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American Dirt Spoon Gang Village RAW novel - Chapter (92)
미국 흙수저 깡촌에서 살아남기-92화(92/280)
재회 2
― 그때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어떻게? 나는 너 때문에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을 수가 있어!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널 보는데!
‘뭐지?’
갑자기 머릿속을 관통하는 베티의 절규.
고개를 휙 돌리니 베티가 반대편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게 보인다.
뭔가 꾹꾹 눌러 담는 듯한 걸음걸이.
뒤통수인데도 온 몸으로 ‘나 지금 엄청나게 참고 있음. 누구도 날 건들지 마.’라는 게 느껴질 정도다.
베티의 속마음이 맞는 것 같은데.
이런 적은 처음이다.
신의 경고인가?
조심하라는?
뭔가 섬뜩한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은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할 시간이다.
첫날부터 지각할 수는 없지.
라틴 교실로 들어섰다.
6학년 때 ‘어드밴스드(Advanced) 영어’ 수업을 들었기에 7학년 때부터 시작하는 제2 외국어는 처음부터 ‘기초 라틴’이 아닌 ‘라틴 1’로 시작했다.
일반 영어를 들은 학생들은 기초 라틴부터 시작이다.
지금은 라틴 3이다.
나처럼 시작부터 ‘라틴 1’로 시작해 정석대로 온 학생들은 9학년이고, ‘일반 라틴’으로 시작한 학생들은 10학년, 다른 외국어를 들었다가 중간에 라틴으로 바꾼 학생들 중엔 11학년이나 12학년도 있다.
그래봤자 총학생 수는 10명이다.
이미 죽은 언어라 불리는 라틴은… 비인기 외국어다.
그럼에도 서구 언어의 뿌리이다 보니 영어나 역사, 의대, 법대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겐 아주 도움이 되는 수업이기도 하다.
오디도 의학 용어의 많은 부분이 라틴어와 닿아 있다며 라틴을 선택한 거니까.
라틴 선생님은 배가 불뚝 튀어나온 남자 선생님이었다.
“나는 다니엘 크롭스키다. 아버지는 러시아계지만 하와이 원주민의 피도 섞였지. 고등학교 라틴 수업인 라틴 3부터 5까지는 내가 다 맡고 있다.”
“…….”
“또한 디베이트 클럽 담당이기도 하다. 디베이트나 스피치, 모델 UN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조만간 있을 클럽 위크에 살펴보고 조인하도록. 그럼 9학년들을 위한 설명은 여기까지. 라틴 3의 첫 수업을 시작하겠다.”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다 이런 건가?
딱딱한 말투에 고압적인 자세들.
첫날이라 해도 얄짤없다.
“아. 그거. 기선제압이지. 원래 안 그래.”
“맞아. 선생님들 대박 웃겨.”
“한 달만 지나 봐. 본모습을 보게 될 거야.”
“특히 밴드 선생님인 미스터 벤은 말이 엄청 많아. 콘서트할 때 와이프가 막 그만 말하라고 손짓도 한다니까.”
.
.
.
우리 프레쉬맨(9학년)들은 소포모어(10학년)와 주니어(11학년)인 공부방 놈들 앞에 얌전하게 앉아 경청하는 중이다.
경험치를 미리 얻으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한껏 거만해진 놈들이 처음엔 장난을 좀 치다가 진실을 털어놓았다.
“근데 미스터 칼은 나도 모르겠다.”
“나도. 미스터 칼이 우리 학교 온 지 얼마 안 됐거든. 한 5년 됐다나? 교장이 모셔오기는 했는데, AP English를 들을 만큼 수준 높은 학생이 얼마 없는 거지. 그래서 이번에 일반 영어까지 같이 한다는 소문이야. 내 주변에도 미스터 칼 수업 들은 학생은 없어. 아. 라즈닉은 들었다고 했는데. 좋다고 했던 거 같아.”
“쩝. 대학 간 사람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어째 다들 도움이 안 돼!”
“알렉스. 이 버르장머리 없는 것. 어디서 버럭질이야! 이 교관이 오늘 네놈에게 참교육이 뭔지 알려 주마!”
“…허얼. 쟤는 서머캠프를 잘못 갔다 왔어. 크리스틴. 넌 군인 하지 마라. 아랫사람들이 너무 불쌍하잖아.”
“항명은 받지 않는다.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길에 나태함은 용서되지 않아!”
“누. 누가 쟤 좀 말려 봐.”
“저건 짐승이야. 인간의 힘으론 감당할 수… 으악. 크리스티인. 이 미친 것이!”
역시 마크는 크리스틴의 밥이다.
두 사람의 육탄전에 우리는 각자의 숙제에 눈을 돌렸다.
9학년에 AP 클래스를 들을 수 있는 건 대충 3개.
나와 오디가 듣는 캘큘러스 AB는 AP 클래스에 속한다.
AP는 많이 들을수록 대학 입시에는 유리하다.
대학에서 어떤 수업을 들었는지 자세히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AP에 욕심내다가 따라가기 힘들어 B- 나 C를 받는 것보다는 일반 클래스에서 A를 받는 것이 더 낫다.
캘큘러스 AB는 보통 11학년에서도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이 듣는 수업이다 보니 수업 첫날인데도 숙제가 있었다.
중학교 때는 너무 놀리더니 고등학교는 들어가자마자 뺑이 치는 느낌이다.
아직도 육박전이 끝나지 않은 마크나 크리스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회의가 밀려온다.
