불이다.
8세 이하 어린이들은 5불.
거기다 내 자식들이, 조카들이 활약하는 무대다.
무대 의상이며, 극본, 조명까지 제법 무대 공연 흉내도 낼 줄 안다.
밴드 연습만도 3달을 하니 결과물이 좋은 건 당연한 거 아니겠나.
아마 뮤지컬을 하는 열정으로 공부를 했다면 이 동네 학생들은 모두 아이비를 가고도 남았을 거다.
그만큼 뮤지컬에 진심인 곳이다.
한 번씩 극단이나 영화계 거물들이 왔다 가곤 한다는데, 아직까지 이 동네에서 유명인이 나온 적은 없다.
그냥 학생들은 자신들의 젊은 열정과 패기를 쏟아부으며 노는 거고, 관객들은 거기 부응해 3시간 동안 즐겁게 즐기다 가는 거다.
편하게 아무 옷이나 입고 와서 가족들과 한바탕 웃고 가는 거다.
몸도 마음도 편하게.
그리고 집에 돌아가면 오늘 봤던 뮤지컬에 대해 한바탕 수다를 떨다가 잠이 들겠지.
1년에 한 번씩, 이 동네의 대표적인 축제로 가을에는 홈커밍데이를, 봄에는 이 뮤지컬을 꼽을 수 있겠다.
목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저녁, 토요일 오후와 밤, 일요일 오후와 밤.
뮤지컬은 이렇게 총 6번의 공연을 한다.
그리고 좌석은 이미 모두 팔려 나갔다.
온라인으로도 팔리고, 오프라인으로도 팔린다.
동네 주민들의 주머니가 또 한 번 대대적으로 털리는 날이다.
미스터 에멋이 긴장된 표정으로 우리를 둘러보았다.
우리는 모두 검은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하고 단상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연습하느라 수고 많았다. 배우들이 마음껏 무대를 활보하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할 것이다. 다들 준비됐나?”
“네!”
“좋다. 모두 악기 튜닝해라.”
잠시 후, 올해의 첫 번째 뮤지컬 공연이 시작되었다.
크리스틴의 복수
― Who who wah dah.
Who who who wah dah dah dah.
Who who wah dah.
Who who who wah dah.
먼지 속 세상의 작은 사람들이 자신들도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알리기 위해 목청껏 고함을 지른다.
그렇다고 듣기 싫은 비명 같은 고함이 아닌 화음이 들어간 듣기 좋은 소리다.
우리의 음악도 거기에 맞춰 긴장감을 불어넣어 준다.
관객들 중에 흥이 많은 사람들은 코끼리 호튼을 위해 같이 목소리를 높여 주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는 호튼 역의 12학년 배우.
텐션이 장난 아니다.
중간중간 리액션을 넣어 관객들의 호응도 유도하고, 배우들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게 느껴질 정도다.
공부방 놈들 중 배우는 3명이다.
제이콥과 크리스틴, 마크.
처음엔 어찌나 분장을 잘했는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제이콥은 호놀룰루의 새 역할이라더니 생각보다 비중이 높은 역이다.
4명의 여자와 2명의 남자로 이루어진 6인의 새 가족들.
원 뮤지컬은 여자 6인으로 구성된 것인데 이번 디렉터는 남자 둘을 집어넣어 좀 더 다채롭게 꾸민 것 같다.
색색의 레깅스를 입고, 중간중간 튀어나와 현재 자신들이 얼마나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노래로 읊어 준다.
제이콥은 그 중 초록색 레깅스에 짧은 반바지, 그리고 초록색 꼬리털을 붙였다.
머리에도 초록색 깃털로 장식을 했다.
몰랐다.
제이콥이 저렇게 노래를 잘하는 줄.
이곳은 노래방 같은 게 전혀 없기 때문에 친구들의 노래 실력이 어찌 되는지 모른다.
저 정도면 밴드가 아니라 코러스에 들어가도 될 듯.
마크와 크리스틴은 작은 세상 속에 살아가는 일반 시민 1, 시민 2와 같은 엑스트라 역을 맡았다.
가끔 튀어나와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 다투며 웃음을 유발하고, 먼지가 날려 자신들의 세상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릴 땐 서로를 꼭 붙잡아 안심시키는 감초 같은 역할.
딱 본인들 현생 관계와 똑같은 역할을 나눠 맡았네.
“크기가 아무리 작아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생명은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 당신 역시 이 세상에 하나뿐인 귀한 생명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깔고 앉은 의자 아래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지고 있을까요? (으하하하) 하하. 감사합니다!”
― 따땅~
마지막 호튼의 능청스런 인사말과 함께 밴드의 강력한 연주 한방.
