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American Dirt Spoon Gang Village RAW novel - Chapter (90)
미국 흙수저 깡촌에서 살아남기-90화(90/280)
고등학교 전초전 3
길고 긴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알바를 하던 제이콥이 내 앞에서 한숨을 계속 쉰다.
나 들으라고 내는 소리다.
“어쩌냐고오. 빨리 해결책을 제시해 봐.”
“그러니까 내가 진즉에 칸 아카데미(Khan Academy) 보고 공부하라고 했잖아.”
“그 사이트 너무 복잡해서 딱 필요한 걸 못 찾겠단 말야. 시간도 없고.”
“알바 시간을 좀 줄여. 지금은 학점 관리랑 시험이 더 중요하다고.”
“새 차 사야 하는데….”
“어쩌라고!”
“캡틴이 요약해 줘.”
“와. 제이콥. 그건 좀 아니지 않냐? 11학년 올라가는 사람이 9학년 올라가는 애한테 요약을 해 달라고 한다고?”
“그럼 어쩌냐? 우리 캡틴은 다 알아. 내가 알지.”
“PSAT는 요약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으응~ 그래도 해 줘어. 너 나 6학년 때 구구단도 다 외우게 해 줬잖아. 나 지금 수학 엄청 잘해. 다음 학기엔 자그마치 캘큘러스 AB(미적분학 1)를 듣는다고. 대단하지 않냐?”
“어? 그럼, 우리랑 같이 듣겠네?”
“뭐? 오디. 너도 캘큘러스 AB 들어?”
“아. 아직은 아니고. 캡틴이랑 나랑 이번 방학 때 프리캘큘러스(기초 미적분학) 스킵 시험 신청했거든. 그거 통과되면 9학년 때 캘큘러스 AB 듣겠지.”
“야호! 완전 좋아. 캡틴. 꼭 합격해라. 나랑 같이 수업 듣자.”
“나도 시험 친다고.”
“오디. 넌 시험 치든 말든 나랑 상관없거든. 넌 니 시험만 잘 치잖아. 가르쳐 달라고 해도 어렵게 설명하고.”
“…….”
“우리 오디가 그렇긴 하지.”
“이것들이! 니들이 인도인들의 수학법을 배우라고! 훨씬 유용하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해.”
“우우우. 그건 좀 너무 헷갈려.”
“맞아. 이해가 안 돼. 캡틴이 훨씬 쉽게 가르쳐 준다고.”
미국 대학 수능인 SAT는 12학년이 되기 직전 주로 친다.
물론 2년간 점수가 유효하기 때문에 10학년 때 치는 학생들도 있지만, 보통의 경우엔 12학년이 되는 8월이나, 점수가 잘 안 나왔을 경우 12학년의 1학기인 10월에 마지막 시험을 치르기도 한다.
11월 초중에 ED(수시모집) 등록이 끝나고, 12월 중순 ED의 결과가 발표되면 곧바로 정시 준비를 한다.
그래 봤자 2주.
수험생들의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는 시기다.
그 SAT 전에 치는 시험이 PSAT(Preliminary SAT)다.
일종의 수능모의고사.
한국처럼 매달 치는 건 아니고 10학년 때 한 번, 11학년 때 한 번으로 1년에 한 번씩 친다.
어떤 학교는 10학년 때는 아예 스킵해 버리고, 11학년 때만 치기도 한다.
11학년 때는 전국의 학생들이 다 같이 치르는 것이기에 잘만 치면 National Merit Scholarship Program(국가 장학금 프로그램)에 뽑혀서 장학금을 받기도 하고, 대입 원서에 한 줄 더 적을 수 있다.
보통 10월 말쯤 치르는데, 제이콥이 어디서 듣고 왔는지 며칠 전부터 걱정을 해 댄다.
방학한 지 얼마나 됐다고.
평소엔 아무 생각 없는 것 같은데 또 이럴 때는 조바심을 내네.
대학을 가고 싶긴 한가 보다.
“나도 PSAT는 해 본 적 없어서 잘 몰라. 그럼, 방학 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1시간씩 같이 공부하자.”
“진짜?”
“어. 대신 하루라도 핑계 대고 안 나오면 그날로 끝이야.”
“어우. 그건 너무 심하지. 세 번으로 해 줘. 세 번. 알바하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오호. 제이콥. 시작도 하기 전에 빠질 생각부터 하는 거야?”