그냥 대충 살아도 되는 거 아닐까?
“제이든.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우린 아직 캘큘러스 AB 안 듣는다. 우리 그거 내년에 들을 거야.”
“어.”
“반응이 왜 그래? 니가 비정상적으로 빠른 거라고. 그 수업에 9학년은 너랑 오디밖에 없지?”
“그… 럴걸?”
“선생님도 놀랐을 거다. 9학년이 2명이나 수강을 했으니. 가끔 수학만 잘하는 천재들이 있긴 하지만 넌 진짜 어느 영역인지 모르겠다. 힘숨찐 이런 건가?”
“왜? 오디도 있잖아. 오디도 대부분 나랑 같은 수업 들어.”
“오디는 과외를 빡세게 받잖아. 돈을 그렇게 쳐 들이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반면 너는 진짜 돈 한 푼 안 들이고 놀면서 공부하잖아. 뭐든 잘하고. 암튼 세상은 불공평해!”
“아 놔. 우리 아빠가 하는 말을 여기서 들을 줄은 몰랐네. 나 집에 간다.”
“오디, 뭘 또 그런 걸로 삐치고 그래. 사실을 말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잖아.”
“그런 걸 말로 후드려 팬다고 그러는 거야. 팩트 폭행. 몰라? 니가 휘두른 돌멩이에 내 심장은 조각조각 산산이 부서져서…”
“워워. 진정. 진정해. 오디. 내가 잘못했다. 사과하마.”
“나. 나는? 나한테는 사과 안 하냐?”
뜬금없는 크리스틴의 영혼 없는 사과.
마크가 발작한다.
에고. 여기저기서 난리구나.
이번 학기에 내가 듣는 수업은 총 5개.
캘큘러스 AB, 영어 상급반(ACCELERATED), 심포니 밴드, 라틴 3, 생물 상급반(ACCELERATED).
밴드가 가장 쉽고, 생물과 라틴은 외우면 되는 거다.
영어와 캘큘러스가 좀 공부를 해야 하는 거지만 크게 어렵진 않을 것 같다.
전생에 다 배웠던 것이다.
이번 생에서 공부란 그냥 삶을 거드는 한 조각일 뿐.
물론 이곳 놈들이 워낙 공부를 안 하니 상대적으로 더 잘해 보이는 것도 있긴 하다.
학교 외 공부를 하루에 1시간씩만 해도 부모들 입에서 칭찬이 마를 날이 없다.
내 시간표 스케줄을 대충 본 후 미스터 칼이 보라고 준 공책을 펼쳤다.
앞면에 올 1년 동안의 학교 행사표를 붙여 두었다고 했다.
없다.
표지를 넘기니 작은 서류 봉투가 안쪽에 붙어있다.
봉투를 열어보니 총 12장의 월 행사표가 프린트되어 있다.
이걸 22명의 학생 노트에 모두 붙여 준 건가?
츤데레네.
보통의 선생님들은 절대 이러지 않는다.
학생들은 각자 알아서 자신의 스케줄을 찾아가야 한다.
오늘은 8월 22일.
10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이번 달은 별거 없었다.
그냥 학교 적응만 잘 하면 된다.
학교 오픈하우스가 있긴 하지만 우리 엄마는 그런 데 안 간다.
나도 딱히 엄마가 학교 오픈하우스 행사에 와야 한다는 생각은 안 든다.
12학년이나 되면 대학 학자금 정보 때문이라도 한 번쯤 들르게 되겠지만 지금은 상관없다.
그걸 제외하곤 8월 31일까지 아침과 점심이 무료로 제공된다는 것이 행사라면 행사랄까.
마칭밴드와 크로스컨트리, 각종 스포츠들은 7월 중순부터 계속해 오고 있었던 것이고.
9월부턴 행사표가 조금 빼곡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행사는 노동자의 날(Labor Day)이 지난 후부터다.
Yearbook에 나올 증명사진 찍는 날부터, 클럽을 정하는 클럽 위크(week), SAT 부트 캠프(딱 하루 4시간 정도 SAT에 대해 알려 주고, 모의 시험도 쳐보고 하는 건데 100불이나 한다.), 마지막 날은 동네 사람들과 학교 졸업자들이 찾아오는 홈커밍데이 행사까지.
이번 달 초청 강연자로는 뇌 전문 수술 의사가 온단다.
엄청 바쁘지만, 시간을 쪼개서 초청했으니 관심 있는 학생들은 꼭 가서 들으라는 미스터 칼의 조언이 첨부되어 있다.
“오디.”
“어?”
“이거 봤어?”
“그게 뭔데?”
“한번 봐.”
“우와. 이거 뭐야? 미스터 칼. 대박. 나 그 반 들어갈래. 우린 이런 거 없다고. 마커슨. 이거 봐봐.”
“와. 미스터 칼. 무섭다고 소문났던데. 완전 멋있다.”
“필요하면 복사해서 써.”
“오케이.
딱히 내 노력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이 정도야 나눠 쓸 수 있지.
나머지 공부방 놈들도 모두 붙어 행사표를 본다.
“넌 이번 달 강연은 안 갈 거지?”
“어. 수업까지 빼고 가긴 좀 그래.”
“그래. 난 가 봐야겠다.”
초청 강연은 수업을 빼고 가는 거다.
이런저런 행사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모든 행사들이 방과 후나 점심시간을 이용할 수는 없는 노릇.