그렇게 뮤지컬이 끝이 났다.
― 우와와와와!!
― 브라보!
― 최고다!
.
.
.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배우들이 모두 나와 다시 인사를 하고, 사람들은 학생들에게 오래도록 박수갈채를 보냈다.
단상 아래의 우리도 발을 굴러 박수 소리를 만들어 냈다.
사람들의 열기가 하나가 되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조명이 우리 쪽을 비추며 다시 한번 박수가 터져 나왔고,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서 박수를 받았다.
그렇게 첫 번째 뮤지컬이 끝났다.
전생에서도 당연히 뮤지컬을 보러 다녔다.
노련한 배우들의 열창과 열정, 제대로 잘 꾸며진 무대 등등.
그때도 좋았지만, 지금의 이 무대는 정말 오랫동안 잊지 못할 거 같다.
나도 내년에는 밴드가 아닌 배우로 나가 볼까?
바순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미 악기 정리가 끝난 알렉스와 마커슨이 다가온다.
“제이든, 정리 끝났어?”
“어, 가자.”
“오디는?”
“갔어. 내일 시험이라 가서 공부해야 된다고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나갔어.”
“힝, 나도 시험 있어.”
“인간적으로 뮤지컬 참가자들한테는 시험 좀 미루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진짜 너무한 거 같아.”
“뭐래. 그럼 제때 시험 치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얼른 들어가자. 마커슨 너도 공부 좀 하다가 자. 바로 자지 말고.”
“어. 아우, 피곤하다.”
선생님들은 얄짤없다.
전날 밤늦게까지 무슨 활동을 했든 학교에 왔으면 시험을 쳐야 한다.
학생들은 이걸로 얼마나 타임 매니지먼트를 잘하는지 평가받는다.
그래서 톱 대학들은 이런저런 활동들 하나도 없이 앉아서 공부만 한 학생들보다는 여러 활동을 하면서도 높은 성적을 유지한 학생들을 더 선호하는 거다.
학점 5.0에 활동이 없는 학생과 학점 4.5에 여러 활동을 한 학생을 비교했을 때 후자를 뽑을 확률이 높다는 뜻.
밖으로 나오니 제이콥 아빠가 차를 대기시키고 있다.
아들이 10학년 때부터 운전을 했기에 웬만하면 자식을 위해 운전대를 잡지 않는 분이 손수 나온 거다.
같은 골목인 나와 마커슨, 제이콥, 마크가 올라탔다.
알렉스는 자신도 인사를 해야겠다며 한참 너스레를 떨다가 엄마에게 끌려갔다.
“안녕하세요.”
“어. 어서들 와라.”
“제이콥, 마크, 오늘 진짜 멋졌어.”
“그러게. 난 제이콥이 그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지 몰랐다니까.”
“헤헤. 내가 노래 좀 하지.”
“마크랑 크리스틴도 잘했어. 너네는 진짜 찰떡인 거 같아.”
“어우야, 말을 말아라. 꼴랑 그거 하면서도 얼마나 싸웠는지. 아까 머리 쥐어뜯고 싸운 거 진짜였어. 이거 봐라. 머리 빠진 거.”
“하하. 암튼 대단들해요.”
.
.
.
뮤지컬에 대한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간 뮤지컬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근데 제이콥, 너 SAT 시험 아직 안 쳤어?”
“어? 어. 방학 되면 슬슬 치려고 생각 중인데.”
“…6월에 시험 치자.”
“히익, 제이든! 나 SAT 한 번도 안 봤어. 그리고 그걸 꼭 지금 말해야겠냐? 이 기분 좋은 날에?”
“시간 없어. 내가 도와줄 테니까 6월이랑 8월 시험 쳐서 점수 보고 안 좋으면 10월에 한 번 더 치자.”
“허얼. 꼭 그래야 돼? 요즘엔 SAT 점수 옵셔널이라 안 넣는 친구들도 많던데.”
“너 아직 전공 못 정했지?”
“…어.”
“그럼 두 번 쳐 보고 점수가 도저히 안 나오면 그때 포기하자. 점수가 높으면 넣는 게 당연히 좋지 않겠어?”
“내가 뭘 준비하면 되는데?”
“랩탑만 들고 와.”
“알았어….”
제이콥의 부모는 제이콥이 대학을 안 가도 상관없다는 주의다.
제이콥의 아빠는 제이콥이 매튜와 함께 자동차 정비 동업을 했으면 했다고.
하지만 아들이 대학을 가겠다고 선언했기에 그냥 두고 보는 중이다.
어차피 학비를 보태 줄 생각은 1도 없고, 그럴 여건도 안 된다.