“크리스틴? 너도 같이 해야 하지 않겠니? 니들이 아직 어려서 인생의 변화무쌍함을 몰라서 그렇지 원래 계획은 늘 변경되기 마련이야.”
“…뭐래.”
“제이콥. 이 자리에 매튜가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분명 한 소리 들었을걸?”
― 드르륵.
그 순간 매튜가 뒷문으로 통하는 베이스먼트 창문을 쓱―열고는 들어선다.
요즘엔 아예 정비소에서 살다시피 하는 매튜.
온몸에서 기름 냄새가 진동을 한다.
들어오자마자 긴 곱슬머리를 넘기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매튜.
피곤해 보이네.
“잘들 지냈냐? 공부방 꼬맹이들?”
“옷은 털었어?”
“왜 이래. 샤워하고, 옷도 말끔하게 갈아입고 왔어. 깔끔쟁이 캡틴님아.”
“…일은 재밌고?”
“어. 일은 재밌지. 자동차는 사랑이야.”
“근데 얼굴은 왜 죽상이야?”
“왜긴. 인간들 때문이지. 어우. 인간들이 진짜 다들 사기꾼들이야. 여기서 충전 좀 하려고 왔어. 뽀송뽀송한 것들 좀 보고 나면 안구가 정화된달까?”
“미친 거야?”
“너희들, 자동차 기본 정비는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엔진 오일 체크나 타이어 정도는 혼자 갈 수 있어야 한다고. 오늘 어떤 여자 손님이 혼자 왔거든? 완전 호구 제대로 잡혔잖아. 오죽하면 멀쩡한 와이퍼까지 뜯어 내고는, 200불을 더 청구하더라니까. 1년은 더 쓰겠더만. 암튼 보스는 안 그러는데, 동료들이 순 사기꾼들이야.”
“보스한테 꼰질러.”
“하이고. 또 그럴 수는 없어요. 다 하는데 나만 독야청청… 암튼 어린 것들은 모르는 그런 것들이 있어. 사회는 비정한 거야.”
“그래 봤자 이제 겨우 18살 된 것들이 오늘따라 늙은이 티를 팍팍 내네. 제이콥도 그러더니.”
“왜? 제이콥이 또 되지도 않는 개똥철학을 설파했어? 내가 혼내줄까?”
“…….”
“암튼 내가 하루 날 잡고 자동차 기본 지식들 싹 가르쳐 주지. 에고. 힘들다. 왜 어른들이 육체노동하고 선술집 가서 맥주 한잔하는지 알겠다니까. 제이든. 집에 콜라 없냐?”
“어. 없어. 탄산소다는 이 썩는 데 일등 공신이야. 너도 적당히 먹어. 목마르면 물 마시고.”
“이런 애늙은이 같으니라고. 정비소에 가면 40대 아재들도 다 망나니들 같고, 여기 오면 중딩이 한 30살은 먹은 아재 같고. 적응이 안 된다. 적응이.”
고개를 휘휘― 젓는 매튜.
속으로 뜨끔했지만, 표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다른 애들도 전혀 반응이 없다.
다 그러려니 하는 것 같다.
“그나저나 올여름 계획은 뭐야? 워크캠프는 가냐?”
“어. 2주 뒤에. 올해는 준비 단단히 하고 갈 거야. 작년에 샀던 데스크 팬은 내가 고이 모셔두고 있다고.”
“맞아. 갈아입을 빤스도 5개는 챙겨야지.”
“아무렴. 손부채도 챙길 거야. 나는.”
.
.
.
우리의 주제는 워크캠프로 바뀌었다.
앉은 자리에서 열두 번도 더 바뀌는 대화 주제들.
올여름엔…
고등학생이 된다고 해서 바뀌는 건 별로 없다.
매번 하던 널싱홈 봉사를 1주일에 한 번씩 하고, SS1은 이제 SS챔버로 바뀌었지만, 방학 때는 거기도 방학이다.
그 외엔… 워크캠프 말고는 특별한 계획은 없다.
8월초부터는 크로스컨트리를 하게 될 거고.
이번 방학도 긴긴 여름이 될 것이 분명하다.
엄마는 본격적으로 간호 공부에 들어간 상태라 여행을 가자고 할 수도 없다.
당일치기나 1박 2일 정도로 가까운 호수 정도는 다녀올 수 있겠지.