부득이하게 수업을 빼고서라도 참가할 학생들은 하는 거다.
고등학교 수업은 하루를 빠지면 진도를 따라잡기가 생각보다 빡세다.
담당 수업 선생님에게 허락을 받는 것도 귀찮고.
1년에 3번이면 된다고 했으니 신중하게 골라서 참석하면 될 것이다.
“뭐. 다른 챙길 거 있어?”
“클럽데이 정도지. 뭐.”
“니가 만들고 싶은 클럽이 있으면 직접 만들어도 돼.”
“그럴 정성은 없고. 반쯤 죽어 있는 클럽 같은 건 해 봐도 될 거 같네. 다들 서로서로 이름은 넣어 주자.”
“오케이.”
* * *
며칠 후 점심시간.
같은 홈베이스라고 해도 듣는 수업에 따라 점심시간이 다르다.
나와 오디가 같은 수업을 듣는 것이 많고, 알렉스와 마커슨이 함께 듣는 수업이 많다.
오늘도 점심은 오디와 나머지 친구들과 함께 하게 됐다.
이번 달까지는 점심이 공짜다.
공짜는 양잿물도 마신다는데, 한 끼에 4불이나 되는 점심을 먹지 않고 지나칠 수는 없는 법이다.
고등학교 급식은 초등학교나 중학교와 다르다.
나름 뷔페식이다.
샌드위치도 있고, 햄버거에 들어가는 패티도 0.2센티는 더 두껍다.
샐러드에 올려져 나오는 치킨도 2조각은 더 많아 보이고.
나는 치킨샐러드와 우유를 주문하고, 오디는 베지테리언 코너에서 야채샐러드와 우유 2개를 받아왔다.
“뭔 우유를 2개나 먹어?”
“야. 이거 봐라. 완전 풀 쪼가리뿐이잖아. 우유를 2개라도 먹어야 힘이 난다고.”
“그냥 고기를 먹어.”
“그럴 순 없어. 우리 아버지 코가 개코야. 고기 먹은 거 들키는 날엔 한 달 동안 난(Naan)만 먹어야 해. 니가 그 고통을 알아?”
“인도에 살지도 않는데 그걸 꼭 지켜야 해?”
“어. 남의 문화는 존중하도록.”
“그래. 뭐. 많이 먹어라.”
“힝… 맛없어.”
카페테리아의 한쪽에 군대 홍보를 하고 있는 내셔널 가드들.
늘 2명씩 군복을 입고, 학생들을 꼬시고 있다.
크리스틴이 한때 잘생긴 내셔널 가드에게 꽂혀서 난리를 쳤었는데.
그 잘생겼다는 군인은 이미 이곳에서의 의무를 마치고 다른 곳으로 갔다고.
제길.
딱 눈이 마주쳤다.
“헤이, 가이즈(guys). 국가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한번 들어볼래?”
“어… 사양해도 될까요?”
“그냥 들어만 보라는 거야. 뭐. 부담 주고 할 생각은 없고. 너희들 이 크래커랑 초콜릿 좋아하니? 우리 먹으면서 이야기나 좀 나눌까?”
“네! 완전요.”
치즈가 잔뜩 들어간 크래커와 맛나 보이는 초콜릿.
오디의 대답이 빨랐다.
눈을 반짝거리며 식판을 들고 안내하는 대로 따라 들어가는 오디.
치사하게 먹는 걸로 꼬시다니.
내 식판에 있는 치킨샐러드는 어쩜 이렇게 초라해 보이는지.
별 수 있나.
맛있는 걸 준다는데.
나도 식판을 들고 따라 들어갔다.
1차 KO 승
세상에.
앞쪽의 작은 부스는 페이크였다.
뒤쪽으로 돌아가니 생각보다 부스가 크다.
시청각 자료까지 준비되어 있다.
안쪽 스낵 바구니엔 각종 캔디와 초콜릿, 크래커와 맛있어 보이는 치즈가 한 가득이다.
이미 잡혀 온 놈들이 3명이나 된다.
우리를 보고 반갑게 웃는 내셔널가드들.
먹을 걸 바로 줄줄 알았는데, 일단 자리에 앉히고 본다.
― 척.
갑자기 우리 앞에 정자세를 잡는 군인 1.
군인 2가 앞으로 나와 우리들을 본다.
“반갑다. 제군들.”
“??”
“미국 시민으로서 나라에 충성할 가장 영예로운 직업이 바로 군인이다. 하지만 아무나 군인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체력과 지성, 지구력과 책임감, 전장을 지휘할 수 있는 리더십과 강인한 정신력 등등. 이 모든 것이 아우러질 때 진정한 군인으로 거듭나는 것이지. 우리는 주 정부 소속 내셔널가드들로서…”
“…….”
“…하여, 입대 후 만기제대를 할 경우 대학 학자금은 물론이고, 평생 의료부터 처음 집을 살 때 등등 온갖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또한 당장 대학을 가지 않는다고 해도 언제든 대학을 가고 싶다면 지원해 줄 것이고, 전 세계 어디든 미국 우방국에 지원을 나갈 수도 있으며….”
온갖 좋은 말은 모두 갖다 붙이며 군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명예로운 직업인지에 대한 설명이 장장 3분 동안 이어진다.
눈앞에 놓인 과자 바구니에만 꽂혀 있던 눈빛들이 서서히 단단해지며 군기가 잡히기 시작한다.