제이콥의 부모도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자식이 대학을 간다니 좋기는 한데 뭘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은 전혀 없는 상태.
이제까지 내 덕에 자기 아들이 이 정도로 올라온 걸 알기에 전적으로 내게 맡기고 있는 중이다.
집이 가난하니 대학은 재정 보조 받아서 가면 된다.
앞길을 방해만 하지 않아도 그게 어딘가.
난 제이콥을 실험체로 쓸 생각이다.
공부방 놈들 중 제일 처음 대입을 치르는 제이콥.
나는 제이콥이 최대한 괜찮은 대학을 가도록 도울 생각이다.
한번 대학을 보내 보면 그다음 타자인 크리스틴과 마크는 좀 더 쉬울 테고, 내 차례가 되었을 땐 어디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을 거다.
제이콥의 아빠가 듣는 데서 일부러 SAT 시험을 들먹였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방해하지 말란 소리다.
제이콥의 아빠가 룸미러로 나를 본다.
두 눈 가득 고마움을 담고 있다.
자식의 앞날이 잘 되길 바라는 건 어느 부모든 마찬가지니까.
“근데 제이콥.”
“어?”
“너 전공은 뭘로 할 거야?”
“아직 모르겠어.”
“괜찮아. 그럼 undecided로 입학하면 돼. 확고하게 이거다, 싶어서 대학 들어가도 다들 전공 엄청 바꾸거든.”
“아까 보니까 제이콥 노래 되게 잘하던데. 제이든, 우리 제이콥, 뮤지컬 시키는 거 어때? 좋아도 하는 것 같은데.”
“안 돼.”
“왜?”
“제이콥이 노래를 잘하긴 하지만 그걸로 밥 벌어먹고 살 정도의 실력은 아니야. 그냥 취미로만 해.”
“헐. 저 냉정한 것 좀 보소.”
“냉정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마커슨, 엔터테인먼트의 길이 얼마나 험준한지 알아? 정말 너무 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시작해도 1%도 성공하지 못하는 게 그 바닥이야. 제이콥, 너 뮤지컬에 인생 다 갈아 넣을 자신 있어?”
“아니, 난 그냥 가끔 이렇게 즐기면 돼. 주인공도 아니고.”
“내가 생각이 짧았다. 우리 제이든, 불확실한 거 싫어하는데 내가 또 초를 쳤네, 미안. 미안해요오.”
“…뭘 또 그렇게까지. 근데 살면서 내가 정말 잘하는 거 2개 정도는 있는 게 좋은 거 같아. 하나는 직업으로, 하나는 취미로. 그러다 어느 순간 취미가 직업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인생 길잖아.”
잠시간의 정적.
단 한 번도 우리들 사이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알지 못했던 제이콥 아빠의 눈이 놀람으로 동그래진다.
“와, 너네들. 앞날에 진심이구나. 난 그맘때 그러지 못했는데…나도 누군가 그렇게 말해 줬으면 지금보다 나았을까?”
“네?”
“어? 아냐. 어우, 잠깐 부러워서 정신을 놨네. 그… 뭐 좀 사 줄까? 배 안고파?”
“내일 시험이 있어서요. 집에 가서 대충 먹을게요.”
“저도요.”
마크와 마커슨이 시험이 있다며 자른다.
나는 내일 시험은 없지만 제이콥을 위해 SAT 시험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봐야 할 거 같다.
6시부터 시작된 뮤지컬은 8시 30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집에 가면 9시.
씻고 정리하다 보면 금방 10시.
자료 좀 찾다 보면 오늘도 12시나 되어야 잠이 들겠다.
다음 주엔 디베이트 내셔널 대회도 있고.
하루하루가 바쁘게 지나간다.
좋은 거겠지?
***
다음 날 오전 6시 20분.
스쿨버스를 기다리는데 크리스틴에게서 문자가 왔다.
― 2분 안에 도착. 파네라 가자.
― 뭐?
― 아침 사 줄게.
― 아침 먹었는데?
― 시꺼!
“제이든, 타!”
그 순간, 크리스틴이 차를 몰고 나타났다.
얼마 전에 16살이 된 기념으로 엄마에게 중고차를 선물 받았다는 크리스틴.
제이콥의 첫 차보다는 괜찮지만… 굳이 얻어 타고 싶은 비주얼은 아니다.
다른 놈들은 생각이 다른 것 같지만.
“우리는?”
마크와 제이콥, 마커슨이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
같은 골목이라 매일 아침 우리는 같은 스쿨버스를 탄다.
“시꺼. 제이든, 빨리! 뒤에 스쿨버스 따라온다고.”
“어? 어.”
탔다.
곧바로 출발하는 크리스틴.