그래서인지 올해 워크캠프도 기대가 됐다.
* * *
워크캠프.
2년 차가 되니 뭔가 익숙하다.
우리 공부방에선 매튜와 조나단만 빠지고 나머지가 모두 합류했다.
헤나와 크리스틴까지.
에어컨이 없는 실내도, 한 번씩 나갔다가 몇 시간 만에 돌아오는 전기도 ‘그러려니’ 하면서 자게 된다.
익숙한 얼굴들도 여기저기 보인다.
함께 개고생을 해서 그런가 말을 나눈 적이 없는데도, 괜히 반갑다.
희한한 감정이다.
서글서글하게 생긴 아시안 남자가 다가와 반갑게 손을 내민다.
지난해 봤을 때는 키가 아주 훤칠하다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게 큰 건 또 아닌 것 같다.
1년 사이 부쩍 자란 내 탓이다.
“안녕. 제이든. 나 기억하지?”
“알지. 대니얼 콜렉.”
“하하. 연락이 없어서 바로 잊은 줄 알았는데. 고맙네.”
“아냐. 딱히 연락해야 할 필요성이 없어서 그랬어. 잘 지냈어?”
“덕분에. 음. 꼭 도움이 필요할 때만 연락을 하라는 건 아니었는데. 암튼 잘 지내서 이렇게 또 보니까 좋네. 키도 큰 거 같고.”
“하하. 어.”
“그. 혹시 KAAN 모임에 참석해볼 생각은 있어? 1달 후에 시카고에서 모임이 있는데.”
“집에서 머네. 안 되겠다.”
“그래. 언제든 관심 생기면 말해 줘. 도움이 필요해도 연락 주고, 도움이 필요 없어도 가끔 안부는 묻고 지내자고.”
“그래. 이건 내 연락처. 우리 집 근처에서 내가 도울 만한 일 있으면 연락 줘.”
“그래. 고맙다.”
꼭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아시아 쪽 입양아들은 생각보다 많다.
얼마 전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 학년의 미아라는 인도 여자애 한명도 입양아였다.
여자애라 별로 신경을 안 써서 몰랐을 뿐.
찾아보면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나 걔네들이 도움이 필요하다 손 내밀면 언제든 도와줄 의향은 있다.
뭘 어떻게 도와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하소연이라도 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워크캠프에서 우리의 업무는 혼자 사는 할머니의 부엌 싱크대를 비롯해, 키친 캐비닛들까지 모두 바꾸는 거였다.
싱크대 아래의 캐비닛에는 쥐똥이 가득했고, 우리가 잠깐 고개 돌린 사이 쥐들이 제집 안방처럼 들락거렸다.
오디가 기겁을 했다.
“나. 나는 내년엔 절대 안 올 거야.”
“올 거 다 알고 있거든? 거기 캐비닛이나 빨리 뜯어.”
“제이든. 넌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
“태연하긴 뭘 태연해. 참고 있는 거지. 나라고 뭐 쥐가 안 무섭겠냐?”
“제이콥이 이쪽으로 왔어야 해. 걔는 쥐가 귀엽다고 그랬잖아.”
“그거야 말이 그렇겠지. 제이콥은 지붕 팀이지?”
“어. 올까 말까 엄청 고민하더니 결국은 따라왔잖아.”
― 으아아악!
그 순간 캐비닛 문짝들을 버리러 나간 알렉스가 비명을 지른다.
“왜 또?”
“저기 너구리가 우리 도시락 까먹고 있다고!”
“쫓아내!”
“무서워.”
“걔가 널 무서워하겠지. 빨랑 쫓아. 우린 이거 뜯어야 해서 못 가!”
“얼른 쫓으라고! 음식 다 뺏기겠다.”
들고 있는 캐비닛 문짝으로 너구리를 위협하는 알렉스.
너구리는 알렉스의 기합소리에도 겁을 집어먹진 않은 것 같다.
그저 좀 귀찮다는 듯 알렉스를 본 후, 먹던 샌드위치를 들고 숲속으로 가 버렸다.
“…저거 안에 사람 들은 거 아닐까?”
“너구리가 똑똑하다고 하긴 하더라.”
“맞아. 완전 똑똑해. 전에 우리 할머니가 감자베이컨 수프 끓여서 식힌다고 부엌 옆 베란다에 잠깐 내 놨었거든? 그 사이에 너구리가 와서 뚜껑 열고 손으로 베이컨만 건져 먹고 있더래.”