악당을 물리치는 영웅신화에 환장하는 미쿡 꼬맹이들은 아주 눈이 돌아가 있다.
오디도 다르지 않다.
정의감과 의협심에 불타는 듯한 저 주먹 쥔 손을 보라.
아직 어린 것들 데리고 이 무슨 사기질인지.
군대가 어떤 곳인지 이미 아는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다.
물론 미국 군대와 한국 군대는 그 시스템이 좀 다르긴 하겠지만 군대가 다 군대지 뭐.
“후우. 가이즈, 듣느라 수고했다. 우리 부스에 처음 방문하는 학생들에겐 꼭 설명하고 넘어가야 하는 프로토콜이라. 그럼 지금부터 팔굽혀펴기 챌린지나 해 볼까? 25개 이상 성공하면 원하는 과자 하나씩. 어때?”
말투 무엇?
갑자기 고압적인 말투가 친근해진다.
그에 맞춰 긴장되었던 분위기도 탁― 풀어진다.
“어. 1등은요?”
“1등? 그렇지. 이 자세지! 예로부터 수컷들에게 음식은 쟁취지. 1등은 10개! 어때?”
“옛썰!(Yes, Sir.)”
기가 막히네.
그놈의 크래커 안 먹고 말지.
미지근해져 버린 내 치킨샐러드와 우유 어쩔 거냐고?
“그럼 부스 밖으로. 자고로 챌린지라 함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하는 거지. 동의하나?”
“네! 동의합니다!”
두 눈이 반짝거리며 줄 맞춰 나가는 놈들.
논산훈련소에 막 입소한 신병들 같네.
예비역의 마음으로 제일 뒤에 처져서 슬슬 걸어 나가는데, 저쪽에서 라이언 해밀턴과 일당들이 막 음식을 타서는 카페테리아 안으로 들어선다.
딱 봐도 운동하는 아이들.
스포티 키즈라고 불리는 놈들이다.
군인 1과 2의 눈빛이 갑자기 초롱초롱해진다.
“어이. 거기 프레시맨들.”
“우리요?”
“그래. 여기 정신교육 받은 제군들, 팔굽혀펴기 챌린지할 건데. 도전할 텐가?”
무시하고 지나가려던 라이언 일행이 뒤늦게 나오는 나를 보고는 발걸음을 딱 멈춘다.
“콜! 이기면 뭐 주나요?”
“아. 여기 크래커랑 치즈…”
“그런 건 됐고요. 이기면 저 새끼랑 한판 뜨게 해 주세요.”
라이언이 손가락을 들어 나를 지목한다.
모두의 눈이 나와 라이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판을 뜨게 해 달라?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요. 저놈이랑 둘만 배틀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달라는 거죠. 종목은 상관없고요. 달리기도 좋고, 윗몸일으키기도 좋고, 하다못해 철봉 딥스도 좋습니다.”
모두 건전한 스포츠다.
긴장하던 군인들의 표정이 살짝 풀어진다.
“오호. 제이든 군. 동의하나?”
“아뇨. 제가 왜 저 제의에 동의해야 할까요?”
“쫄은 건가?”
“풋. 하사관님. 그런 식으로 유도 신문 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그런 거 안 합니다.”
“그게 쫀 거야 새꺄. 공부방 클럽? 하하. 별 미친 클럽이 다 있네. 샌님 새끼. 팔굽혀펴기 5개는 가능하냐? 하하하.”
“…….”
“…….”
주변이 싸해진다.
군인들이 당황한다.
이거 위로 보고들어가면 문제 커진다.
괜히 챌린지 시키려다가 학생 간 시비가 붙어 버린 거니까.
이 20대 초중반의 하사관들의 잘못은 하필이면 챌린지 상대로 저놈들을 골랐다는 거다.
어떻게 상황을 수습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군인들을 위해 이쯤에서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로 했다.
“나랑 정 붙고 싶어? 그럼 팔굽혀펴기 따위 말고. 흠. 삽질 어때? 삽질.”
“삽질?”
“학교 안에서만 깰짝거리는 온실 속 풋볼 선수라 삽이란 걸 잡아는 봤는지 모르겠네?”
“깨. 깰짝? 미친. 저게 돌았나?”
― 미친 거 아냐?
― 지금 저 새끼가 우리더러 온실 속 풋볼 선수라고 한 거야?
― 도라이네. 저거.
― 뭐. 맞긴 하지. 아직 학교 밖으로 나간 적 없잖아.
― 미친놈이냐?
.
.
.
카페테리아 전체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사실 우리 학군 풋볼 팀은 크리스 이후로 별 볼 일이 없다.
크리스가 특별히 잘난 것이었을 뿐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는 형국이다.
한마디로 풋볼 팀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지금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풋볼 선수가 몇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큰 싸움이 될 만한 말인 건 맞다.
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오로지 내 상대는 라이언 한놈이어야 한다.
“또또 급발진이네. 싫음 말고. 팔굽혀펴기나 달리기 따위로 시간을 낼 만큼 내 삶이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서 말야.”
“부. 붙어. 하지만 일단은 팔굽혀펴기부터 해. 여기서 내가 이기면 내가 원하는 종목, 니가 이기면 니가 원하는 종목으로 2차로 붙으면 될 거 아냐.”
“흠. 근데 내가 왜 그런 걸 해야 하지? 내가 너랑 딱히 붙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
“나한텐 있어.”
“그래? 뭔데?”