타고 보니 크리스틴의 복장이… 제법 야하다.
어깨 한쪽을 완전히 내놓은 상태에 숏 팬츠를 입고 있고, 머리는 위로 바싹 당겨 묶었다.
한마디로 살색이 많이 보이는 데다 화장도 아주… 섹시하게 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윙크 한 번 찡긋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다 버리고 따라올 만한 수준이다.
“야, 뭐야? 너 왜 이러고 왔어?”
“그 새끼한테 보여 주러. 그 새끼 오늘도 파네라에 아침 먹으러 왔대.”
“그걸 어떻게 알아?”
“내 친구가 거기서 알바 해. 너, 어제 나랑 잔 거다.”
“허얼. 크리스틴, 우리 그렇게 막나가진 말자.”
“지가 어떤 여자를 놓쳤는지 알게 해야지.”
“…그게 최선의 수일까?”
“어. 이게 최선이다, 됐냐?”
“난 치킨 샐러드에 감자 스프로. 소문나도 난 모른다.”
“오냐, 내가 다 책임지마.”
공부방 놈들만 사실이 아닌 걸 알면 되겠지, 뭐.
에라, 나도 모르겠다.
― 띠링.
파네라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저 안쪽에서 예쁜 여자랑 아침을 먹고 있는 군인이 눈에 들어온다.
크리스틴이 갑자기 내 몸에 찰싹 붙는다.
미치겠네.
내가 아무리 전생에 놀 거 다 놀았다고 쳐도 이 몸으로는 아직 내성이 없다.
“안 떨어지냐?”
“좀만 참아. 시간 금방 가.”
“…….”
“제이드은~ 너 감자 스프 좋아하지? 우리 샐러드도 먹을까아?”
아침 식사를 위해 파네라에 와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크리스틴에게 집중된다.
한국식 애교가 아니다.
우렁차고 씩씩한, 현장을 지배하는 목소리.
몸의 반을 내게 밀착하며, 옷차림은 야한 것이 누가 봐도 어젯밤을 같이 보낸 후 새벽, 같이 아침 먹으러 나온 모습이다.
남자 어른 몇몇이 나를 보며 엄지를 치켜든다.
고등학생이 아닌 성인으로 보고 있는 거겠지.
어금니를 깨물었다.
“크리스티인, 좀만 떨어지자아.”
“싫어. 야야, 봤다, 봤어. 저 새끼 표정 썩는 거 봐라. 야, 저 새끼 어제 나한테 지 손가락 보여 주더라. 반지 뺀 손가락 말야. 근데 오늘 저러고 밥을 처먹어? 웃기는 놈일세.”
“…….”
“어제 리허설하면서 마크한테 얘기했거든? 근데 엄청 지랄하더라고. 왜 그러는지 몰라, 진짜. 우리 어제 무대에서 진짜로 싸웠잖아.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진짜 모르는 거냐? 모르는 척하는 거냐?”
“어?”
“…치킨 샐러드.”
“어어. 여기 이거?”
그렇게 우리는 거의 껴안은 채로 키오스크에서 음식을 주문하고는 돌아섰다.
크리스틴이 아주 밝은 표정으로 군인 커플에게 다가간다.
“어머, 크리스토퍼?”
“어…. 안녕, 크리스틴? 아침 먹으러 왔니?”
“네, 여긴 내 남자친구 제이든이에요. 알죠? 아, 이분이 그 동생분이시구나.”
“어?”
“전에 저한테 그랬잖아요. 반지는 여동생이 억지로 끼워 준 거라고. 여친은 없으시다고….”
“내, 내가 언제?”
“뭐래요. 어제도 반지 뺀 거 저한테 보여 주셨잖아요. 흠, 근데 오늘은 다시 끼셨네?”
그리고 그 순간.
처음부터 끝까지 군인의 눈길을 따라 우리를 보고 있던 군인의 여자친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야, 내가 너 한 번만 더 걸리면 진짜 끝이라고 했지? 잘 가라, 개새꺄. 그리고 너. 크리스틴? 옆에 애가 너 남친이야? 얘도 여자 엄청 많게 생겼다. 마음고생할 거야. 남자 새끼들은 좀만 잘생겼다 싶으면 지가 진짜 잘난 줄 알거든. 웬만하면 그냥 버려.”
그렇게 자기 할 말만 하고는 나가 버리는 여자.
그 뒤를 군인이 허겁지겁 쫓아간다.
“어우, 시원해. 밥 먹자, 제이든.”
잠시 두 사람의 모습을 쳐다보던 크리스틴이 해맑게 웃으며 자리를 잡는다.
다시 한번 되새긴다.
내 그릇은 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