“으하하. 마커슨. 그거 실화냐?”
“첨엔 우리도 안 믿었지. 할머니가 너무 기가 막혀서 소리를 꽥 지르니까 뚜껑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가 버렸대. 할머니가 혼자 본 게 억울하다고 그랬는데 밖에 나가 보니까 수프 묻은 너구리 발자국들이 찍혀 있더라니까. 내가 사진도 찍어 놨어.”
열심히는 하는데, 요령이 없어 일의 진척이 없었던 작년.
올해는 적당히 수다도 떨면서 일도 진도에 맞춰 착착 해 나가고 있었다.
내년엔 더 잘해서 다른 팀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확실히 뭔가에 대해 미리 알고 있다는 건 힘인 것 같다.
한번 살아봤던 인생이라고 이번 생은 애늙은이처럼 보내고 있는 나를 보면 말이다.
갑자기 내 옆을 지키고 있는 친구 놈들이 귀엽게 보인다.
“으웩. 제이든. 그 표정 뭐야?”
“우웨에엑. 그 눈빛 느끼하다고. 집어치워!”
“나… 토할 거 같아.”
이것들이 사람 진심을 몰라 주네.
* * *
방학이 끝났다.
우리는 드디어 고등학생이 되었다.
징징거리던 제이콥은 방학 동안 착실히 PSAT 공부를 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1시간씩.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보면 기가 차겠지만 방학엔 공부보다 다양한 활동들을 하는 것이 이곳의 풍습이다.
제이콥은 월수금, 화목토로 나눠 알바를 두 군데나 뛰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방학이 끝나는 시점에 3천 불짜리 차를 하나 샀다.
덜덜거리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이전 차보단 엔진 상태가 괜찮다는 자칭 자동차 전문가 매튜의 소견이 있었다.
2개의 알바를 뛰고 하루에 1시간씩 공부까지 했으니 나름 알찬 방학을 보낸 거다.
나와 오디는 프리캘큘러스 스킵 시험을 통과했고, 제이콥과 같이 캘큘러스 AB(미적분 1) 수업을 듣게 되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우리 아들! 재밌게 놀다 와.”
“노는 거 아니고, 공부하러 가요.”
“그래그래. 고등학교는 재밌게 놀면서 보내는 거지.”
“…….”
등교 스쿨버스는 오전 6시 30분 우리 동네 스탑사인에 선다.
제이콥과 마크가 미리 와 있다.
나와 마커슨이 느릿하게 다가갔다.
“헤이. 캡틴, 마커슨. 드디어 고딩이 되었구나.”
“제이콥. 차 사놓고 왜 안 타고 가?”
“학교에 차 가져가면 주차비 내야 해.”
“학교 주차는 공짜 아니었어?”
“뭐래.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월 40불씩이나 내야 한다고. 그거 아깝게 왜 내냐? 공짜 스쿨버스가 있는데. 내 애마는 알바와 데이트를 위한 거라고.”
“알바는 알겠는데. 데이트? 그런 것도 해?”
“…곧 할 거야. 곧.”
“학생은 공부해야지. 데이트는 대학 가면 해도 돼.”
“뭔 소리야. 대학이 얼마나 빡센데 거기서 데이트를 해? 거긴 공부하는 곳이지. 데이트는 고등학교 때 하는 거야.”
“그건 맞지.”
“쯧쯧. 불쌍한 중딩들. 아직 데이트 한 번 못 했지?”
“이제 중딩 아니거든.”
“아. 9학녀언. 그래. 행복해라.”
― 치이익.
스쿨버스가 도착했다.
킨더부터 지금까지 계속 같이 온 스쿨버스 드라이버.
고등학생들이 모두 등교하면 곧바로 중학생들을 태우고, 중학생들이 모두 등교하면 초등학생들을 태운다.
하교도 마찬가지.
스쿨버스 드라이버가 그만두거나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우리는 12년 내내 같은 드라이버를 만나게 된다.
물론 스쿨버스의 사정에 따라 중간중간 다른 드라이버들도 오긴 하지만 어쨌든 하루에 2번씩, 12년을 만나니 선생님보다 반갑다.
“하이. 미스터 토마스.”
“어서 와라. 제이든.”
고등학교의 첫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