“…니가 이기면 말해 줄게.”
“근데 그거 별로 안 궁금한데.”
“아. 시바. 진짜 저 새끼가.”
약이 바짝 오른 라이언이 달려드는 걸 군인들이 막는다.
“학생들. 지금 이 시간은 주 방위군의 챌린지 시간이다. 챌린지를 방해할 거면 썩 꺼져.”
“…뭐. 저렇게 애원하니 붙어보죠. 주 방위군들까지 있는데, 지난번처럼 어깨빵 놓고 도망치는 치사한 짓거리는 하지 않겠죠.”
“어깨빵?”
“요즘엔 스포츠맨십을 어떻게 배우는 건지 원. 군인 형님들께서 제대로 가르쳐 주십시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끝난 군인 1과 2.
라이언을 보는 눈이 가늘어진다.
라이언의 하얀 얼굴이 귀까지 빨개진다.
본인도 본인의 한 짓을 아는 거지.
평소에는 군인들이 말 걸까 봐 귀찮아 저쪽으로 돌아가던 학생들이 어느새 하나 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 기회를 놓칠 군인들이 아니다.
“크흠. 좋다. 주 방위군의 명예를 걸고 두 사람의 시합을 허용한다. 먼저 25번의 팔굽혀펴기를 성공할 경우 일단 약속한 음식부터 내어 주지. 모두 제자리에서 엎드려!”
― 시이작!
― 하나, 둘, 셋, 넷… 열다섯. 퍽.
한놈 실패.
― 스물, 스물 하나… 픽.
두 번째 놈 실패.
― 스물 다섯! 제이든과 라이언을 제외한 나머지 기상!
우리 쪽에서 우리보다 먼저 군인들에게 잡혀있던 2명이 실패하고, 라이언 쪽에선 모두 성공.
어째 잡혀 있던 놈들이 좀 부실해 보이긴 했다.
오디는 평소 우리와 해 오던 가락이 있어서인지 팔굽혀펴기 25개쯤은 가볍게 해 낸다.
성공한 놈들은 처음 약속한 대로 군인들이 내민 캔디와 크래커 등을 챙겨들고는 관중의 모드로 돌아갔다.
“그럼 지금부터는 제이든 패터슨 군과 라이언 해밀턴 군의 대결이다. 먼저 엎어지는 놈이 지는 거다. 오케이?”
― 네.
― 네.
“속도는 똑같이. 동시에 내려오고, 동시에 올라간다. 시작!”
― 하나, 둘, 셋, 넷…스물다섯, 스물여섯… 서른아홉…
― 딩딩딩.
다음 수업 종이 울린다.
구경꾼 놈들이 화들짝 놀라며 사사삭― 흩어진다.
제길.
내 치킨샐러드와 우유는?
“제이든. 나 수업 간다. 미세스 하우엔에게는 말해 둘게. 꼭 이겨라.”
오디가 캔디 하나를 톡 까서 입에 넣고는 달아난다.
‘저 의리 없는 놈’이라고 욕하고 싶지만 나 같아도 버리고 가긴 했을 거다.
수업이 제일 중요하지.
“부탁한다.”
라이언 쪽은 두 놈이 수업도 땡땡이치고 끝까지 남았다.
평소에도 운동광으로 소문난 놈들이다.
“둘 다 계속 이어 가도 상관없겠나?”
“괘. 괜찮습니다아!”
“나중에 사유서 작성할 때 증인이나 돼 주세요.”
“좋다. 군인은 근성이다. 계속 간다.”
― 마흔일곱, 마흔여덟… 일흔둘, 일흔셋…
“음. 너네들. 괜찮냐?”
“괜찮습. 니다.”
“헉헉. 괘. 괜찮습니다.”
힘들다.
하지만 견딜 만하다.
놈은 자그마치 풋볼로 다져진 몸이다.
내가 아무리 크로스컨트리로 하체가 단련되어 있고, 공부방 놈들과 놀이 삼아 가끔 팔굽혀펴기를 하긴 했어도 끽해야 서른 개 정도였는데.
이 정도면 백 개라도 쉽게 해 낼 것 같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일정한 속도에 군인들이 먹잇감을 발견한 듯 침을 질질 흘린다.
― 아흔둘, 아흔셋… 툭.
“헉헉. 독한 새끼.”
마침내 라이언이 바닥에 대자로 뻗어 버렸다.
“라이언!”
“배. 백 개를 못 채웠어?”
“시끄러. 벤치 신세들인 주제에. 요즘 주전 훈련 때문에 체력이 바닥 났다고!”
옆에서 지키고 있던 지 친구놈들에게 버럭 성질을 내는 라이언.
손바닥을 탁탁―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잠시 숨을 골랐다.
나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는 중이지만 티를 낼 수는 없지.
“이런이런. 학교에서 깰짝거리는 수준 맞네. 그 정도면 삽질 같은 건 열 번도 못 할 거 같은데 2차는 무슨. 이쯤에서 접자. 내가 너 이겨 먹어서 어디 써먹겠냐?”
“…빌어먹을.”
“자. 그럼 더 망신당하기 전에 말해. 왜 엄한 사람 어깨빵은 한 거냐? 설마 진짜 소문처럼 여자 때문이냐?”
“뭐?”
“소문났던데? 어떤 여자애한테 찝쩍거렸다가 까였다고. 그 원인이 나라며? 난 난생처음 듣는 소리긴 한데. 진짜 찌질하게 그것 때문인 거야?”
“우. 웃기지 마. 누가 그런 말도 안 돼는….”
“다행이네. 그게 사실이었으면 진짜 실망할 뻔했잖아. 가라. 다시는 얼쩡거리지 말고.”
“X발!”
거나하게 큰 소리로 욕을 지껄이고는 사라지는 라이언.
라이언의 추종자로 불리며 어디든 따라다니던 갈색 머리 두 놈이 머쓱해하며 나를 본다.
“야. 제이든. 너 좀 멋있다.”
“그러게. 멋있다. 풋볼팀에 들어오면 잘해 줄게. 고민해 봐라.”
“니들도 빨리 수업이나 들어가.”
“그래. 또 보자.”
두 놈이 군인 1과 2의 눈치를 보며 사라진다.
벌써 수업 시작 15분이 지났다.
나도 이제 가려고 발을 떼는데, 군인 둘이 붙잡는다.
“제이든 패터슨 군. 진지하게 군인 할 생각 없나?”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딱 자를 건 아니지 않나. 아직 9학년이니 시간이 많잖은가. 꼭 고민해 보라고.”
“맞아. 군인이라고 해서 딱딱하고 재미없는 건 아냐. 월급도 나쁘지 않고, 생활 보장도 되고. 니가 원하기만 한다면 이번 겨울방학 때부터 연방 주 정부 프로그램에 추천서 써 줄 수도 있어.”
“아까 들어보니 성적도 좋은 것 같은데. 군인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어. 육해공 어디든 사관학교도 있고….”
“저기. 군인 형님들. 죄송한데 제가 지금 수업에 들어가야 해서요. 캘큘러스 AB 시간이라 좀 빡셉니다.”
“9학년이라고 하지 않았나?”
“네.”
“캘큘러스 AB를 듣는다고?”
“그럼. 또 뵙겠습니다.”
더 있다간 진짜 붙잡히겠다.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이 여우의 꼬리는 몇 개 일까?
― 드르륵.
조심스럽게 교실 뒷문을 열었다.
대부분의 교실은 출입구가 교단 쪽에 붙어 있는 것 하나만 있다.
따라서 수업 중간에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손을 들고 허락을 받아야 하며, 내가 화장실에 가는 걸 클래스 친구들이 모두 보게 된다.
이게 싫어서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안 먹는 학생들도 있다고.
화장실을 참아 버리는 거다.
하지만 이 ‘캘큘러스 AB’ 교실은 앞뒤로 하나씩 문이 2개다.
얼마나 다행인지.
수업 시작한지 벌써 20분이나 지났다.
고등학교의 모든 수업 시간은 90분이다.
수업과 수업 사이의 교실 이동 시간은 5분이며, 점심시간은 30분.
학생들 각자의 스케줄에 따라 중간에 수업이 뜨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때엔 스터디 홀(Study Hall)에 가서 자율학습을 한다.
9―10학년은 그런 경우가 잘 없지만 11학년부터는 간혹 있다.
12학년이 3학기쯤 되면 오전으로 모든 수업을 채우고, 점심시간쯤엔 하교해 버리는 경우도 많다.
아무튼 이 순간 나는 이 수업의 교실 문이 2개인 걸 감사히 생각하며 뒷문을 조심히 연 순간이었다.
모두의 고개가 나를 향했다.
‘뭐. 뭐지?’
화이트보드에 열심히 수학 풀이를 적던 미세스 하우엔이 무심하게 묻는다.
“흠. 어떻게 됐지? 제이든?”
“네?”
“결과를 알려 줘야지.”
“무슨 결과… 아. 이겼어요. 93번째에서 라이언이 엎어져서.”
― 우와와아아!
갑자기 들리는 환호와 박수 소리.
― 근데 93번째?
― 지금 라이언이 93번째에서 엎어졌다고 한 거야?
― 그럼 쟤는 더 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지?
― 대박.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
.
.
뒤이어 소곤거림들이 따라왔다.
“큼. 잘했네. 앉아라. 거기 빈 책상에 놓인 워크시트(Worksheets) 중 3번째 것 하고 있는 중이다.”
“네. 감사합니다.”
갑자기 교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왠지 아이들의 표정도 밝아진 것 같고.
이 클래스는 ‘캘큘러스 AB’ 시간으로 AP 수학 클래스다.
공부방 멤버 중엔 9학년 오디와 11학년인 제이콥이 같이 듣는 수업.
제이콥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나름 이 학교 ‘너드’들의 수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들 평소 알게 모르게 스포티키즈(Sportikids, 운동하는 아이들)들한테 억눌린 것들이 있었던 거다.
고등학교 스포츠의 꽃은 당연히 풋볼이다.
농구, 야구, 하키, 수영, 펜싱, 수상 보트 등등 수많은 스포츠가 있지만, 풋볼의 인기를 따라갈 순 없다.
그 풋볼팀에서 9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주전 자리를 차지한 라이언을 팔굽혀펴기에서 이겼다고 하니 다들 대리만족을 느낀 것이다.
하다못해 미세스 하우엔까지도.
수학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뭔가 분위기가 몽실몽실한 것이 평소와는 다른 낯선 공기가 수업 시간 내내 떠다녔다.
― Bye. 제이든. 다음 시간에 보자.
― 제이든, 내일 보자.
― 제이든, 모르거나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이거 내 연락처.
― 제이든, 우리 스터디 그룹 있는데. 들어올래?
.
.
.
지난 시간엔 9학년이 들어왔다고 따가운 눈총을 보내던 이들이 살갑게 인사들을 해댄다.
“짜식. 내가 너 해낼 줄 알았다.”
“그래서 혼자 살겠다고 날 버리고 수업 들어왔냐?”
“그럼 어떡하냐? 자그마치 캘큘러스 AB인데? 난 너랑 다르다고.”
“오디가 너랑 라이언이랑 붙고 있다고 했는데, 아무도 걱정을 안 하더라. 하하. 역시 우리 캡틴.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배운 것 중에 말야….”
“제이콥. 나 다음 수업 밴드야. 뛰어야 한다고. 저녁에 공부방에서 봐줄게.”
“오키오키. 얼른 가. 우리 캡틴! 멋지다!”
저런 허세 1도 없는 놈 같으니.
4학년 때부터 봐 왔지만 2살이나 많은 나이는 길바닥에 버린 지 한참이다.
모르는 게 있으면 주저 없이 물어본다.
좋은 자세다.
* * *
밴드부.
소문대로 미스터 벤은 말이 참 많았다.
수업을 시작한 지 30분 만에,
미스터 벤의 가족은 고양이 2마리와 강아지 2마리, 딸만 셋인데, 그중 첫째는 3학년, 둘째는 1학년, 막내는 작년에 태어났으며, 막내는 기대하지 않았던 럭키베이비라는 것까지 알아버렸다.
또한 본인의 아내는 은행에서 일하며, 본인의 아버지가 추운 지역이 싫어 플로리다로 이사를 하면서 그가 살던 집을 에누리 없이 제값 다 주고 사야만 했다는 사실까지.
‘어질어질하네.’
한참을 그렇게 자기소개를 하던 미스터 벤은 마침내 이 방에 모인 30명에 달하는 밴드 부원들을 한 명씩 호명해, 자기소개를 하도록 시켰다.
이 클래스엔 공부방 놈들 중 9학년 4명 전부와 10학년 크리스틴이 함께 하고 있다.
크리스틴은 이번 학기엔 일주일에 2번 밴드 수업을 듣고, 다음 학기에 일주일에 3번 밴드 수업을 들을 거라고.
우리는 이번 학기에 1주일 내내 밴드 수업이 있다.
그리고 다음 학기엔 밴드 수업이 없다.
― 나는 9학년 찰리 딜런이고, 악기는 플롯. 원래는 바이올린을 했다가 6학년 때 플롯으로 바꿨고. 재즈밴드와 마칭밴드에 가입해 활동할 생각이고….
― 나는 11학년 토마스 왈시이고, 악기는 색소폰. 현재 마칭밴드에서 활동하고 있고…
.
.
.
각자 소개는 지금 자리에 앉은 순서대로.
학년이라든지, 이름 알파벳순이라든지 하는 규칙 따위는 없다.
특이한 선생님이다.
― 나는 9학년 제이든 패터슨이고, 악기는 바순이야. 악기가 윈드 목관이라 마칭밴드나 재즈밴드 활동은 어려워서 외부 기관인 SS에서 챔버로 활동하고 있어.
― 나는 9학년 알렉스 레닌이고, 악기는…
.
.
.
대부분의 소개가 끝나가고 있을 때 갑자기 등골이 싸해지는 느낌.
― 드르륵.
이유를 알지 못해 당황스러운 순간 교실 문이 열렸다.
‘베티 윌슨!’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누구지?”
“베티 윌슨입니다.”
“베티 윌슨? 아. 클라리넷. 하지만 밴드는 고민해 본다고 하지 않았나?”
“밴드로 결정했습니다. 방금 카운슬러와 상담하고 바꿨어요. 아직 수업 변경 가능한 시기잖아요.”
“뭐. 클라리넷은 많을수록 좋지. 음. 거기 앉아라.”
베티가 자리를 잡자 다시 다른 아이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설마 나 때문에 바꾼 건 아니겠지? 설마….’
도끼병 아니다.
아무래도 찜찜하다.
나는 잠시 그 사건 때 특별히 잘못한 게 있는지 되짚어 보는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나에 대한 원망이 그렇게 깊다면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다는 거 아니겠나?
그럼 풀어 줘야지.
근데…
없다.
― 야. 저거 완전 미친 X다. 나 지금 온몸에 소름 돋았어. 조심 또 조심.
알렉스의 문자.
말했듯이 우리 공부방 놈들은 눈치가 무척 빠르다.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눈칫밥을 먹고 자란 우리.
특히 이런 싸한 기운에 대한 눈치는 99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알렉스가 과하게 팔을 막 문지르며 덜덜 떠는 시늉을 한다.
― 풋.
살짝 긴장했는데, 알렉스 때문에 웃음이 터져 버렸다.
“그럼 마지막으로 들어온 베티 윌슨. 자기소개 해 볼까?”
“네. 나는 9학년 베티윌슨이고, 악기는 클라리넷이야. 사실 중학교 때까지는 치어리더를 했어. 고등학교 때는 마칭밴드를 할까 치어리더를 계속할까 고민하다가 어제 밤에 최종적으로 마칭밴드로 마음을 정했지. 그래서 오늘 등교하자마자 수업 변경 신청서도 제출했고. 사립에서 와서 아는 친구들이 거의 없어서 걱정했는데. 제이든도 있고, 알렉스도 있고. 몇몇 아는 애들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아. 제이든이랑 알렉스?”
“네. 킨더 때 같은 반이었거든요. 우리가 킨더 때 엄청 친했어요. 몇 개월 다니다가 사립으로 전학해 버려서 더 친해지지 못한 게 아쉽긴 하지만요. 애들아. 다시 만나서 반갑다.”
“하하. 그래. 큼. 그럼 이걸로 각자 소개를 끝내고. 이번 학기 밴드 일정표와 이벤트들을 소개하지. 다들 바인더들 챙겨왔지?”
“네.”
“지금 나눠주는 것들은 바인더 맨 앞에 꽂아 두고….”
베티가 뜬금없이 나와 알렉스를 소환했지만 미스터 벤은 능숙하게 화제를 돌리며 수업에 들어갔다.
학생들간 문제는 절대 끼어들지 않겠다는 단호박 처세술 되시겠다.
본인의 이야기를 저렇게 늘어놓을 정도로 말이 많은 걸 보면 가십(Gossip, 소문)에도 그만큼 관심이 많다는 뜻일 터.
어쩌면 나와 베티의 관계는 이 고등학교의 웬만한 선생님들은 모두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 온 선생님들은 모를 수 있겠지만 당시 이 조용한 동네에선 꽤나 시끄러웠던 이슈였으니까.
엄청 오래된 것 같지만 그래봤자 9년 전의 일이다.
사람에 따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나와 알렉스처럼 말이다.
우리 골목에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한 달에 한번 마지막 주 금요일 밤에는 마크네 집 뒷야드에서 골목 반상회? 가 열린다.
처음엔 아무 데나 마크네 집 모닥불이 피어오르면 모이곤 했었는데, 재작년부턴 아예 시간을 고정시켜 버렸다.
물론 비정기적인 모임은 평소와 다름없이 자주 가진다.
뭐 하러 정기 모임을 잡았는지 헷갈릴 정도로.
아무튼 그 골목길 반상회에서 우리는 이 동네의 온갖 소문들을 듣는다.
선생님들 중에도 남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같은 직업이다보니 이런저런 모임들도 많을 테고.
미스터 벤의 행동으로 대충 상황이 이해되었다.
미스터 벤은 수업 내내 나와 알렉스, 베티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베티는 미스터 벤의 몸짓을 이해했을까?
당시 난 피해자였다.
그럼에도 베티를 붙잡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내자니 뭔가 구차하다.
지금껏 베티가 나에게 한 건 모두 호의적인 인사뿐이었다.
다시 만나서 반갑다고 했고, 마칭밴드를 하기 위해 밴드부에 들어왔다 했다.
딱히 꼬투리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다만 그녀의 속마음이 내게 다가왔을 뿐이다.
얼마나 크게 보고, 긴 시간 공을 들일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지켜보는 재미는 있겠다.
딱히 위협이 될 것 같지도 않고.
뭐 간간이 좀 귀찮은 일이 생길 수는 있겠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다.
잡념을 떨쳐내고, 미스터 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딩딩딩.
오늘의 수업이 모두 끝났다.
공부방 놈들은 모두 같은 스쿨버스를 타고 우리 집으로 가는 중이다.
“나 걔가 딱 들어오는데, 순간 완전 쫄았잖아.”
“나도 나도.”
“나도. 순수한 의도로 온 것 같진 않지?”
“치어리더를 포기할 정도로 우리 캡틴한테 원한이 깊은 건가?”
“얘들아, 그때 일은 명백히 걔 엄마 잘못이었어. 절대 꿀릴 일 없어. 힘내, 캡틴.”
“뭐래. 진짜 마칭밴드가 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지. 걱정들 붙들어 매.”
“근데 겁나 이쁘긴 하지 않냐? 마음만 좀 곱게 쓰면 진짜 좋으련만.”
“그래서 사람이 겉만 보고 혹하면 안 된다는 거야. 생긴 건 진짜 천사가 따로 없지.”
“얘들아. 마커슨이 걔가 딱 홈베이스 들어왔을 때 어땠는 줄 아냐?”
“야! 오디! 하지 마라. 죽인다.”
“흐흐흐. 그런 협박이 나한테 통할까?”
“너. 너도 만만찮았거든?”
“너보단 덜했지. 의자까지 빼줬지 아마?”
“…나만 그런 거 아니었거든? 거기 있던 애들 대부분 고개가 같이 돌아갔거든?”
“뭐. 객관적으로 이쁘긴 하지.”
― 착. 착. 착.
찰진 타격감.
크리스틴이 나를 제외한 놈들의 등짝을 한번씩 후려치는 소리였다.
“크리스틴! 뭐야. 왜 때려?”
“너 폭행죄로 고소할 거야.”
“그러든가.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다며? 자꾸 그렇게 음해하면 내가 니들 고소한다.”
“우리가 누구 말하는 줄 알고? 우리 아무 이름도 안 꺼냈거든?”
“암튼 정신 단단히 차리고 말려들지만 않으면 돼. 오늘의 주제는 그게 아니라고!”
“그럼?”
“뭐긴 뭐야. 주 정부의 내셔널가드들께서 오디와 캡틴에게 참교육을 하셨다며? 그 썰이나 풀어놔 봐. 궁금해 죽겠는데 뻘소리만 늘어놓고 있어. 확!”
“그러고 보니. 캡틴 괜찮냐? 너 오늘 하루가 엄청 길었겠다.”
“…그러네.”
진심 긴 하루였다.